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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명사(明史)』 「외국전 (外國傳)」 4~9, 「서역전 (西域傳)」 번역 및 해설

by 시큼한 파인애플 2026.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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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明史) 권323 열전 제211 외국4

류큐(琉球)

류큐는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으며, 예로부터 중국과 통하지 않았다. 원나라 세조가 관리를 보내 초유(招諭)했으나 도달하지 못했다. 홍무 초기에 그 나라에는 세 왕이 있었으니, 중산(中山), 산남(山南), 산북(山北)이라 하였고 모두 상(尚)씨를 성으로 삼았는데 중산이 가장 강했다. 홍무 5년(1372년) 정월에 행인 양재에게 명하여 즉위와 건원을 알리는 조서를 가지고 그 나라에 가게 하니, 중산왕 찰도(察度)가 동생 태기 등을 보내 양재를 따라 입조하게 하고 방물을 바쳤다. 황제가 기뻐하여 《대통력》과 문라, 사라 등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해설]

류큐는 오늘날의 오키나와를 말한다. 당시 오키나와 섬은 중산, 산남, 산북의 세 세력으로 나뉘어 경쟁하던 삼산(三山) 시대였다. 명나라 주원장(홍무제)이 즉위한 후 조공 관계를 맺기 시작한 장면이다.

홍무 7년 겨울, 태기가 다시 와서 조공하고 황태자에게 전문을 올렸다. 형부시랑 이호에게 명하여 문라와 도자기, 철기를 하사하게 하고, 도자기 7만 개와 철기 1천 개로 그 나라의 말과 교역하게 했다. 홍무 9년 여름, 태기가 이호를 따라 입공하여 말 40필을 얻었다. 이호가 말하기를 그 나라는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자기와 쇠솥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니, 이로부터 상으로 내리는 물건은 대부분 이런 물건을 썼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정월 초하를 축하하고 말 16필과 유황 1천 근을 바쳤다. 또 이듬해에 다시 조공했다. 산남왕 승찰도 또한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예로써 하사함이 중산과 같았다.

홍무 15년 봄, 중산이 와서 조공하니 내관을 보내 그 사신을 호송하여 귀국시켰다. 이듬해 산남왕과 함께 와서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두 왕에게 도금한 은인을 하사했다. 당시 두 왕은 산북왕과 패권을 다투며 서로 공격했다. 내사감승 양민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칙서를 내려 병사를 거두고 백성을 쉬게 하니, 세 왕이 모두 명령을 받들었다. 산북왕 파니지(怕尼芝)가 곧 사신을 보내 두 왕의 사신과 함께 조공했다. 홍무 18년에 또 조공하니 산북왕에게 도금한 은인을 하사하기를 두 왕과 같이 하고, 두 왕에게는 해주(바다배)를 각각 한 척씩 하사했다. 이로부터 세 왕이 여러 번 사신을 보내 조공했는데, 중산왕이 더욱 자주 했다.

[해설]

중산, 산남, 산북 세 왕이 모두 명나라 책봉 체제에 들어와 경쟁적으로 조공 무역을 하는 모습이다. 명나라는 이들을 중재하며 우위를 점하고 있던 중산왕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홍무 23년, 중산이 와서 조공했는데 그 통사가 사사로이 유향 10근, 후추 300근을 가지고 도성으로 들어오다가 문지기에게 적발되어 관으로 몰수하게 되었다. 조서를 내려 돌려주게 하고 또한 지폐(초)를 하사했다. 홍무 25년 여름, 중산의 조공 사신이 그 왕의 조카와 채관(신하)의 아들을 데리고 함께 와서 국자감에서 학업을 닦기를 청했다. 이를 따르고 옷, 두건, 신발, 양말과 여름 옷 한 벌을 하사했다. 그해 겨울, 산남왕도 조카와 채관의 아들을 보내 국자감에 입학시키니 하사품이 그와 같았다. 이로부터 매년 겨울과 여름 옷을 하사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이듬해 중산이 두 번 입공하고, 또 채관의 아들을 보내 국자감에서 공부하게 했다. 이때 국법이 엄하여 중산의 학생과 산남의 학생 중에 조서를 비난하는 자가 있었다. 황제가 이를 듣고 그들을 사형에 처했으나 그 나라는 예전과 같이 대우했다. 산북왕 파니지가 이미 죽고 그 후사왕 반안지(攀安知)가 홍무 29년 봄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국자감에서 공부하던 산남의 학생을 보내 귀국하여 부모를 뵙게 하니 그해 겨울 다시 왔다. 중산 또한 채관의 아들 2명과 여관생 고, 노매 2명을 보내 전후로 와서 학업을 닦게 하니, 중화의 풍속을 사모함이 이와 같았다. 중산이 또 사신을 보내 관대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니, 예부에 명하여 그림을 그려 스스로 만들게 했다. 왕이 굳이 청하므로 이에 하사하고 그 신하들의 관복도 함께 하사했다. 또 직분을 닦음이 부지런함을 가상히 여겨 민중(복건성)의 뱃사공 36호를 하사하여 조공 사신이 왕래하는 데 편하게 했다. 혜제가 즉위하자 관리를 보내 등극 조서로 그 나라에 알리니, 세 왕 또한 조공을 끊지 않았다.

[해설]

류큐가 명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특히 '민중의 뱃사공 36호(민인 36성)'를 하사한 것은 류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들이 류큐로 건너가 항해술과 문서 작성, 외교 실무를 담당하며 류큐의 발전을 도왔다.

성조(영락제)가 대통을 잇자 전과 같이 조서를 내려 알렸다. 영락 원년 봄, 세 왕이 모두 와서 조공했다. 산북왕이 관대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중산과 같이 주었다. 행인 변신, 유항에게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세 나라에 가게 하고 융단, 비단, 사라를 하사했다. 이듬해 2월, 중산왕세자 무녕(武寧)이 사신을 보내 부친상을 알리니, 예부에 명하여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고 부의로 포백을 주었으며, 마침내 무녕에게 명하여 작위를 계승하게 했다. 4월, 산남왕의 종제 왕응조가 또한 사신을 보내 승찰도의 상을 알리고, 전왕이 아들이 없어 응조에게 왕위를 전했으니 조정의 명을 더해주고 관대를 하사해 줄 것을 청했다. 황제가 모두 따르고 마침내 관리를 보내 책봉했다.

이때 산남의 사신이 사사로이 은을 가지고 처주에 가서 자기를 사다가 일이 발각되어 죄를 논하게 되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먼 지방 사람은 이익을 구할 줄만 알지 어찌 금령을 알겠느냐." 하며 모두 용서했다. 영락 3년, 산남이 채관의 아들을 보내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이듬해 중산 또한 채관의 아들 6명을 보내 국자감에 입학시키고 환관 몇 명을 바쳤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들도 사람의 자식인데 죄 없이 거세했으니 차마 어찌 하겠는가?" 하며 예부에 명하여 돌려보내게 했다. 부의 신하가 말하기를 "돌려보내면 귀화하려는 마음을 막을까 염려되니, 다만 칙서를 내려 다시는 보내지 말게 하십시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빈말로 타일러 주는 것은 실제 일을 보여주는 것만 못하다. 지금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들이 아첨하려 하여 반드시 계속해서 바칠 것이다. 천지는 만물을 낳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데 제왕이 되어서 어찌 인류를 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돌려보냈다.

[해설]

영락제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무역 규정을 어긴 사신을 용서하고, 환관(거세된 남자)을 공물로 바치자 이를 거절하고 돌려보내는 장면이다.

영락 5년 4월, 중산왕세자 사소(思紹)가 사신을 보내 부친상을 알리니, 제사를 지내고 부의를 내리고 책봉하기를 전의 의식과 같이 했다. 영락 8년, 산남이 관생 3명을 보내 국자감에 입학시키니 두건, 옷, 신발, 띠, 이불, 요, 휘장을 하사했고, 이후 다시 빈번하게 하사한 바가 있었다. 하루는 황제가 신하들과 더불어 이에 대해 말했다. 예부상서 여진이 말하기를 "옛날 당 태종이 학교를 일으켰을 때 신라, 백제가 모두 자제를 보내와서 배웠습니다. 그때는 겨우 식량만 주었지 오늘날 하사함이 두루 미침과 같지 않았습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만이의 자제들이 의를 사모하여 왔으니, 반드시 입고 먹는 것이 항상 충분해야 그다음에 학문을 향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태조의 아름다운 뜻이니 짐이 어찌 어기겠는가." 했다.

이듬해 중산이 국상의 아들과 채관의 아들을 보내 국자감에 입학시키고 인하여 말하기를 "우장사 왕무가 보필한 지 오래되었으니 국상으로 승진시켜 주시고, 좌장사 주복은 본래 강서 요주 사람으로 신의 조부 찰도를 보필하여 40여 년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금년 나이 80이 넘었으니 치사(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하니, 이를 따랐다. 이에 주복과 왕무를 모두 국상으로 삼고 주복은 좌장사를 겸하여 치사하게 하고, 왕무는 우장사를 겸하여 그 나라 일을 맡게 했다. 영락 11년, 중산이 채관의 아들 13명을 보내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이때 산남왕 응조가 그 형 달발기에게 시해당하자 여러 채관들이 그를 토벌하여 죽이고 응조의 아들 타루매를 추대하여 군주로 삼고 13년 3월에 책봉을 청했다. 행인 진계약 등에게 명하여 산남왕으로 책봉하고 고명과 관복 및 보초 1만 5천 정을 하사했다.

[해설]

류큐 삼산 시대의 혼란과 명나라와의 관계가 지속되는 모습이다. 산남왕의 시해 사건 등 내부 정세가 불안정함을 보여준다. 또한 류큐에 귀화했던 중국인 주복이 다시 중국으로 은퇴하는 장면은 당시 인적 교류가 활발했음을 시사한다.

류큐가 세 왕으로 나뉘었으나 오직 산북이 가장 약하여 그 조공 또한 가장 드물었다. 영락 3년 조공한 뒤로 이해 4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공했다. 그 후 마침내 두 왕에게 병합되었고, 중산이 더욱 강성해져서 그 나라가 부유하므로 1년에 항상 두세 번 조공했다. 천조(명나라)가 비록 그 번거로움을 싫어했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그해 겨울, 조공 사신이 돌아가다가 복건에 이르러 멋대로 바다 배를 빼앗고 관군을 죽였으며 중관(내관)을 구타하여 다치게 하고 그 의복과 물건을 약탈했다. 일이 들리자 그 우두머리를 죽이고 나머지 67인은 그 주인에게 넘겨 스스로 다스리게 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사죄하니 황제가 그들을 대우하기를 처음과 같이 했고 그들이 조공을 닦음이 더욱 삼갔다. 영락 22년 봄, 중산왕세자 상파지(尚巴志)가 와서 부친상을 알리니 제사하고 부의를 내림이 통상 의례와 같았다.

인종이 즉위하자 행인 방이를 보내 조서를 내려 그 나라에 알렸다. 홍희 원년 중관에게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가서 상파지를 봉하여 중산왕으로 삼았다. 선덕 원년, 그 왕이 관복을 받지 못했다 하여 사신을 보내와 청하니 가죽으로 만든 고깔과 옷(피변복)을 만들어 하사했다. 선덕 3년 8월, 황제는 중산왕이 조공함이 더욱 삼간다 하여 관리를 보내 칙서를 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비단 등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 산남은 선덕 4년부터 두 번 조공하고 황제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다시는 오지 않았으니 또한 중산에게 병합된 것이다. 이로부터 오직 중산 한 나라만이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해설]

여기서 류큐 왕국의 통일이 언급된다. 상파지(쇼 하시)가 삼산을 통일하고 류큐 왕국을 세웠으며, 이후 류큐는 중산이라는 이름으로 명나라에 단독 조공하게 된다. 통일 후 국력이 강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정통 원년, 그 사신이 말하기를 "처음 복건에 들어올 때 다만 공물만 갖추어 보고했는데, 아랫사람들이 가져온 소라 껍데기를 열어서 보고하는 것을 빠뜨려 모두 관청에 몰수당하는 바람에 왕래할 비용이 없게 되었으니 불쌍히 여겨 내려주십시오." 하니, 명하여 전례대로 값을 주게 했다. 이듬해 조공 사신이 절강에 이르니 시박을 맡은 자가 다시 그들이 가져온 물건을 조사하여 등록하기를 청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오랑캐가 무역으로 이익을 삼는데, 이 두 가지 물건을 취하여 어디에 쓰겠느냐, 모두 돌려주고 법령으로 정하라." 했다. 사신이 주하길 "본국 배신(신하)의 관복은 모두 국초에 하사받은 것인데 세월이 오래되어 헐고 상했으니 다시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소방(작은 나라)이 정삭(달력)을 받드는데 바닷길이 험하고 멀어 달력을 받는 사신이 혹 반년이나 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오니 항상 시기를 놓칠까 두렵습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관복은 본국에서 스스로 만들게 하라. 《대통력》은 복건포정사에서 주도록 하라." 했다.

정통 7년 정월, 중산 세자 상충(尚忠)이 와서 부친상을 알리니 급사중 여변, 행인 유손에게 명하여 상충을 봉하여 중산왕으로 삼았다. 칙사로 급사중을 쓴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여변 등이 돌아오면서 황금, 침향, 왜선(일본 부채)의 선물을 받았다가 정탐하는 자에게 발각되어 모두 관리에게 넘겨져 장형을 받고 풀려났다. 정통 12년 2월, 세자 상사달(尚思達)이 와서 부친상을 알리니 급사중 진부, 행인 만상을 보내 봉했다.

경태 2년 상사달이 죽고 아들이 없어 그 숙부 금복(金福)이 국사를 섭정하며 사신을 보내 상을 알렸다. 급사중 교의, 행인 동수굉에게 명하여 금복을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경태 5년 2월, 금복의 동생 태구(泰久)가 주하기를 "큰형 금복이 죽고 둘째 형 포리와 형의 아들 지루가 왕위를 다투다 둘 다 상처를 입어 죽고 하사받은 인(도장) 또한 부서졌습니다. 나라 안의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섭정하게 했으니, 인을 다시 하사하여 먼 번국을 진무하게 해주십시오." 하니 이를 따랐다. 이듬해 4월 급사중 엄성, 행인 유검에게 명하여 태구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천순 6년 3월, 세자 상덕(尚德)이 와서 부친상을 알리니 급사중 반영, 행인 채철에게 명하여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성화 5년, 그 조공 사신 채경이 말하기를 "조부는 본래 복건 남안 사람으로 류큐의 통사가 되었는데 경에 이르러 장사로 승진했습니다. 제도와 같이 고명을 내려 그 부모를 추증하고 봉해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글을 예관에게 내렸으나 전례가 없다 하여 그만두었다. 이듬해 복건 안찰사가 말하기를 "조공 사신 정붕이 복주에 이르러 지휘 유옥과 사사로이 재물을 통하고 뇌물을 썼으니 아울러 조사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명하여 유옥은 다스리고 정붕은 용서했다. 성화 7년 3월, 세자 상원(尚圓)이 와서 부친상을 알리니 급사중 구홍, 행인 한문에게 명하여 왕으로 봉했다. 구홍이 산동에 이르러 병으로 죽으니 급사중 관영에게 명하여 대신하게 했다. 성화 10년 조공 사신이 복건에 이르러 회안 백성 부부 두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겁탈했는데, 그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잡지 못했다.

이듬해 다시 조공하니 예관이 인하여 청하기를 "2년에 한 번 조공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고 100명을 넘지 못하게 하며 사사로운 물건을 덧붙여 가져와 길에서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황제가 이를 따르고 칙서를 내려 왕에게 경계했다. 그 사신이 조상의 제도대로 매년 조공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이듬해 조공 사신이 왔는데 마침 동궁을 책립하게 되어 조선, 안남과 같이 조서를 내려 보내주기를 청했다. 예관이 의논하기를 "류큐는 일본, 점성(참파)과 함께 해외에 거주하므로 전례상 조서를 반포하지 않으니 이에 칙서를 내려 문라 비단과 채색 폐백을 그 왕과 비에게 하사해야 합니다." 했다. 성화 13년 사신이 와서 다시 매년 조공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해설]

류큐 내부의 왕위 다툼(금복, 포리, 지루의 분쟁)과 잦은 왕위 교체, 그리고 명나라 책봉사 파견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류큐 사신들이 무역 이익을 위해 잦은 조공을 원하고 명나라는 이를 제한하려는 갈등, 사신들의 횡포(살인, 약탈) 문제가 드러난다. 상원(쇼 엔) 왕의 즉위는 제2 상씨 왕조의 시작을 알린다.

이듬해 4월 왕이 죽어 세자 상진(尚真)이 와서 상을 알리고 작위 계승을 구하며 다시 매년 조공을 청했다. 예관이 말하기를 "그 나라가 잇달아 글을 올려 청하는 것은 단지 무역을 꾀하고자 함에 불과합니다. 근년에 보낸 사신은 대부분 복건에서 도망친 죄인들로 살인하고 불을 지르며 간사하고 교활함이 백단이라, 오로지 중국의 물화만 무역하여 외국 오랑캐의 이익을 독차지하려 하니 청하는 바를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했다. 이에 급사중 동민, 행인 장상을 보내 봉하기만 하고 그 청은 따르지 않았다. 성화 16년 사신이 와서 다시 《조훈》의 조항을 인용하여 매년 조공을 청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경계하고 약속했다. 성화 18년 사신이 이르러 다시 그 말을 하니 칙서를 내리기를 처음과 같이 했다. 사신이 배신(신하)의 자식 5명을 데리고 와서 배우게 하니 남경 국자감에 소속시켰다. 성화 22년 조공 사신이 오자 그 왕이 예부에 자문을 보내 5명을 보내 귀국하여 부모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니 이를 따랐다.

홍치 원년 7월 그 조공 사신이 절강으로부터 왔다. 예관이 말하기를 "조공 길은 본래 복건을 경유했는데 지금 정당한 길이 아닐뿐더러 조공 시기도 아니니 마땅히 물리쳐야 합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허가했다. 그 사신이 다시 국왕이 예부에 보내는 글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지난해에 동궁이 비를 책봉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사신을 보내와 축하하는 것이지 감히 제도를 어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했다. 예관이 이에 받아들일 것을 청하되 수행원의 하사품을 조금 줄여 억제하는 뜻을 보였다. 홍치 3년 사신이 이르러 말하기를 "근래에 조공 사신이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25명으로만 허락하니 물건은 많고 사람은 적어 소홀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5명을 늘리는 것을 허락하고 복건에 있는 수행원들에게도 아울러 20명의 식량을 더 지급하여 170명으로 했다. 이때 조공 사신이 가져온 토산물로서 복건 사람들과 교역하는 것을 간사한 상인들이 억누르고 관청에서 또한 따라서 침탈했다. 사신이 조정에 호소하니 조서를 내려 금지했다. 홍치 17년 사신을 보내 조공을 보충하며 말하기를 "소방의 조공물은 항상 만랄가(말라카)에서 사오는데 풍랑을 만나 시기를 놓쳤습니다." 하니 명하여 제도대로 연회를 베풀고 하사했다. 정덕 2년 사신이 와서 매년 조공을 청했다. 예관이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으나, 이때 유근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있어 특별히 허락했다. 정덕 5년 관생 채진 등 5명을 보내 남경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해설]

류큐의 무역 의존도가 높았음을 보여준다. 조공 물품을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말라카 등 동남아시아에서 중계 무역을 통해 구해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근의 난정(정치 혼란) 틈을 타 매년 조공권을 얻어내는 모습도 보인다.

가정 2년 예관의 논의를 따라 칙서를 내려 류큐는 구제와 같이 2년에 한 번 조공하게 하고 150명을 넘지 못하게 했다. 가정 5년 상진이 죽고 그 세자 상청(尚清)이 가정 6년에 와서 조공하며 인하여 부고를 알렸는데 사신이 돌아가다가 바다에 이르러 물에 빠져 죽었다. 가정 9년 다른 사신을 보내 와서 조공하고 아울러 책봉을 청했다. 복건의 수신(지방관)에게 명하여 조사하여 보고하게 했다. 가정 11년 세자가 나라 안 신민들의 상황을 써서 와서 올리니 이에 급사중 진간, 행인 고징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봉하게 했다. 돌아오매 그 증여를 물리쳤다. 가정 14년 조공 사신이 이르러, (책봉사가) 증여받은 황금 40냥을 그대로 조정에 바치니 이에 진간 등에게 칙서를 내려 받게 했다. 가정 29년 와서 조공하고 배신의 자식 5명을 데리고 와서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가정 36년 조공 사신이 와서 왕 상청의 상을 알렸다. 이에 앞서 왜구가 절강에서 패하여 돌아가다가 류큐 국경에 이르렀다. 세자 상원(尚元)이 병사를 보내 요격하여 크게 섬멸하고 납치되었던 중국인 6명을 얻어 이때에 이르러 송환했다. 황제가 그 충순함을 가상히 여겨 하사함을 더하게 하고, 즉시 급사중 곽여림, 행인 이제춘에게 명하여 상원을 봉하여 왕으로 삼게 했다. 복건에 이르렀으나 바람에 막혀 가지 못했다. 가정 39년 그 조공 사신이 또한 복건에 이르러 세자의 명을 받았다 칭하고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풍랑을 예측할 수 없고 왜구가 또 때없이 출몰하니 천사(황제의 사신)에게 다른 염려가 있을까 두려워, 청컨대 정덕 연간에 점성(참파)을 봉했던 고사에 따라 사람을 보내 표문과 방물을 대신 올리게 하고 자신은 본국 장사와 함께 봉 책을 가지고 돌아가 천사가 멀리 왕림하는 번거로움을 없게 하소서." 했다. 순안어사 번헌과가 이를 아뢰니 예관이 말하기를 "사신을 보내 책봉하는 것은 조상의 제도입니다. 지금 사신이 멀리서 책명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군주의 은혜를 풀 숲에 버리는 것이니 한 가지 불가한 점이요. 사신은 본래 표문을 받들고 조공하러 온 것인데 관리를 보내 대신 올리기를 구하는 것은 세자가 오로지 파견한 명을 저버리는 것이니 두 가지 불가한 점이요. 옛날 정덕 연간에 점성왕은 안남의 침략을 받아 다른 곳에 숨어 살았으므로 사신이 칙명을 가지고 돌아간 것은 일시적인 권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나라를 잃은 일을 끌어다 자기 임금에게 견주는 것은 세 가지 불가한 점이요. 배를 띄워 길을 통함은 복종의 상례입니다. 저들이 핑계 대는 것은 왜구의 경보와 풍파의 위험일 뿐인데, 보물과 공물을 실어 나르고 사신이 왕래하는 것은 과연 무슨 까닭으로 환난이 없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가지 불가한 점이요. 지난번 점성은 비록 봉을 받았으나 그 왕이 오히려 사신 보내기를 간청했습니다. 지금 사신은 세자에게 직접 명을 받은 것도 아니고 또 인신과 공문도 없습니다. 만약 그 말을 가볍게 믿었다가 혹 세자가 사신 파견을 지극한 영광으로 여기고 멀리서 절하는 것을 비례로 여겨 책봉을 받지 않고 다시 글을 올려 사신을 청한다면 장차 누가 그 허물을 지겠습니까? 다섯 가지 불가한 점입니다. 청컨대 복건 수신에게 명하여 전의 조서대로 종사하게 하소서. 아직 책봉을 받지 않았는데 먼저 사은하는 것 또한 고사가 아닙니다. 마땅히 그 입공만 들어주고 그 사은표문은 세자가 책봉을 받은 뒤에 사신을 보내 올리기를 기다려야 중국의 대체가 온전해질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가정 41년 여름 사신을 보내 입공하고 사은했다. 이듬해 및 가정 44년에 아울러 입공했다. 융경 연간에 무릇 세 번 조공했는데 모두 중국의 표류민을 송환했다. 천자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은과 폐백을 더하여 하사했다.

[해설]

류큐가 왜구 퇴치에 협조한 공로를 인정받는 한편, 명나라 책봉사를 받아들이는 문제로 갈등하는 모습이다. 류큐 측은 바다의 위험(왜구, 풍랑)을 핑계로 책봉사가 직접 오는 것을 피하고 문서만 받아가려 했으나, 명나라 예부는 이를 국가의 위신 문제로 보아 거절하고 원칙대로 사신을 파견하려 한다.

만력 원년 겨울, 그 나라 세자 상영(尚永)이 사신을 보내 부친상을 알리고 작위 계승을 청했다. 글을 예부에 내려 복건 수신에게 조사하여 아뢰게 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등극을 축하했다. 만력 3년 입공했다. 만력 4년 봄 다시 조공했다. 7월 호과급사중 소숭업, 행인 사걸에게 명하여 칙서와 피변관복, 옥규를 가지고 가서 상영을 봉하여 중산왕으로 삼게 했다. 이듬해 겨울 소숭업 등이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세자가 다시 사신을 보내 입공했고 그 후 조공을 닦기를 통상 의례와 같이 했다. 만력 8년 겨울 배신의 자식 3명을 보내 남경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만력 19년 사신을 보내 와서 조공했는데 상영이 곧 죽었다. 예관이 일본이 바야흐로 이웃 경계를 침략하고 있으니 류큐에 왕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여 세자로 하여금 속히 습봉을 청하게 하여 진압하는 바탕으로 삼기를 빌었다. 이를 따랐다.

만력 23년 세자 상녕(尚寧)이 사람을 보내 습봉을 청했다. 복건순무 허부원이 왜구의 분위기가 아직 그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신 정효가 봉을 받았던 의논에 의거하여, 관리 한 명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 복건에 이르게 하여 그 배신이 직접 받아 귀국하게 하거나 혹은 바다에 익숙한 무신 한 명을 보내 배신과 함께 가게 하자고 청했다. 예관 범겸이 그 말대로 의논하고 또 세자의 표문이 오기를 기다려 허락하자고 청했다. 만력 28년 세자의 표문이 이르렀는데 그 배신이 조상의 제도대로 관리를 보내달라고 청했다. 예관 여계등이 말하기를 "여러 조정에서 류큐를 책봉할 때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드느라 움직이면 몇 해가 걸렸습니다. 사신은 풍파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소국은 접대의 번거로움에 괴로워합니다. 마땅히 전의 의논과 같이 종사해야 합니다." 하니 황제가 허락하고, 명하여 금후 책봉에는 단지 청렴하고 용맹한 무신 한 명만 보내 책봉을 청하는 배신과 함께 가게 하고, 전왕을 제사하고 새 왕을 봉하는 예의는 한결같이 옛 규정대로 하되 그 나라 대신의 결장(보증서)이 오기를 기다려 행하게 했다. 이듬해 가을 조공 사신이 결장을 가지고 왔으나 여전히 문신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에 급사중 홍첨조, 행인 왕사정에게 명하여 가게 하고, 해적의 경보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바다를 건너 거행하게 했다. 얼마 후 홍첨조가 상을 당하여 떠나니 급사중 하자양으로 고쳐 명하여 만력 31년 2월 복건에 도착했다. 안신(순안어사) 방원언이 다시 해상에 일이 많고 경보가 자주 있다 하여 마침 순무 서학취와 회동하여 상소하여 무신을 보내자고 청했다. 하자양과 왕사정은 속국이 말을 어겨서는 안 되고 사신은 마땅히 끝맺음이 있어야 한다 하여 성명(황제의 명령)을 굳게 하여 먼 곳 사람들을 위로해 달라고 빌었다. 상소가 모두 답을 받지 못했는데 예부시랑 이정기가 말하기를 "마땅히 봉을 받아 가라는 당초의 뜻을 행해야 하며 무신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했다. 이에 어사 전환, 급사중 소근고가 번갈아 글을 올려 그 불가함을 다투며 이르기를 "이 일은 흠명이 정해지기 전에 있었어야지 책봉사가 이미 파견된 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담당 관청에 칙서를 내려 속히 바다 배를 완성하여 금년 바다를 건너갈 시기를 놓치지 말게 하십시오. 일을 마치고 복명하기를 기다린 후에 획일적인 규정을 정하여 문건으로 먼저 알리고 바다 위에서 봉을 받게 하여 영구히 준수하게 하십시오." 하니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만력 33년 7월 마침내 하자양 등에게 명하여 속히 바다를 건너 일을 마치게 했다.

[해설]

류큐 책봉을 둘러싼 명나라 조정의 논쟁이 치열하다. 임진왜란(만력의 역) 이후 일본의 위협과 해상의 위험 때문에 명나라는 책봉사를 직접 보내기를 꺼리고, 류큐는 전통적인 권위를 위해 문신 책봉사가 직접 오기를 고집한다. 결국 명나라가 양보하여 사신을 보낸다.

이때 일본이 바야흐로 강성하여 집어삼키고 멸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류큐는 밖으로는 강한 이웃을 막고 안으로는 조공을 닦아 끊이지 않았다. 만력 40년(1612년) 일본이 과연 정예병 3천으로 그 나라에 쳐들어가 그 왕을 사로잡고 종묘의 기물을 옮기고 크게 약탈하고 갔다. 절강총병관 양종업이 이를 알리고 해상 병비를 엄하게 닦기를 청하니 이를 따랐다. 얼마 후 그 왕이 풀려나 돌아와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닦았으나 그 나라가 파괴됨이 이미 심하여 예관이 이에 10년에 한 번 조공하는 예로 정했다. 이듬해 예전과 같이 조공을 닦았다. 또 이듬해 다시 조공하니 복건 수신이 조정의 명을 좇아 물리쳐 돌려보내니 그 사신이 앙앙불락하며 갔다. 만력 44년 일본이 계롱산(대만)을 취할 모의를 했는데 그 땅 이름은 대만이며 복건과 매우 가깝다. 상녕이 사신을 보내 이를 알리니 조서를 내려 해상 경비를 갖추게 했다.

[해설]

1609년 일본 사쓰마 번(시마즈 가문)의 류큐 침공 사건을 다룬다. 류큐 왕 상녕이 일본에 잡혀갔다가 돌아왔으나, 사실상 류큐는 이때부터 일본(사쓰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명나라는 이를 알고 조공 횟수를 줄이는 등 경계했으나 류큐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천계 3년 상녕이 이미 죽고 그 세자 상풍(尚豐)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청하고 책봉을 청했다. 예관이 말하기를 "구제에 류큐는 2년에 한 번 조공했으나 뒤에 왜구에게 파괴된 바 되어 10년으로 고쳤습니다. 지금 그 나라가 휴양한 지 오래지 않으니 잠정적으로 5년에 한 번 조공하게 하고 새 왕의 책봉을 기다려 다시 의논합시다." 하니 이를 따랐다. 천계 5년 사신을 보내 입공하고 책봉을 청했다. 천계 6년 다시 조공했다. 이때 중국에 일이 많았고 과신(급사중) 중에 사신으로 갈 사람 또한 가는 것을 꺼렸으므로 책봉 의전이 오랫동안 지체되었다.

숭정 2년 조공 사신이 또 와서 책봉을 청하니 명하여 고사대로 관리를 보내게 했다. 예관 하여총이 다시 위험을 밟고 비용을 쓴다는 이유로 배신으로 하여금 봉을 받아 가게 하자고 청했다. 황제가 따르지 않고 마침내 호과급사중 두삼책, 행인 양륜에게 명하여 가서 예를 이루고 돌아오게 했다. 숭정 4년 가을 사신을 보내 동궁 책립을 축하했다. 이로부터 숭정 말기까지 모두 의례대로 조공을 닦았다. 뒤에 양경(북경, 남경)이 잇달아 함락되고 당왕(융무제)이 복건에서 섰는데도 오히려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받들었다. 그 천조를 섬기는 정성이 외번 중 으뜸이라 이른다.

[해설]

명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류큐는 끝까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켰음을 강조하며 류큐 편을 마무리한다. 명나라가 망한 후 남명 정권(당왕)에게까지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다.

루손(呂宋)

루손은 남해 가운데 있으며 장주와 거리가 매우 가깝다. 홍무 5년 정월 사신을 보내 소리(Soli)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와서 조공했다. 영락 3년 10월 관리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그 나라를 위무하고 타일렀다. 영락 8년 풍가시란과 함께 입공했고 이후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만력 4년 관군이 해적 임도건을 쫓아 그 나라에 이르니 그 나라 사람들이 토벌을 도운 공이 있어 다시 조공했다. 이때 불랑기(佛郎機)가 강성하여 루손과 서로 무역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 나라가 약하여 취할 만함을 보고 이에 후한 뇌물을 왕에게 보내며 소가죽만 한 땅을 빌려 집을 짓고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왕이 그 속임수를 생각지 못하고 허락하니 그 사람이 이에 소가죽을 찢어 길게 이어 수천 장(丈)에 이르게 하고 루손 땅을 둘러싸고 약속대로 해달라고 빌었다. 왕이 크게 놀랐으나 이미 허락한지라 어찌할 수 없어 마침내 들어주고 국법대로 세금을 조금 거두었다. 그 사람이 땅을 얻자마자 곧 집을 짓고 성을 쌓고 화기를 나열하고 수비 도구를 설치하여 엿볼 계책을 세웠다. 얼마 후 마침내 대비하지 않음을 틈타 그 왕을 습격하여 죽이고 그 백성을 쫓아내고 그 나라를 점거했다. 이름은 그대로 루손이라 했으나 실상은 불랑기였다. 이에 앞서 복건 사람들이 그 땅이 가깝고 또 풍요하고 부유하므로 장사하는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왕왕 오랫동안 거주하여 돌아오지 않고 자손을 낳고 기르기까지 했다. 불랑기가 그 나라를 빼앗은 뒤 그 왕이 추장 하나를 보내 진수하게 했는데 중국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많이 쫓아 보내고 남은 자들은 모두 침략과 모욕을 당했다.

[해설]

루손은 필리핀의 루손섬, 특히 마닐라를 지칭한다. '불랑기'는 본래 포르투갈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명나라 후기에는 스페인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 여기서는 스페인의 필리핀 정복을 다룬다. 소가죽을 찢어 땅을 넓게 차지했다는 이야기는 서양의 디도 여왕 전설(카르타고 건국 신화)과 유사한 설화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이 마닐라를 점령하고 중국인(화교) 사회와 갈등을 빚는 상황이다.

만력 21년 8월, 추장 낭뢰폐리계료(고메즈 페레즈 다스마리냐스)가 미락거(몰루카)를 침략하면서 중국인 250명을 부려 전투를 도왔다. 반화오라는 자가 있어 초관(지휘관)이 되었다. 오랑캐들이 날마다 술 취해 누워 있으면서 중국인에게 배를 부리게 하고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면 문득 채찍질하여 죽음에 이르는 자도 있었다. 반화오가 말하기를 "반란을 일으켜도 죽고 매 맞아도 죽으니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으면 또 싸우다 죽을 것이니, 어찌 이 추장을 찔러 죽이고 죽음을 면하는 것만 하겠느냐. 이기면 돛을 올리고 돌아가고 이기지 못하여 묶이더라도 죽기에 늦지 않다." 하니 무리가 그렇다 했다. 이에 밤에 그 추장을 찔러 죽이고 추장의 머리를 들고 크게 소리쳤다. 여러 오랑캐들이 놀라 일어나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모두 칼을 맞거나 물에 떨어져 죽었다. 반화오 등이 그 금보와 무기를 모두 거두어 배를 몰고 돌아왔다. 길을 잃어 안남(베트남)에 이르렀는데 그 나라 사람들에게 약탈당하고 오직 곽유태 등 32명만이 다른 배에 붙어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추장의 아들 낭뢰묘린(루이스 페레즈 다스마리냐스)이 삭무(세부?)에 주둔하다가 이를 듣고 무리를 이끌고 달려와 승려를 보내 아버지의 원통함을 진술하고 전함과 금보를 돌려주고 원수를 죽여 아버지의 목숨을 갚게 해달라고 빌었다. 순무 허부원이 조정에 알리고 양광 독무에게 격문을 보내 예로써 승려를 보내고 곽유태는 법으로 다스리게 했으나 반화오는 끝내 안남에 머물며 감히 돌아오지 못했다.

[해설]

스페인 총독 다스마리냐스가 몰루카 원정 중 중국인 선원들에게 암살당한 사건(1593년)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반화오(潘和五)가 주동자이다.

처음 추장이 죽임을 당했을 때 루손에 거주하던 그 부하들이 중국인들을 모두 성 밖으로 쫓아내고 그 집을 헐었다. 묘린이 돌아와서 성 밖에 집을 짓고 살게 했다. 마침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어 묘린은 내통하여 환란이 될까 두려워 다시 쫓아낼 것을 의논했다. 그런데 허부원이 마침 사람을 보내 불러오게 하니 오랑캐들이 이에 여행 식량을 주어 보냈다. 그러나 중국 상인들은 이익을 탐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보지 않아 시간이 지나자 다시 모여들었다.

그때 광세사(광산 세금 징수관)들이 사방으로 나가 간사한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익을 말했는데, 염응룡, 장의라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루손의 기역산(Cavite?)에 본래 금과 은이 생산되어 채굴하면 1년에 금 10만 냥, 은 30만 냥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만력 30년 7월 궁궐에 나아가 주상했다. 황제가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명령이 내려지자 조정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도어사 온순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근래 안팎의 여러 신하들이 광세의 폐해를 다투어 말하여 천청(임금의 귀)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지금 광동의 이봉이 부녀자 66명을 더럽히고 욕보였으며 사사로이 재물을 옮긴 것이 큰 배 30척, 큰 짐 300개에 이르니 형세가 반드시 분노가 쌓인 무리에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어찌 지금이라도 철회하여 위복을 조종하는 자루를 잃지 않는 것만 하겠습니까. 미얀마 추장이 보석 광산 때문에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내지를 범하려 하니 서남의 오랑캐가 위태롭고 근심스럽습니다. 그런데 복건의 간사한 무리가 또 기역산 일로 고했습니다. 그 망령된 말은 참으로 연극과 같은데 뜻밖에 황상의 총명함으로 잘못 들으셨습니다. 신 등은 놀란 혼이 흔들려 잠자고 먹는 것이 편치 않습니다. 다른 때 변고가 일어나고 화가 생기면 국가의 재물을 허비함이 몇백만인지 알지 못할 것이니 혹 일찍 제거하지 않으면 그 근심이 재물을 허비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해증 시박 고채가 이미 해마다 3만 금을 거두어 결코 힘을 남겨 이익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기역이 바다 너머에 있다 해도 또한 결코 땅에 금은이 깔려 있어 사람이 마음대로 캐갈 이치는 없으니, 어디서 금 10만, 은 30만을 얻어 그 말을 채우겠습니까. 불과 조정의 명을 빌려 금지된 물건을 함부로 내가고 여러 번국을 유인하여 궤도를 벗어난 모의를 부리려는 것이니 어찌 번거롭고 어지럽게 하여 공과 사에 해를 끼치고 해증 한 고을에 해를 끼칠 뿐이겠습니까.

옛날 왜구의 환란은 바로 간사한 백성이 바다로 내려가 사사로이 큰 성씨들과 통하고 값을 억지로 깎을 계책을 꾸며 왜적들이 분하고 한스러워하여 병사를 일으켜 순응함을 범하게 한 데서 연유했습니다. 지금 조정의 명으로 이를 행하면 해가 마땅히 더욱 클 것입니다. 병란이 이어지고 화가 맺히기에 이르면 여러 간사한 자들이 장차 왕직, 증일본 무리의 옛 지혜를 본받아 바다를 등지고 왕이라 칭하며 병사를 끼고 진영을 벌려 놓을 것이니, 가까이는 무거운 이익을 꾀할 수 있고 멀리는 위타(남월 무제)가 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망명자의 계책으로는 득이 되겠으나 국가의 큰 근심은 어찌 하겠습니까! 비옵건대 급히 법으로 다스려 화의 근본을 없애소서."

언관 김충사, 조어변, 주오필 등도 잇달아 글을 올려 힘껏 다투었으나 모두 듣지 않았다.

[해설]

명나라 말기 환관들이 황제의 비호를 받아 전국 각지에서 광산 세금(광세)을 걷으며 횡포를 부리던 상황이다. 루손에 금은산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보고를 황제가 믿고 사람을 보내려 하자, 신하들이 이를 극구 말리는 상소문이다. 이들은 이것이 외교적 분쟁과 반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일이 복건 수신에게 내려지니 행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조정의 명령에 핍박되어, 이에 해증현 승 왕시화, 백호 간일성을 보내 장의와 함께 가서 조사하게 했다. 루손 사람들이 듣고 크게 놀랐다. 중국인으로서 떠돌아 사는 자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천조는 다른 뜻이 없고 다만 간사한 무리가 함부로 일의 단서를 만들었기에, 지금 사신을 보내 검증하여 간사한 무리가 스스로 궁해지게 하여 돌아가 보고하기 편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했다. 그 추장의 뜻이 조금 풀려 여러 승려에게 명하여 길가에 꽃을 뿌리게 하여 조정의 사신을 공경하는 듯하게 하고 성대하게 호위병을 진열하여 맞이했다. 왕시화 등이 들어가자 추장이 연회를 베풀고 묻기를 "천조가 사람을 보내 산을 열고자 한다는데 산에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어찌 열 수 있는가? 비유컨대 중화에 산이 있으면 우리나라가 열도록 허용하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나무에 금 콩이 열린다는데 어떤 나무에서 열리는가?" 했다. 왕시화가 대답하지 못하고 자주 장의를 쳐다보니 장의가 말하기를 "이 땅이 다 금인데 하필 콩이 어디서 나왔는지 묻느냐?" 했다. 위아래가 다 크게 웃고 장의를 남겨두어 죽이고자 했다. 여러 중국인이 함께 풀어주어 이에 풀려나 돌아왔다. 왕시화는 임지로 돌아와 곧 놀란 병으로 죽었다. 수신이 이를 알리고 장의의 망령된 말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다. 일은 이미 그쳤으나 루손 사람들은 끝내 스스로 의심하여 천조가 장차 습격하여 그 나라를 취하려 하고 여러 떠돌아 사는 자들이 내응이 되었다고 여겨 몰래 죽일 모의를 했다.

이듬해, 병사를 일으켜 이웃 나라를 침략한다고 소문을 내고 비싼 값으로 철기를 사들였다. 중국인들이 이익을 탐하여 모두 팔아버리니 이에 집에 한 조각 쇠붙이도 없게 되었다. 추장이 곧 명령을 내려 중국인의 성명을 기록하고 300명을 한 구역(원)으로 나누어 들어오면 곧 섬멸했다. 일이 조금 드러나자 중국인들이 무리를 지어 채원(채소밭)으로 달아났다. 추장이 병사를 내어 공격하니 무리에게 무기가 없어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고 대륜산으로 달아났다. 오랑캐들이 다시 와서 공격하니 무리가 죽기로 싸워 오랑캐 병사가 조금 꺾였다. 추장이 곧 후회하고 사신을 보내 화친을 의논했다. 무리가 그 거짓됨을 의심하여 때려죽였다. 추장이 크게 노하여 무리를 거두어 성으로 들어가 성 곁에 매복을 두었다. 무리가 굶주림이 심하여 모두 산을 내려와 성을 공격했다. 복병이 발동하여 무리가 대패하고 전후로 죽은 자가 2만 5천 명이었다. 추장이 얼마 후 명령을 내려 여러 약탈한 중국인의 재물을 모두 봉하고 표시하여 창고에 저장했다. 복건의 수신에게 글을 보내 중국인들이 장차 반란을 꾀하려 하여 부득이 먼저 손을 썼으니 죽은 자의 가족으로 하여금 가서 그 처자식과 재물을 가져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순무 서학취 등이 급히 변란을 조정에 고하니 황제가 놀라고 슬퍼하며 법사에게 내려 간사한 무리의 죄를 의논하게 했다. 32년 12월 의논을 올리니 황제가 말하기를 "장의 등은 조정을 기만하고 해외에서 분란을 일으켜 2만 상인과 백성이 모두 칼날에 피를 묻히게 했으니 위엄을 덜고 나라를 욕보여 죽어도 죄가 남는다. 즉시 목을 베어 해상에 전시하라. 루손 추장이 멋대로 상인과 백성을 죽였으니 순무와 안찰관은 죄를 의논하여 아뢰라." 했다. 서학취 등이 이에 루손에 격문을 보내 멋대로 죽인 죄를 꾸짖고 죽은 자의 처자를 보내게 했으나 끝내 토벌하지는 못했다. 그 후 중국인이 다시 조금씩 갔는데 오랑캐들이 중국과의 무역을 이롭게 여겨 또한 거절하지 않아 시간이 지나자 다시 모여들었다.

[해설]

1603년 제1차 루손(마닐라) 중국인 학살 사건(Sangkley Massacre)을 다룬다. 광산 소동으로 의심을 품은 스페인 당국이 중국인들을 선제 공격하여 대학살을 자행했다. 명나라는 원인을 제공한 장의를 처형했지만, 스페인을 정벌할 힘은 없었기에 외교적 항의에 그쳤다. 이후에도 무역의 이익 때문에 중국인들은 다시 마닐라로 모여들었다.

이때 불랑기가 이미 만랄가(말라카)를 병합하고 루손을 더하여 세력이 더욱 강해지고 해외를 횡행하다가 마침내 광동 향산오(마카오)를 점거하고 성을 쌓고 살면서 백성들과 무역하니 근심이 다시 광동에서 적중했다.

[해설]

스페인(루손)과 포르투갈(마카오, 말라카)의 세력 확장을 언급한다. 명사는 이 둘을 모두 '불랑기'로 통칭하기도 한다.

합묘리(合貓裡)

합묘리는 바다 가운데 있는 작은 나라이다. 땅은 척박하고 산이 많으며 산 밖은 큰 바다이다. 물고기와 조개가 넉넉하고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줄 안다. 영락 3년 9월 사신을 보내 자와(자바) 사신에 붙여 조공했다. 그 나라는 또 묘리무(貓裡務)라고도 하는데 루손과 가까워 상선이 왕래하여 점차 부유한 땅이 되었다. 중국인이 그 나라에 들어가면 감히 업신여기지 않고 시장의 법이 가장 공평하므로 중국인들이 말하기를 "부자가 되려면 모름지기 묘리무로 가야 한다." 했다. 망건초로(網巾礁老)라는 자가 있어 가장 흉포하여 해상에서 노략질을 하는데 배가 마치 바람처럼 떠다녀 그를 만나면 면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유독 상선이 그 땅에 이르지 않는 것을 싫어하여 우연히 이르는 자가 있으면 대우함이 매우 좋았다. 묘리무가 뒤에 도적의 약탈을 당하여 사람이 많이 죽고 다쳤으며 땅 또한 빈곤해졌다. 상인들이 초로에게 겁탈당할까 염려하여 가는 자가 드물었다.

[해설]

합묘리(또는 묘리무)는 필리핀의 카탄두아네스(Catanduanes) 섬 혹은 민도로 섬 인근으로 추정된다. 무역하기 좋은 곳이었으나 해적의 피해로 쇠퇴했다는 기록이다.

미락거(美洛居)

미락거는 속칭 미육합(米六合)이라 잘못 부르는데 동해 가운데 있으며 자못 풍요롭고 부유하다 칭해진다. 추장이 나오면 위엄과 의식이 매우 갖추어져 있고 소속 부락민들이 손을 모으고 길가에 엎드린다. 남자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머리를 묶어 상투를 튼다. 땅에 향산(향나무 산)이 있어 비 온 뒤에 향이 떨어져 물을 따라 땅에 가득하면 주민들이 주워도 다함이 없다. 그 추장이 쌓아 둔 것이 마룻대까지 차서 상선의 판매를 기다린다. 동양에는 정향이 나지 않고 오직 이 땅에만 있는데 사기를 물리칠 수 있으므로 중국인이 많이 무역한다.

만력 때 불랑기(포르투갈)가 와서 공격하니 그 추장이 싸우다 패하여 항복을 청하므로 이에 용서하여 복위시키고 해마다 정향으로 조공을 채우게 하고 수비병을 두지 않고 떠났다. 얼마 후 홍모번(네덜란드)이 바다를 횡행하다가 불랑기 병사가 이미 물러간 것을 알고 빈틈을 타서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추장을 잡고 말하기를 "네가 나를 잘 섬기면 내가 너의 주인이 되어 불랑기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했다. 추장이 부득이하여 명을 따르고 예전과 같이 복위했다. 불랑기 추장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병사를 이끌고 와서 공격하다가 길에서 중국인에게 피살되었는데, 그 말은 《루손전》에 갖추어져 있다.

[해설]

미락거는 몰루카 제도(향신료 제도)를 말한다. 정향(丁香, Clove)의 주산지다. 처음엔 포르투갈(불랑기)의 지배를 받다가 나중에 네덜란드(홍모번)가 들어와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을 묘사한다. 앞서 루손전에서 언급된 다스마리냐스 총독의 죽음이 여기서 다시 연결된다.

이때 홍모번이 비록 미락거를 점거했으나 대개 1, 2년에 무리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돌아간 뒤 다시 왔다. 불랑기 추장의 아들이 작위를 잇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크게 병사를 일으켜 습격해 왔는데, 마침 홍모번이 이미 떠난 때라 드디어 미락거를 깨뜨리고 그 추장을 죽이고 자기가 믿는 자를 세워 주인으로 삼았다. 얼마 안 있어 홍모번이 이르러 또 그 성을 깨뜨리고 불랑기가 세운 추장을 쫓아내고 미락거 옛 왕의 아들을 세웠다. 이로부터 해마다 병사가 얽혀 사람들이 견딜 수 없었다. 중국인으로서 떠돌아 사는 자들이 두 나라를 유세하여 각기 병사를 거두게 하고 나라 안의 만로고산(Manado? or a mountain in Moluccas)을 나누어 경계로 삼아 산 북쪽은 홍모번에 속하고 남쪽은 불랑기에 속하게 하여 비로소 조금 휴식했으나 미락거는 마침내 두 나라에 분할된 바 되었다.

[해설]

향신료 제도를 둘러싼 서구 열강(포르투갈 vs 네덜란드)의 식민지 쟁탈전과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현지인, 그리고 중재하려는 중국 상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요(沙瑤)

사요는 납필탄(吶嗶啴)과 땅이 이어져 있다. 납필탄은 바닷가에 있고 사요는 조금 굽어 산모퉁이로 들어가는데 모두 루손과 가깝다. 남녀가 머리를 길러 상투를 틀고 남자는 신발을 신으나 여자는 맨발이다. 판자로 성을 만들고 나무를 세우고 띠풀을 덮어 집을 만든다. 불교(여기서는 가톨릭을 의미할 가능성 큼)를 숭상하고 예배하는 절(교회)을 많이 짓는다. 남녀의 금기가 매우 엄하여 남편이 앞에서 가는데 그 아내가 다른 사람과 조소하면 남편이 즉시 그 아내를 칼로 찌르는데, 조소당한 사람은 감히 달아나지 못하고 찌르고 베는 대로 맡겨둔다. 도둑은 크고 작음을 묻지 않고 문득 사형으로 논한다. 임신부가 장차 해산하려 하면 물을 붓고 또 물로 그 아이를 씻어 물속에 두니 태어나면서 물과 익숙해진다. 물산이 매우 박하여 중국인이 그 땅에서 장사하는데 가져가는 것은 겨우 자기, 솥 종류뿐이고 무거운 것은 베에 이를 뿐이다. 뒤에 불랑기가 루손을 점거하고 이웃 경계를 많이 침탈했으나 오직 두 나라는 호령이 미치지 못했다.

[해설]

사요(Sayao)와 납필탄은 필리핀 비사야 제도(세부, 파나이 등) 지역으로 추정된다. 스페인(불랑기)의 세력이 아직 완전히 미치지 못한 곳으로 묘사된다. '불교를 숭상하고 예배사를 짓는다'는 표현은 당시 중국인들이 가톨릭 성당을 불교 사원과 혼동하거나 뭉뚱그려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이미 스페인 선교사들이 들어갔을 시기).

계롱(雞籠)

계롱산은팽호서(펑후 제도) 동북쪽에 있어 본래 북항이라 이름하고 또 동번(동쪽 오랑캐)이라 이름하는데 천주와 거리가 매우 가깝다. 땅에 깊은 산과 큰 호수가 많고 마을이 별처럼 흩어져 있다. 군장이 없고 15개 사(社, 마을)가 있어 사가 많은 곳은 천 명, 적은 곳은 혹 오륙백 명이다. 요역과 세금이 없고 자녀가 많은 자를 우두머리로 삼아 그 호령을 듣는다. 비록 바다 가운데 거주하지만 바다를 몹시 두려워하여 배를 잘 부리지 못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이웃 나라와 왕래하지 않는다.

영락 때 정화가 동서양을 두루 지나며 보물을 바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유독 동번만이 멀리 피하여 오지 않았다. 정화가 이를 미워하여 집집마다 동령(구리 방울) 하나씩을 주어 목에 걸게 했으니 대개 개들의 나라에 견준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이 도리어 이를 보물로 여겨 부자는 주워 모은 것이 여러 개에 이르렀고 말하기를 "이것은 조상이 남긴 것이다." 했다. 풍속이 용맹을 숭상하여 한가하면 곧 달리기 연습을 하여 하루에 수백 리를 가니 달리는 말에 뒤지지 않는다. 발 가죽 두께가 수 푼(分)이라 가시덤불 밟기를 평지같이 한다. 남녀가 머리를 묶어 상투를 틀고 벌거벗고 쫓아다녀도 피하는 바가 없다. 여자는 혹 풀로 치마를 엮어 몸을 가리는데 어른을 만나면 몸을 돌려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려 간다. 남자는 귀를 뚫었다. 여자는 나이 15세가 되면 입술 옆의 이를 끊어 장식으로 삼고 손과 발에 모두 문신을 하는데 온 마을이 모두 하례하며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가난하여 하례를 받을 수 없는 자는 감히 문신을 하지 못한다. 사시사철 풀이 푸른 것으로 새해의 머리를 삼는다. 땅은 오곡에 마땅하나 논에는 서툴다. 곡식 종자가 땅에 떨어지면 곧 살생을 금지하며 말하기를 좋은 일을 행하여 천공(하느님)을 도와 밥과 음식을 빈다고 한다. 수확하고 나면 곧 대나무 장대를 길에 표시하는데 이를 삽청이라 이르며, 이때는 외부 사람을 만나면 곧 죽인다. 촌락끼리 서로 원수가 되면 기약을 정한 뒤에 싸우는데 용맹한 자 몇 명이 앞에 나와 뛰다가 죽임을 당하면 곧 흩어진다. 그 승리한 자는 무리가 그를 하례하여 말하기를 "장사가 사람을 죽일 수 있구나." 한다. 그 패한 자도 집안 무리가 또한 하례하여 말하기를 "장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한다. 다음날이면 곧 화친하여 처음과 같이 된다. 땅에 대나무가 많은데 크기는 몇 아름에 이르고 길이는 10장이라, 대나무로 집을 짓고 띠풀로 덮어 넓고 길며 씨족이 모여 산다. 달력과 문자가 없고 큰일이 있으면 무리를 모아 의논한다. 표창을 잘 쓰는데 대나무 자루에 쇠촉을 하여 날카로움이 심하여 사슴을 시험하면 사슴이 죽고 호랑이를 시험하면 호랑이 또한 죽는다. 성품이 본래 바다를 두려워하여 물고기는 시내와 산골짜기에서 잡는다. 겨울에 무리를 모아 사슴을 잡는데 표창을 던지면 문득 맞추어 쌓은 것이 언덕과 산 같다. 유독 닭과 꿩은 먹지 않고 다만 그 털을 취하여 장식으로 삼는다. 그 속에 큰 시내가 많아 바다로 흘러드는데 물이 맑으므로(혹은 싱거우므로) 그 밖을 담수양이라 이름한다.

[해설]

계롱(Keelung)은 대만 북부를 지칭한다. 명나라 사람들은 대만 원주민들의 생활상(문신, 사냥, 달리기, 맹세, 무기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정화의 원정 때 대만만 조공하지 않아 '개들의 나라' 취급을 받았다는 전설이 흥미롭다.

가정 말기 왜구가 복건을 어지럽히자 대장 척계광이 이를 물리쳤다. 왜구가 달아나 이곳에 살았는데 그 무리 임도건이 그들을 따랐다. 얼마 후 임도건은 왜구에게 병합될까 두려워하고 또 관군의 추격을 두려워하여 돛을 올리고 곧바로 발니(브루나이)에 이르러 그 변방 땅을 빼앗아 살며 도건항이라 불렀다. 계롱은 왜구의 분탕질과 약탈을 만나 나라가 드디어 잔폐해졌다. 처음에는 모두 해변에 살았는데 왜구의 난을 만난 뒤로 조금씩 산 뒤로 피하여 살았다. 홀연 중국 어선이 망항으로부터 표류하여 이르러 마침내 왕래하며 몰래 판매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만력 말기에 이르러 홍모번(네덜란드)이 이곳에 배를 대고 인하여 농사짓고 개간하며 시장을 설치하고 대만이라 칭했다.

숭정 8년 급사중 하해가 바다를 평안히 할 계책을 진술하여 말하기를 "원진, 이충, 양록, 양책, 정지룡, 이괴기, 종빈, 유향이 잇달아 난을 일으킨 이래 해상이 편안히 쉰 해가 없습니다. 지금 도적의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면 그 소굴을 빈터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소굴이 어디입니까? 대만이 이것입니다. 대만은 팽호섬 밖에 있어 장주, 천주와 거리가 겨우 이틀 길이며 땅이 넓고 기름집니다. 처음에 빈민들이 때때로 그 땅에 이르러 물고기와 소금의 이익을 엿보더니 뒤에 병사의 위엄이 미치지 못함을 보고 왕왕 모여서 도적이 되었습니다. 근래에는 홍모번이 그 가운데 성을 쌓고 간사한 백성과 무역하여 우뚝하게 하나의 큰 부락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빈터로 만들 계책은 간과(전쟁)로 종사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바다로 통하는 금지령을 엄하게 하여 홍모번으로 하여금 이익을 꾀할 수 없게 하고 간사한 백성으로 하여금 먹을 것을 얻을 수 없게 한 뒤, 병사를 내어 사방으로 침범하여 우리 군사가 그 빈틈을 타서 공격하면 크게 뜻을 얻을 것입니다. 홍모번이 이곳을 버리고 떠난 연후에야 바다의 분위기가 평안해질 것입니다." 했으나 당시에는 쓸 수 없었다.

[해설]

대만이 역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과정이다. 왜구와 해적(임도건 등)의 거점이 되었다가, 나중에 네덜란드(홍모번)가 진출하여 요새(젤란디아 성 등)를 짓고 무역 기지로 삼는 과정이 묘사된다. 정지룡 등 유명한 해적들의 이름도 언급된다.

그 땅은 북쪽으로 계롱으로부터 남쪽으로 랑교에 이르기까지 1천여 리 될 만하다. 동쪽으로 다라만으로부터 서쪽으로 왕성(젤란디아 성)에 이르기까지 900여 리 될 만하다. 물길은 순풍이면 계롱 담수에서 복주 항구까지 5경(更)이면 도달할 수 있다. 대만항에서 팽호섬까지 4경이면 도달할 수 있다. 팽호에서 금문까지 7경이면 도달할 수 있다. 동북쪽으로 일본까지 70경이면 도달할 수 있다. 남쪽으로 루손까지 60경이면 도달할 수 있다. 대개 바닷길은 리(里)로 계산할 수 없고 뱃사람들이 하룻밤 낮을 10경으로 나누므로 경으로써 도리를 계산하여 말한다.

[해설]

대만의 지리적 위치와 항해 거리를 설명한다. '경(更)'은 당시 항해에서 쓰던 시간 및 거리 단위로, 향 하나가 타는 시간(약 2.4시간)을 기준으로 뱃길을 계산했다.

파라(婆羅)

파라는 또 문라이(文萊)라 이름하는데 동양의 끝이요 서양이 시작되는 곳이다. 당나라 때 파라국이 있어 고종 때 항상 입공했다. 영락 3년 10월 사신을 보내 옥새가 찍힌 글(새서)과 채색 비단을 가지고 가서 그 왕을 위무하고 타일렀다. 영락 4년 12월 그 나라 동, 서 두 왕이 아울러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조공했다. 이듬해 또 조공했다.

그 땅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며 불교를 숭상하고 살생을 싫어하고 보시하기를 좋아한다.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하며 어기는 자는 사형이다. 왕은 머리를 깎고 금수 놓은 두건을 쓰고 쌍칼을 차며 출입할 때 걸어 다니고 따르는 자가 200여 명이다. 예배하는 절(모스크)이 있어 제사할 때마다 희생을 쓴다. 그 공물은 대모, 마노, 자개, 진주, 백초포, 화초포, 강진향, 황랍, 흑소시(검은 하인?)이다.

만력 때 왕이 된 자는 복건 사람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정화가 파라에 사신 갔을 때 복건 사람이 그를 따랐는데 인하여 그 땅에 머물러 살았고 그 후손이 마침내 그 나라를 점거하여 왕 노릇 한다고 했다. 저택 옆에 중국 비석이 있다. 왕에게 금인 하나가 있는데 전문(篆文)으로 위가 짐승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영락 조정에서 하사한 것이라 말한다. 민간에서 시집가고 장가들 때 반드시 이 도장을 청하여 등에 찍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뒤에 불랑기가 횡포를 부려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왕이 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산골짜기로 달아나 약물을 푼 물을 흘려보내 그 사람들을 독살한 것이 헤아릴 수 없으니 왕이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불랑기가 드디어 루손을 침범했다.

[해설]

파라(Boluo)는 브루나이(Brunei)를 말한다. '불교를 숭상한다'고 되어 있으나 돼지고기를 금하고 예배사가 있다는 묘사로 보아 이슬람교임을 알 수 있다. 명나라 사람들은 종교 구분이 명확지 않아 이슬람도 불교의 일종이나 별파로 묘사하곤 했다. 복건 사람이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마엽옹(麻葉甕)

마엽옹은 서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영락 3년 10월 사신을 보내 새서와 하사품을 가지고 가서 그 나라를 초유했으나 끝내 조공하지 않았다. 점성 영산에서 배를 띄워 순풍으로 10일 낮밤이면 교란산(Belitung?)에 이르고 그 서남쪽이 곧 마엽옹이다. 산은 가파르고 땅은 평평하며 밭이 기름져 수확이 다른 나라의 배가 된다.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고 사탕수수를 빚어 술을 만든다. 남녀가 머리를 묶어 상투를 틀고 긴 적삼을 입고 천으로 두른다. 풍속이 절의를 숭상하여 부인이 남편을 잃으면 얼굴을 긋고 머리를 깎고 곡기를 7일간 끊고 시체와 함께 자는데 많이 죽는다. 7일이 되어도 죽지 않으면 친척들이 음식 먹기를 권하는데 종신토록 재가하지 않는다. 혹 시신을 태우는 날에 또한 불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불탄다. 산물은 대모, 목면, 황랍, 빈랑, 화포 등속이다.

교란산은 매우 높고 넓으며 대나무와 나무가 넉넉하다. 원나라 사필과 고흥이 자와(자바)를 정벌할 때 풍랑을 만나 이 산 아래에 이르러 배가 많이 부서지자 이에 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 다시 만들고 마침내 자와를 격파했다. 그 병든 병졸 100여 명을 남겨두어 기르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뒤에 더욱 번성하여 그 땅에 중국인이 많다.

또 갈복(葛卜) 및 속아미낭(速兒米囊) 두 나라가 있어 또한 영락 3년에 사신을 보내 새서와 하사품을 가지고 초유했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해설]

마엽옹은 필리핀의 마이(Mait) 혹은 민도로(Mindoro) 지역, 또는 보르네오 인근의 섬으로 추정된다. 남편을 따라 순사하는 풍습(사티와 유사)이 묘사되어 있다. 교란산(Gelam? Belitung?)은 자바 원정의 경유지로 언급된다.

고마자랑(古麻剌朗)

고마자랑은 동남 바다 가운데 있는 작은 나라이다. 영락 15년 9월 중관 장겸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 그 왕 간라의역분돈을 위무하고 융단, 저사, 사라를 하사했다. 영락 18년 8월 왕이 처자와 배신을 거느리고 장겸을 따라 내조하여 방물을 바치니 소록국(술루) 왕과 같이 예우했다. 왕이 말하기를 "신이 어리석고 무지하여 비록 나라 사람들에게 추대된 바 되었으나 아직 조정의 명을 받지 못했으니 다행히 봉작을 내리시고 국호는 그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하니 이를 따랐다. 이에 인과 고명, 관대, 의장, 안마 및 문라 비단, 금으로 짠 습의(옷)를 하사하고 비 이하에게도 아울러 하사함이 있었다. 이듬해 정월 하직하고 돌아가니 다시 금은전, 문라, 사라, 채색 비단, 금으로 짠 습의, 기린의를 하사하고 비 이하에게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왕이 돌아가다 복건에 이르러 병을 만나 죽었다. 예부주사 양선을 보내 제사하고 시호를 강정이라 하고 관청에서 무덤을 만들어 왕의 예로 장사 지냈다. 그 아들 라필에게 명하여 뒤를 이어 왕이 되게 하고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게 했으며 보초와 폐백을 하사했다.

[해설]

고마자랑은 필리핀 민다나오섬의 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왕이 직접 명나라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객사하여 중국(복건성)에 묻힌 사례다. 명나라는 그를 왕의 예우로 장사 지내주었다.

풍가시란(馮嘉施蘭)

풍가시란 또한 동양 가운데 있는 작은 나라이다. 영락 4년 8월 그 추장 가마은 등이 내조하여 방물을 바치니 보초와 폐백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영락 6년 4월 그 추장 대모, 이욕 두 사람이 각기 그 무리를 이끌고 조공하니 두 사람에게 보초 각 100정, 문라 비단 6표리(겉감과 안감)를 하사하고 그 따르는 자에게도 또한 하사함이 있었다. 영락 8년 다시 와서 조공했다.

[해설]

풍가시란은 필리핀 루손섬의 팡가시난(Pangasinan) 지역이다.

문랑마신(文郎馬神)

문랑마신은 나무로 성을 만들고 그 절반은 산에 의지해 있다. 추장은 수 놓는 여자 수백 명을 기른다. 나가서 코끼리를 타면 수 놓는 여자가 옷과 신발, 칼과 검 및 빈랑 접시를 들고 따른다. 혹은 배를 띄우면 추장은 평상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고 수 놓는 여자는 그 아래 줄지어 앉아 서로 마주 보거나 혹은 배를 젓게 하니 위엄과 의식이 매우 훌륭하다. 백성은 대부분 물 위에 나무를 엮어 집을 짓고 사니 삼불제(스리비자야/팔렘방)와 같다. 남녀가 오색 천으로 머리를 두르고 배와 등을 많이 드러내며 혹은 소매 작은 옷을 입고 머리를 가리고 들어오며 하체는 휘장으로 두른다. 처음에는 바나나 잎을 식기로 쓰다가 뒤에 중국인과 무역하면서 점차 자기를 썼다. 특히 자기 항아리를 좋아하여 그 겉에 용을 그리고 죽으면 항아리 속에 넣어 장사 지낸다. 그 풍속이 음란함을 미워하여 간통하는 자는 사형으로 논한다. 중국인이 여자와 통하면 문득 그 머리를 깎고 여자와 짝지어 주어 영구히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가 머리가 짧은 것을 괴로워하여 중국인에게 어찌하여 길게 하느냐고 물으면 속여서 말하기를 "나는 중국 물로 감아서 길다." 한다. 그 여자가 이를 믿고 다투어 배 안의 물을 사서 감는다. 중국인이 일부러 아껴서 웃음거리를 삼는다. 여자가 혹 중국인을 좋아하면 바나나, 사탕수수, 말리꽃을 가지고 와서 증여하고 많이 더불어 조소한다. 그러나 그 법이 엄한 것을 꺼려 감히 사사로이 통하는 자는 없다.

그 깊은 산속에 오롱리탄(烏籠裡憚)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꼬리가 났으며 사람을 보면 문득 얼굴을 가리고 달아나 피한다. 그러나 땅에 사금(모래 금)이 넉넉하여 상인이 물건을 가지고 가서 무역하려는 자는 작은 구리북을 쳐서 신호하고 물건을 땅에 두고 곧 한 길(丈)쯤 뒤로 물러난다. 그 사람이 이에 앞으로 와서 보고 마음에 들면 금을 곁에 둔다. 주인이 멀리서 팔겠다고 말하면 물건을 가지고 가고 그렇지 않으면 금을 품고 돌아가니 말을 섞지 않는다. 생산되는 것은 코뿔소, 공작, 앵무새, 사금, 학정(코뿔새 머리), 강향, 밀랍, 등석, 경등, 필발, 혈갈, 육두구, 노루 가죽 등 여러 물건이다.

이웃 경계에 매와유(買哇柔)라는 곳이 있는데 성품이 흉하고 사나워 매번 한밤중에 도둑질하여 사람 머리를 베어 가고 금으로 장식한다. 그러므로 상인들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밤이면 반드시 경비를 엄하게 하여 기다린다.

처음에 문랑마신 추장이 어질고 덕이 있어 상인을 은혜와 신의로 대우했다. 아들이 31명인데 상선을 소란스럽게 할까 두려워 외출하지 못하게 했다. 그 아내가 곧 매와유 추장의 여동생인데 아들을 낳아 아버지의 작위를 습격하게 되자 그 외가의 말을 들어 힘써 속임수를 행하고 상인의 값을 많이 빚지니 이로부터 가는 자가 또한 드물어졌다.

[해설]

문랑마신(Banjarmasin)은 보르네오섬 남부의 반자르마신이다. 수상 가옥 생활과 항아리 장례 풍습이 묘사된다. '꼬리 달린 사람' 이야기는 오랑우탄이나 원숭이를 잘못 보았거나 전설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 심산유곡의 침묵 교역(Silent Trade) 방식도 흥미롭다. 매와유(Biaju? Dayak?) 족의 '헤드헌팅(참수)' 풍습도 언급되어 있다. 초기의 우호적인 무역 환경이 추장이 바뀌면서 악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명사(明史) 권324 열전 제212 외국5

 

점성(참파)

점성은 남해 가운데 있다. 경주(하이난)에서 배를 타고 순풍이면 하루 밤낮에 이를 수 있고, 복주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열흘 낮밤에 이를 수 있다. 즉 주나라 때 월상 땅이다. 진나라 때는 임읍이라 했고, 한나라 때는 상림현이었다. 후한 말에 구련이 그 땅을 점거하고 비로소 임읍왕이라 칭했다. 진(晉)나라부터 수나라까지 이를 따랐다. 당나라 때는 혹은 점불로, 혹은 점파라 칭했으며 그 왕이 거처하는 곳을 점성이라 했다. 지덕 연간 이후 국호를 환이라 고쳤다. 주(후주), 송에 이르러 마침내 점성을 호칭으로 삼았으며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가 그들이 명을 거역하는 것을 미워하여 대군을 일으켜 격파했으나 평정하지는 못했다.

[해설]

이 문단은 점성, 즉 참파 왕국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연원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참파는 오늘날 베트남 중남부 해안 지역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인 진, 한, 당, 송, 원나라와의 관계 및 명칭의 변화(임읍, 점불로, 점파, 환왕국 등)를 서술하고 있다. 특히 몽골 제국(원나라)이 침공했으나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음을 언급하여 참파의 저항력을 보여준다.

홍무 2년, 태조(주원장)가 관리를 보내 즉위 조서를 가지고 그 나라를 타일렀다. 그 왕 아답아자가 먼저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내조하여 코끼리, 호랑이 및 토산물을 바쳤다. 황제가 기뻐하여 즉시 관리를 보내 새서와 대통력, 무늬 있는 비단, 사로(비단)를 가지고 그 사신과 함께 가서 하사하게 하니, 그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후 혹은 매년, 혹은 격년, 혹은 일 년에 두 번 조공했다. 얼마 안 있어 중서성 관구 감환, 회동관 부사 노경현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아답아자를 점성국왕에 봉하고, 채색 비단 40필과 대통력 3천 권을 하사했다. 3년에는 사신을 보내 그 산천에 제사 지내게 하고, 이어서 과거를 실시한다는 조서를 그 나라에 반포했다.

[해설]

명나라 건국 초기인 홍무 연간(주원장 시대)에 명나라와 참파 사이에 조공 책봉 관계가 수립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대통력(달력)을 하사하는 것은 명나라의 시간 질서를 따르겠다는 의미로, 제후국으로서의 복종을 상징한다. 산천에 제사를 지내거나 과거 시행을 알리는 것 또한 명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참파를 편입시키려는 외교적 행위이다.

처음에 안남(베트남)과 점성이 전쟁을 일으키자, 천자가 사신을 보내 화해하도록 타일렀으나 안남이 다시 침략했다. 4년, 그 왕이 금엽표(금으로 만든 표문)를 받들고 내조했는데, 길이가 1척 남짓하고 너비가 5촌이며 본국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관원이 이를 번역하니 그 뜻은 이러했다. 대명 황제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사해를 어루만지시니 마치 천지가 만물을 덮어 싣고 해와 달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아답아자는 비유하자면 한 포기 풀과 나무일 뿐인데 삼가 사신을 보내시어 금인으로써 국왕에 봉해주시니 감대하고 기뻐함이 보통의 정보다 만 배나 더합니다. 오직 저 안남이 병사를 써서 강역을 침범하고 소란을 피우며 관리와 백성을 살육하고 약탈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황제께서 자비를 드리우시어 무기와 악기, 악인을 하사하시어 안남으로 하여금 우리 점성이 성교(황제의 가르침)가 미치는 곳이며 조공을 바치는 땅임을 알게 하신다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가 예부에 명하여 타이르기를, 점성과 안남은 함께 조정을 섬기고 같이 정삭(달력)을 받들면서 제멋대로 전쟁을 일으켜 생령을 해치니, 임금을 섬기는 예도 잃었고 이웃과 사귀는 도리에도 어긋난다. 이미 안남국왕에게 자문을 보내 즉시 파병하게 했다. 본국 또한 마땅히 신의를 닦고 화목을 도모하여 각기 강토를 보전하라. 요청한 무기는 왕에게 무엇이 아까우랴마는,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데 점성에 하사한다면 이는 너희가 서로 공격하는 것을 돕는 것이니 무마하고 편안하게 하는 의리가 심히 아니다. 악기와 악인은 언어와 소리가 판이하여 보내기가 어렵다. 너희 나라에 중국 말을 아는 자가 있으면 그를 뽑아 오게 하여 마땅히 익히게 하겠다, 라고 했다. 이어서 복건성 관리에게 명하여 그들의 세금을 징수하지 말라고 하여 회유하는 뜻을 보였다.

[해설]

참파와 안남(대월국, 오늘날의 베트남 북부)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참파 왕은 명나라에 무기 지원을 요청하며 안남의 침략을 호소했으나, 명 태조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나라가 화해할 것을 종용하며 무기 지원을 거절한다. 이는 명나라 초기, 주변국 간의 분쟁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평화적인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외교 정책을 보여준다.

6년, 조공 사신이 말하기를, 해적 장여후, 임복 등이 원수라 자칭하며 해상을 약탈했는데 국왕이 이를 격파하여 괴수는 물에 빠져 죽고 그 배 20척과 소목 7만 근을 획득하여 삼가 바칩니다, 라고 했다.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하사품을 등급을 더하여 주라고 명했다. 겨울에 사신을 보내 안남을 이긴 것을 보고했다. 황제가 성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난겨울 안남은 점성이 국경을 침범했다고 말했고, 금년에는 점성이 안남이 변방을 소란케 한다고 하니 곡직을 살피기 어렵다. 사람을 보내 타일러 각기 병사를 파하고 백성을 쉬게 하며 서로 침범하지 말게 하라, 고 했다. 10년 안남왕 진단과 크게 싸웠는데 진단이 패하여 죽었다. 12년 조공 사신이 도성(남경)에 이르렀는데 중서성이 제때 주상하지 않았다. 황제가 승상 호유용, 왕광양을 호되게 질책하고 두 사람은 마침내 죄를 얻었다. 관리를 보내 왕에게 대통력과 의복, 폐백을 하사하고 안남과 수호하고 파병하게 했다.

[해설]

해적 소탕과 안남과의 지속적인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안남왕 진단(진 예종)이 참파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사건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또한, 명나라 내부적으로 승상 호유용 등이 참파 사신의 도착을 제때 보고하지 않아 문책당한 사건이 언급되는데, 이는 명초 황제권 강화와 관련된 호유용의 옥 사건의 전조를 보여준다.

13년 사신을 보내 만수절을 하례했다. 황제가 그들이 안남과의 수전에서 불리하다는 소식을 듣고 칙서를 내려 타이르기를, 지난번 안남의 병사가 나왔다가 점성에게 패했다. 점성이 승세를 타고 안남에 들어가니 안남의 치욕이 이미 심했다. 왕이 능히 국경을 보전하고 백성을 쉬게 한다면 복을 길게 누릴 것이나, 만약 반드시 병사를 몰아 고전한다면 승부를 알 수 없고 방죽과 도요새가 서로 버티면 어부가 이득을 보는 격이니(어부지리), 훗날 후회한들 또한 늦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 16년 상아 200지와 토산물을 조공했다. 관리를 보내 감합, 문책 및 금을 섞어 짠 무늬 있는 비단 32필, 자기 1만 9천 개를 하사했다. 19년 아들 보부령 시나일홀을 보내 내조하여 만수절을 하례하고 코끼리 54마리를 바치니 황태자 또한 바친 것이 있었다. 황제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하사함이 넉넉했고 환관에게 명하여 호송해 돌려보냈다. 이듬해 다시 코끼리 51마리와 가남향, 서각 등 여러 물건을 조공하니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하사했다. 돌아가다 광동에 이르자 다시 환관에게 명하여 전별 연회를 베풀고 여행 경비를 주었다.

[해설]

참파가 안남을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우세를 점했으나, 명 황제는 '어부지리'의 고사를 들어 과도한 전쟁을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이후 참파 왕자가 직접 조공을 오고 많은 양의 코끼리를 바치는 등 명나라와의 우호 관계가 깊어짐을 보여준다.

진랍이 코끼리를 조공했는데 점성왕이 그 4분의 1을 빼앗았으며 그 밖에도 실덕한 일이 심히 많았다. 황제가 이를 듣고 노했다. 21년 여름, 행인 동소를 명하여 칙서로써 그를 꾸짖었다. 동소가 이르기도 전에 그 조공 사신이 경사(서울)에 도착했다. 얼마 후 다시 사신을 보내 사죄하니 이에 명하여 제도대로 연회를 베풀고 하사했다.

[해설]

참파가 이웃 나라인 진랍(캄보디아)이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품을 약탈한 사건이다. 이는 명나라 주도의 조공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였기에 황제가 분노하고 문책했으나, 참파가 사죄함으로써 관계가 회복되었다.

당시 아답아자가 도를 잃어 대신 각승이 불궤한 꾀를 품고 있다가 23년 왕을 시해하고 자립했다. 이듬해 태사를 보내 표문을 받들고 내조하여 조공했으나, 황제가 그 패역함을 미워하여 물리쳤다. 30년 뒤에 다시 연이어 입공했다.

[해설]

참파 내부의 왕위 찬탈 사건을 다룬다. 신하가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자 명나라는 유교적 명분에 따라 역적의 조공을 거부했다.

성조(영락제)가 즉위하여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타일렀다. 영락 원년, 그 왕 점파적라이가 금엽표를 받들고 조공하며 또 안남이 침략한다고 고하고 칙서를 내려 경계하고 타일러 달라고 청했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고 행인 장빈흥, 왕추를 보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고 융, 금, 금을 섞어 짠 무늬 있는 비단, 사로를 하사했다. 이듬해 안남왕 호저의 주상으로 인해 조서를 내려 병사를 거두게 하고 관리를 보내 점성왕을 타일렀다. 그러나 왕이 사신을 보내 주상하기를, 안남이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고 수군을 이끌고 와서 침범하여, 조공하고 돌아오던 사람이 하사받은 물건을 모두 약탈당했습니다. 또 신에게 관복과 도장을 주며 신하로 삼으려 했습니다. 또한 이미 신의 사리야 등 여러 땅을 점거하고도 다시 침략을 그치지 않으니 신은 아마도 스스로 보존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판도(명나라의 영토)에 소속되기를 비니 관리를 보내 다스려 주십시오, 라고 했다. 황제가 노하여 칙서로 호저를 꾸짖고 점성왕에게는 초폐(지폐와 폐백)를 하사했다.

[해설]

영락제 시대의 시작이다. 안남(당시 호씨 정권)의 팽창 정책으로 참파가 위기에 처하자, 참파는 명나라에 영토를 바치고 직접 통치를 요청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임을 알린다. 이는 명나라가 안남을 정벌하게 되는 주요 명분 중 하나가 된다.

4년 흰 코끼리와 토산물을 조공하고 다시 안남의 환난을 고했다. 황제가 크게 병사를 일으켜 가서 토벌하고, 점성에게 칙서를 내려 국경에 병사를 엄히 하여 그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고 잡으면 즉시 경사로 보내라고 했다. 5년 안남에게 침략당한 땅을 공격하여 취하고 적당 호열, 반마휴 등을 잡아 궐하에 포로를 바치고 토산물을 조공하여 은혜에 사례했다. 황제가 그들이 병사를 도와 역적을 토벌한 것을 가상히 여겨, 환관 왕귀통을 보내 칙서와 은, 폐백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했다.

[해설]

명나라가 안남을 정벌할 때 참파가 협조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 포로를 바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와 참파의 군사적 공조가 이루어졌다.

6년, 정화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왕이 그 손자 사양해를 보내 코끼리 및 토산물을 조공하여 은혜에 사례했다. 10년, 그 조공 사신이 관대를 청하니 이를 주었다. 다시 정화에게 명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해설]

유명한 정화의 남해 원정이 언급된다. 정화의 함대는 참파를 중요한 기항지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양국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13년, 왕의 군대가 바야흐로 전기확을 정벌하는데 점성에게 명하여 병사를 돕게 했다. 상서 진흡이 말하기를, 그 왕이 몰래 두 마음을 품고 기한을 어기며 나아가지 않으면서 도리어 금과 비단, 전상(전투 코끼리)으로 전기확을 돕고, 전기확은 여창의 딸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다시 전기확의 외삼촌 진옹정과 약속하여 승화부가 관할하는 4주 11현의 땅을 침범했습니다. 그 죄가 서로 균등하니 마땅히 병사를 보내 토벌해야 합니다, 라고 했다. 황제는 교지(안남)가 막 평정되었으므로 군대를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아 다만 칙서를 내려 호되게 꾸짖고 침범한 땅을 돌려주게 하니, 왕이 즉시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16년, 그 손자 사나좌를 보내 내조했다. 환관 임귀, 행인 예준에게 명하여 호송해 돌려보냈으며 하사품이 있었다.

[해설]

참파가 명나라와 안남의 반란 세력(전기확)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친 정황이다. 명나라는 이를 알고 있었으나 현실적인 이유로 무력 토벌 대신 외교적 압박을 선택했다.

선덕 원년, 행인 황원창이 가서 정삭을 반포했는데 그 왕이 공경하지 않자 답례로 준 금과 폐백을 물리치고 돌아오니 호부원외랑으로 발탁되었다. 정통 원년, 경주지부 정형이 말하기를, 점성이 매년 한 번 조공하니 수고와 비용이 실로 많습니다. 비건대 섬라 등 여러 나라의 예처럼 3년에 한 번 조공하게 하십시오, 라고 했다. 황제가 이를 옳게 여겨 그 사신에게 칙서를 내려 정형의 말과 같이 하게 하고 왕과 왕비에게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그러나 오랑캐들이 중국과의 교역을 이롭게 여겨 비록 이러한 명령이 있어도 끝내 따르지 않았다.

[해설]

명나라 중기, 조공 횟수를 줄여 부담을 덜어주려 했으나 참파는 무역 이익을 위해 잦은 조공을 계속하려 했다는 내용이다. 조공이 형식적으로는 복종의 예지만, 실질적으로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 걸린 무역 행위였음을 보여준다.

6년, 왕 점파적라이가 죽고 그 손자 마하분해가 유명을 받들어 왕손 술제곤을 보내 내조하고 조공하며 왕위를 잇기를 청했다. 이에 급사중 관동, 행인 오혜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왕으로 봉하고 새 왕과 왕비에게 아울러 하사품이 있었다. 7년 봄, 술제곤이 길에서 죽으니 황제가 이를 불쌍히 여겨 관리를 보내 제사 지내게 했다. 8년 조카 차양락을 보내 춤추는 패와 깃발, 검은 코끼리의 조공을 재촉했다.

[해설]

왕위 계승과 관련된 외교적 절차를 보여준다. 조공 사절이 도중에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11년, 마하분해에게 칙서를 내려 타이르기를, 요사이 안남왕 여준이 사신을 보내 주상하기를 왕이 그가 고아이고 어린 것을 업신여겨, 지난번 이미 승, 화, 사, 의 4주를 침범했고 지금 또 누차 화주를 공격하여 그 사람과 가축, 재물을 약탈했다고 한다. 두 나라가 모두 조정의 명을 받았고 각기 나뉜 강역이 있는데 어찌 병사를 일으켜 원한을 맺고 이웃과 화목하며 국경을 보전하는 의리를 어기는가. 왕은 마땅히 예를 따르고 분수를 지켜 변방의 신하를 엄히 단속하고, 멋대로 침범하여 생령에게 화를 끼치지 말라, 고 했다. 아울러 안남에게도 엄히 방어를 행하고 사사로이 보복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에 앞서 3년 1공의 예를 정했으나 그 나라가 따르지 않았다. 그 사신을 문책하니 이르기를, 선왕이 이미 돌아가시고 전의 칙서가 남아 있지 않아 이 명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라고 했다. 이해에 조공 사신이 다시 이르자 재차 왕에게 칙서를 내려 제도를 따르게 하고 왕과 왕비에게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겨울에 다시 사신을 보내와 조공했다.

[해설]

참파와 안남의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명나라가 이를 중재하는 모습이다. 안남은 레 왕조(여준) 시기로 접어들었다. 또한 3년 1공 원칙을 참파가 계속 어기자 명나라가 다시 주지시키고 있다.

12년, 왕이 안남과 싸우다가 대패하여 사로잡혔다. 옛 왕 점파적라이의 조카 마하귀래가 사신을 보내 주상하기를, 선왕이 병이 들어 일찍이 신을 세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려 했습니다. 신이 그때 나이가 어려 외삼촌 마하분해에게 양위했습니다. 그 후 누차 병사를 일으켜 안남을 정벌하다가 적병이 구주 고루 등처에 들어오게 하여 사람과 가축을 거의 다 살육하고 약탈했으며 왕 또한 사로잡혔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신이 선왕의 조카이고 또 유명이 있다 하여 신에게 왕위를 대신할 것을 청했습니다. 재삼 사양하다가 부득이하여 비로소 부 앞에서 일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신이 감히 스스로 오로지 할 수 없어 엎드려 조정을 명을 기다립니다, 라고 했다. 이에 급사중 진의, 행인 설간을 보내 왕으로 봉하고 나라를 보전하고 이웃과 사귀는 것으로써 타이르고, 아울러 나라 안의 신료와 백성에게 타일러 함께 보필하게 했다. 13년 안남에게 칙서를 내려 마하분해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했으나 명을 받들지 않았다.

[해설]

1471년 안남의 대규모 침공으로 참파의 수도 비자야가 함락되고 왕이 포로로 잡힌 결정적인 사건을 다룬다. 참파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명나라는 새로운 왕 마하귀래를 책봉하여 체제를 유지하려 했으나 안남의 세력 확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태 3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왕의 부고를 알렸다. 급사중 반본우, 행인 변영에게 명하여 그 동생 마하귀유를 왕으로 봉했다. 천순 원년 입공하니 그 정사와 부사에게 삽화금대를 하사했다. 2년 왕 마하반라열이 새로 서자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조공했다. 4년 다시 조공하니 정사 이하에게 사모 및 금은각대를 차등 있게 하사했다. 사신이 안남이 침략함을 호소하니 인하여 안남왕에게 칙서를 내려 타일렀다. 9월 사신이 와서 왕의 상을 알렸다. 급사중 황여림, 행인 유서에게 명하여 왕의 동생 반라차전을 왕으로 봉했다.

[해설]

경태, 천순 연간의 잦은 왕위 교체와 조공 기록이다. 안남의 압박은 계속되고 있었다.

8년 입공했다. 헌종이 즉위하여 응당 번국에 비단을 하사해야 하니 예관이 사신에게 부쳐서 보내자고 청하여 이를 따랐다. 사신이 다시 안남이 침략함을 호소하며 흰 코끼리를 요구한다고 했다. 영락 연간처럼 관리를 보내 안무하고 계패석(국경비)을 세워 침략을 막아달라고 빌었다. 병부가 두 나라가 바야흐로 다투는데 사신을 보내는 것은 편치 않으니, 사신으로 하여금 돌아가 국왕에게 타일러 힘써 예법을 따르고 봉강을 굳게 하며 외세의 업신여김을 막고 가벼이 화를 짓지 말라고 하게 해달라고 비니, 이를 따랐다.

[해설]

참파는 명나라의 적극적인 개입(국경비 설치 등)을 요청했으나, 명나라는 군사적, 외교적 부담을 느껴 직접 개입을 회피하고 자력으로 방어하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보낸다. 명나라의 대외 정책이 소극적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성화 5년 입공했다. 이때 안남이 점성의 서각, 코끼리, 보물을 요구하고 천조(명나라)를 섬기는 예로써 자신들을 섬기라고 시켰다. 점성이 따르지 않자 대거 가서 정벌했다. 7년 그 나라를 격파하고 왕 반라차전 및 가족 50여 명을 잡고 인신을 겁탈하고 크게 불태우고 약탈하였으며 마침내 그 땅을 점거했다. 왕의 동생 반라차열이 산중으로 도망하여 사신을 보내 환난을 고했다. 병부가 말하기를, 안남이 우방을 병탄했으니 만약 처분하지 않으면 점성이 귀부하는 마음을 잃을 뿐만 아니라 안남이 발호하는 뜻을 열어줄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관리를 보내 칙서를 가지고 가서 선유하여 그 국왕과 권속을 돌려주게 해야 합니다, 라고 했다. 황제는 안남이 명을 거역할까 염려하여 조공 사신이 오는 날을 기다려 칙서로 꾸짖게 했다.

[해설]

1471년 안남의 레 탄 똥(여성종)이 참파를 멸망에 가깝게 파괴한 사건이다. 안남은 참파에게 자신들을 황제국으로 섬길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자 침공하여 왕을 사로잡고 영토를 병합했다. 명나라는 이에 대해 우려했으나 실질적인 군사 행동은 취하지 못했다.

8년, 반라차열이 책봉을 청함으로 인해 급사중 진준, 행인 이산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게 했다. 진준 등이 신주항에 이르니 지키는 자가 막았고, 그 나라가 이미 안남에게 점거되어 교남주로 바뀐 것을 알고는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10년 겨울 조정으로 돌아왔다.

[해설]

명나라 사신이 책봉을 위해 갔으나 이미 안남이 점령하여 행정구역(교남주)으로 개편해버린 상황이라 진입하지 못하고 돌아온 굴욕적인 사건이다.

안남이 이미 점성을 격파하고 다시 병사를 보내 반라차열을 잡아 가고, 전 왕의 손자 재아마불암을 왕으로 세워 나라 남쪽 변방의 땅을 그에게 주었다. 14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책봉을 청하여, 급사중 풍의, 행인 장근에게 명하여 가서 책봉하게 했다. 풍의 등이 사물(개인 무역품)을 많이 휴대했는데 광동에 이르러 재아마불암이 이미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동생 고래가 사신을 보내 책봉을 빌었다. 풍의 등은 빈손으로 돌아가 이익을 잃을까 염려하여 급히 점성에 이르렀다. 점성 사람이 말하기를, 왕손이 책봉을 청한 뒤 즉시 고래에게 피살되었고 안남이 거짓 칙서로 그 나라 사람 제파태를 왕으로 세웠다고 했다. 풍의 등은 주상하여 보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문득 인신과 폐백으로써 제파태에게 주어 그를 책봉하고, 뇌물로 황금 백여 냥을 얻었으며, 또 만랄가(말라카)국으로 가서 그 사물을 다 팔고 돌아왔다. 풍의는 바다에서 병들어 죽었다. 장근이 그 사실을 갖추고 아울러 거짓 칙서를 조정에 올렸다.

[해설]

명나라 사신들의 부패와 외교적 혼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신들이 개인적인 무역 이익을 위해 현지의 정치적 상황(왕위 찬탈, 안남의 괴뢰 정권 수립)을 무시하고, 정통성이 없는 인물(제파태)을 책봉해버린 사건이다.

17년, 고래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말하기를, 안남이 신의 나라를 격파할 때 옛 왕의 동생 반라차열은 도망하여 불령산에 거처했습니다. 천사의 봉고가 이르렀을 때 이미 적인에게 잡혀갔고, 신과 형 재아마불암은 산골짜기에 숨었습니다. 그 후 적인이 천자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 신의 형을 찾아 옛 땅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방도랑에서 점랍에 이르기까지 겨우 5곳뿐이었습니다. 신의 형이 나라를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죽었습니다. 신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나 감히 독단할 수 없어 천자의 은혜를 우러러보며 책봉의 인신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신의 나라가 소유한 토지는 본래 27곳으로 4부 1주 22현이었습니다. 동으로는 바다, 남으로는 점랍, 서로는 여인산, 북으로는 아본라보에 이르러 무릇 3천5백여 리입니다. 비건대 특별히 교인(안남 사람)을 타일러 본국을 다 돌려주게 해주십시오, 라고 했다. 이 글을 조정의 의논에 내려 영국공 장무 등이 특별히 근신 중 위망이 있는 자 2명을 사신으로 보내자고 청했다. 때마침 안남 조공 사신이 막 돌아가려던 참이라 즉시 칙서를 내려 여호(안남왕)를 힐책하고 속히 땅을 돌려주며 조정의 명에 항거하지 말라고 했다. 예관이 이에 장근이 멋대로 책봉한 것을 탄핵하여 조옥에 내려 심문하여 그 실정을 다 알아내고 사형을 논했다. 당시 고래가 보낸 사신이 관에 있었는데 불러서 물으니 말하기를, 고래는 실로 왕의 동생이며 그 왕은 병사했지 시해된 것이 아닙니다. 제파태는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라고 했다. 이에 사신에게 명하여 잠시 광동으로 돌아가 제파태의 사신이 오기를 기다려 참과 거짓을 살핀 뒤 처분하게 했다. 사신이 명을 기다린 지 해가 지나도 제파태의 사신이 오지 않아 이에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해설]

고래(古來)라는 인물이 정통성을 주장하며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호소한다. 명나라는 앞서 부패한 사신 장근을 처벌하고 진상 파악에 나선다. 안남의 세력이 강해져 참파가 쪼그라든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20년, 고래에게 칙서를 내려 제파태를 어루만져 타일러 원래 내려준 국왕의 인신을 바치게 하고 거짓 책봉을 받은 죄를 용서하여 그대로 두목으로 삼게 했다. 제파태가 명을 받지 않자 이에 급사중 이맹양, 행인 엽응을 보내 고래를 책봉하여 국왕으로 삼았다. 이맹양 등이 말하기를, 점성은 험하고 멀며 안남이 전쟁을 그치지 않고 제파태가 또 그 땅을 도둑질하여 점거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신중하지 않으면 도리어 국위를 손상할 것입니다. 마땅히 온 사신으로 하여금 고래에게 전하여 광동에 나아와 책봉을 받게 하고 아울러 안남에게 칙서를 내려 화를 뉘우치게 해야 합니다, 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 고래가 이에 노아(라오스)로부터 가족을 이끌고 애주(하이난)에 이르렀고 이맹양은 책봉하는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고래가 또 몸소 궐정(명나라 조정)에 나아가 안남의 죄를 주상하고자 했다. 23년 총독 송민이 이를 알렸다. 조정의 의논이 대신 한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안남에게 격문을 보내 멸망한 나라를 보존하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여(존망계절), 고래를 맞이하여 점성으로 돌아가게 하자고 했다. 황제가 좋다고 답하여 남경 우도어사 도용에게 명하여 가게 했다. 광동에 이르러 즉시 안남에 격문을 보내 화복을 선시했다. 건장한 병졸 2천 명을 모집하고 바다 배 20척을 부려 고래를 호위하여 귀국시켰다. 안남은 도용이 대신으로서 특별히 파견을 받들었으므로 감히 저항하지 못했고 고래는 이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해설]

명나라가 참파 왕 고래를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드문 사례다. 광동에서 책봉을 받게 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안남을 압박하고 군사적 호위를 통해 귀국시켰다. '존망계절(存亡繼絕)'은 춘추시대 이래 중국 외교의 이상적 명분이다.

이듬해 홍치로 개원하여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2년 동생 복고량을 광동에 보내 말하기를, 안남이 여전히 멋대로 침략하니 비건대 영락 연간처럼 장수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여 지켜주십시오, 라고 했다. 총독 진굉 등이 이를 알렸다. 병부가 말하기를, 안남과 점성은 모두 조훈(황실의 가르침)에 기재된 정벌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영락 연간에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낸 것은 바로 레(여) 적의 시해와 반역의 죄 때문이지 이웃 국경이 서로 미워한 까닭이 아닙니다. 지금 여호는 조공을 닦음이 오직 삼가는데, 고래가 피부로 느끼는 원한은 용혹 과장된 정이 있어 그 편파적인 말만 믿고 정벌하지 않는 나라에 군대를 수고롭게 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수신(지방관)에게 명하여 회답하되, 근래 교인(안남인)이 왕자 고소마를 살해하자 왕이 즉시 무리를 이끌고 그를 격파하여 원수와 부끄러움을 이미 씻었다고 한다. 왕은 마땅히 스스로 힘써 정치를 닦고 나라 사람을 어루만지며 강토를 보전하고, 그대로 안남과 돈목하고 수호하라. 그 나머지 자잘한 혐의는 모두 마땅히 버리고 없애라. 만약 스스로 힘쓰지 못하고 오로지 조정이 병사를 내어 바다를 건너 왕을 대신해 나라를 지켜주기를 바란다면 예부터 이런 이치는 없었다, 라고 하게 하십시오 하니 황제가 그 말과 같이 했다. 3년 사신을 보내 은혜에 사례했다. 그 나라는 잔파된 후로 백성과 물자가 쓸쓸하여 조공 사신이 점차 드물어졌다.

[해설]

홍치 연간, 명나라는 다시 불간섭 원칙으로 회귀한다. 안남이 겉으로는 명나라에 순종하고 있었기에 명나라는 참파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자강을 권고한다. 참파의 쇠락이 가속화된다.

12년 사신을 보내 주상하기를, 본국의 신주항 땅을 여전히 안남에게 침탈당하여 환난이 바야흐로 그치지 않습니다. 신은 나이가 이미 늙었으니 청건대 신이 죽지 않았을 때 장자 사고복락에게 명하여 습봉하게 하시면 바라건대 훗날 국토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안남이 점성의 근심이 된 지 이미 하루가 아닙니다. 조정이 일찍이 점성의 원한으로 인해 누차 새서를 내려 곡진히 가르치고 타일렀습니다. 안남의 전후 주상과 보고는 모두 조정의 명을 공경히 받들어 토지와 인민을 다 이미 돌려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안남의 변명하는 말이 막 이르자 점성의 호소하는 말이 또 들리니 아마 참으로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듯합니다. 마땅히 그대로 수신에게 명하여 안남을 간절히 타일러, 남의 토지를 탐하여 스스로 재앙을 남기지 말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편사(일부 군대)를 보내 그 죄를 묻겠다고 의논하게 하십시오. 점성왕의 장자에 대해서는 아비가 있는데 습봉하는 이치가 없습니다. 청건대 우선 세자로 삼아 국사를 섭정하게 하고 훗날 습위할 때가 되면 예에 따라 책봉을 청하게 하십시오, 라고 하니 황제가 윤허했다. 얼마 후 왕손 사부등고로를 보내 조공했다.

[해설]

안남과 참파 사이의 진실 공방과 명나라의 고심을 보여준다. 명나라는 안남을 의심하면서도 전면적인 개입은 꺼렸다.

18년 고래가 죽었다. 아들 사고복락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는데 부친의 상은 알리지 않고 다만 대신에게 명하여 그 나라에 가서 신주항 등 여러 땅을 가지고 봉해달라고 빌었다. 별도로 방여(강역)를 빼앗긴 주상이 있었는데 은미하게 부친이 죽은 사실을 언급했다. 급사중 임양필 등이 말하기를, 점성은 전에 국토가 깎이고 약해져서 조공을 빙자해 책봉을 빌고 천자의 위엄에 의지하여 이웃 나라를 겁주려 복종시키려 했습니다. 사실 국왕이 서고 안 서고는 조정이 봉하고 안 봉하고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고래가 이미 죽었다고 칭하나 허실을 알기 어렵습니다. 만일 우리 사신이 그곳에 이르렀는데 고래가 아직 살아 있다면 장차 그 아들을 봉할 것입니까? 아니면 의리로 불가하다 하고 그만둘 것입니까? 핍박하고 위협하는 사이에 일은 지극히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날 과신 임소의 사신이 만랄가(말라카)에 갔을 때 북면하여 무릎 꿇기를 긍정치 않다가 갇혀 굶어 죽었으나 끝내 그 죄를 묻지 못했습니다. 임금의 명령과 나라의 위엄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해외의 여러 번국은 일이 없으면 조공을 폐하고 자립하며, 일이 있으면 조공을 빌려 책봉을 청합니다. 지금 조공 사신이 온 것은 어찌 책봉을 구함이 급해서이겠습니까, 불과 안남에게 침략당한 땅을 회복하고 월동(광동)으로 도망간 사람을 돌려보내고자 함일 뿐입니다. 무릇 안남이 침략한 땅은 새서로 누차 돌려주라고 타일렀으나 점거함이 예전과 같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타이른다면 저들은 장차 장난으로 볼 것이니 천자의 위엄이 더러워집니다. 만일 우리 사신이 가서 점성을 봉하려는데 억류하여 보내지 않고 처분을 구한다면 조정은 장차 무엇으로 응하시겠습니까? 또 혹은 우리 사신을 구속하고 도망간 사람을 찾게 한다면 이는 천조의 귀한 신하로서 해외의 오랑캐 나라에 인질이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지난 해 고래가 광동에 나아가 책봉받은 일처럼 하여 그로 하여금 칙서를 받아 귀국하게 함이 계책으로 편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예부 또한 고래의 존망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광동 수신에게 명하여 점성에 공문을 보내 조사해 보고하게 하자고 청하니 이를 따랐다. 이윽고 봉하는 일은 오랫동안 행해지지 않았다.

[해설]

명나라 말기로 갈수록 국력이 쇠하고 외교적 신중함(혹은 소극성)이 더해지는 모습이다. 신하들은 과거의 실패 사례를 들어 위험한 현지 파견보다는 안전한 광동에서의 책봉을 주장한다. 참파의 쇠락과 명나라의 영향력 약화가 동시에 드러난다.

정덕 5년, 사고복락이 숙부 사계파마를 보내 입공하고 인하여 책봉을 청했다. 급사중 이관, 행인 유서에게 명하여 가게 했다. 이관이 광동에 도착하여 가기를 꺼려하며 청하기를 지난 해 고래의 고사처럼 그 사신으로 하여금 봉작을 받아가게 하자고 했다. 조정의 의논이, 관리를 보낸 지 이미 2년인데 지금 만약 중지하면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는 의리가 아닙니다. 만일 그 사신이 봉작을 받아 가기를 원치 않거나, 받아 돌아갔는데 그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라면 거듭 사단이 일어나 국체를 더욱 손상할 것이니 마땅히 이관 등으로 하여금 급히 가게 해야 합니다, 라고 했다. 이관이 끝내 가기를 꺼려 통역과 화장(선장)이 없다는 것을 핑계 댔다. 조정 의논이 광동 수신에게 명하여 그 사람을 찾게 하고 만약 끝내 얻지 못하면 옛 예대로 행하게 했다. 이관이 다시 말을 꾸며 이르기를, 신이 명을 받든지 5년인데 풍파의 위험을 꺼리는 듯하나, 실은 점성이 고래가 쫓겨난 뒤로부터 적감 방도랑으로 숨어 사니 나라는 옛 강역이 아니고 형세가 갈 수 없습니다. 하물며 고래는 바로 전 왕 재아마불암의 두목이었는데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왕에게 세 아들이 있어 그 하나가 아직 살아 있으니 의리상 또한 불가합니다. 춘추의 법으로 따지자면 비록 죄를 묻는 군대는 일으키지 않더라도 반드시 조공 사신은 끊어야 합니다. 어찌하여 또 방문하고 찾는 논의를 하여 헛되이 세월만 끌어 일에 무익하게 합니까, 라고 했다. 광동 순안 정해 또한 부회하여 주상하니 조정의 의논이 이를 따랐다. 10년 그 사신에게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가게 하니 이로부터 마침내 고사가 되어 그 나라 조공 사신 또한 항상 이르지는 않았다.

[해설]

정덕 연간, 명나라 사신들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핑계를 대고 결국 현지 책봉을 무산시키는 과정이다. 참파의 중심지가 남쪽으로 밀려났음(적감, 방도랑)을 알 수 있고, 명나라의 관리들이 해외 파견을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했음을 보여준다.

가정 22년 왕의 숙부 사부등고로를 보내 입공하고, 자주 안남의 침략을 당하고 길이 막혀 돌아가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관리를 보내 호송하여 귀국시키기를 비니 허락한다고 답했다.

그 나라는 서리와 눈이 없고 사시사철이 모두 여름과 같아 초목이 늘 푸르다. 백성은 어업을 업으로 삼고 보리(이맥)가 없으며 농사에 힘쓰는 자가 적으므로 수확이 적다. 나라 사람은 모두 빈랑을 먹는데 종일 입에서 떼지 않는다. 삭망(음력 초하루와 보름)을 알지 못하고 다만 달이 생겨나는 것을 초라 하고 달이 그믐이 되는 것을 다했다고 하며 윤달을 두지 않는다. 낮과 밤을 10경으로 나누고, 해가 중천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고 밤이 깊지 않으면 눕지 않으며, 달을 보면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으로 즐거워한다. 종이와 붓이 없고 양가죽을 얇게 펴서 검게 그을려 사용하며, 가는 대나무를 깎아 흰 회를 묻혀 글자를 쓰는데 모양이 지렁이 같다. 성곽과 갑병이 있고 사람의 성품은 사나우면서 교활하며 무역할 때 불공평한 경우가 많다. 집은 모두 북쪽을 향하고 민가는 다 띠 풀로 처마를 덮는데 높이가 3척을 넘을 수 없다. 두목(지배층)은 등급을 나누어 차등이 있고 문의 높낮이 또한 한계가 있다. 음식은 더럽고 물고기는 썩지 않으면 먹지 않으며 술은 구더기가 생기지 않으면 맛있다 하지 않는다. 인체는 검고 남자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여자는 몽치머리를 하고 모두 맨발이다.

[해설]

참파의 풍습에 대한 민족지적 기술이다. 열대 기후, 빈랑 씹는 풍습, 독자적인 시간 관념(10경), 문자 기록 방식, 주거 형태, 음식 문화(생선젓갈-뇨크맘-로 추정되는 썩은 생선 선호) 등을 묘사한다. '지렁이 같은 글자'는 꼬불꼬불한 인도계 문자를 중국인들이 표현한 것이다.

왕은 쇄리(솔리-남인도 촐라 또는 무슬림 상인 집단을 지칭하기도 함) 사람으로 불교(혹은 힌두교/이슬람교 혼합)를 숭상한다. 세시에 산 사람의 쓸개(담)를 채취해 술에 넣어 가족과 함께 마시고 또 그것으로 몸을 씻으며 "온몸이 담이다"라고 말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채취하여 왕에게 바치고 또 코끼리 눈을 씻긴다. 매번 길에서 사람을 엿보다가 불의에 급히 그를 죽이고 쓸개를 취해 간다. 만약 그 사람이 놀라 깨면 쓸개가 이미 먼저 찢어져 쓸 수 없게 된다. 여러 쓸개를 그릇에 담아두면 중국인의 쓸개가 문득 위에 자리 잡으므로 더욱 귀하게 여긴다. 5, 6월 사이 상인들이 나갈 때는 반드시 경계하고 대비한다. 왕이 재위 30년이 되면 자리를 피하여 깊은 산으로 들어가 형제나 자질로 대신하게 하고, 자기는 재계하고 계율을 받으며 하늘에 고하여 말하기를 "내가 임금이 되어 무도했다면 원컨대 이리와 호랑이가 나를 먹거나 혹은 병들어 죽게 하소서"라고 한다. 1년을 거처하여 탈이 없으면 다시 지위를 회복하여 처음과 같이 한다. 나라 안에서 "석리마하라"라고 부르는데 이는 지존하고 지성하다는 칭호이다.

[해설]

'산 사람의 쓸개(생인담)' 이야기는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참파에 대한 기담이다. 다소 과장되었거나 공포심을 조장하는 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왕이 30년마다 산에 들어가 신의 심판을 받는다는 풍습 또한 독특한 왕권의 종교적 성격을 보여준다. '석리마하라'는 산스크리트어 'Sri Maharaja(위대한 왕)'의 음차로 보인다.

나라는 심히 부유하지 않으나 오직 코끼리와 코뿔소가 가장 많다. 오목, 강향을 땔나무로 하여 땐다. 기남향은 유독 그 땅의 한 산에서만 생산되는데 추장이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여 백성이 채취할 수 없고 범하는 자는 손을 자르는 형벌에 처한다.

악어 연못이 있어 옥사가 의심스러워 결단하지 못할 때 원고와 피고로 하여금 소를 타고 그 곁을 지나게 한다. 굽은 자(죄인)는 악어가 문득 뛰어올라 그를 잡아먹고, 곧은 자(무죄인)는 횟수를 거듭해 왕복해도 먹지 않는다. 시두만이라는 것이 있는데 일명 시치어라고 하며 본래 부인인데 오직 눈동자가 없는 것이 다르다. 밤중에 사람과 함께 자다가 홀연 머리가 날아가 사람의 오물을 먹고 와서 즉시 부활한다. 만약 사람이 알고 그 목을 봉하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몸을 옮기면 그 부인은 즉시 죽는다. 나라에서 엄한 금지령을 두어 있는데도 고하지 않는 자는 죄가 일가에 미친다.

[해설]

기남향(침향의 일종)이 특산물임을 밝히고 있다. 악어를 이용한 신성 재판(Trial by ordeal)과 동남아시아 민속 신앙에 등장하는 '머리 날아다니는 귀신(Krasue 등)'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이는 중국인들이 남방을 신비롭고 기이한 곳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빈동룡(판두랑가)

빈동룡국은 점성과 땅이 접해 있다. 혹은 여래가 사위국에 들어가 걸식했던 곳이 바로 그 땅이라고 말한다. 기후, 초목, 인물, 풍토는 대개 점성과 유사하다. 오직 상을 당하면 능히 상복을 입고, 외진 땅에 장사 지내며, 재를 설하고 부처에게 예경하고, 혼인은 우연히 합해진다. 추장은 출입할 때 코끼리나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백여 명이며 앞뒤에서 찬창(소리쳐 길을 틔움)한다. 백성은 띠를 엮어 지붕을 덮는다. 화폐는 금, 은, 꽃무늬 천을 쓴다.

[해설]

빈동룡은 참파의 남부 지역인 판두랑가(Panduranga)를 말한다. 참파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곤륜산이 있어 저만치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점성 및 동, 서 천축과 솥발처럼 마주 보고 있다. 그 산은 사방이 넓고 높으며 그 바다를 곧 곤륜양이라 한다. 서양(인도양 방면)으로 가는 모든 자는 반드시 순풍을 기다려 7주야 만에 비로소 통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뱃사람들의 속담에 "위로는 7주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곤륜을 두려워하니, 바늘(나침반)이 미혹되고 키를 잃으면 사람과 배가 보존되지 못한다"라고 했다. 이 산에는 특이한 산물이 없다.

사람들은 모두 굴에서 살고 둥지에 거처하며 과실과 물고기, 새우를 먹고 집이나 우물, 부엌이 없다.

[해설]

곤륜산은 오늘날 베트남 남부의 꼰다오(Con Dao) 제도 혹은 풀로 콘도르(Pulo Condore)를 지칭한다. 항해의 요충지이자 위험한 곳으로 묘사된다. '7주'는 파라셀 제도(시사군도) 근처의 칠주양을 말한다. 이곳의 원시적인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다.

진랍(캄보디아)

진랍은 점성의 남쪽에 있는데 순풍이면 3주야에 이를 수 있다. 수, 당 및 송나라 때 모두 조공했다. 송나라 경원 연간에 점성을 멸하고 그 땅을 병합하여 인하여 국명을 점랍이라 고쳤다. 원나라 때는 그대로 진랍이라 칭했다.

[해설]

진랍은 캄보디아(크메르 제국)를 지칭한다.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포괄한다. 송나라 때 참파를 일시 점령했던 역사(자야바르만 7세 시대)가 언급되어 있다.

홍무 3년 사신 곽징 등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그 나라를 어루만져 타일렀다.

4년 그 나라 파산왕 홀이나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토산물을 조공하며 이듬해 정월 초하루를 하례했다. 조서를 내려 대통력 및 채색 비단을 하사하고 사신에게도 차등 있게 지급했다.

6년 조공했다.

12년 왕 참답감무자지달지가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조공하니 연회를 베풀고 하사함이 전과 같았다.

13년 다시 조공했다. 16년 사신을 보내 감합과 문책을 그 왕에게 하사했다. 무릇 나라 안의 사신이 이르렀을 때 감합이 부합하지 않으면 곧 거짓으로 간주하여 묶어서 보고하는 것을 허락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 금을 섞어 짠 무늬 있는 비단 32필, 자기 1만 9천 개를 하사했다. 그 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해설]

명나라 초기의 조공 관계 수립과 '감합(勘合)' 제도의 도입을 설명한다. 감합은 쪼개진 부절을 맞춰보아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증명서로, 공식적인 조공 무역의 필수 요소였다.

19년 행인 유민, 당경을 보내 환관과 함께 자기를 가지고 가서 하사했다.

이듬해 당경 등이 돌아오니 왕이 사신을 보내 코끼리 59마리, 향 6만 근을 조공했다. 얼마 후 사신을 보내 그 왕에게 도금한 은도장을 하사하니 왕과 왕비에게 모두 하사품이 있었다. 그 왕 참렬실비사감보자가 사신을 보내 코끼리 및 토산물을 조공했다. 이듬해 다시 코끼리 28마리, 코끼리 종 34명, 번인 종 45명을 조공하여 도장을 하사받은 은혜에 사례했다. 22년 세 번 조공했다. 이듬해 다시 조공했다.

[해설]

'참렬...'로 시작하는 왕의 이름은 캄보디아 왕의 칭호인 'Samdech...' 등을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와 향료가 주요 조공품이었다.

영락 원년 행인 장빈흥, 왕추를 보내 즉위 조서로써 그 나라를 타일렀다. 이듬해 왕 참렬파비야가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토산물을 조공했다. 처음에 환관이 진랍에 사신으로 갔을 때 부하 병졸 3명이 몰래 도망쳤는데 찾지 못하자 왕이 그 나라 사람 3명으로 대신하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인견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중국 사람이 스스로 도망쳤는데 저들에게 무엇이 관여되어 배상을 책망하겠는가? 또 언어가 통하지 않고 풍토를 익히지 못했으니 내 어찌 그들을 쓰겠는가? 하고 명하여 의복 및 여행 경비를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3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옛 왕의 상을 알렸다. 홍려시 서반 왕자에게 명하여 조문하게 하고 급사중 필진, 환관 왕종이 조서를 가지고 가서 그 아들 참렬소평야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필진 등이 돌아오니 새 왕이 사신을 보내 함께 와서 은혜에 사례했다. 6년, 12년 재차 입공했다. 사신이 그 나라가 자주 점성의 침략을 받아 오랫동안 머물며 떠나지 않았다. 황제가 환관을 보내 그를 호송해 돌려보내고, 아울러 점성왕에게 칙서를 내려 병사를 파하고 수호하게 했다. 15년, 17년 아울러 입공했다. 선덕, 경태 연간에도 또한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이후로는 항상 이르지는 않았다.

[해설]

영락제 시기에도 조공 관계가 유지되었으나, 점차 횟수가 줄어들었다. 도망친 명나라 병사 대신 캄보디아인을 보냈으나 영락제가 이를 거절하고 돌려보낸 일화는 황제의 관대함을 과시하는 기록이다.

그 나라 성황(성곽과 해자)은 둘레가 70여 리이고 폭은 수천 리이다. 나라 안에 금탑, 금다리, 전우 30여 곳이 있다. 왕은 세시에 한 번 모임을 갖는데 옥 원숭이, 공작, 흰 코끼리, 코뿔소를 앞에 나열하며 이름을 백탑주라 한다. 음식을 금쟁반, 금완에 담으므로 "부귀한 진랍"이라는 속담이 있다. 민속은 부유하고 넉넉하다. 날씨는 항상 덥고 서리와 눈을 모르며 벼는 일 년에 수차례 여문다. 남녀는 상투를 틀고 짧은 저고리를 입으며 초포를 두른다. 형벌에는 코를 베는 것(의), 발꿈치를 자르는 것(월), 자자하고 유배 보내는 것(자배)이 있으며 도둑질하면 손발을 자른다. 번인이 당인(중국인)을 죽이면 사형이고, 당인이 번인을 죽이면 벌금형이며 금이 없으면 몸을 팔아 죄를 속죄한다. 당인이란 여러 번국에서 중국인을 부르는 칭호인데 무릇 해외 여러 나라가 다 그러하다. 혼가는 양가가 모두 8일 동안 문을 나서지 않고 밤낮으로 등을 켠다. 사람이 죽으면 들에 두어 까마귀나 솔개가 먹게 내버려 두는데 잠깐 사이에 다 먹으면 복을 받았다고 이른다. 상을 치를 때는 다만 머리를 깎는데, 여자는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동전 크기만큼 자르고 이것으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말한다. 문자는 노루와 사슴의 잡다한 가죽을 검게 물들이고 분을 사용하여 작은 줄처럼 그 위에 그리는데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10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고 윤달은 다 9월을 쓴다. 밤을 4경으로 나눈다. 또한 천문을 아는 자가 있어 일월식(일식과 월식)을 계산할 수 있다. 그 땅에서는 유생을 반힐이라 하고, 승려를 저고라 하며, 도사를 팔사라 한다. 반힐은 무슨 책을 읽는지 알지 못하나 이로써 벼슬에 들어간 자를 화관(높은 벼슬)이라 한다. 전에는 목에 흰 실 하나를 걸어 스스로 구별했으나 귀해진 뒤에는 예전처럼 흰 옷을 끈다. 풍속은 불교를 숭상하며 승려는 모두 물고기와 고기를 먹고 혹은 부처에게 공양하나 오직 술은 마시지 않는다. 그 나라는 스스로 감패지라 칭했는데 후에 와전되어 감파자가 되었고 만력 이후 또 캄보디아(간포채)로 고쳤다.

[해설]

앙코르 톰(Angkor Thom)의 웅장함과 '부귀진랍'이라는 당시의 평판을 묘사한다. 주달관의 <진랍풍토기> 내용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조장(鳥葬) 풍습, 형벌 제도, 중국인(당인)에 대한 우대, 그리고 사회 계급인 반힐(브라만/학자), 저고(승려), 팔사(수행자)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국명이 캄보디아로 정착되는 과정도 설명한다.

섬라(시암/태국)

섬라는 점성의 서남쪽에 있는데 순풍이면 10주야에 이를 수 있다. 즉 수, 당의 적토국이다. 후에 나곡, 섬 두 나라로 나뉘었다. 섬 땅은 척박하여 농사에 마땅치 않고 나곡은 땅이 평평하고 넓어 심으면 많이 수확하니 섬은 이에 의지해 공급받았다. 원나라 때 섬은 항상 입공했다. 그 후 나곡이 강해져 섬의 땅을 병합하고 마침내 섬라곡국이라 칭했다.

[해설]

섬라(Siam)의 형성 과정을 설명한다. '나곡'은 라보(Lavo/Lopburi) 또는 롭부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섬'은 수판부리(Suphanburi) 또는 수코타이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두 세력이 합쳐져 아유타야 왕조(섬라곡)가 되었다.

홍무 3년, 사신 여종준 등을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그 나라를 타일렀다. 4년 그 왕 참렬소비야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여종준 등과 함께 와서 길들인 코끼리, 다리 여섯 달린 거북 및 토산물을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그 왕에게 비단을 하사하고 사신에게도 폐백을 차등 있게 주었다. 이윽고 다시 사신을 보내 이듬해 정월 초하루를 하례하니 조서를 내려 대통력 및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5년 검은 곰, 흰 원숭이 및 토산물을 조공했다. 이듬해 다시 와서 조공했다. 그 왕의 누이 참렬사녕이 따로 사신을 보내 금엽표를 올리고 중궁(황후)에게 토산물을 조공했으나 물리쳤다. 얼마 후 그 누이가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황제는 여전히 물리쳤으나 그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하사했다. 당시 그 왕이 나약하고 무력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그 백부 참렬보비야리다라록을 추대하여 국사를 주관하게 했다. 사신을 보내 이를 알리고 토산물을 조공하니 연회를 베풀고 하사함이 제도와 같았다. 얼마 후 새 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은혜에 사례했는데 그 사신 또한 바친 것이 있었으나 황제가 받지 않았다. 이윽고 사신을 보내 이듬해 정월 초하루를 하례하고 토산물을 조공하며 또 본국 지도를 바쳤다.

[해설]

명나라 초기의 빈번한 조공 관계와 아유타야 왕조 내부의 왕위 교체(우통 왕가에서 수판부리 왕가로의 이동 등)를 반영한다. 6족 거북은 기이한 동물로 바쳐졌다. 황후에게 따로 조공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외교 의례의 엄격함을 보여준다.

7년 사신 사리발이 와서 조공했다. 말하기를, 작년 배가 오저양에 머물다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떠밀려 해남(하이난)에 이르렀는데 관청의 구호에 힘입어 떠밀리고 남은 두로면, 강향, 소목 등 여러 물건이 아직 있어 바칩니다, 라고 하니 광동성 신하가 이를 보고했다. 황제가 그 표문이 없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이미 배가 뒤집혔다고 말했는데 토산물이 이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번국 상인일까 의심하여 명하여 물리치게 했다. 중서성과 예부 신하에게 타이르기를, 옛 제후는 천자에게 매년 한 번 소빙하고 3년마다 대빙했다. 구주 밖은 매 세대 한 번 조회하며 토산물을 바치는 것은 정성과 공경을 표할 뿐이다. 오직 고려는 자못 예악을 알므로 3년에 한 번 조공하게 했다. 다른 먼 나라, 예컨대 점성, 안남, 서양쇄리, 조와, 발니, 삼불제, 섬라곡, 진랍 등 여러 나라는 입공이 너무 잦아 수고와 비용이 너무 심하다. 지금 다시 그러할 필요 없이 그 여러 나라에 공문을 보내 알게 하라, 고 했다. 그러나 오는 자는 그치지 않았다. 그 세자 소문방왕 소록군응 또한 사신을 보내 황태자에게 전을 올리고 토산물을 조공했다. 명하여 그 사신을 인도하여 동궁(태자)을 조회하게 하고 연회를 베풀고 하사하여 보냈다. 8년 재차 입공했다. 그 옛 명대왕 세자 소패라국 또한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조공하니 왕의 사신과 같이 연회를 베풀고 하사했다.

[해설]

주원장이 지나치게 잦은 조공을 제한하려 했던 유명한 일화다. 조공은 명나라 황제의 권위를 세워주지만, 답례품과 체류 비용 등 경제적 부담도 컸기 때문이다. 또한 상인들이 조공 사절을 사칭하여 무역하려는 시도를 경계했다.

10년 소록군응이 그 부친의 명을 받들어 내조했다. 황제가 기뻐하여 예부원외랑 왕항 등에 명하여 조서와 도장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했는데, 글에 "섬라국왕지인"이라 했고 아울러 세자에게 의복과 폐백 및 여행 경비를 하사했다. 이로부터 그 나라는 조정의 명을 따랐고 비로소 섬라라 칭했다. 매년 한 번 조공하거나 혹은 일 년에 두 번 조공했다. 정통 연간 이후에는 혹은 수년에 한 번 조공했다.

[해설]

'섬라국왕'이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어 국명이 확정되었다. 이는 아유타야 왕조가 명나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6년 감합 문책 및 무늬 있는 비단, 자기를 진랍 등과 같이 하사했다. 20년 후추 1만 근, 소목 1만 근을 조공했다. 황제가 관리를 보내 후하게 보답했다. 당시 온주 백성 중 그 침향 등 여러 물건을 산 자가 있었는데 담당 관청이 '통번(오랑캐와 내통함)'으로 죄를 주어 기시(사형)에 해당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온주는 바로 섬라가 반드시 거치는 땅이니 그 왕래함으로 인하여 그것을 산 것은 통번이 아니다, 라고 하여 용서를 받았다. 21년 코끼리 30마리, 번인 종 60명을 조공했다. 22년 세자 소록군응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23년 소목, 후추, 강향 17만 근을 조공했다.

[해설]

대규모의 향료와 소목(염료) 무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해금 정책(바다를 막는 정책) 하에서도 조공 무역과 관련된 민간의 거래를 황제가 유연하게 허용해 준 사례가 등장한다.

28년 소록군응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 부친의 상을 알렸다. 환관 조달 등에게 명하여 가서 제사 지내게 하고 칙서로 세자에게 왕위를 잇게 하며 하사함에 더함이 있었다. 타이르기를, 짐이 즉위한 이래 사신에게 명하여 국경을 나가 사방을 두루 다니게 하니 발이 그 땅을 밟은 곳이 36국이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곳이 31국이라 풍속이 서로 다르다. 큰 나라가 18이요 작은 나라가 149인데 지금과 비교하면 섬라가 가장 가깝다. 요사이 사신이 이르러 너의 선왕이 이미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 왕이 선왕의 기업을 이어 나라에 도가 있으니 신민이 기뻐한다. 이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 명을 내리니 왕은 법도를 잃지 말고 향락에 빠지지 말며 선열을 빛내라. 공경할지어다, 라고 했다. 성조(영락제)가 즉위하여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타일렀다. 영락 원년 그 왕 소록군응에게 다라체자타뉴 도금 은도장을 하사하니 그 왕이 즉시 사신을 보내 은혜에 사례했다. 6월 고황제(주원장)의 존시를 올리자 관리를 보내 조서를 반포하고 하사품이 있었다. 8월 복명하여 급사중 왕철, 행인 성무가 그 왕에게 비단을 하사했다. 9월 환관 이흥 등에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가서 그 왕을 위로하고 하사하게 하니 그 문무 신하들에게도 아울러 하사품이 있었다.

[해설]

홍무제 말기에서 영락제 초기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홍무제는 섬라를 가장 가까운 우방 중 하나로 인식했다. 영락제 또한 즉위 후 적극적인 우대 정책을 펼쳤다.

2년 어떤 번선(외국 배)이 복건 해안에 표류해 왔는데 따져 물으니 바로 섬라가 유구(류큐/오키나와)와 수호하여 통하던 자들이었다. 담당 관청이 그 화물을 압류하여 보고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두 나라가 수호하는 것은 심히 아름다운 일이다. 불행히 바람을 만났으니 마땅히 불쌍히 여기고 아껴야지 어찌 인하여 이익을 취하겠는가. 담당 관청은 배를 고치고 식량을 주어 바람이 편안하기를 기다려 유구로 보내라, 고 했다. 이달 그 왕이 황제가 새서를 내려 위로하고 하사한 것으로 인해 사신을 보내 와서 사례하고 토산물을 조공했다. 하사품을 더하여 주고 아울러 열녀전 100권을 하사했다. 사신이 도량형을 반포하여 나라의 영원한 법식으로 삼기를 청하니 이를 따랐다.

[해설]

섬라와 유구(류큐) 사이의 해상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명나라는 이를 장려하고 표류민을 보호했다. <열녀전>과 도량형을 하사한 것은 유교적 문명과 표준을 전파하려는 의도이다.

이에 앞서 점성 조공 사신이 돌아가다가 바람에 그 배가 팽형(파항)에 표류했는데 섬라가 그 사신을 빼앗아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수문답랄(수마트라) 및 만랄가(말라카) 또한 섬라가 강함을 믿고 병사를 일으켜 천조가 하사한 인신과 고명을 빼앗았다고 호소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꾸짖기를, 점성, 수문답랄, 만랄가는 너희와 함께 조정을 명을 받았는데 어찌 위세를 부려 그 조공 사신을 구속하고 고명과 인신을 빼앗는가. 하늘에는 드러난 도가 있어 선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안남의 여 적을 거울로 삼을 만하다. 즉시 점성 사신을 돌려보내고 수문답랄, 만랄가의 인신과 고명을 돌려주라. 이제부터 법을 받들고 이치를 따르며 국경을 보전하고 이웃과 화목하면 영원히 태평의 복을 누릴 것이다, 라고 했다. 당시 섬라가 보낸 조공 사신이 바람을 잃고 안남에 표류하여 모두 여 적에게 피살되고 오직 패흑 한 사람만 남았다. 후에 관군이 안남을 정벌할 때 그를 얻어 돌아왔다. 황제가 불쌍히 여겨 6년 8월 환관 장원에게 명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에게 폐백을 하사하며 피살된 자의 집을 후하게 구휼하게 했다. 9월 환관 정화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니 그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고 전의 죄를 사죄했다.

[해설]

아유타야 왕조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말라카, 수마트라, 참파 등 주변국과 갈등을 빚었다. 명 황제는 이를 엄중히 경고하며 질서 유지를 요구했다. 안남에 표류했다가 살아남은 사신의 귀환과 정화의 방문이 이어진다.

7년 사신이 와서 인효황후를 제사 지내니 환관에게 명하여 기연(신주 앞)에 고하게 했다. 당시 간사한 백성 하팔관 등이 섬라로 도망쳐 들어가니 황제가 사신에게 명하여 돌아가 그 주인에게 고하여 도망자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 왕이 즉시 명을 받들어 사신을 보내 말과 토산물을 조공하고 아울러 하팔관 등을 송환하니 장원에게 명하여 칙서와 폐백을 가지고 가서 장려하게 했다. 10년 환관 홍보 등에게 명하여 가서 폐백을 하사했다.

[해설]

범죄자가 해외로 도피했을 때 송환을 요구하는 범죄인 인도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는 명나라의 행정력이 해외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14년 왕자 삼뢰파라마찰적라이가 사신을 보내 부친의 상을 알렸다. 환관 곽문에게 명하여 가서 제사 지내고 따로 관리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그 아들을 봉하여 왕으로 삼고 소금(흰 비단), 소로를 하사하니 뒤따라 사신을 보내 은혜에 사례했다. 17년 환관 양민 등에게 명하여 호송해 돌려보냈다. 섬라가 만랄가를 침략함으로 인해 사신을 보내 책망하고 화목하게 하니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선덕 8년 왕 실리마하라이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해설]

섬라와 말라카의 갈등이 지속되고 명나라는 중재자 역할을 계속한다.

처음에 그 나라 배신 내삼탁 등이 조공 배가 점성 신주항에 머물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 다 약탈당했다. 정통 원년 내삼탁이 몰래 작은 배에 붙어 경사에 와서 점성의 약탈 상황을 호소했다. 황제가 점성 사신을 불러 서로 따져 묻게 했다. 사신이 대답하지 못하자 이에 점성왕에게 칙서를 내려 약탈한 인물(사람과 물건)을 다 돌려주게 했다. 이윽고 점성이 예부에 자문을 보내 말하기를, 본국이 재작년 사신을 보내 수문달나(수마트라)에 갈 때 또한 섬라 적인에게 약탈당했으니 반드시 섬라가 먼저 약탈한 것을 돌려주어야 본국이 감히 돌려주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3년 섬라 조공 사신이 또 이르자 칙서를 내려 이 뜻을 깨우치고 속히 점성의 인물을 돌려주게 했다. 11년 왕 사리파라마나야지랄이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해설]

섬라와 참파가 서로 조공선을 약탈하며 보복하는 상황이다. 명나라 조정에서 두 나라 사신을 대질 심문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경태 4년 급사중 유수, 행인 유태에게 명하여 그 죽은 왕 파라마찰적라이를 제사 지내고 그 아들 파라란미손랄을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천순 원년 그 조공 사신에게 삽화금대를 하사했다. 6년 왕 패랄람라자직파지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해설]

지속적인 책봉과 조공 기록이다.

성화 9년 조공 사신이 말하기를 천순 원년에 반포한 감합이 벌레에게 먹혔으니 고쳐서 발급해달라고 비니 이를 따랐다. 17년 조공 사신이 돌아가다가 도중에 자녀를 몰래 사고 또 사적인 소금을 많이 실어서 관리를 보내 여러 번국을 경계하고 타일렀다. 이에 앞서 정주 사람 사문빈이 소금을 팔러 바다로 나갔다가 그 나라에 표류해 들어갔는데 벼슬이 곤악에 이르렀으니 천조의 학사와 같았다. 후에 사신으로 충원되어 내조했는데 금지된 물건을 무역하다 일이 발각되어 관리에게 넘겨졌다.

[해설]

사문빈이라는 중국인이 태국 관료(곤악-Khun Phraklang 등으로 추정)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온 사례다. 이는 당시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중국인들이 고위직에 오르거나 상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18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 부친의 상을 알렸다. 급사중 임소, 행인 요륭에게 명하여 가서 그 아들 국륭발랄약곤식랄유지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홍치 10년 입공했다. 당시 사이관(통역 관청)에 섬라의 번역관이 없어 내각 신하 서부 등이 광동에 공문을 보내 저 나라 언어와 문자에 능통한 자를 찾아 경사로 보내 대비하게 하자고 청하니 이를 따랐다. 정덕 4년 섬라 배가 광동에 표류해 온 것이 있었는데 시박 환관 웅선이 수신과 의논하여 그 물건에 세금을 매겨 군수품에 이바지했다. 일이 알려지자 조서를 내려 웅선이 망령되이 일을 주관했다고 배척하고 남경으로 철수시켰다. 10년 금엽표를 올리고 조공했는데 관 안에 그 글자를 아는 자가 없었다. 내각 신하 양저 등이 그 사신 한두 명을 선발하여 관에 머물며 익히게 하자고 청하니 허락한다고 답했다. 가정 원년 섬라, 점성 화물선이 광동에 이르렀다. 시박 환관 우영이 하인들을 풀어 사사로이 매매하다가 사형을 논함이 법률과 같았다. 32년 사신을 보내 흰 코끼리 및 토산물을 조공했는데 코끼리가 도중에 죽자 사신이 주보로 그 상아를 장식하고 금쟁반에 담아 꼬리와 아울러 와서 바쳤다. 황제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후하게 보냈다.

[해설]

명나라 중기, 태국어 통역관이 부족해 애를 먹는 상황이 묘사된다. 또한 환관들의 부패와 사적인 무역 개입이 문제가 되었다. 죽은 코끼리의 상아와 꼬리를 바친 일화는 조공에 대한 그들의 성의를 보여준다.

융경 연간에 그 이웃 나라 동만우가 혼인을 구했으나 얻지 못하자 부끄러워하고 노하여 대군을 일으켜 그 나라를 공격해 격파했다. 왕은 스스로 목매어 죽고 그 세자 및 천조가 하사한 도장을 노획하여 돌아갔다. 차자가 왕위를 이어 표문을 받들고 도장을 청하니 주었다. 이로부터 동만우에게 제압당했는데, 뒤를 이은 왕이 복수를 다짐했다. 만력 연간 적병이 다시 이르자 왕이 병사를 정돈하여 분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남은 무리가 밤에 도망쳤다. 섬라는 이로 말미암아 해상에서 웅비했다. 병사를 옮겨 진랍을 공격해 격파하고 그 왕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부터 해마다 병사를 써서 마침내 여러 나라에 패자가 되었다.

[해설]

여기서 '동만우(東蠻牛)'는 버마(미얀마)의 퉁구 왕조(Toungoo Dynasty)를 가리킨다. '동만우'는 퉁구의 음차로 보인다. 버마의 바인나웅(Bayinnaung) 왕이 아유타야를 침공하여 함락시킨 사건(1569년)을 묘사한다. 이후 나레수안 대왕이 등장하여 버마군을 격파하고 독립을 되찾으며, 캄보디아(진랍)까지 공격하여 동남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6년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20년 일본이 조선을 격파하자 섬라가 몰래 군대를 보내 일본을 직접 타격하여 그 뒤를 견제하겠다고 청했다. 중추 석성이 따르자고 의논했으나 양광 독신 소언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이에 그만두었다. 그 후 조공을 받듦이 끊이지 않았다. 숭정 16년에도 오히려 입공했다.

[해설]

임진왜란 당시 태국이 명나라에 일본의 배후를 치겠다고 제안한 유명한 일화다. 실제로 성사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명나라가 망하기 직전(숭정 16년, 1643년)까지 조공이 이어졌다.

그 나라는 둘레가 천 리이고 풍속은 굳세고 사나우며 수전에 익숙하다. 대장은 성철을 몸에 두르는데 칼과 화살이 들어가지 않는다. 성철이란 사람의 두개골이다. 왕은 쇄리 사람이다. 관직은 10등급으로 나뉜다.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이 있으면 모두 그 부인에게 결단받는다. 그 부인의 뜻과 도량이 실로 남자보다 낫다. 부인이 중국인과 사통하면 남편이 술을 차려 함께 마시고 태연히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 부인이 아름다워 중국인이 좋아하는 바가 되었다"라고 한다. 불교를 숭신하여 남녀가 많이 승려와 비구니가 되며 또한 암자에 거처하고 재계하고 계율을 받는다. 의복은 자못 중국과 유사하다. 부귀한 자는 더욱 부처를 공경하여 백금의 재산이 있으면 곧 그 절반을 보시한다. 기후가 바르지 않아 혹은 춥고 혹은 더우며 땅은 낮고 습하여 사람들은 모두 누각에 산다. 남녀는 상투를 틀고 흰 천으로 머리를 감싼다. 부귀한 자가 죽으면 수은을 그 입에 부어 장사 지낸다. 가난한 자는 해변으로 옮겨 두면 곧 까마귀 떼가 날아와 쪼아 먹는데 잠깐 사이에 다하면 가족이 그 뼈를 주워 소리 내어 울고 바다에 버리니 이를 조장이라 한다. 또한 승려를 초빙해 재를 설하고 부처에게 예경한다. 교역에는 바다 조개(카우리 조개)를 쓴다. 이해에 쓰지 않으면 나라에 반드시 큰 역병이 돈다. 그 조공품에는 코끼리, 상아, 서각, 공작 꼬리, 비취 깃털, 거북통, 6족 거북, 보석, 산호, 편뇌, 미뇌, 강뇌, 뇌유, 뇌시, 장미수, 완석, 정피, 아위, 자경, 등갈, 등황, 유황, 몰약, 오다니, 안식향, 나곡향, 속향, 단향, 황숙향, 강진향, 유향, 수향, 목향, 정향, 오향, 후추, 소목, 육두구, 백두구, 필발, 오목, 대풍자 및 살합랄, 서양의 여러 포목이 있다. 그 나라에 삼보묘가 있어 환관 정화를 제사 지낸다.

[해설]

태국의 풍습, 종교, 장례(수은 사용, 조장), 화폐(조개), 특산물 등을 나열한다. '성철(두개골 부적)'이나 부인에게 의사결정을 맡기는 풍습, 중국인과의 관계에 대한 개방성 등이 묘사된다. '삼보묘'는 정화(삼보태감)를 모시는 사당으로, 태국 내 화교 사회와 정화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조와(자바/인도네시아)

조와는 점성의 서남쪽에 있다.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때 사신 맹기를 보냈는데 얼굴에 자자를 당했다. 세조가 대군을 일으켜 정벌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해설]

조와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마자파힛(Majapahit) 제국을 주로 가리킨다. 원나라 사신 맹기가 얼굴에 상처를 입은 모욕을 당하자 쿠빌라이 칸이 원정군을 보냈던 역사를 언급한다.

홍무 2년 태조가 사신을 보내 즉위 조서로써 그 나라를 타일렀다. 그 사신이 먼저 원나라에 조공을 받들고 갔다가 돌아오다 복건에 이르러 원나라가 망하자 인하여 경사에 들어와 살았다. 태조가 다시 사신을 보내 그를 호송해 돌려보내고 또 대통력을 하사했다. 3년 사막(북원)을 평정한 것으로써 조서를 반포해 말하기를, 예로부터 천하의 주인이 된 자는 천지가 덮어 싣고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면 멀거나 가깝거나 인류라면 누구나 그 땅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살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중국이 편안해야 사방 만국이 순종하고 붙는다. 요사이 원나라 임금 타환첩목이(순제)는 황음하고 혼미하고 나약하여 뜻이 백성에게 있지 않았다. 천하의 영웅이 강토를 분열했다. 짐이 생민의 도탄을 불쌍히 여겨 의병을 일으켜 난략을 제거했다. 천하의 군민이 함께 짐을 존대하여 제위에 거하게 하니 국호를 대명이라 하고 건원하여 홍무라 했다. 재작년 원나라 도읍을 극취하고 사방이 평정되었다. 점성, 안남, 고려 등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조공했다. 금년 장수를 보내 북쪽을 정벌하여 비로소 원나라 임금이 이미 죽은 것을 알았고 그 손자 매적리팔라를 잡아 숭례후로 봉했다. 짐은 전대 제왕을 모방하여 천하를 다스리되 오직 중외의 인민이 각기 그 처소를 편안히 하기를 바랄 뿐이다. 또 여러 번국이 먼 지방에 치우쳐 있어 짐의 뜻을 다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고로 사신을 보내 가서 타일러 모두 듣고 알게 하노라, 했다. 9월 그 왕 석리팔달라포가 사신을 보내 금엽표를 받들고 내조하여 토산물을 조공하니 연회를 베풀고 하사함이 예와 같았다.

[해설]

명나라 건국과 원나라 멸망의 정당성을 알리는 조서를 자바에 보냈다. '석리팔달라포'는 하얌 우룩(Hayam Wuruk) 왕의 칭호인 'Sri Baduga Prabhu' 등을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마자파힛의 전성기였다.

5년 또 사신을 보내 조정 사신 상극경을 따라와 조공하고, 원나라가 주었던 선칙 3도를 올렸다. 8년 또 조공했다. 10년 왕 팔달나파나무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그 나라에는 또 동, 서 두 왕이 있어 동번왕 물원로망결, 서번왕 물로파무가 각기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천자가 그 예의 뜻이 성실하지 않다 하여 조서를 내려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얼마 후 풀어서 돌려보냈다. 12년 왕 팔달나파나무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듬해 또 조공했다. 당시 사신을 보내 삼불제 왕에게 인수를 하사했는데 조와가 유인하여 그를 죽였다. 천자가 노하여 그 사신을 한 달 넘게 억류하여 장차 죄를 주려다가 이윽고 돌려보내며 칙서를 내려 꾸짖었다. 14년 사신을 보내 흑노 300명 및 다른 토산물을 조공했다. 이듬해 또 흑노 남녀 100명, 큰 구슬 8알, 후추 7만 5천 근을 조공했다. 26년 재차 조공했다. 이듬해 또 조공했다.

[해설]

마자파힛 제국 말기의 분열(동왕과 서왕)을 보여준다. 동왕과 서왕의 대립은 '파레그레그 전쟁(Paregreg War)'이라 불리는 내전을 의미한다. 또한 삼불제(팔렘방)에 대한 명나라의 책봉을 자바가 방해하고 사신을 죽인 사건은 자바가 이 지역의 패권국임을 과시한 것이다. 흑노(노예)와 후추가 주요 조공품이었다.

성조(영락제)가 즉위하여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타일렀다. 영락 원년 또 부사 문양보, 행인 영선을 보내 그 왕에게 융, 면, 금을 섞어 짠 무늬 있는 비단, 사로를 하사했다. 사신이 이미 떠났는데 그 서왕 도마판이 사신을 보내 입하(하례)하여, 복명하여 환관 마빈 등을 시켜 도금 은도장을 하사했다. 서왕이 사신을 보내 도장 하사에 사례하고 토산물을 조공했다. 동왕 패령달합 또한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도장을 청하여 관리를 보내 하사하게 했다. 이후 두 왕이 나란히 조공했다.

[해설]

영락제는 동왕과 서왕 모두에게 도장을 주어 이중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3년 환관 정화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듬해 서왕이 동왕과 전쟁을 하여 동왕이 싸움에 패하고 나라가 멸망했다. 마침 조정 사신이 동왕의 땅을 지나는데 부하 병졸이 저자에 들어갔다가 서왕의 나라 사람들에게 피살되니 무릇 170명이었다. 서왕이 두려워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호되게 꾸짖고 황금 6만 냥을 바쳐 속죄하게 했다. 6년 다시 정화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서왕이 황금 1만 냥을 바치니 예관이 바친 수가 부족하다 하여 그 사신을 옥에 가두자고 청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짐이 먼 사람에게 그 죄를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일 뿐 어찌 그 금을 이롭게 여기겠는가? 하고 다 탕감해 주었다. 이후 매년 한 번 조공하거나 혹은 격년, 혹은 일 년에 수차례 조공했다. 환관 오빈, 정화가 전후로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해설]

정화의 원정대원 170명이 자바 내전(파레그레그 전쟁)에 휘말려 서왕(위크라마와르다나) 군대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명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결국 탕감해주어 대국의 아량을 보였다. 이를 통해 자바를 확실히 복속시키려 했다.

당시 구항(팔렘방) 땅에 조와가 침략해 점거한 곳이 있었는데 만랄가 국왕이 조정의 명을 사칭해 그것을 요구했다. 황제가 이에 칙서를 하사해 말하기를, 전 환관 윤경이 돌아와 말하기를 왕이 칙사를 공손히 대우함이 더함은 있어도 바뀜은 없다고 했다. 요사이 들으니 만랄가국이 구항의 땅을 요구하여 왕이 심히 의심하고 두려워한다고 한다. 짐은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니 만약 과연 허락했다면 반드시 칙유가 있었을 것인데 왕은 어찌 의심하는가. 소인의 뜬소문을 삼가 가볍게 듣지 말라, 고 했다. 13년 그 왕이 양유서사로 이름을 고치고 사신을 보내 은혜에 사례하고 토산물을 조공했다. 당시 조정 사신이 데리고 간 병졸 중에 바람을 만나 반졸아국에 표류해 간 자가 있었는데 조와 사람 진반이 이를 듣고 금을 써서 속환하여 왕의 처소로 돌려보냈다. 16년 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인하여 여러 병졸을 송환했다. 황제가 가상히 여겨 칙서를 내려 왕을 장려하고 아울러 진반에게 넉넉히 하사했다. 이로부터 조공 사신이 대개 매년 한 번 이르렀다.

[해설]

말라카와의 영토 분쟁에서 명나라가 자바를 안심시키는 내용이다. '양유서사'는 자바 왕의 새로운 칭호 혹은 이름이다.

정통 원년 사신 마용량이 말하기를, 먼저 팔제(직책명인 듯)를 맡아 내조하여 은대를 하사받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금 아열이 되었는데 품계가 4품이니 금대를 하사해 주십시오, 하니 이를 따랐다. 윤6월 고리, 수문답랄, 석란산, 가지, 천방, 가이륵, 아단, 홀루모스, 조법아, 감파리, 진랍 사신을 보내 조와 사신 곽신 등과 함께 가게 했다. 조와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왕이 우리 선조 때부터 직분을 닦음이 게으르지 않았다. 짐이 지금 즉위하여 다시 사신을 보내 내조하니 뜻이 성실함을 갖추어 다 알겠다. 선덕 때 고리 등 11국이 와서 조공했는데 지금 왕의 사신이 돌아감으로 인해 여러 사신으로 하여금 함께 가게 한다. 왕은 뜻을 더하여 어루만지고 나누어 보내 귀국하게 하여 짐이 먼 곳을 품는 정성에 부합하게 하라, 고 했다. 5년 사신이 돌아오다가 바람을 만나 56명이 물에 빠져 죽고 산 자가 83인이었는데 그대로 광동으로 돌아왔다. 담당 관청에 명하여 식량을 주고 편한 배를 기다려 붙여 보내게 했다.

[해설]

조와가 남해 원정의 허브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여러 나라 사신들이 조와를 경유하여 귀국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8년 광동 참정 장염이 말하기를, 조와가 조공함이 빈번하고 잦아 접대 비용이 번거로우니 중국을 피폐하게 하여 먼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 사신이 돌아갈 때 칙서를 하사해 말하기를, 해외 여러 나라는 모두 3년에 한 번 조공한다. 왕 또한 마땅히 군민을 체휼하여 한결같이 이 제도를 따르라, 고 했다. 11년 다시 세 번 조공했고 뒤에는 이에 점차 드물어졌다.

[해설]

다시 조공 횟수 제한(3년 1공)이 언급된다.

경태 3년 왕 파라무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천순 4년 왕 도마반이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사신이 돌아가다 안경에 이르러 술주정하며 입공하던 번승(승려)과 싸워 승려 죽은 자가 6명이었다. 예관이 반송하던 행인의 죄를 다스리자고 청했으나, 사신은 칙서로 국왕이 스스로 다스리게 하니 이를 따랐다. 성화 원년 입공했다. 홍치 12년 조공 사신이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겨우 통사 한 배만 광동에 도달했다. 예관이 청하여 담당 관청에 칙서를 내려 헤아려 하사품을 주어 돌려보내고 그 조공품은 그대로 경사로 올리게 하니, 제(황제의 재가)가 옳다고 했다. 이로부터 조공 사신이 드물게 이르렀다.

[해설]

사신들의 난동 사건과 해난 사고 등을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중기로 갈수록 조공 관계가 소원해진다.

그 나라는 점성과 가까워 20주야면 이를 수 있다. 원나라 군대가 서정(자바 원정)할 때 지원 29년 12월에 천주를 출발하여 이듬해 정월에 즉 그 나라에 도착했으니 거리가 겨우 한 달 남짓이다. 선덕 7년 입공했는데 표문에 "1376년"이라 썼으니 대개 한 선제 원강 원년이 바로 그 건국의 시초이다. 땅은 넓고 사람이 조밀하다. 성품은 흉포하고 사나워 남자는 젊으나 늙으나 귀하나 천하나 모두 칼을 차고 조금만 거슬리면 문득 서로 해치므로 그 갑병이 여러 번국 중 최고이다. 글자는 쇄리와 유사하고 종이와 붓이 없으며 교장 잎에 새긴다. 기후는 항상 여름과 같고 벼는 일 년에 두 번 여문다. 책상이나 의자, 숟가락, 젓가락이 없다. 사람에게 세 종류가 있다. 중국인으로 떠돌아다니다 사는 자는 복식과 음식이 곱고 화려하다. 다른 나라 상인으로 오래 산 자 또한 우아하고 깨끗함을 숭상한다. 그 본국 사람이 가장 더러운데 뱀, 개미, 벌레, 지렁이 먹기를 좋아하고 개와 함께 자고 먹으며 형상은 검고 원숭이 머리에 맨발이다. 귀신 도를 숭신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3일만 피하면 곧 죄를 면한다. 부모가 죽으면 들어서 들에 이르고 개를 풀어 먹게 한다. 다 먹지 않으면 크게 슬퍼하며 그 나머지를 태운다. 처첩은 많이 불타 순장된다.

[해설]

마자파힛의 강력한 군사력(크리스 단검 착용 풍습)과 사회상(중국인, 외국 상인, 원주민의 구분)을 묘사한다. '1376년'은 자바의 사카(Saka) 기원을 쓴 것인데 명나라가 이를 한나라 연호로 오해하여 해석한 부분이다. 장례 풍습(개에게 먹이거나 화장, 순장)도 기록되어 있다.

그 나라 일명은 포가룡이고 또 하항이라 하며 순탑이라고도 한다. 만력 때 홍모번(네덜란드)이 대간 동쪽에 토고(창고/요새)를 쌓고 불랑기(포르투갈/스페인)가 대간 서쪽에 쌓아 해마다 호시(무역)했다. 중국 상인과 여행객 또한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그 나라에 신촌이 있어 가장 부유하다고 일컬어진다. 중화 및 여러 번국 상선이 그 땅에 모여들고 보화가 가득 넘친다. 그 마을 주인은 곧 광동 사람인데 영락 9년 스스로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토산물을 조공했다.

[해설]

'포가룡'은 페칼롱간(Pekalongan) 등으로 추정되나 명확지 않다. '하항(바람/Bantam)', '순탑(수 nda/Sunda Kelapa)' 등 자바 서부의 항구 도시들이 언급된다. '홍모번(네덜란드)'과 '불랑기(포르투갈)'의 등장은 대항해시대 서양 세력의 진출을 보여준다. '신촌(그레식/Gresik)'은 중국인들이 주도권을 잡은 무역항으로 묘사된다.

사파

사파는 옛날에는 사파달이라 했다. 송나라 원가 연간에 비로소 중국에 조회했다. 당나라 때는 하릉이라 했고 또 사파라 했으며 그 왕은 사파성에 거처했다. 송나라 때는 사파라 했으며 모두 입공했다. 홍무 11년 그 왕 마나타남이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토산물을 조공했는데 그 후 다시는 이르지 않았다. 혹은 조와가 곧 사파라고 한다. 그러나 <원사 조와전>에는 말하지 않았고, 또 "그 풍속, 물산을 상고할 바가 없다"라고 했다. 태조 때 두 나라가 동시에 입공했고 그 왕의 이름이 같지 않다. 혹 본래 두 나라였는데 그 후 조와에게 멸망당했는지도 모르나 상고할 수 없다.

[해설]

사파(Shepo)는 역사적으로 자바(Java)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Yavadvipa -> Shepo)일 가능성이 높으나, 명나라 기록자들은 이를 별개의 나라로 혼동하거나 자바 섬 내의 다른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릉(Kalingga) 등 자바의 고대 왕국들과 연결 짓고 있다.

소길단(수카다나)

소길단은 조와의 속국인데 후에 와전되어 사길항이 되었다. 나라는 산속에 있고 겨우 몇 개의 촌락이다. 추장은 길력석에 산다. 그 물이 솟구쳐 배를 댈 수 없다. 상선은 다만 요동으로 가는데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나아가 무역한다. 그 우방으로 사로와 및 저만이 있다. 저만은 도둑이 많아 중국인이 드물게 이른다.

[해설]

소길단(Sukadana)은 보르네오(칼리만탄) 서부의 항구이다. 조와(마자파힛)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접리

접리는 조와와 가깝다. 영락 3년 사신을 보내 그(조와) 사신에 붙어 와서 조공했다. 그 땅은 불교를 숭상하고 풍속은 순박하여 송사가 적으며 물산은 심히 적다.

[해설]

접리(Deli)는 수마트라 북부 혹은 자바 인근의 소국으로 추정된다.

일라하치

일라하치는 조와와 가깝다. 영락 3년 사신을 보내 그 사신에 붙어 입공했다. 나라는 작고 심고 가꾸는 것을 알며 도적이 없다. 또한 불교를 숭상하며 생산되는 것은 소목, 후추뿐이다.

[해설]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나 자바의 영향권에 있는 소국이다.

삼불제(스리비자야/팔렘방)

삼불제는 옛 이름이 간타리이다. 유송 효무제 때 항상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받들었다. 양나라 무제 때 자주 이르렀다. 송나라 때는 삼불제라 이름했고 조공을 닦음이 끊이지 않았다.

[해설]

삼불제(Srivijaya)는 수마트라섬 팔렘방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해상 제국이다. 명나라 때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홍무 3년 태조가 행인 조술을 보내 조서로 그 나라를 타일렀다. 이듬해 그 왕 마합랄찰팔라복이 사신을 보내 금엽표를 받들고 따라와서 검은 곰, 화계(칠면조 종류 혹은 화식조), 공작, 오색 앵무새, 여러 향, 필포, 두로피 등 여러 물건을 입공했다. 조서를 내려 대통력 및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호부가 말하기를 그 화물선이 천주에 이르니 마땅히 세금을 징수해야 합니다, 하니 징수하지 말라고 명했다.

6년 왕 달마사나아자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 표문 하나로 이듬해 정월 초하루를 하례했다. 당시 그 나라에 세 왕이 있었다. 7년 왕 마나합보림방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8년 정월 다시 조공했다. 9월 왕 승가렬우란이 사신을 보내 불룸국(비잔틴/로마 관련이나 여기서는 서역)을 불러 타일러 오던 조정 사신을 따라 입공했다.

[해설]

'마합랄찰...'은 마하라자(Maharaja) 칭호를 의미한다. 당시 삼불제는 국력이 약화되어 여러 세력(세 왕)으로 분열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9년 달마사나아자가 죽고 아들 마나자무리가 이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코뿔소, 검은 곰, 화계, 흰 원숭이, 붉은 가장자리 앵무새, 거북통 및 정향, 미뇌 등 여러 물건을 조공했다. 사신이 말하기를, 후사가 감히 멋대로 서지 못하여 조정에 명을 청합니다, 라고 했다. 천자가 그 의리를 가상히 여겨 사신에게 명하여 도장을 가지고 가서 삼불제 국왕으로 봉하게 했다. 당시 조와가 강하여 이미 위력으로 삼불제를 복종시켜 속국으로 부렸는데, 천조가 국왕으로 봉하여 자기들과 동등하게 됨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사람을 보내 유인하여 조정 사신을 맞아 죽였다. 천자 또한 능히 죄를 묻지 못했고 그 나라는 더욱 쇠하여 조공 사신이 마침내 끊어졌다.

[해설]

마자파힛(조와)이 삼불제를 정복하는 과정이다. 명나라가 삼불제 왕을 책봉하려 하자 마자파힛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면서까지 이를 저지했고, 명나라는 이에 대해 군사적 보복을 하지 못했다. 이로써 삼불제는 멸망의 길을 걷고 마자파힛의 영역이 되었다.

30년 예관이 여러 번국이 오랫동안 조공을 결함을 들어 주상해 알렸다. 황제가 말하기를, 홍무 초에 여러 번국의 조공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요사이 안남, 점성, 진랍, 섬라, 조와, 대유구, 삼불제, 발니, 팽형, 백화, 수문답랄... 서양 등 30국이, 호유용이 난을 일으킴으로 인해 삼불제가 이에 간첩을 내어 우리 사신이 그곳에 이른 것을 속였고, 조와왕이 이를 알고 사람을 보내 경계하고 타일러 예로써 조정에 돌려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상인의 여행이 막히고 여러 나라의 뜻이 통하지 않았다. 오직 안남, 점성, 진랍, 섬라, 대유구는 조공함이 예전과 같고 대유구는 또 자제를 보내 입학시켰다. 무릇 여러 번국 사신이 오는 자는 다 예로써 대우했다. 내가 여러 나라를 봄이 박하지 않은데 여러 나라의 마음은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지금 조와에 사신을 보내려 하나 삼불제가 도중에 막을까 두렵다. 듣자니 삼불제는 본래 조와의 속국이라 하니 짐의 뜻을 기술하여 섬라에 자문을 보내 조와에 전달하게 하라, 고 했다. 이에 부신이 공문을 보내 말하기를, 천지가 있은 이래로 곧 군신 상하의 나눔과 중국과 사방 오랑캐의 구분이 있었다. 우리 조정이 통일한 초기에 해외 여러 번국이 와서 누리지 않음이 없었다. 어찌 뜻했으랴 호유용이 모반하자 삼불제가 드디어 딴마음을 품을 줄을. 우리의 믿을만한 사신을 속이고 멋대로 교활한 짓을 행했다. 우리 성천자께서는 한결같이 인의로써 여러 번국을 대우하시는데 어찌 여러 번국은 감히 큰 은혜를 배반하고 군신의 예의를 잃는가? 만일 천자께서 진노하시어 편장 하나를 보내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손히 천벌을 행한다면 쉽기가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너희 여러 번국은 어찌하여 심히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 성천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안남, 점성, 진랍, 섬라, 대유구는 다 신하의 직분을 닦는데 오직 삼불제가 우리의 성교를 막는다. 저들이 조그마한 나라로서 감히 굴강하여 복종하지 않으니 스스로 멸망을 취하는구나! 하셨다. 너 섬라는 신하의 절개를 삼가 지키니 천조가 돌보고 예우함이 더함이 있다. 조와에 전달하여 대의로써 삼불제를 타일러 고유하게 하라. 진실로 허물을 반성하고 선을 쫓으면 예로 대우함이 처음과 같을 것이다, 라고 했다. 당시 조와가 이미 삼불제를 격파하고 그 나라를 점거하여 이름을 구항이라 고쳤다. 삼불제는 마침내 망하고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 조와 또한 능히 그 땅을 다 소유하지 못했다. 중국인으로 떠돌아다니다 사는 자들이 왕왕 일어나 그곳을 점거했다. 양도명이라는 자가 있어 광주 남해현 사람인데 오랫동안 그 나라에 살았고 민, 월(복건, 광동)의 군민으로 바다를 건너 그를 따르는 자가 수천 집이었다. 도명을 추대해 우두머리로 삼으니 한 지방을 웅시했다. 마침 지휘 손현이 해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아들을 만나 끼고 함께 왔다.

[해설]

명나라가 삼불제의 배반(사신 살해 등)을 비난하며 섬라와 조와를 통해 압박하려 했으나, 이미 삼불제는 멸망하고 그 지역(구항/팔렘방)은 무주공산이 되어 있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중국인 해상 세력(양도명 등)이었다. 이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왕국을 형성했다.

영락 3년 성조(영락제)가 행인 담승수가 도명과 동향 사람이라 하여 천호 양신 등과 함께 칙서를 가지고 가서 그를 부르게 했다. 도명과 그 무리 정백가가 따라 입조하여 토산물을 조공하고 하사품을 받고 돌아갔다.

[해설]

영락제는 무력 토벌 대신 회유책을 써서 양도명을 입조시켰다.

4년 구항 두목 진조의가 아들 사량을 보내고, 도명은 조카 관정을 보내 아울러 내조했다. 조의 또한 광동 사람인데 비록 조공했으나 해상에서 도둑질하여 조공 사신이 오가는 자들이 괴로워했다. 5년 정화가 서양에서 돌아올 때 사람을 보내 그를 타일렀다. 조의가 거짓 항복하고 몰래 요격하여 겁탈할 것을 꾀했다. 시진이라는 자가 있어 정화에게 고했다. 조의가 습격해 오자 사로잡혀 조정에 바쳐져 복주(형벌 받아 죽음)되었다. 당시 진경이 마침 사위 구언성을 보내 조공하니 구항선위사를 설치하고 진경을 사신(책임자)으로 삼아 고명과 도장 및 관대를 주었다. 이로부터 누차 입공했다. 그러나 진경은 비록 조정의 명을 받았으나 여전히 조와에 복속했으며 그 땅은 협소하여 옛날의 삼불제가 아니었다. 22년 진경의 아들 제손이 부친의 부고를 알리고 직을 잇기를 비니 허락했다. 홍희 원년 사신을 보내 입공하고 옛 도장이 불에 타 훼손되었다고 호소하니 황제가 명하여 다시 주게 했다. 그 후 조공이 점차 드물어졌다.

[해설]

악명 높은 해적왕 진조의(Chen Zuyi)의 토벌과 구항선위사(Old Port Pacification Commission) 설치 과정이다. 정화의 함대가 진조의를 격파함으로써 말라카 해협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 후임으로 시진(시진경)을 임명하여 명나라의 직할령에 준하는 선위사를 설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자바(마자파힛)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가정 말년 광동의 큰 도적 장련이 난을 일으켰는데 관군이 이미 이겨서 잡았다고 보고했다. 만력 5년 상인이 구항에 간 자가 장련이 가게를 늘어놓고 번선(외국 배)의 우두머리가 되어 장주, 천주 사람들이 많이 그를 따르니 마치 중국의 시박관 같더라고 했다.

[해설]

명나라 말기, 또 다른 중국인 해적/반란자 장련이 팔렘방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명나라 조정은 그를 잡았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해외로 도망쳐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땅은 여러 번국의 요충지로 조와의 서쪽에 있는데 순풍이면 8주야에 이를 수 있다. 15주를 관할하며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에 알맞다. 속담에 "일 년 벼를 심으면 3년은 금이 생긴다"라고 하니 수확이 성하고 무역하는 금이 많음을 말한다. 풍속은 부유하고 음란함을 좋아한다. 수전에 익숙하여 이웃 나라가 두려워한다. 땅에 물이 많아 오직 두목만 육지에 살고 서민은 모두 물에 산다. 뗏목을 엮어 집을 짓고 말뚝에 묶어 놓는다. 물이 불어나면 뗏목이 뜨니 빠질 근심이 없다. 옮기고자 하면 말뚝을 뽑아 가니 재력이 들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그 윗사람을 칭하여 잠비라고 하니 국군과 같다. 후에 대추장이 거처하는 곳을 즉 잠비국이라 부르고 옛 도읍을 고쳐 구항이라 했다. 처음에는 본래 부유했으나 조와에게 격파되어 멸망한 후로는 삭막해져 상선이 드물게 이르렀다. 그 밖의 풍속, 물산은 <송사>에 상세히 갖추어져 있다.

[해설]

팔렘방(구항)의 풍요로움과 수상 가옥 생활상을 묘사한다. '잠비(Jambi)'는 팔렘방 북쪽의 또 다른 항구 도시이자 왕국으로, 나중에 이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자파힛의 정복 이후 과거의 영광을 잃고 쇠락했음을 서술하며 끝맺는다.

 


명사(明史) 권325 열전 제213 외국6

발니(浡泥)

발니는 송나라 태종 때 처음으로 중국과 통교하였다. 홍무 3년(1370년) 8월, 어사 장경지와 복건행성 도사 심질에게 명하여 사신으로 가게 했다. 천주에서 항해하여 반년 만에 사파(자바)에 도착했고, 다시 한 달을 넘겨 그 나라에 도착했다. 왕 마합모사는 오만하여 예를 갖추지 않았는데, 심질이 이를 꾸짖자 비로소 자리에서 내려와 절을 하고 조서를 받았다. 당시 그 나라는 소록(술루)의 침략을 받아 매우 쇠퇴하고 소모된 상태였다. 왕은 가난을 핑계로 3년 후에 조공하겠다고 했다. 심질이 대의로써 깨우치니 왕이 이내 허락했으나, 그 나라는 본래 사파에 속해 있었으므로 사파 사람들이 이간질하여 왕의 뜻이 중도에 꺾였다. 심질이 힐난하여 말하기를 "사파는 오랫동안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쳐왔다. 너희는 사파는 두려워하면서 어찌 천조(명나라)는 두려워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이에 왕은 사신을 보내 표문과 전문을 받들게 하고, 학정(투구 부리), 생대모(거북 등껍질), 공작, 매화대편용뇌, 미용뇌, 서양포, 강진향 등 여러 향을 바쳤다. 8월에 장경지 등을 따라 입조했다. 표문은 금을 사용하고 전문은 은을 사용했으며, 글자는 회골(위구르) 문자와 비슷했는데 모두 새겨서 올렸다. 황제가 기뻐하며 연회를 열고 하사품을 매우 후하게 주었다. 8년에는 그 나라의 산천을 복건 산천의 다음에 붙여 제사 지내게 했다.

[해설]

발니(浡泥)는 오늘날의 브루나이이다. 당시 브루나이는 필리핀 남부의 술루 술탄국과 자바의 마자파힛 제국 사이에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명나라 초기, 중국 중심의 조공 무역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합모사는 브루나이의 1대 술탄인 무하마드 샤로 추정된다.

영락 3년(1405년) 겨울, 그 나라 왕 마나야가나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관리를 보내 국왕으로 봉하고 도장과 고명, 칙부, 감합, 비단, 채색 폐백을 하사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왕비와 동생, 여동생, 자녀, 배신(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조회했다. 복건에 머물자 지방관이 이를 보고했다. 중관(환관)을 보내 연회를 열고 위로했으며, 지나가는 주와 현에서도 모두 연회를 열었다. 6년 8월에 도성에 들어와 알현하니 황제가 그 노고를 치하했다. 왕이 무릎 꿇고 말하기를 "폐하께서 하늘의 보배로운 명을 받아 만방을 통일하시니, 신은 멀리 바다 섬에 있으면서도 천은을 입어 봉작을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나라 안에 비와 볕이 때맞추어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며 백성에게 재앙이 없고 산천의 진귀한 것이 모두 드러나며 초목과 조수 또한 모두 번성하였습니다. 나라의 늙은이들이 모두 말하길 이는 성천자께서 덮어주신 소치라 합니다. 신은 천일의 모습을 뵙고 정성을 조금이라도 바치고자 험하고 먼 길을 꺼리지 않고 직접 가족과 신하를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재삼 위로하고, 왕비가 올린 중궁 전문과 토산물을 문화전에 진열하게 했다. 왕이 전각에 나아가 헌상을 마치자 왕과 왕비 이하에게 모두 관대와 습의를 하사했다. 황제는 봉천문에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고, 왕비 이하는 다른 곳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예가 끝나자 회동관으로 보내주었다. 예관이 왕이 친왕(황제의 아들)을 알현하는 의식을 청하자, 황제는 공후(공작과 후작)의 예를 따르도록 명했다. 얼마 후 왕에게 의장, 교의, 은그릇, 산선(양산과 부채), 금을 입힌 안장과 말, 금직 무늬 비단, 사라, 능견 옷 10벌을 하사하고, 나머지도 차등 있게 하사했다. 10월에 왕이 객관에서 죽었다. 황제가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관리를 보내 제사 지내며 비단으로 부의를 주었다. 동궁과 친왕들도 모두 사람을 보내 제사 지냈으며, 유사(담당 관리)가 관곽과 명기를 갖추어 안덕문 밖 석자강에 장사 지내고 신도비(무덤 가는 길의 비석)를 세웠다. 또 무덤 곁에 사당을 세워 유사가 봄가을로 소를 잡아 제사 지내게 하고 시호를 공순이라 했다. 아들 하왕에게 칙서를 내려 위로하고 국왕의 작위를 잇게 했다.

하왕이 그 숙부와 함께 말하기를 "신은 해마다 자바에 용뇌 40근을 바치고 있는데, 칙서를 내려 자바가 매년 바치는 것을 없애고 천조에 바치게 해주십시오. 신이 이제 귀국하는데, 호송을 명해주시고 1년 동안 머물며 진수하여 나라 사람들의 바램을 위로해 주십시오. 아울러 조공하는 시기와 수행원 숫자를 정해주십시오."라고 하니 황제가 모두 따랐다. 3년에 한 번 조공하게 하고 수행원은 왕이 보내는 대로 하도록 명했으며, 마침내 자바국에 칙서를 내려 그들이 받는 연례 공물을 면제하게 했다. 왕이 하직하고 돌아가니 옥대 1개, 금 100냥, 은 3000냥 및 돈과 지폐, 비단, 사라, 이불, 요, 휘장, 기물을 하사하고 나머지도 모두 하사품이 있었다. 중관 장겸과 행인 주항에게 호행을 명했다.

[해설]

이 부분은 브루나이 왕이 명나라 황제를 직접 알현하고 중국에서 사망하여 묻힌 사건을 다룬다. 브루나이 왕의 무덤은 현재 중국 난징에 유적으로 남아있다. 또한 브루나이가 자바(마자파힛)의 속국 상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는 조공국이 되기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처음에 옛 왕이 말하기를 "신이 은혜를 입어 작위를 받았으니 신의 영토는 모두 직방(중국 관직)에 속합니다. 나라 뒤편의 산을 봉하여 일방의 진산으로 삼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새 왕이 다시 이것을 말하니, 이에 장녕진국지산으로 봉했다. 황제가 비문을 짓고 장겸 등에게 비석에 새기게 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비문 내용 생략, 황제의 덕을 칭송하고 브루나이 왕의 충성을 기리는 내용)

8년 9월, 사신을 보내 장겸 등을 따라 들어와 조공하고 은혜에 감사했다. 이듬해 다시 장겸에게 명하여 그 왕에게 비단, 사라, 채색 비단 도합 120필을 하사하고 그 아랫사람들에게도 모두 하사품이 있었다. 10년 9월, 하왕이 어머니와 함께 내조했다. 예관에게 명하여 회동관에서 연회를 열게 하고 광록시에서 아침저녁으로 술과 음식을 공급했다. 다음 날 황제가 봉천문에서 연회를 베풀고 왕의 어머니에게도 연회가 있었다. 이틀 뒤 다시 연회를 열고 왕에게 관대와 습의를 하사했으며, 왕의 어머니와 숙부 이하에게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이듬해 2월 하직하고 돌아갔다. 금 100냥, 은 500냥, 지폐 3000정, 돈 1500꾸러미, 비단 4필, 기백 사라 80필, 금직 문수와 무늬 비단 옷 각 1벌, 이불, 요, 휘장, 기물을 모두 갖추어 하사했다. 13년부터 홍희 원년까지 4번 입공했으나 그 후로는 조공 사절이 점차 드물어졌다.

가정 9년(1530년), 급사중 왕희문이 말하기를 "섬라(태국), 점성(참파), 유구(오키나와), 자바, 발니 5국이 조공하러 올 때 모두 동관을 경유합니다. 나중에 사사로이 상인을 데리고 오는 바람에 조공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덕 연간에 불랑기(포르투갈)가 함부로 들어와 해독을 끼쳐서 대개 막아서 끊었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갑자기 다시 회복할 것을 논의하니 위엄을 손상함이 심합니다."라고 했다. 상소문이 도찰원에 내려져 모두 옛 제도를 준수하고 함부로 섞여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말라고 청했다.

만력 연간에 그 왕이 죽고 후사가 없어 친족들이 서로 왕이 되려고 다투었다. 나라 안의 살육이 거의 다하자 이에 그 딸을 왕으로 세웠다. 장주 사람 장씨 성을 가진 자가 처음에 그 나라의 나독이 되었는데, 중국말로 높은 관직이다. 난리로 인해 도망쳐 나왔다. 여주(여왕)가 즉위하자 그를 맞아들여 돌려보냈다. 그 딸이 왕궁을 드나들다가 심질(정신질환)을 얻어 아버지가 반역을 꾀한다고 망언을 했다. 여주가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 그 집을 조사하게 하니 나독이 자살했다. 나라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여주가 후회하며 그 딸을 교살하고 그 아들에게 관직을 주었다. 이후 다시는 조공하지 않았으나 상인들의 왕래는 끊이지 않았다.

나라는 14주를 통솔하며 구항(팔렘방)의 서쪽에 있고 점성에서 40일이면 닿는다. 처음에는 자바에 속했다가 뒤에 섬라에 속했는데 이름을 대니라고 고쳤다. 중국인이 많이 흘러들어가 그곳에 살았다. 가정 말기에 복건과 광동의 해적 잔당이 도망쳐 이곳에 이르러 2천여 명이 모였다. 만력 때 홍모번(네덜란드)이 강제로 그 국경에서 장사하며 토고(창고)를 짓고 살았다. 팽호(펑후 제도)에 들어와 호시한 자들이 휴대한 것이 바로 대니국의 문서였다. 여러 풍속과 물산은 『송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

[해설]

후반부 기록은 명나라 중후기 해금 정책의 이완과 서양 세력(포르투갈, 네덜란드)의 등장을 시사한다. 특히 '장씨'가 '나독(Dato, 말레이계 작위)'이 되었다는 기록은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화교들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대니(Patani)'라고 이름을 고쳤다는 부분은 기록의 혼동일 수 있다. 대니(파타니)는 말레이 반도에 있는 별도의 왕국이다. 명사는 때때로 지리 정보를 혼동하여 기록하곤 했다.

만랄가(滿剌加)

만랄가는 점성(참파)의 남쪽에 있다. 순풍으로 8일이면 용야문(싱가포르 해협 입구)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2일 가면 닿는다. 혹은 옛 돈손이며 당나라의 가라부사라고도 한다.

영락 원년 10월, 중관 윤경을 그 땅에 사신으로 보내 직금 문기, 소금 장만 등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 그 땅에는 왕이 없고 나라도 칭하지 않았으며 섬라(태국)에 복속하여 해마다 금 40냥을 세금으로 바쳤다. 윤경이 도착하여 위엄과 덕을 선포하고 초래(불러서 오게 함)의 뜻을 전했다. 그 추장 배리미소라가 크게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윤경을 따라 입조하여 토산물을 바치니 3년 9월에 경사(수도)에 도착했다. 황제가 가상히 여겨 만랄가 국왕으로 봉하고 고명과 도장, 채색 폐백, 습의, 황개를 하사하고 다시 윤경에게 명하여 가게 했다. 그 사신이 말하기를 "왕이 의를 사모하여 중국의 여러 군과 같이 되어 해마다 직공을 바치기를 원하니, 그 산을 봉하여 나라의 진산으로 삼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황제가 따랐다. 비문을 지어 산 위에 새기게 하고 끝에 시를 덧붙였다. (시 내용 생략) 윤경 등이 다시 이르자 그 왕이 더욱 기뻐하며 예를 더하여 대우했다.

[해설]

만랄가는 멜라카(말라카) 술탄국이다. 배리미소라는 멜라카의 건국자 파라메스와라이다. 멜라카는 태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자 했다. 이는 명나라의 정화 원정대가 멜라카를 주요 거점으로 삼는 계기가 된다.

5년 9월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듬해 정화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고 곧이어 입공했다. 9년, 그 왕이 처자와 배신 540여 명을 이끌고 내조했다. 근교에 도착하자 중관 해수, 예부낭중 황상 등에게 명하여 연회를 열어 위로하게 하고 유사가 회동관에 장막을 쳤다. 봉천전에 들어와 조회하자 황제가 친히 연회를 베풀고 왕비 이하는 다른 곳에서 연회했다. 광록시에서 매일 생뢰와 상존(좋은 술)을 보내고 왕에게 금수 용옷 2벌, 기린옷 1벌, 금은 기물, 휘장, 이불, 요를 모두 갖추어 하사하고 왕비 이하에게도 모두 하사품이 있었다. 돌아가려 할 때 왕에게 옥대, 의장, 안장과 말, 왕비에게 관복을 하사했다. 떠날 임시에 봉천문에서 연회를 하사하고 다시 옥대, 의장, 안장과 말, 황금 100, 백금 500, 지폐 40만 관, 돈 2600관, 금기사라 300필, 비단 1000필, 혼금문기 2, 금직통수슬란 2를 하사했다. 왕비 및 자질, 배신 이하에게도 연회와 하사가 차등 있게 있었다. 예관이 용강역에서 전송하고 다시 용담역에서 연회를 하사했다. 10년 여름, 그 조카가 와서 사례했다. 하직하고 돌아갈 때 중관 감천에게 명하여 함께 가게 하니 곧 또 입공했다.

12년, 왕자 모간살어적아사가 내조하여 아버지의 부고를 알렸다. 즉시 명하여 습봉하게 하고 금과 폐백을 하사했다. 그 후로 해마다 혹은 격년으로 입공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17년, 왕이 처자와 배신을 이끌고 내조하여 은혜에 감사했다. 하직하고 돌아갈 때 섬라가 침략한 상황을 호소했다. 황제가 섬라에 칙유를 내려주니 섬라가 이에 조서를 받들었다. 22년, 서리마합랄이 아버지가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고 처자와 배신을 이끌고 내조했다.

선덕 6년,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섬라가 본국을 침략하려 하여 왕이 입조하고자 하나 막힐까 두려워합니다. 주상하여 알리고 싶으나 글을 쓸 줄 아는 자가 없어 신 등 3명으로 하여금 소문답랄의 조공 배에 붙어 와서 호소하게 했습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정화의 배에 붙어 귀국하게 명하고, 인하여 정화에게 칙서를 내려 섬라를 타일러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고 조정의 명을 어기지 말라고 책망하게 했다. 처음에 세 사람이 왔을 때 공물이 없자 예관이 관례상 상을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먼 곳 사람이 수만 리를 넘어와 불공평함을 호소하는데 어찌 하사품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습의와 채색 폐백을 조공 사신의 예와 같이 하사했다.

8년, 왕이 처자와 배신을 이끌고 내조했다. 남경에 도착했을 때 날씨가 이미 추워져서, 봄이 되어 따뜻해지면 북상하도록 명하고 따로 사람을 보내 칙서로 왕과 왕비에게 하사품을 주며 위로했다. 입조하기에 이르러 예법대로 연회와 하사를 했다. 돌아갈 때 유사가 배를 마련해 주었다. 왕이 다시 동생을 보내 타조, 말, 토산물을 바쳤다. 당시 영종이 이미 즉위했으나 왕은 아직 광동에 있었다. 칙서를 내려 왕을 장려하고 지방관에게 명해 호송하여 귀국하게 했다. 인하여 고리(캘리컷), 진랍(캄보디아) 등 11국 사신을 딸려 보내 함께 돌아가게 했다.

정통 10년, 그 사신이 왕에게 식력팔밀식와아지팔사호국의 칙서와 망포(구렁이 무늬 옷), 산개(양산과 덮개)를 하사하여 나라 사람들을 진압하고 복종시키게 해달라고 청했다. 또 말하기를 "왕이 직접 대궐에 나아가려 하는데 따르는 사람이 많으니 큰 배 한 척을 하사하여 멀리 건너오는데 편리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황제가 모두 따랐다.

경태 6년, 속로탄무답불나사가 말과 토산물을 바치고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했다. 급사중 왕휘에게 조서를 주어 가게 했다. 얼마 후 다시 입공하여 하사받은 관대가 불에 탔다고 말했다. 가죽 고깔 옷, 붉은 비단 상복, 서대(무소뿔 허리띠), 사모를 만들어 주도록 명했다.

천순 3년, 왕자 소단망속사가 사신을 보내 입공하니 급사중 진가유 등에게 명하여 가서 봉하게 했다. 2년이 지나 예관이 말하기를 "진가유 등이 바다에 뜬 지 이틀 만에 오저양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6일을 표류하다 청란수어소에 이르러 구조되었습니다. 칙서는 잃어버리지 않았으나 여러 하사품이 모두 물에 젖었습니다. 다시 지급하고 사신으로 하여금 다시 가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따랐다.

성화 10년, 급사중 진준이 점성왕을 책봉하러 갔다가 안남(베트남) 병사가 점성을 점거하여 들어가지 못하자, 가지고 갔던 물건을 가지고 만랄가에 이르러 그 왕을 타일러 입공하게 했다. 그 사신이 도착하자 황제가 기뻐하며 칙서를 내려 가상히 여기고 장려했다. 17년 9월, 조공 사신이 말하기를 "성화 5년에 조공 사신이 돌아가다가 표류하여 안남 경계에 닿았는데 많이 피살되고 나머지는 얼굴에 문신을 하여 노비로 삼았으며 어린 자는 궁형(거세)을 가했습니다. 지금 이미 점성 땅을 점거하고 또 본국을 삼키려 합니다. 본국은 모두 왕의 신하라 여겨 감히 싸우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마침 안남의 조공 사신 또한 도착했으므로 만랄가 사신이 조정에서 쟁변하기를 청했다. 병부에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지나간 일에 속하니 깊이 따질 것이 못 된다고 했다. 황제는 이에 안남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칙서를 내려 그 왕을 꾸짖고, 아울러 만랄가에 유시하기를 안남이 다시 침능하면 즉시 병사를 정돈하여 싸움을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 후 급사중 임영, 행인 황건형을 보내 왕자 마합목사를 왕으로 책봉했다. 두 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니 관직을 추증하고 제사를 하사했으며, 음서의 혜택을 주고 그 집을 구휼했다. 나머지는 유사에 칙명을 내려 해변에서 초혼제를 지내게 하고 역시 그 집을 구휼했다. 다시 급사중 장성, 행인 좌보를 보냈다. 장성이 광동에서 죽자 지방관에게 명하여 관리 한 명을 택해 좌보의 부사로 삼아 봉하는 일을 마치게 했다.

정덕 3년, 사신 단아지 등이 입공했다. 그 통역 아류는 본래 강서 만안 사람 소명거인데 죄를 짓고 그 나라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대통사 왕영, 서반 장자에게 뇌물을 주고 발니에 가서 보물을 찾겠다고 꾀했다. 예부 관리 후영 등도 뇌물을 받고 거짓으로 부인(도장)을 만들어 역전을 소란케 했다. 돌아오는 길에 광동에 이르러 소명거가 단아지 무리와 말다툼을 하다가 동료 팽만춘 등과 함께 그들을 겁박하고 죽여 그 재물을 모두 가졌다. 일이 발각되어 경사로 잡혀왔다. 소명거는 능지처참하고 팽만춘 등은 참수했으며 왕영은 감형하여 쌀 300석을 벌금으로 내게 하고 장자, 후영과 함께 변방으로 귀양 보냈으며 상서 백월 이하도 모두 벌을 논의했다. 유근이 이 때문에 강서 사람을 죄주어 그 해액 50명을 줄이고 벼슬하는 자는 경직(서울 벼슬)에 임명하지 못하게 했다.

[해설]

이 단락은 명나라 말기 조정의 부패와 해상 무역의 혼란상을 보여준다. 중국인 범죄자가 통역으로 위장하여 외교 사절을 살해하고 약탈한 사건은 당시 해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불법 교류가 활발했음을 시사한다. 유근은 당시 악명 높은 환관이다.

후에 불랑기(포르투갈)가 강성해져 군사를 일으켜 그 땅을 침탈하니 왕 소단마말이 도망쳐 나가 사신을 보내 위난을 알렸다. 당시 세종이 즉위하여 칙서로 불랑기를 꾸짖고 그 옛 땅을 돌려주라고 명했다. 섬라 등 여러 국왕에게 유시하여 재난을 구제하고 이웃을 돕는 의로움을 보이라고 했으나 끝내 응하는 자가 없었고, 만랄가는 마침내 멸망당하는 바가 되었다. 그때 불랑기 또한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봉작을 청했는데 광동에 도착하자 지방관이 그 나라가 본래 『왕회(조공국 목록)』에 없던 나라라 하여 그 사신을 억류하고 보고했다. 조서를 내려 토산물의 값을 쳐주고 돌려보냈는데, 후에 이름을 마륙갑(말라카)으로 고쳤다고 한다.

만랄가가 조공하는 물건으로는 마노, 진주, 대모, 산호수, 학정, 금모학정, 쇄복, 백필포, 서양포, 살합랄, 서각, 상아, 흑곰, 검은 원숭이, 흰 사슴, 화계(칠면조 또는 타조류), 앵무새, 편뇌, 장미로, 소합유, 치자화, 오더니, 침향, 속향, 금은향, 아위 등이 있다.

산에서 샘이 흘러나와 시내가 되는데 토착인이 모래를 일어 주석을 채취하여 덩어리로 만드니 두석이라 한다. 밭이 척박하여 수확이 적고 백성은 모두 모래를 일고 물고기를 잡아 생업으로 삼는다. 기후는 아침에 덥고 저녁에 춥다. 남녀는 상투를 틀고 신체는 검으며 간혹 흰 자가 있는데 당인(중국인)의 종자다. 풍속은 순박하고 상도(상거래 도덕)가 꽤 공평하다. 불랑기에 격파된 이후로 그 풍속이 갑자기 달라졌다. 상선이 드물게 오고 대부분 곧바로 소문답랄로 간다. 그러나 반드시 그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대개 약탈을 당하니 바닷길이 거의 끊어졌다. 스스로 중국에 와서 판매하는 자는 곧바로 광동 향산오(마카오)에 이르니 발자취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소문답랄(蘇門答剌)

소문답랄(사무드라 파사이)은 만랄가의 서쪽에 있다. 순풍으로 9일 낮밤이면 닿을 수 있다. 혹은 한나라의 조지, 당나라의 파사(페르시아), 대식(아라비아) 두 나라의 땅이라고도 하며 서양의 요충지이다.

성조(영락제) 초기에 사신을 보내 즉위 조서로 그 나라를 타일렀다. 영락 2년 부사 문양보, 행인 영선을 보내 직금 문기, 융금, 사라를 하사하고 초래했다. 중관 윤경이 자바에 사신으로 갈 때 길을 편히 하여 다시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3년 정화가 서양에 내려갈 때 다시 하사함이 있었다. 정화가 이르기 전에 그 추장 재노리아필정이 이미 사신을 보내 윤경을 따라 입조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소문답랄 국왕으로 봉하고 도장과 고명, 채색 폐백, 습의를 하사했다. 드디어 해마다 입공하여 성조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정화는 모두 세 번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보다 앞서 그 왕의 아버지가 이웃 나라 화면왕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자가 나이가 어리자 왕의 아내(왕비)가 무리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누구든 나를 위해 원수를 갚아주는 자가 있다면 내가 지아비로 삼고 국사를 함께하겠다."라고 했다. 어떤 어옹(어부)이 이 말을 듣고 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공격하여 그 왕의 귀를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왕의 아내가 드디어 그와 결합하고 노왕이라 칭했다. 얼마 후 왕자가 나이가 들자 몰래 부령들과 모의하여 노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습격했다. 노왕의 동생 소간랄이 산속으로 도망쳐 해마다 무리를 이끌고 침략하고 소란을 피웠다. 13년 정화가 다시 그 나라에 이르자 소간랄이 하사품이 자기에게 미치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요격했다. 정화가 부대 병졸과 나라 사람들을 지휘하여 방어하고 적의 무리를 대파했으며 남발리국까지 추격하여 사로잡아 돌아왔다. 그 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했다.

[해설]

이 이야기는 사무드라 파사이의 내전을 다룬다. '어부' 전설은 현지 전승과 중국 기록이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정화가 개입하여 정통성 있는 왕을 지지하고 반란군을 제압함으로써 명나라의 영향력을 확고히 했다.

선덕 원년 사신을 보내 입공하여 하례했다. 5년, 황제는 외방 번국의 조공 사신이 많이 오지 않는다 하여 정화와 왕경홍을 보내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조서를 반포하게 했다. (조서 내용 생략: 선덕으로 개원했으니 태평의 복을 누리라는 내용) 모두 20여 개국을 지났는데 소문답랄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입공한 것이 두 번이었다. 8년에 기린을 바쳤다.

9년, 왕의 동생 합리지한이 내조했다가 경사에서 죽었다. 황제가 그를 불쌍히 여겨 홍려소경을 추증하고 고명을 하사했으며 유사가 상장(장례)을 치르고 무덤 지키는 집을 두었다. 당시 왕경홍이 다시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왕이 동생 합니자한을 보내 따라가서 입조하게 했다. 이듬해 도착하여 말하기를 왕이 늙어 일을 처리할 수 없으니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청한다고 했다. 이에 그 아들 아복새역적을 봉하여 국왕으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조공 사신이 점차 드물어졌다.

성화 22년, 그 사신이 광동에 도착했는데 유사가 검사해보니 도장과 신표, 감합이 없었다. 이에 그 표문을 창고에 넣어두고 그 사신을 물리쳐 돌려보냈다. 따로 번인(외국인)을 보내 공물을 경사로 보내니 조금 하사함이 있었다. 이후로는 조공 사신이 오지 않았다.

만력 연간에 이르러 나라의 성이 두 번 바뀌었다. 그때 왕이 된 자는 남의 종이었다. 종의 주인이 나라의 대신으로 병권을 쥐고 있었다. 종은 사납고 교활했는데 주인이 코끼리를 기르게 하니 코끼리가 살이 쪘다. 물고기 세금을 감독하게 하니 날마다 큰 물고기를 주인에게 바쳤다. 주인이 크게 기뻐하며 좌우에서 심부름하게 했다. 하루는 주인을 따라 조정에 들어갔는데 왕이 존엄하기가 신과 같고 주인은 국궁하여 오직 삼가는 것을 보고 나와서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인께서는 어찌하여 그리 심하게 공손하십니까?" 하니 주인이 "저분은 왕이다. 어찌 감히 대항하겠느냐." 했다. 종이 말하길 "주인께서 왕이 되려고 하지 않으셔서 그렇지, 하고자 하면 주인이 곧 왕입니다."라고 했다. 주인이 놀라 꾸짖어 물러가게 했다. 다른 날 또 나아가 말하기를 "왕의 좌우 호위가 적습니다. 주인은 중병을 거느리고 나가 진수하시니 반드시 들어와 하직할 것인데, 청컨대 종을 데리고 가십시오. 주인이 기밀한 일이 있다고 말하고 좌우를 물리쳐 달라고 청하면 왕은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이 틈을 타서 찔러 죽이고 주인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면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주인이 그 말을 따랐고 종이 과연 왕을 죽이고 크게 소리치기를 "왕이 무도하여 내가 죽였다. 내 주인이 곧 왕이다. 감히 다른 말을 하는 자는 이 칼에 죽으리라!" 하니 무리가 겁을 먹고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 주인이 드디어 찬탈하여 왕위에 오르고 종을 심복으로 삼아 병권을 맡겼다. 얼마 안 가 종이 다시 주인을 죽이고 그를 대신했다. 이에 방위를 크게 하고 그 궁궐을 넓히며 6개의 문을 세워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 비록 훈구 귀족이라도 칼을 차고 전해 오르지 못했다. 나갈 때는 코끼리를 타는데 코끼리에 정자를 얹고 그 밖을 휘장으로 가렸으며 이와 같은 것이 백여 마리라 사람들이 왕이 있는 곳을 헤아리지 못하게 했다.

[해설]

이 찬탈 이야기는 아체 술탄국(Aceh Sultanate)의 성립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사무드라 파사이는 16세기에 아체에 병합되었다. '노예 출신 왕' 이야기는 아체의 술탄 살라후딘이나 알라우딘 리아야트 샤 알 카하르 등의 권력 투쟁 과정이 와전되거나 각색된 것일 수 있다. 마지막 문단에서 국명을 '아제(啞齊, 아체)'로 고쳤다고 명시한다.

그 나라 풍속은 꽤 순박하고 말하는 것이 부드럽고 아첨하나 오직 왕만 살인을 좋아한다. 해마다 십여 명을 죽여 그 피를 취해 몸을 씻으며 질병을 없앨 수 있다고 한다. 조공물로는 보석, 마결, 수정, 석청, 회회청, 좋은 말, 코뿔소, 용연향, 침향, 속향, 목향, 정향, 강진향, 칼, 활, 주석, 쇄복, 후추, 소목, 유황 등이 있다. 화물선이 이르면 무역이 공평하다고 칭송한다. 땅은 본래 척박하여 보리는 없고 벼가 있는데 벼는 일 년에 두 번 수확한다. 사방의 상인들이 모여든다. 중국인이 가는 경우 땅이 멀어 가격이 높으므로 다른 나라보다 이익을 배로 얻는다. 그 기후는 아침은 여름 같고 저녁은 가을 같으며 여름에는 장기(풍토병)가 있다. 부인은 나체를 하고 오직 허리에 천 하나를 두른다. 기타 풍속은 만랄가와 비슷하다. 찬탈하고 시해한 뒤 국명을 아제(啞齊, 아체)로 바꾸었다.

수문달나(須文達那)

수문달나는 홍무 16년, 국왕 수단마늑올달반이 사신 엄팔아를 보내 내조하고 말 2필, 유필포 15필, 격착포, 입적력포 각 2필, 화만직지 2, 번면주직지 2, 두라면 2근, 살랄팔 2개, 유뢰혁착 1개, 살합랄 1개 및 장미수, 침향, 강향, 속향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왕에게 『대통력』, 기라, 보초를 하사하고 사신에게 습의를 하사하도록 명했다. 혹자는 수문달나가 곧 소문답랄인데 홍무 때 고친 것이라 말하지만, 그 조공물과 왕의 이름이 모두 달라 상고할 수 없다.

소록(蘇祿)

소록(술루)은 땅이 발니(브루나이), 사파(자바)와 가깝다. 홍무 초기에 군사를 일으켜 발니를 침략하여 크게 얻었으나 사파의 원병이 이르자 이에 돌아갔다.

영락 15년, 그 나라 동왕 파도갈팔합랄, 서왕 마합랄질갈랄마정, 동왕의 아내 파도갈바랄복이 아울러 그 가족과 두목 도합 340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조공하고, 금을 새긴 표문을 올리고 진주, 보석, 대모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만랄가와 같이 예우하고 곧 아울러 국왕으로 봉했다. 도장과 고명, 습의, 관대 및 안장과 말, 의장 기물을 하사하고 그 수행원에게도 관대를 차등 있게 하사했다. 27일간 머물다가 세 왕이 하직하고 돌아갔다. 각각 옥대 1개, 황금 100, 백금 2000, 나금문기 200, 비단 300, 지폐 1만 정, 돈 2000꾸러미, 금수 망룡, 기린옷 각 1벌을 하사했다. 동왕이 덕주에 머물다가 객관에서 죽었다. 황제가 관리를 보내 제사 지내고 유사에 명하여 장례를 치르게 했으며, 묘도에 비석을 세우고 시호를 공정이라 했다. 처첩과 시종 10명을 남겨 무덤을 지키게 하고 3년 상을 마치기를 기다려 돌려보냈다. 이에 사신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 그 장자 도마함에게 유시하기를 "너의 아비가 중국을 높일 줄 알아 직접 가족과 배신을 이끌고 멀리 바닷길을 건너 만 리를 와서 조회하였다. 짐이 그 정성을 돌보아 이미 왕 작위를 내리고 넉넉히 하사품을 더하여 관리를 보내 호송하여 돌아가게 했다. 배가 덕주에 이르러 질병을 만나 죽었다. 짐이 듣고 깊이 슬퍼하여 이미 예법대로 장사 지내고 제사 지냈다. 네가 적장자로서 나라 사람들의 귀속되는 바가 되었으니 마땅히 즉시 계승하여 번방의 직분을 편안히 하라. 이제 특별히 너를 봉하여 소록국 동왕으로 삼는다. 너는 부디 충정과 곧음을 더욱 도타이 하고 하늘의 도를 공경히 받들어, 돌보아주는 마음(권애)에 부응하고 네 아비의 뜻을 계승하라. 공경할지어다."라고 했다.

[해설]

소록은 필리핀 남부의 술루 술탄국이다. 동왕, 서왕, 동왕 등 세 왕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당시 술루가 여러 권력자로 분할되어 있었거나 연합체였음을 시사한다. 동왕 파도갈팔합랄(Paduka Batara)의 무덤은 산둥성 더저우(덕주)에 있으며, 후손들이 안(安)씨와 온(溫)씨 성을 가지고 현재까지 중국에 살고 있다.

18년, 서왕이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19년, 동왕의 어머니가 왕의 숙부 파도가소리를 보내 내조하고 큰 진주 1개를 바쳤는데 무게가 7냥 남짓이었다. 21년, 동왕비가 귀국하니 후하게 하사하여 보냈다. 이듬해 입공하고 그 뒤로는 다시 오지 않았다. 만력 때 불랑기가 여러 번 공격했으나 성이 산의 험준한 곳에 의지하고 있어 끝내 함락하지 못했다.

그 나라는 옛적을 상고할 바가 없다. 땅이 척박하여 조와 보리가 적고 백성은 대개 물고기와 새우를 먹으며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고 사탕수수를 빚어 술을 만들며 대나무를 짜서 베를 만든다. 기후는 항상 덥다. 진주 연못이 있어 밤에 보면 빛이 수면에 뜬다. 토착인이 진주를 중국인과 무역하는데 큰 것은 이익이 수십 배다. 상선이 돌아가려 하면 문득 몇 사람을 붙잡아 인질로 삼아 그들이 다시 오기를 바란다. 그 근처에 고약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대모가 난다.

서양쇄리(西洋瑣裡)

서양쇄리는 홍무 2년 사신 유숙면에게 명하여 즉위 조서로 그 나라를 타일렀다. 3년 사막을 평정하고 다시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반포했다. 그 왕 별리제가 사신을 보내 금엽표(금박 입힌 표문)를 받들고 숙면을 따라와 토산물을 바쳤다. 문기, 사라 등 여러 물건을 매우 후하게 하사하고 아울러 『대통력』을 하사했다.

성조가 해외 여러 나라에 즉위 조서를 반포할 때 서양(쇄리) 또한 참여했다. 영락 원년 부사 문양보, 행인 영선을 그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융금, 문기, 사라를 하사했다. 얼마 후 다시 중관 마빈에게 명하여 가서 사신 노릇을 하게 하고 전과 같이 하사했다. 그 왕이 즉시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고 후추를 실어와 백성과 매매했다. 유사가 세금을 걷기를 청하니 징수하지 말라고 명했다. 21년 고리, 아단(아덴) 등 15국과 함께 와서 조공했다.

[해설]

서양쇄리와 쇄리는 인도 남부의 코로만델 해안이나 촐라(Chola) 왕국과 관련된 지역으로 추정된다. '서양'은 당시 인도양 방면을 통칭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쇄리(瑣裡)

쇄리는 서양쇄리와 가까우나 조금 작다. 홍무 3년, 사신 탑해첩목아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그 나라를 어루만지고 타일렀다. 5년, 왕 복납적이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조공했으며 아울러 그 나라 토지산천도를 바쳤다. 황제가 중서성 신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서양의 여러 나라는 본래 먼 번국이라 일컬어지며 바다를 건너오니 세월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 조공이 드문지 잦은지를 따지지 말고 가는 것을 후하게 하고 오는 것을 박하게 함(후왕박래)이 옳다."라고 했다. 이에 『대통력』 및 금직 문기, 사라 각 4필을 하사하고 사신에게도 폐백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람방(覽邦)

람방은 서남해 중에 있다. 홍무 9년, 왕 석리마합랄찰적랄찰이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와서 조공했다. 조서를 내려 그 왕에게 직금 문기, 사라를 하사하고 사신에게는 제도대로 연회와 하사를 했다. 영락, 선덕 연간에 일찍이 이웃 나라에 붙어 조공했다. 그 땅은 자갈이 많고 삼과 보리 외에는 다른 종자가 없다. 상인이 드물게 이른다. 산은 평탄하고 길게 뻗어 봉우리가 없고 물 또한 얕고 탁하다. 풍속은 불교를 좋아하고 제사 지내기를 부지런히 한다. 그 공물은 공작, 말, 단향, 강향, 후추, 소목이다. 교역에는 돈을 쓴다.

담파(淡巴)

담파 또한 서남해 중의 나라이다. 홍무 10년, 그 왕 불갈사라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니 하사가 차등 있게 있었다. 그 나라는 돌로 성을 쌓고 기와로 집을 덮었다. 왕은 수레를 타고 관리는 말을 타니 중국의 위의가 있었다. 흙이 기름지고 물이 맑으며 초목이 무성하고 가축이 매우 많다. 남녀가 농사와 길쌈에 부지런하고 시장에는 무역이 있으며 들에는 도적이 없어 낙토라 일컬어진다. 그 공물은 필포, 두라면 이불, 침향, 속향, 단향, 후추이다.

백화(百花)

백화는 서남해 중에 거주한다. 홍무 11년, 그 왕 라정라자망사가 사신을 보내 금엽표를 받들고 흰 사슴, 붉은 원숭이, 귀통, 대모, 공작, 앵무새, 와와도괘조(거꾸로 매달린 새) 및 후추, 향, 밀랍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왕과 사신에게 비단, 폐백, 습의를 차등 있게 하사했다. 나라 안 기후가 항상 따뜻하여 서리와 눈이 없고 기이한 꽃과 풀이 많으므로 이름을 백화라 했다. 백성이 부유하고 넉넉하며 불교를 숭상한다.

팽형(彭亨)

팽형(파항)은 섬라의 서쪽에 있다. 홍무 11년, 그 왕 마합랄야답요가 사신을 보내 금엽표를 가지고 와서 번노(외국인 노비) 6명과 토산물을 바치니 예법대로 연회와 하사를 했다. 영락 9년, 왕 파라밀쇄라달라식니가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10년, 정화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2년, 다시 입공했다. 14년, 고리, 자바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조공하니 다시 정화에게 명하여 답하게 했다.

그 나라는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항상 따뜻하며 쌀과 조가 넉넉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고 야자 장으로 술을 빚는다. 위아래가 친하고 익숙하며 도적이 없다. 그러나 귀신에 미혹되어 향나무를 깎아 형상을 만들고 사람을 죽여 제사를 지내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빈다. 바치는 물건에는 상아, 편뇌, 유향, 속향, 단향, 후추, 소목 등이 있다.

만력 때에 이르러 유불(조호르)국 부왕자가 팽형왕의 딸에게 장가들게 되어, 혼인하려 할 때 부왕(부왕자)이 아들을 보내 팽형에 이르게 하니 팽형왕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파라(보르네오)국 왕자가 팽형왕의 매제가 되는데 술잔을 들어 부왕에게 바칠 때 손가락에 매우 아름다운 큰 진주가 있었다. 부왕이 그것을 원하여 무거운 뇌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왕자가 아까워하여 주지 않자 부왕이 노하여 즉시 귀국해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팽형 사람들은 뜻밖의 일이라 싸우지 않고 스스로 무너졌다. 왕과 파라 왕자는 금산으로 도망쳤다. 발니 국왕은 왕비의 오빠인데 이 소식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구원했다. 부왕은 이에 크게 불지르고 약탈한 뒤 떠났다. 이때 나라 안에 귀신 곡소리가 3일간 이어졌고 인민이 반이나 죽었다. 발니왕이 그 누이동생을 맞아 돌아가고 팽형왕이 따랐으며 그 장자에게 명하여 나라를 섭정하게 했다. 얼마 후 왕이 복위했는데 차자가 본래 흉포하여 드디어 그 아비를 독살하고 그 형을 시해하고 스스로 섰다.

[해설]

팽형은 말레이 반도의 파항(Pahang) 왕국이다. 인신공양 풍습에 대한 기록은 과장되었거나 특정 의식을 오해한 것일 수 있다. 후반부의 복잡한 왕실 간의 결혼, 진주를 둘러싼 갈등, 전쟁, 발니(브루나이)의 개입 등은 말레이 반도 국가들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나고아(那孤兒)

나고아(나구르)는 소문답랄의 서쪽에 있고 땅이 서로 접해 있다. 땅이 좁아 겨우 천여 가구이다. 남자는 모두 먹으로 얼굴을 찔러 꽃과 짐승 모양을 하므로 또 화면국(꽃 얼굴 나라)이라고도 한다. 원숭이 머리에 나체이고 남녀가 단지 홑 베로 허리를 두른다. 그러나 풍속이 순박하고 밭에는 벼가 넉넉하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하지 않고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교만하지 않으며 모두 스스로 경작하여 먹고 도적이 없다. 영락 연간에 정화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 추장이 항상 와서 토산물을 조공했다.

리벌(黎伐)

리벌(리디?)은 나고아의 서쪽에 있다. 남쪽은 큰 산이고 북쪽은 큰 바다이며 서쪽은 남발리와 접한다. 주민은 3천 가구이며 한 사람을 추대하여 주인으로 삼는다. 소문답랄에 예속되어 있으며 말소리와 풍속이 그들과 같은 것이 많다. 영락 연간에 일찍이 그 사신을 따라 입공했다.

남발리(南渤利)

남발리(람브리)는 소문답랄의 서쪽에 있다. 순풍으로 3일 낮밤이면 닿을 수 있다. 왕과 주민은 모두 회회인(무슬림)이며 겨우 천여 가구이다. 풍속은 질박하고 성실하며 땅에 곡식이 적어 사람들은 물고기와 새우를 많이 먹는다. 서북쪽 바다 가운데 산이 있어 매우 높고 큰데 모산이라 하며, 그 서쪽은 다시 큰 바다로 나몰리양이라 하는데 서쪽에서 오는 서양 배들이 모두 이 산을 바라보고 기준으로 삼는다. 산 근처 얕은 물 속에 산호수가 자라는데 높은 것은 3척쯤 된다. 영락 10년, 그 왕 마합마사가 사신을 보내 소문답랄 사신에 붙어 입공했다. 그 사신에게 습의를 하사하고 왕에게 도장과 고명, 비단, 기라, 채색 폐백을 하사했다. 정화를 보내 그 나라를 타일렀다. 성조 때가 끝날 때까지 해마다 입공했으며 그 왕자 사자한 또한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선덕 5년, 정화가 여러 나라에 두루 하사할 때 남발리 또한 참여했다.

[해설]

남발리는 수마트라섬 북단 아체 지방의 람브리(Lambri)이다. 이슬람화된 소국으로 묘사된다. '모산'은 항해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웨섬(Weh Island)이나 그 인근 산으로 추정된다.

아로(阿魯)

아로(아루)는 일명 아로(啞魯)라고도 하며 만랄가와 가깝다. 순풍으로 3일 낮밤이면 닿는다. 풍속과 기후는 대체로 소문답랄과 비슷하다. 밭이 척박하여 수확이 적고 파초와 야자를 많이 심어 식량으로 삼는다. 남녀가 모두 나체이며 천으로 허리를 두른다. 영락 9년, 왕 속로당홀선이 사신을 보내 고리 등 여러 나라에 붙어 입공했다. 그 사신에게 관대, 채색 폐백, 보초를 하사하고 그 왕에게도 하사함이 있었다. 10년, 정화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7년, 왕자 단아라사가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19년, 21년에 다시 입공했다. 선덕 5년, 정화가 여러 번국에 사신으로 갈 때 또한 하사함이 있었다. 그 후로는 조공 사신이 오지 않았다.

유불(柔佛)

유불(조호르)은 팽형과 가깝고 일명 오정초림(우중 타나?)이라고도 한다. 영락 연간에 정화가 서양을 두루 지날 때 유불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혹자는 정화가 일찍이 동서축산을 지났는데 지금 이 산이 바로 그 땅에 있으니 아마도 동서축일 것이라 한다. 만력 연간에 그 추장이 군사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이웃 나라 정기의, 팽형이 여러 번 그 환란을 입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장사하는 중국인이 많으면 그곳에 나아가 무역하고 때로는 초청하여 그 나라에 이르게 했다.

나라 안은 띠 풀로 덮어 집을 만들고 나무를 벌여 성을 만들며 못으로 둘렀다. 일이 없으면 밖으로 통상하고 일이 있으면 불러 모아 병사로 삼으니 강국이라 칭한다. 땅에서 곡식이 나지 않아 항상 이웃 땅에서 쌀을 바꾼다. 남자는 머리를 깎고 맨발에 칼을 차며 여자는 머리를 기르고 상투를 틀고 그 추장은 쌍칼을 찬다. 글자는 교조 잎을 써서 칼로 찌른다(새긴다). 혼인에는 또한 문벌을 따진다. 왕은 금은으로 식기를 삼고 아랫사람들은 도자기를 쓴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없다. 풍속은 재계를 좋아하여 별을 보고서야 밥을 먹는다(라마단). 절기는 4월을 새해 첫머리로 삼는다. 상을 당하면 부인은 머리를 깎고 남자는 겹으로 깎으며 죽은 자는 모두 화장한다. 산물로는 코뿔소, 코끼리, 대모, 편뇌, 몰약, 혈갈, 주석, 밀랍, 가문점, 목면화, 빈랑, 해채, 와연(제비집), 서국미, 기길시 등이 있다.

처음에 그 나라의 길녕인이 큰 창고(대고)가 되어 왕에게 충성하고 왕이 의지하고 신임하는 바가 되었다. 왕의 동생이 형이 자기를 멀리하는 것 때문에 몰래 그를 죽였다. 후에 외출하다 말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좌우가 모두 길녕인이 재앙을 내린 것을 보았으므로 이로부터 집집마다 그를 제사 지냈다.

[해설]

유불은 조호르 술탄국이다. 멜라카가 포르투갈에 함락된 후 그 왕족이 세운 나라이다. '오정초림'은 말레이어 'Ujung Tanah'(땅의 끝)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관습(단식, 라마단)에 대한 묘사가 정확하다. '길녕인'은 클링(Kling), 즉 인도계 사람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

정기의(丁機宜)

정기의(트렝가누?)는 자바의 속국으로 면적이 매우 좁아 겨우 천여 가구이다. 유불이 교활하고 웅강한데 정기의가 접경하고 있어 때때로 그 환란을 입었다. 후에 후한 폐백으로 혼인을 청하여 조금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그 나라는 나무로 성을 만든다. 추장이 사는 곳 곁에 종고루를 벌여 세웠으며 드나들 때 코끼리를 탄다. 10월을 새해 첫머리로 삼는다. 성품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추장이 먹는 것은 모두 몸소 잡고 삶는다. 민속은 자바와 비슷하고 물산은 모두 유불과 같다. 술 금지가 매우 엄하여 항상 세금이 있다. 그러나 대가(부호)는 모두 마시지 않고 오직 호적 없는 백성들이 마시는데, 그 짝들이 모두 비웃는다. 혼인하는 자는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그 문호를 지키므로(데릴사위) 딸을 낳는 것이 아들을 낳는 것보다 낫다. 장례는 화장을 쓴다. 중국인이 가서 장사하는데 거래가 매우 공평하다. 유불에게 격파된 이후로 가는 자가 또한 드물다.

파라서(巴剌西)

파라서는 중국에서 아주 멀다. 정덕 6년 사신 사지백을 보내 입공하여 말하기를 "그 나라는 남해에 있는데 비로소 왕명을 받들어 내조하다가 배가 4년 반을 가서 바람을 만나 서란해에 표류하여 배가 부서지고 단지 작은 배 한 척만 남아 또 8일을 표류하여 득길령국에 이르러 1년을 살았습니다. 비득에 이르러 8개월을 살았습니다. 이에 육로를 따라 26일을 지나 섬라에 도착하여 사정을 왕에게 고하니 일용할 것을 하사받고 또 부녀자 4명을 하사받아 4년을 살았습니다. 금년 5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외국 배에 붙어 광동에 들어와 대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금엽표를 올리고 조모록(에메랄드) 1개, 산호수, 유리병, 파리잔 각 4개 및 마노 구슬, 호흑단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황제가 그 멀리서 온 것을 가상히 여겨 하사를 더했다.

불랑기(佛郎機)

불랑기(포르투갈)는 만랄가(멜라카)와 가깝다. 정덕 연간에 만랄가 땅을 점거하고 그 왕을 쫓아냈다. 13년(1518년) 사신 가필단말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봉작을 청하니 비로소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조서를 내려 토산물의 값을 쳐주고 돌려보냈다. 그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떠나지 않고 행인을 약탈하고 겁박하며 심지어 어린 아이를 약탈하여 먹는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얼마 후 진수 중귀(환관)에게 인연을 맺어 경사(북경)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무종이 남쪽으로 순행할 때 그 사신 화자아삼이 강빈을 통해 황제의 좌우를 모셨다. 황제가 때때로 그 말을 배워 놀이로 삼았다. 회원역에 머무는 자들이 더욱 양민을 약탈하고 매매하며 집을 짓고 요새를 세워 오래 거주할 계책을 꾸몄다.

15년, 어사 구도륭이 말하기를 "만랄가는 칙서로 봉한 나라인데 불랑기가 감히 병합하고, 또 우리를 이익으로 꾀어 봉작과 조공을 요구하니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그 사신을 물리치고 순역을 분명히 보여 만랄가 강토를 돌려주게 한 뒤에야 비로소 조공을 허락해야 합니다. 만약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여러 번국에 격문을 보내 죄를 성토하고 토벌을 이루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어사 하오가 말하기를 "불랑기는 가장 흉하고 교활하며 병기가 여러 번국보다 유독 정교합니다. 지난 해에 큰 배를 타고 광동 회성에 돌입하여 대포 소리가 땅을 진동시켰습니다. 역관에 머무는 자는 제도를 어기고 교통하며 도성에 들어온 자는 사납고 교만하여 윗자리를 다투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왕래하며 무역하는 것을 들어주면 형세가 반드시 다투고 살상하여 남방의 화가 거의 끝이 없을 것입니다. 조종의 조공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고 방어에는 떳떳한 제도가 있어서 오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포정사 오정거가 상공할 향 물건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느 해인지를 묻지 않고 오면 즉시 물건을 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외국 배가 바닷가에 끊이지 않고 만인(오랑캐)이 주성(지방 도시)에 뒤섞였습니다. 금하고 방어함이 이미 소홀해지고 물길이 더욱 익숙해졌습니다. 이것이 불랑기가 기회를 틈타 갑자기 이르게 된 까닭입니다. 청컨대 오(마카오 등)에 있는 외국 배와 몰래 거주하는 외국인을 모두 몰아내고 사사로이 통하는 것을 금하며 수비를 엄하게 하면 거의 한 지방이 편안함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상소가 예부에 내려지니 말하기를 "구도륭은 먼저 순덕을 다스렸고 하오는 바로 순덕 사람이므로 이해관계를 깊이 알고 있습니다. 마땅히 만랄가 사신이 오기를 기다려 조정에서 불랑기가 이웃 나라를 침탈하고 내지를 소란케 한 죄를 힐문하고 처치를 주상해야 합니다. 기타는 모두 어사의 말과 같이 하십시오."라고 하니 재가했다.

[해설]

불랑기(佛郎機)는 'Frank'의 음역으로, 당시 명나라는 포르투갈을 이렇게 불렀다. 이 기록은 중국과 유럽 세력의 초기 충돌을 보여준다. '가필단말'은 포르투갈의 사절 'Fernão Pires de Andrade' 또는 그 일행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아삼'은 톰 피레스(Tomé Pires)의 통역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아이를 먹는다는 소문은 당시 서양인에 대한 공포와 편견, 그리고 포르투갈인의 잔혹 행위에 대한 소문이 섞인 것이다.

아삼이 황제를 모시며 교만함이 심했다. 어가를 따라 도성에 들어와 회동관에 거주했다. 제독주사 양작을 보고 무릎을 꿇지 않았다. 양작이 노하여 그를 매질했다. 강빈이 크게 욕하며 말하기를 "그는 일찍이 천자와 더불어 희롱했는데 너 같은 작은 관리에게 무릎을 꿇겠느냐?"라고 했다. 이듬해 무종이 붕어하자 아삼을 관리에게 넘겼다. 스스로 본래 중국인인데 번인에게 부림을 당했다고 말하여 이에 법대로 처형하고 그 조공을 끊었다. 그해 7월 또 조정 사신을 접제한다는 핑계로 토산물을 가지고 와서 시장을 요구했다. 지방관이 전례대로 추분(세금 징수)을 청했으나 조서를 내려 다시 거절했다. 그 장수 별도로는 이미 거포와 날카로운 무기로 만랄가 여러 나라를 제멋대로 약탈하고 해상에서 횡행하다가 다시 그 부하 소세리 등을 거느리고 배 5척을 몰아 파서국(브라질? 또는 페르시아?)을 격파했다.

가정 2년(1523년) 드디어 신회의 서초만을 침략하니 지휘 가영, 백호 왕응은이 방어했다. 전전하여 초주에 이르렀는데 향화인(귀화인) 반정구가 먼저 오르고 무리가 일제히 나아가 별도로, 소세리 등 42명을 생포하고 35급을 참수했으며 그 배 2척을 포획했다. 나머지 적이 다시 배 3척을 이끌고 접전했다. 왕응은이 전사하고 적 또한 패하여 달아났다. 관군이 그 대포를 얻어 즉시 이름을 불랑기라 하고 부사 왕굉이 조정에 바쳤다. 9년 가을, 왕굉이 벼슬이 높아져 우도어사가 되어 상언하기를 "지금 변방에 돈대와 성보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오랑캐가 오면 문득 유린당하는 것은 대개 돈대는 망보는 것에 그치고 성보에는 또한 멀리 제압할 도구가 없으므로 왕왕 곤란을 당합니다. 마땅히 신이 바친 랑기(불랑기포)를 쓰되, 그 작아서 20근 이하이고 사거리가 600보인 것은 돈대에 써야 합니다. 돈대마다 1개를 쓰고 3명이 지키게 하십시오. 그 커서 70근 이상이고 사거리가 5~6리인 것은 성보에 써야 합니다. 보마다 3개를 쓰고 10명이 지키게 하십시오. 5리에 돈대 하나, 10리에 보 하나를 두어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의지하고 멀고 가까운 것이 서로 호응하면 적이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니 앉아서 싸우지 않고도 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기뻐하며 즉시 따랐다. 화포에 불랑기가 있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장수와 병사가 잘 쓰지 못해 끝내 적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처음에 광동의 문무관 월봉을 번화(외국 물건)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물건이 오는 것이 적어지자 다시 불랑기와 통상(호시)을 허락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급사중 왕희문이 힘써 간쟁하여, 이에 여러 번국이 제때 조공하지 않거나 감합에 차실이 있는 자는 모두 행하길 금지한다는 영을 정하니 이로 말미암아 외국 배가 거의 끊어졌다. 순무 임부와 상언하기를 "광동의 공적, 사적 여러 비용은 상세(상업 세금)에 많이 의지하는데 외국 배가 오지 않으니 공사가 모두 곤궁합니다. 지금 불랑기에게 호시를 허락하면 네 가지 이로움이 있습니다. 조종 때 여러 번국이 항상 조공하는 것 외에 원래 추분(세금)하는 법이 있었는데 조금 그 나머지를 취하면 어용에 충당하기 족하니 이로움이 하나요. 양 광동(광동, 광서)이 해마다 용병하여 국고가 고갈되었는데 이것을 빌려 군향을 충당하고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할 수 있으니 이로움이 둘이요. 광서(월서)는 본래 광동(월동)에게 공급을 의지하는데 조금만 징발이 있어도 조치하지 못해 나아가지 못하니 만약 외국 배가 유통되면 상하가 서로 구제될 것이니 이로움이 셋이요. 소민(백성)은 무역으로 생계를 삼는데 한 돈의 물건을 가지면 곧 전전하여 판매하고 바꾸어 그 가운데서 의식을 해결하니 이로움이 넷입니다. 나라를 돕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여 양쪽이 의지하는 바가 있으니 이것은 백성의 이익으로 인하여 그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 이익의 구멍을 열어 백성에게 화의 사다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따랐다. 이로부터 불랑기가 향산오(마카오)에 들어와 시장을 열 수 있었고 그 무리가 또 경계를 넘어 복건에서 장사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해설]

이 부분은 명나라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금지했다가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다시 허용하고, 결국 마카오 거주를 묵인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추분'은 명나라의 관세 제도이다. 임부의 상소는 해금 정책 완화의 경제적 논리를 잘 보여준다.

26년에 이르러 주환이 순무가 되어 외국과 통하는 것을 엄금했다. 그 사람들이 이익을 얻을 곳이 없자 무리를 정돈하여 장주의 월항, 오서를 침범했다. 부사 가교 등이 방어하여 물리쳤다. 28년 또 조안을 침범했다. 관군이 주마계에서 요격하여 적괴 이광두 등 96명을 생포하고 나머지는 달아났다. 주환이 편의(임의)로 그들을 참수했는데 주환을 원망하던 어사 진구덕이 드디어 그가 전단(마음대로 처리함)했다고 탄핵했다. 황제가 급사중 두여정을 보내 조사하게 했는데, 말하기를 이들은 만랄가 상인으로 해마다 해변의 무뢰한 무리를 불러 왕래하며 판매했을 뿐 참칭하거나 약탈한 일은 없는데 주환이 마음대로 죽였으니 진실로 어사가 탄핵한 것과 같다고 했다. 주환이 드디어 체포되자 자살했다. 대개 만랄가가 곧 불랑기인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주환이 죽은 후 해금이 다시 풀려 불랑기가 드디어 해상에서 거리낌 없이 횡행했다. 향산오, 호경(마카오)에서 시장을 여는 자들은 집을 짓고 성을 세워 바닷가에 웅거하기를 마치 하나의 나라처럼 했으며, 장수와 관리로서 어질지 못한 자들은 도리어 외부의 관청(외부)으로 보았다. 호경은 향산현 남쪽 호도문 밖에 있다. 이보다 앞서 섬라, 점성, 자바, 유구, 발니 여러 나라의 호시는 모두 광주에 있었고 시박사를 두어 관장했다. 정덕 때 고주의 전백현으로 옮겼다. 가정 14년 지휘 황경이 뇌물을 받고 상관에게 청하여 호경으로 옮기고 해마다 세금 2만 금을 바치게 하니 불랑기가 드디어 섞여 들어올 수 있었다. 높은 기둥과 날아갈 듯한 지붕이 즐비하게 서로 바라보고 복건, 광동 상인들이 오리처럼 달려갔다. 오래되자 그 오는 것이 더욱 많아졌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 피하니 드디어 오로지 그들이 점거하는 바가 되었다. 44년 거짓으로 만랄가라 칭하고 입공했다. 얼마 후 포도려가(포르투갈)라고 고쳐 칭했다. 지방관이 보고하여 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필시 불랑기가 가탁한 것이라 하여 물리쳤다.

만력 연간에 여송(루손, 필리핀)을 격파하고 멸망시켜 복건, 광동 해상의 이익을 모두 독차지하니 세력이 더욱 치성해졌다. 34년에 이르러 또 물 건너 청주에 절을 세웠는데 높이가 6~7장이나 되고 굉장하고 기이하고 깊숙하여 중국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현 장대유가 그 높은 담장을 허물기를 청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번우의 거인 노정룡이 회시에 참가하러 도성에 들어와서 오(마카오) 안의 여러 번인을 모두 쫓아내고 낭백 외해로 나가 살게 하여 우리의 호경 옛 땅을 돌려받자고 청했으나 당국자가 쓸 수 없었다. 번인들이 이미 성을 쌓고 해외의 잡다한 번인을 모아 널리 무역을 통하니 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 땅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힐문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 보화를 탐내어 겉으로는 금지하고 속으로는 허락하는 자도 있었다. 총독 대요가 재임 13년 동안 그 환란을 양성했다. 번인들이 또 왜적을 몰래 숨겨주고 대적하여 관군을 죽였다. 42년 총독 장명강이 격문을 보내 번인에게 왜적을 바다로 몰아내게 하고 인하여 상언하기를 "광동에 오이(마카오 오랑캐)가 있는 것은 마치 등에 종기가 난 것과 같습니다. 오(마카오)에 왜적이 있는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가 달린 것과 같습니다. 지금 하루아침에 몰아내어 화살 하나 소비하지 않았으니 이는 성천자의 위엄과 덕이 이른 바입니다. 오직 왜적은 갔으나 번인은 아직 남아 있어 마땅히 토벌하여 없애야 한다는 자도 있고 마땅히 낭백 외양으로 옮겨 배에서 무역하게 해야 한다는 자도 있으나, 병사를 가볍게 움직이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호경은 향산 내지에 있어 관군이 바다를 둘러싸고 지키면 저들이 매일 먹는 소용이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어 한번 딴 마음을 품으면 우리가 곧 그 사명(목숨)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만약 외양으로 옮기면 큰 바다가 망망한데 간교한 짓을 어찌 힐문하며 제어를 어찌 시행하겠습니까? 약속을 분명히 밝혀 안으로는 간사한 자가 함부로 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고 밖으로는 왜적이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아 틈을 열지 말고 방비를 늦추지 않아 서로 편안히 우환이 없게 하는 것이 나은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부의 논의가 따랐다. 3년이 지나 중로 옹맥영에 참장을 설치하고 천 명을 징발하여 수자리 서게 하니 방어가 점차 조밀해졌다. 천계 원년(1621년) 지방관이 그들이 끝내 환란이 될까 염려하여 감사 풍종룡 등을 보내 그들이 쌓은 청주성을 허물게 하니 번인 또한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그때 대서양인(예수회 선교사 등)이 중국에 왔는데 또한 이 오(마카오)에 거주했다. 대개 번인은 본래 교역을 구할 뿐 처음에는 불궤할 모의가 없었는데 조정이 지나치게 의심하여 끝내 조공을 허락하지 않고 또 제압할 힘도 없었으므로 논하는 자들이 분분했다. 그러나 명나라가 마칠 때까지 이 번인은 진실로 일찍이 변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은 키가 크고 코가 높으며 고양이 눈에 매의 부리 같고 곱슬머리에 붉은 수염이며 장사를 좋아하고 강함을 믿고 여러 나라를 능멸하여 가지 않는 곳이 없다. 뒤에 또 간계랍국(스페인/카스티야)이라 칭했다. 산물은 코뿔소, 코끼리, 진주, 조개 종류가 많다. 의복은 화려하고 깨끗하며 귀한 자는 관을 쓰고 천한 자는 삿갓을 쓰는데 존장을 보면 문득 벗는다. 처음에는 불교를 받들다가 뒤에는 천주교를 받들었다. 교역할 때 단지 손가락을 펴서 수를 세는데 비록 천금이라도 계약서를 쓰지 않으며 일이 있으면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고 서로 저버리지 않는다. 만랄가, 파서, 여송 세 나라를 멸망시킨 이후로 해외의 여러 번국이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화란(和蘭)

화란(네덜란드)은 또 홍모번(붉은 털 오랑캐)이라 하며 땅이 불랑기와 가깝다. 영락, 선덕 때 정화가 일곱 번 서양에 내려가 여러 번국 수십 개 나라를 지났으나 이른바 화란이라는 자는 없었다. 그 사람은 눈이 깊고 코가 길며 머리카락, 눈썹, 수염이 모두 붉고 발 길이 1척 2촌이며 키가 큰 것이 보통의 배나 된다.

만력 연간에 복건 상인이 해마다 인(허가증)을 받아 대니(파타니), 여송(루손), 교유파(바타비아/자카르타)에 가서 판매했는데, 화란인은 여러 나라에 나아가 전매(물건을 받아 다시 팖)했을 뿐 감히 중국을 엿보지 못했다. 불랑기가 향산에서 시장을 열고 여송을 점거하자 화란이 듣고 부러워했다. 29년(1601년) 큰 배를 몰고 거포를 휴대하고 곧바로 여송에 육박했다. 여송 사람이 힘껏 막으니 방향을 돌려 향산오(마카오)에 육박했다. 오(마카오) 사람들이 숫자를 힐문하자 말하기를 조공하고 통상하고자 할 뿐 감히 도적질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당국자가 어렵게 여겼다. 세사 이도가 즉시 그 추장을 불러 성에 들어오게 하고 한 달 동안 놀며 지내게 했으나 감히 조정에 알리지 못하고 이에 돌려보냈다. 오(마카오) 사람들은 그들이 상륙할까 염려하여 삼가 방어하니 비로소 이끌고 떠났다.

해징 사람 이금과 간사한 상인 반수, 곽진이 오랫동안 대니에 살며 화란인과 익숙했다. 중국 일을 말하다가 이금이 말하기를 "너희가 조공하고 통상하고자 한다면 장주만한 곳이 없다. 장주 남쪽에 팽호(펑후 제도)라는 섬이 있는데 바다와 거리가 머니 진실로 빼앗아 지키면 공시(조공과 무역)를 이루기 어렵지 않다."라고 했다. 그 추장 마위랑(Wijbrand van Warwijck)이 말하기를 "지방관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찌하느냐?" 하니 "세사 고채가 금과 은을 매우 좋아하니 만약 후하게 뇌물을 주면 그가 특별히 상소하여 올릴 것이고 천자가 반드시 재가할 것이니 지방관이 감히 뜻을 거역하겠느냐."라고 했다. 추장이 "좋다." 했다. 이금이 이에 대니 국왕의 편지를 대신 써서 하나는 고채에게 보내고 하나는 병비부사에게, 하나는 수장에게 보내어 반수, 곽진으로 하여금 가지고 오게 했다. 수장 도공성이 크게 놀라 급히 당국자에게 알리고 반수를 옥에 가두니 곽진은 끝내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처음에 반수가 추장과 약속하기를 복건에 들어와 의논이 이루어지면 마땅히 배를 보내 알리겠다고 했는데 추장이 성격이 급해 기다리지 못하고 즉시 큰 배 2척을 몰아 곧바로 팽호에 도착했다. 때는 32년 7월이었다. 순찰하던 병사가 이미 철수하여 마치 무인의 폐허에 들어온 것 같았으므로 드디어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오래 거주할 계책을 세웠다. 이금 또한 몰래 장주에 들어와 정탐하고는 거짓으로 잡혔다가 도망쳐 왔다고 말했는데 당국자가 이미 그 정황을 조사하여 알고 아울러 옥에 가두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을 보내 그 추장을 타일러 귀국하게 하고 스스로 속죄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의논했으며 또 곽진을 잡아 함께 가게 했다. 세 사람이 이미 추장과 약속을 했으므로 자기들의 실책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단지 "우리나라가 아직 머뭇거려 결정하지 못했다"라고만 했다. 당국자가 보낸 장교 제헌충이 격문을 가지고 가서 타일렀는데 이에 폐백과 식물을 많이 휴대하고 그 후한 보답을 바랐다. 해변 사람들도 몰래 화물을 싣고 가서 무역하니 추장이 더욱 관망하며 가려 하지 않았다. 당국자가 여러 번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 추장의 말을 보면 문득 굴복하지 않고 더욱 오만해졌다. 고채가 이미 심복 주지범을 추장에게 보내 3만 금을 고채에게 주면 즉시 공시를 허락하겠다고 설득하니 추장이 기뻐하며 주었다. 맹약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마침 총병 시덕정이 도시 심유용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타이르게 했다. 심유용은 담력과 지혜를 자부하여 큰 소리로 논설하니 추장이 마음으로 꺾여 이에 말하기를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라고 했다. 그 아랫사람이 칼을 드러내고 따져 물었으나 심유용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기세를 높여 변론하니 추장이 이에 뉘우치고 깨달아 주지범에게 주었던 금을 돌려주게 하고 단지 다라련(모직물), 유리 그릇 및 번도(외국 칼), 번주(외국 술)를 고채에게 주며 통상을 대신 주상해 달라고 청했다. 고채는 감히 응하지 못했고 순무와 순안이 간사한 백성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엄금하고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이니 이로 말미암아 접제할 길이 막혀 번인들이 먹을 것을 얻지 못하자 10월 말 닻을 올리고 떠났다. 순무 서학취가 반수, 이금 등의 죄를 탄핵하여 사형과 유배를 차등 있게 논했다.

[해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초기 중국 진출 시도와 실패를 다룬다. '교유파'는 자카르타(바타비아)를 말한다. 심유용(Shen Yourong)이 단신으로 네덜란드 함대에 가서 담판을 지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금 등의 화교 브로커들이 개입된 정황이 상세하다.

그러나 이때 불랑기가 해상에서 횡행하고 홍모(네덜란드)가 패권을 다투어 다시 배를 띄워 동쪽으로 와서 미락거국(몰루카 제도)을 쳐서 격파하고 불랑기와 땅을 나누어 지켰다. 뒤에 또 대만(타이완) 땅을 침탈하여 집을 짓고 밭을 갈며 오래 머물러 떠나지 않으니 해상의 간사한 백성들이 함부로 화물을 내어 그들과 교역했다. 얼마 후 또 나와 팽호를 점거하고 성을 쌓고 수비를 설치하여 점차 시장을 요구할 계책을 세웠다. 지방관이 화를 두려워하여 성을 허물고 멀리 옮겨가면 즉시 호시를 허락하겠다고 설득했다. 번인이 그 말을 따라 천계 3년(1623년) 과연 그 성을 허물고 배를 옮겨 떠났다. 순무 상주조가 유시를 따라 멀리 옮겨갔다고 보고했으나 그들이 대만을 점거한 것은 예전과 같았다. 얼마 후 호시가 이루어지지 않자 번인이 원망하여 다시 팽호에 성을 쌓고 어선 600여 척을 약탈하여 중국인으로 하여금 흙과 돌을 운반해 쌓는 것을 돕게 했다. 곧 하문을 침범하여 관군이 방어하여 수십 명을 사로잡고 베니 이에 거짓 말로 화친을 청했다. 재차 성을 허물고 멀리 옮겨갈 것을 허락했으나 성을 수축하기를 예전과 같이 했다. 얼마 후 또 풍궤자(펑구이)에 정박하고 오서, 백갱, 동정, 포두, 고뢰, 홍서, 사주, 갑주 사이를 출몰하며 호시를 요구했다. 해적 이단이 다시 그들을 도우니 바닷가 군과 읍이 계엄 상태가 되었다.

그해 순무 남거익이 처음 부임하여 토벌을 모의했다. 상언하기를 "신이 국경에 들어온 이래 들으니 번선 5척이 계속 도착하여 풍궤자의 배와 합쳐 모두 11척이 되었는데 그 기세가 더욱 치성합니다. 소교 진사영이라는 자가 있어 먼저 교유파(자카르타)에 보내 그 왕에게 선유하게 했는데 삼각서에 이르러 홍모의 배를 만나니 말하기를 교유파 왕은 이미 아남국으로 갔다고 하여 인하여 진사영과 함께 대니(파타니)에 이르러 그 왕을 알현했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교유파 국주가 이미 전함을 크게 모아 팽호에 가서 호시를 구할 것을 의논했는데 만약 허락받지 못하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했습니다. 대개 아남은 곧 홍모번의 나라(네덜란드 본국 또는 거점)이고 교유파, 대니가 그들과 공모했으니 반드시 이치로 타일러서는 안 됩니다. 오늘을 위한 계책은 병사를 쓰는 것 외에는 불가합니다."라고 했다. 인하여 병사를 조동하고 군량을 족히 할 방략을 열거하여 올리니 부의 의논이 따랐다. 4년 정월 장수를 보내 먼저 진해항을 빼앗아 성을 쌓고 한편으로 쌓고 한편으로 싸우니 번인이 이에 물러나 풍궤성을 지켰다. 남거익이 병사를 증원하여 가서 돕고 수개월을 공격했으나 적이 오히려 물러나지 않자 이에 병사를 크게 일으켜 여러 군이 일제히 나아갔다. 적의 형세가 궁해지자 두 번 사신을 보내 병사를 늦춰주기를 구하고 쌀을 운반해 배에 들이는 것을 용인해주면 즉시 물러가겠다고 했다. 여러 장수가 궁한 적은 쫓지 않는다 하여 허락하니 드디어 돛을 올리고 떠났다. 유독 그 우두머리 고문율 등 12명이 높은 누각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키니 여러 장수가 격파하고 사로잡아 조정에 포로로 바쳤다. 팽호의 경보는 이로써 그쳤으나 그들이 대만을 점거한 것은 오히려 예전과 같았다.

숭정 연간에 정지룡에게 격파되어 감히 내지를 엿보지 못한 지 수년이었는데, 이에 향산의 불랑기와 통호하여 사사로이 외양에서 무역했다. 10년 4척의 배를 몰고 호도문을 경유하여 광주에 육박해 소리쳐 시장을 구한다고 했다. 그 추장이 시장에서 요동하며 부르짖으니 간사한 백성들이 보기를 금광처럼 여겼는데 대개 대성(유력 가문) 중에 그들을 위해 주선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국자가 호경(마카오)의 일을 거울삼아 몰아낼 것을 의논했으나 혹자가 그 가운데서 방해했다. 마침 총독 장경심이 처음 도착하여 불가함을 강력히 견지하니 이에 달아났다. 얼마 후 간민 이엽영에게 유인되어 총병 진겸과 교통하여 머무르는 곳으로 삼고 드나들었다. 일이 드러나 이엽영은 관리에게 넘겨졌다. 진겸은 스스로 전용(보직 변경)을 청하여 화를 피하려 했으나 병과 능의구 등에게 탄핵되어 체포되어 심문받았다. 이로부터 간민들이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다시는 감히 유인하지 않았으나 번인은 오히려 대만을 점거하기를 예전과 같이 했다.

[해설]

이 단락은 네덜란드가 대만(젤란디아 요새)을 점거하게 된 배경과 명나라와의 충돌, 그리고 정지룡(정성공의 아버지)의 등장을 다룬다. '아남'은 네덜란드 본국이라기보다는 안남(베트남) 등을 오인했거나 특정 거점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문율은 네덜란드 장교 코르넬리스 레이어스(Cornelis Reijersen) 휘하의 장교이거나 레이어스 본인을 지칭하는 중국식 표기로 추정된다(실제 레이어스는 포로가 되지 않고 떠났으므로 다른 장교일 수 있다). 정지룡은 해적 출신으로 명나라에 귀순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견제했다.

그 본국은 서양에 있는데 중화와 거리가 아주 멀어 중국인이 일찍이 가본 적이 없다. 그들이 믿는 것은 오직 큰 배와 대포뿐이다. 배는 길이가 30장, 너비가 6장, 두께가 2척 2촌이며 돛대를 5개 세우고 뒤에는 3층 누각을 만들었다. 옆에 작은 창을 내어 동포(구리 대포)를 설치했다. 돛대 아래에는 2장(길이)의 거대한 철포를 두었는데 발사하면 돌성을 뚫고 깨뜨릴 수 있으며 진동이 수십 리에 달하니 세상에서 칭하는 홍이포가 바로 그 제도이다. 그러나 배가 커서 방향을 바꾸기 어렵고 혹 얕은 모래톱을 만나면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또 전투에 서툴러서 왕왕 꺾이고 패했다. 그들이 부리는 자는 이름이 오귀(검은 귀신)이다. 물에 들어가면 가라앉지 않고 해면을 달리기를 평지처럼 한다. 그 키 뒤에는 조해경을 설치했는데 크기가 지름 수 척으로 능히 수백 리를 비춘다. 그 사람들은 모두 천주교를 받든다. 산물로는 금, 은, 호박, 마노, 유리, 천하고(벨벳), 쇄복, 다라련 등이 있다. 국토가 이미 부유하여 마음에 드는 중국 물건을 만나면 후한 값을 아끼지 않으므로 중국인들이 즐겨 그들과 시장을 열었다.

[해설]

마지막 부분은 네덜란드 선박(갤리온선)과 무기, 노예에 대한 묘사이다. '오귀'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출신의 흑인 노예를 지칭하는데, 수영을 잘한다는 묘사가 흥미롭다. '홍이포'는 명청 교체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포이다. '조해경'은 망원경이나 거울을 과장하여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명사(明史) 권326 열전 제214 외국7

 

고리(古里)

고리는 인도 서해안에 위치한다. 정화가 제1차 서양 원정 때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 말하기를 '그 나라는 중국에서 10만여 리 떨어져 있고, 백성과 산물이 모두 평온하며, 밝고 깨끗한 풍속이 같기에, 이에 돌에 새겨 영원히 만세에 알린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화가 국외에 세운 최초의 비석이다. 훗날 정화는 제7차 서양 원정 후 귀국하는 도중 이곳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서양의 큰 나라이다. 서쪽은 큰 바다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가지국과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낭노아국과 떨어져 있고, 동쪽으로 700리 거리에 감파국이 있다. 가지에서 배로 3일이면 갈 수 있고, 석란산(스리랑카)에서는 10일이면 갈 수 있어 여러 번국들이 모이는 요충지이다.

영락 원년(1403년)에 환관 윤경에게 명하여 조서를 받들고 그 나라를 위로하게 하고, 채색 비단을 하사하였다. 그 추장 사미적희가 사신을 보내 윤경을 따라 입조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3년에 난징에 도착하니 국왕으로 봉하고 인신과 고명, 문이 있는 비단 등 여러 물건을 하사하였으며, 드디어 매년 입공하였다. 정화 또한 자주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3년에 가지, 남발리, 감파리, 만랄가 등의 나라와 함께 입공하였다. 14년에는 자와, 만랄가, 점성, 석란산, 목골도속, 유산, 남발리, 불라와, 아단, 소문답랄, 마목, 라살, 홀로모스, 가지, 남무리, 사리만이, 팽형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입공하였다. 이때 여러 번국의 사신들이 조정에 가득 찼는데, 고리가 대국이라 하여 그 사신을 우두머리로 삼았다. 17년에 만랄가 등 17개국과 함께 와서 조공하였다. 19년에 또 홀로모스 등의 나라와 함께 입공하였다. 21년에 다시 홀로모스 등과 함께 사신 1,200명을 보내 입공하였다. 당시 황제가 막 요새 밖으로 나갔기에 황태자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날씨가 추워지니 공물 바치는 사신은 예관에게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고 하사품을 주어 돌려보내라. 토산물을 가지고 와서 매매하려는 자는 관에서 그 값을 쳐주어라'고 하였다. 선덕 8년, 그 왕 비리마가 사신을 보내 소문답랄 등 여러 나라 사신과 함께 입공하였다. 그 사신이 남경(유도)에 들어왔는데, 정통 원년에 이르러 자와(자바)의 조공선에 태워 서쪽으로 돌아가게 명하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 나라는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하여 곡식은 있으나 보리는 없다. 풍속은 매우 순박하여 길 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는다. 사람은 다섯 등급으로 나뉘는데 가지국과 같고, 불교를 공경하고 우물을 파서 부처를 씻기는 것 또한 같다. 매일 아침 왕과 신하, 백성은 소똥을 가져다 물에 개어 벽과 땅에 바르고, 또 태워서 재를 만들어 이마와 허벅지에 바르는데, 이를 부처를 공경하는 것이라 한다. 나라 안에서는 회교(이슬람교)를 숭상하는 이가 절반이라 예배 사원 수십 곳을 세웠다. 7일에 한 번 예배하는데, 남녀가 재계하고 목욕하며 일을 쉰다. 오시(낮 12시)에 사원에서 하늘에 절하고 미시(오후 2시)에 흩어진다. 왕이 늙으면 아들에게 전하지 않고 생질(누이의 아들)에게 전하며, 생질이 없으면 동생에게 전하고, 동생이 없으면 나라의 덕망 있는 자에게 전한다. 나랏일은 모두 두 장령이 결정하는데 회회인(무슬림)이 맡는다. 형벌에는 채찍질이 없고 가벼운 자는 손발을 자르며, 무거운 자는 벌금으로 금과 진주를 내게 하고, 더욱 무거운 자는 멸족하고 재산을 몰수한다. 국문하여도 자백하지 않으면 그 손가락을 끓는 물 속에 넣어 3일 동안 짓무르지 않으면 죄를 면해준다. 죄를 면한 자는 장령이 풍악을 울리며 인도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친척들이 하례한다.

부유한 집은 야자수를 심어 수천 그루에 이른다. 어린 것은 즙을 마실 수 있고 술을 빚을 수도 있으며, 늙은 것은 기름과 설탕을 만들고 밥을 지을 수도 있다. 줄기는 집을 짓고 잎은 기와를 대신하며, 껍질은 잔을 만들고 속으로는 밧줄을 꼬며, 태워서 재를 만들면 금을 상감할 때 쓴다. 기타 채소, 과일, 가축은 중국과 비슷한 것이 많다. 바치는 공물로는 보석, 산호주, 유리병, 유리베개, 보철도, 불랑 쌍날칼, 금 허리띠, 아사모달도아기, 용연향, 소합유, 꽃무늬 담요, 백란포, 필포 등의 종류가 있다.

[해설]

고리는 현재 인도 케랄라주의 코지코드를 말한다. 정화 원정대의 중요한 기항지였다. 본문에서 묘사하는 왕위 계승 방식(누이의 아들에게 전승)은 케랄라 지방의 모계 사회 전통인 '마루마카타얌'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소똥을 바르는 것은 힌두교의 관습이고, 예배 사원에 가는 것은 이슬람교의 관습이다.

가지(柯枝)

가지는 혹은 고반반국이라고도 한다. 송, 양, 수, 당나라 때 모두 입공하였다. 소갈란에서 서북쪽으로 가서 순풍을 만나면 하룻밤에 이를 수 있다.

영락 원년(1403년), 환관 윤경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그 나라를 위로하게 하고, 금을 입힌 장막과 금실로 짠 비단, 채색 비단 및 화려한 덮개를 하사하였다. 6년에 다시 정화에게 명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9년에 왕 가역리가 사신을 보내 입공하였다. 10년에 정화가 다시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고, 2년 연속 입공하였다. 그 사신이 인신과 고명을 내려주고 나라 안의 산을 봉해달라고 청하였다. 황제는 정화를 보내 인신을 왕에게 하사하고, 인하여 비문을 지어 산 위 돌에 새기게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의 교화가 천지와 더불어 통하니,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 도야(조화)에 들어온 자는 조화의 어짊을 체득한 것이다. 대개 천하에 두 가지 이치가 없고 생민에게 두 마음이 없으니, 근심과 기쁨의 같은 정과 편안함과 배부름의 같은 욕구에 어찌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겠는가. 임금과 백성의 맡음을 받은 자는 마땅히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왕기 천 리는 백성이 머무는 곳이라, 사해에 그 경계를 넓힌다" 하였고, 서경에 이르기를 "동으로는 바다에, 서으로는 유사에 미치고, 북과 남으로 명성과 교화가 이르러 사해에 닿는다" 하였다. 짐이 천하에 군림하여 중화와 오랑캐를 어루만져 다스림에 일시동인하여 피차의 사이가 없다. 옛 성제명왕의 도를 미루어 천지의 마음에 합치하고자 한다. 먼 나라와 다른 지역이 모두 각기 그 처소를 얻게 하니, 풍문을 듣고 교화를 따르는 자가 뒤처질까 다툰다.

가지국은 멀리 서남쪽에 있어 바닷가와 떨어져 있고 여러 번국의 바깥에 솟아 있는데, 중화를 사모하고 덕화를 흠모한 지 오래되었다. 명령이 이르자 무릎 꿇고 기뻐 뛰며 순순히 따르고 귀의하여, 모두 하늘을 우러러 절하며 말하기를 "어찌 다행인가, 중국 성인의 가르침이 우리에게까지 미치다니!" 하였다. 이에 몇 년 이래로 나라 안이 풍요로워지고, 거처에는 집이 있고, 먹을 것은 물고기와 자라가 풍족하며, 입을 것은 베와 비단이 족하고, 늙은이는 어린이를 사랑하고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며, 화락하게 즐거워하여 능멸하고 다투는 습관이 없어졌다. 산에는 사나운 짐승이 없고 시내에는 악한 물고기가 없으며, 바다에서는 기이한 보배가 나고 숲에서는 좋은 나무가 생산되어, 모든 물건이 번성함이 보통을 갑절이나 넘는다. 사나운 바람이 일지 않고 빠른 비가 내리지 않으며, 역병이 그치고 재앙이 없다. 대개 매우 성대하도다. 짐이 덕이 얇음을 헤아리건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이루어 낸 바가 아니겠는가? 이에 가역리를 봉하여 국왕으로 삼고 인장을 하사하여 그 백성을 어루만져 다스리게 한다. 아울러 그 나라 안의 산을 봉하여 진국(나라를 지키는)의 산으로 삼고 비석을 그 위에 새겨 무궁토록 보이게 한다.' 하고는 명(銘)을 이어 말하기를, '저 높은 산을 깎아 바다 나라의 진산으로 삼으니, 연기를 토하고 구름을 내어 아래 나라를 넓고 크게 하네. 그 번잡하고 높음을 엄숙히 하여 비와 볕을 때맞추고, 저 요기 서린 기운을 물리쳐 저 풍년을 만든다. 재앙도 없고 질병도 없어 영원히 이 강역을 덮어주니, 넉넉히 노니는 세월에 집집마다 서로 경사로다. 아! 산의 우뚝함이여, 바다의 깊음이여, 이 명시를 새겨 서로 처음과 끝을 함께 하리라.' 하였다. 이후로는 해를 걸러 입공하였다.

선덕 5년, 다시 정화를 보내 그 나라를 위로하였다. 8년에 왕 가역리가 사신을 보내 석란산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와서 조공하였다. 정통 원년에 그 사신을 보내 자와 조공선에 태워 귀국하게 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왕을 위로하였다.

왕은 소리 사람(Chola 사람, 혹은 남인도인)으로 불교를 숭상한다. 불좌 사방은 모두 물도랑이고 다시 우물을 하나 팠다. 매일 아침 종과 북을 울리고 물을 길어 부처에게 붓고 세 번 목욕시킨 뒤에야 늘어서 절하고 물러난다.

그 나라는 석란산과 마주 보고 있으며, 가운데는 고리와 통하고 동쪽은 큰 산이며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다. 풍속은 자못 순박하다. 집을 지을 때 야자수를 재목으로 삼고 잎을 취해 엮어서 지붕을 덮는데 비바람을 모두 가릴 수 있다.

사람은 다섯 등급으로 나뉜다. 첫째는 남곤(Nair/Brahmin 계급)이라 하여 왕족 부류이다. 둘째는 회회(무슬림), 셋째는 철지(Chetti)인데 모두 부유한 백성이다. 넷째는 혁전(Chetties/Artisans)인데 모두 중개상이다. 다섯째는 목과(Mukkuvar)이다. 목과는 가장 가난하여 남을 위해 천한 일을 하는 자들이다. 집 높이는 3자를 넘을 수 없다. 옷은 위로는 배꼽을 넘지 못하고 아래로는 무릎을 넘지 못한다. 길에서 남곤이나 철지 사람을 만나면 문득 땅에 엎드려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난다.

기후는 항상 덥다. 1년 중 2, 3월에는 비가 적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집을 수리하고 식량을 저축하며 기다린다. 5, 6월 사이에는 큰비가 그치지 않아 거리와 시장이 강을 이루고, 7월에 비로소 개며 8월 이후에는 다시 비가 오지 않는데 해마다 모두 그러하다. 밭이 척박하여 수확이 적고 여러 곡식이 모두 나지만 유독 보리는 없다. 가축 또한 모두 있으나 유독 거위와 당나귀는 없다고 한다.

[해설]

가지는 현재 인도 케랄라주의 코치(Kochi)이다. 명나라 영락제는 이곳의 산을 '진국지산'으로 봉하고 비석을 내렸는데, 이는 명나라의 조공 체계에서 이 나라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본문에서 묘사하는 5등급의 신분 제도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관찰한 것이다. '남곤'은 나이라(Nair) 혹은 남푸티리 브라만 계급을, '목과'는 불가촉천민에 가까운 하층민인 무쿠바(Mukkuvar) 어민 계급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기후 묘사는 인도의 몬순 기후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소갈란(小葛蘭), 대갈란(大葛蘭)

소갈란은 그 나라가 가지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석란산에서 서북쪽으로 6일 낮밤을 가면 도달할 수 있다. 동쪽은 큰 산이고 서쪽은 큰 바다이며 남북으로 땅이 좁은 서양의 작은 나라이다. 영락 5년에 사신을 보내 고리, 소문답랄에 부쳐 입공하니, 그 왕에게 비단, 사라, 안장 얹은 말 등 여러 물건을 하사하고 그 사신에게도 하사함이 있었다.

왕과 신하들은 모두 소리 사람으로 불교를 받든다. 소를 중히 여기며 기타 혼인과 장례 등의 예절은 석란과 같은 것이 많다. 풍속은 순박하다. 땅이 척박하여 수확이 적어 방갈라에 의지하여 공급받는다. 정화가 일찍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 공물은 오직 진주 우산, 흰 무명, 후추뿐이다.

또 대갈란이라는 곳이 있는데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배를 댈 수 없으므로 상인들이 드물게 이른다. 흙이 검고 기름져 본래 곡식과 보리에 마땅하나 백성들이 경작을 게을리하여 해마다 오다(Orissa?)의 쌀에 의지하여 식량을 충당한다. 풍속과 물산은 소갈란과 비슷한 점이 많다.

[해설]

소갈란은 현재 인도 케랄라주의 콜람(Kollam, 옛 이름 Quilon)이다. '대갈란' 또한 인근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후추의 주요 산지 중 하나였다.

석란산(錫蘭山)

석란산은 혹 고대 낭아수라고도 한다. 양나라 때 중국과 통하였다. 소문답랄에서 순풍을 타면 12일 낮밤에 도달할 수 있다.

영락 연간에 정화가 서양에 사신으로 가서 그 땅에 이르렀는데, 그 왕 알열고내아가 정화를 해치려 하거늘 정화가 깨닫고 다른 나라로 떠났다. 왕은 또 이웃 국경과 화목하지 못하여 자주 오가는 사신들을 가로막고 약탈하니 여러 번국이 모두 괴로워하였다. 정화가 돌아올 때 다시 그 땅을 지나게 되자, 이에 정화를 나라 안으로 유인하고 병사 5만을 일으켜 정화를 겁박하고 귀로를 막았다. 정화가 이에 보병 2천을 거느리고 샛길을 통해 허점을 틈타 그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알열고내아 및 처자, 두목을 생포하여 조정에 포로로 바쳤다. 조정 신하들이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황제는 그 무지함을 불쌍히 여겨 처자와 함께 모두 풀어주고 또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그 족속 중 어진 자를 택하여 세우도록 명하였다. 사파내나라는 자가 있었는데 여러 포로들이 모두 그가 어질다고 칭하니, 이에 사신을 보내 인신과 고명을 주어 왕으로 봉하고 그 옛 왕도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해외의 여러 번국이 천자의 위엄과 덕에 더욱 복종하여 조공 사신이 길에 이어졌고, 왕이 드디어 자주 입공하였다.

선덕 5년, 정화가 그 나라를 위로하였다. 8년에 왕 불랄갈마파홀랄비가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정통 원년에 명하여 자와 조공선에 부쳐 돌아가게 하고 칙서를 내려 타일렀다. 10년에 만랄가 사신과 함께 와서 조공하였다. 천순 3년에 왕 갈력생하랄석리파교랄야가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그 후로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 나라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으며 화물이 많이 모여 자와 다음가는 수준이다. 동남쪽 바다 가운데 산 서너 좌가 있는데 총칭하여 취람서라 한다. 크고 작은 일곱 개의 문이 있어 문마다 배가 통할 수 있다. 가운데 한 산이 특히 높고 큰데 번국 이름으로 사독만산이라 한다. 그 사람들은 모두 둥지를 짓거나 굴에서 살며, 알몸에 머리를 깎았다. 전해오길 석가불이 옛날 이 산을 지날 때 물에서 목욕했는데 혹자가 그 가사를 훔치니 부처가 맹세하여 이르길 "훗날 옷을 입는 자는 반드시 그 피부와 살이 문드러지리라" 하였다. 이로부터 아주 작은 천조각이라도 몸에 걸치면 문득 창독이 생기므로 남녀가 모두 나체이다. 다만 나무 잎을 엮어 앞뒤를 가리거나 혹은 천을 두르기도 하므로 또 나형국이라 이름한다. 땅에는 곡식이 나지 않고 오직 물고기, 새우 및 산토란, 바라밀, 파초 열매 등을 먹는다. 이 산에서 서쪽으로 7일을 가면 앵무취산(앵무새 부리 산)이 보인다. 또 2, 3일을 가면 불당산에 이르는데 즉 석란 국경에 들어간 것이다. 바닷가 산돌 위에 발자국 하나가 있는데 길이가 3자 가량이다. 옛 노인이 말하길 부처가 취람서에서 와서 이곳을 밟았기에 발자국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가운데 얕은 물이 있어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데 사람들이 손을 담가 눈을 닦고 얼굴을 씻으며 '불수청정'이라 한다. 산 아래 절에는 석가 진신이 침상에 모로 누워 있다. 곁에는 불치(부처님 이빨)와 사리가 있는데 전하기로 부처가 열반한 곳이라 한다. 그 침좌는 침향으로 만들고 여러 색깔의 보석으로 장식하여 매우 장엄하다. 왕이 거처하는 곁에 큰 산이 있어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있다. 그 꼭대기에 거인의 발자국이 있어 돌에 들어간 깊이가 2자이고 길이가 8자 남짓인데 반고의 유적이라 한다. 이 산에서는 홍아고(루비), 청아고(사파이어), 황아고, 석라니, 굴몰람 등 여러 색깔의 보석이 산출된다. 매번 큰비가 내려 산 아래로 씻겨 내려오면 토착인들이 다투어 줍는다. 바다 곁에 뜬 모래가 있는데 조개가 그 안에 모여 빛채가 넘실거린다. 왕이 사람을 시켜 건져내어 땅에 두면 조개가 썩어 그 진주를 취하므로 그 나라에는 진주와 보석이 특히 풍부하다.

왕은 소리국 사람이다. 불교를 숭상하고 소를 중히 여겨, 매일 소똥을 가져다 태워 재를 만들어 몸에 바르고, 또 물에 개어 땅에 두루 바른 뒤에야 부처에게 절한다. 손발을 곧게 펴고 배를 땅에 붙여 공경을 표하며, 왕과 서민이 모두 이와 같다. 소고기는 먹지 않고 오직 우유만 먹으며, 죽으면 묻어주고 소를 죽이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기후는 항상 덥고 쌀과 조가 풍족하며 백성이 부유하나 밥 먹기를 즐기지 않는다. 먹으려 할 때는 어두운 곳에서 하여 남이 보지 못하게 한다. 온몸에 털이 있어 모두 깎아버리는데 오직 머리카락은 깎지 않는다. 바치는 공물로는 진주, 산호, 보석, 수정, 사하라(모직물), 서양포, 유향, 목향, 수향, 탄향(샌달우드), 몰약, 유황, 등갈, 노회(알로에), 오목(흑단), 후추, 완석, 길들인 코끼리 등의 종류가 있다.

[해설]

석란산은 현재의 스리랑카이다. 본문은 정화의 원정 중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명-코테 전쟁(Ming-Kotte War)을 다루고 있다. 당시 왕 알열고내아(Alagakkonara)가 정화 함대를 공격했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해 중국으로 압송되었던 사건이다. '사독만산'과 '부처의 발자국'에 대한 묘사는 스리랑카의 성지인 아담스 피크(Adam's Peak, 스리 파다)를 설명한 것이다.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 전설이 혼재된 성지이다.

방갈라(榜葛剌)

방갈라는 곧 한나라 때의 신독국이며 후한 때는 천축이라 했다. 그 후 중천축은 양나라에 조공했고 남천축은 위나라에 조공했다. 당나라 때 또한 5천축으로 나누었는데 또 5인도라고도 이름했다. 송나라 때도 그대로 천축이라 이름했다. 방갈라는 곧 동인도이다. 소문답랄에서 순풍을 타면 20일 낮밤에 이를 수 있다.

영락 6년, 그 왕 애아사정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여 토산물을 바치니 연회를 베풀고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7년에 그 사신이 무릇 두 번 왔는데 수행원을 230여 명이나 데리고 왔다. 황제가 바야흐로 먼 지역을 불러오려 하여 하사함이 매우 후하였다. 이로부터 매년 입공하였다. 10년에 조공 사신이 장차 이르려 할 때 관원을 보내 진강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일을 마치자 사신이 그 왕의 부고를 알렸다. 관원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고 세자 사이물정을 왕으로 봉하였다. 12년에 새 왕이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와서 사례하며 기린 및 명마와 토산물을 바쳤다. 예관이 표문을 올려 하례하기를 청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 환관 후현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니 왕과 왕비, 대신들에게 모두 하사함이 있었다. 정통 3년에 기린을 바치니 백관이 표문을 올려 하례하였다. 이듬해 또 입공하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 나라는 땅이 크고 물산이 풍부하다. 성지와 거리, 시장에 재화가 모이고 상업이 통하여 번화함이 중국과 비슷하다. 사계절 기후는 항상 여름과 같다. 땅이 기름져 1년에 두 번 수확하며 김매고 가꾸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풍속은 순박하고 문자가 있으며 남녀가 농사와 길쌈에 부지런하다. 용모와 신체는 모두 검은데 간혹 흰 자도 있다. 왕과 관원, 백성은 모두 회회인(무슬림)이며 상례, 제사, 관례, 혼례는 모두 그 예법을 쓴다. 남자는 모두 머리를 깎고 흰 천으로 감싼다. 옷은 목에서부터 꿰어 입고 천으로 두른다. 달력에는 윤달을 두지 않는다. 형벌에는 태, 장, 도, 유 등 몇 등급이 있다. 관청의 상하에도 공문서가 오간다. 의술, 점술, 음양, 온갖 공예, 기예가 모두 중국과 같으니 대개 전세(앞선 시대)에 흘러 들어간 것이다.

그 왕은 천조(명나라)를 공경한다.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 관원을 보내 의장과 예물을 갖추고 기병 천 기로 맞이한다. 왕궁은 높고 넓으며 기둥은 모두 황동으로 감싸 장식하고 꽃과 짐승을 조각하였다. 좌우에 긴 회랑을 설치하고 안에는 밝은 갑옷을 입은 기병 천여 명을 나열하고, 밖에는 거인들이 밝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칼, 검, 활, 화살을 잡고 나열하였는데 위엄 있는 의식이 매우 장대하다. 뜰 좌우에는 공작 깃털로 만든 우산과 덮개 백여 개를 설치하고, 또 코끼리 부대 백여 마리를 전각 앞에 두었다. 왕은 여덟 가지 보석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전각 위 높은 자리에 다리를 뻗고 앉아 무릎에 칼을 가로놓는다. 조정 사신이 들어오면 은지팡이를 짚은 자 두 사람을 시켜 인도하게 하는데 다섯 걸음에 한 번 소리치고 중간에 이르면 멈춘다. 또 금지팡이를 짚은 자 두 사람이 처음과 같이 인도한다. 그 왕이 절하며 조서를 맞이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손을 이마에 올린다. 조서를 열어 읽고 하사품을 받은 뒤, 전각에 융단을 깔고 조정 사신에게 연회를 베푸는데, 술은 마시지 않고 장미 이슬에 향과 꿀물을 타서 마시게 한다. 사신에게 금 투구, 금 허리띠, 금병, 금동이를 선물하고, 그 부사에게는 모두 은을 사용하며 수행원들에게도 모두 선물이 있다. 그 공물로는 좋은 말, 금은유리기물, 청화백자, 학정(투구부리), 서각, 비취 깃털, 앵무새, 세백필포, 두라면, 사하라, 사탕, 유향, 숙향, 오향, 마등향, 오다니, 자교, 등갈, 오목, 소목, 후추, 조황 등이 있다.

[해설]

방갈라는 현재의 방글라데시와 인도 서벵골주 지역에 있었던 벵골 술탄국을 말한다. 명나라와 활발히 교류했으며, 특히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기린(Giraffe)을 중국에 '기린(麒麟, 전설 속의 동물)'으로 바쳐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 벵골은 이슬람 왕조였기에 왕과 관료들이 무슬림으로 묘사된다. '장미 이슬(Rose water)' 등의 묘사는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벵골 궁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납박아(沼納朴兒)

소납박아는 그 나라가 방갈라의 서쪽에 있다. 혹은 중인도라고도 하며 옛날 불국(부처의 나라)이라 칭하던 곳이다. 영락 10년에 사신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 그 나라를 위로하게 하고 왕 역불랄에게 금 융단, 금으로 짠 비단, 채색 비단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18년에 방갈라 사신이 그 나라 왕이 자주 병사를 일으켜 침략한다고 호소하니, 조서를 내려 환관 후현에게 칙서를 가지고 가서 이웃과 화목하고 국경을 보전하는 의리로 타이르게 하고, 인하여 채색 비단을 하사하였다. 지나가는 금강보좌의 땅에도 하사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왕은 중국과 거리가 매우 멀다는 이유로 끝내 조공하러 오지 않았다.

[해설]

소납박아는 인도 북부의 자운푸르(Jaunpur) 술탄국이다. 방갈라(벵골)와 분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불랄'은 당시 자운푸르의 술탄 이브라힘 샤(Ibrahim Shah)를 가리킨다.

조법아(祖法兒)

조법아는 고리에서 배를 띄워 서북쪽으로 순풍을 타면 10일 낮밤에 이를 수 있다. 영락 19년에 사신을 보내 아단, 라살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입공하니 정화에게 명하여 새서(옥새가 찍힌 문서)와 하사품을 가지고 가서 답하게 했다. 21년에 조공 사신이 다시 왔다. 선덕 5년에 정화가 다시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니 그 왕 아리즉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 8년에 경사에 도착하였다. 정통 원년에 귀국하는데 새서를 내려 왕을 장려하였다.

그 나라는 동남쪽은 큰 바다이고 서북쪽은 첩첩산중이다. 날씨는 항상 8, 9월과 같다. 오곡과 채소, 과일, 여러 가축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사람들의 신체는 크고 건장하다. 왕과 신하, 백성은 모두 회회교(이슬람교)를 받들며 혼례와 상례 또한 그 제도를 따른다. 예배 사원을 많이 지었다. 예배일(금요일)을 만나면 시장은 매매를 끊고 남녀노소가 모두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장미 이슬이나 침향유로 얼굴을 닦고 침향, 전단향, 암팔아(용연향) 등 여러 향을 태우고 그 위에 서서 옷에 향기를 쐰 뒤에 가서 절한다. 지나가는 거리와 시장에 향기가 한참 동안 흩어지지 않는다. 천사의 사신이 이르러 조서를 열어 읽기를 마치면, 그 왕이 나라 사람들에게 두루 타일러 유향, 혈갈, 노회, 몰약, 소합유, 안식향 등 여러 물건을 모두 내어 중국인과 교역하게 한다. 유향은 곧 나무의 수지이다. 그 나무는 느릅나무와 비슷하나 잎이 뾰족하고 긴데, 토착인이 나무를 찍어 그 수지를 취하여 향으로 삼는다. 타계(낙타닭)가 있는데 목이 길어 학과 같고 다리 높이가 3, 4자이며 털색은 낙타와 같고 걷는 것도 그와 같은데, 항상 이것으로 공물을 채운다.

[해설]

조법아는 아라비아 반도 남부, 현재 오만의 도파르(Dhofar) 지역이다. 고대부터 유향(Frankincense)의 주산지로 유명했다. 본문에서도 유향 채취와 향 문화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타계(낙타닭)'는 타조를 묘사한 것이다.

목골도속(木骨都束)

목골도속은 소갈란에서 배로 20일 낮밤을 가면 이를 수 있다. 영락 14년에 사신을 보내 불라와, 마림 등 여러 나라와 함께 표문을 받들고 조공하니, 정화에게 명하여 칙서와 폐백을 가지고 그 사신과 함께 가서 답하게 했다. 후에 다시 입공하니 정화에게 명하여 함께 가게 하고 왕과 왕비에게 채색 비단을 하사하였다. 21년에 조공 사신이 또 왔다. 돌아갈 때 그 왕과 왕비에게 다시 하사함이 있었다. 선덕 5년에 정화가 다시 그 나라에 조서를 반포하였다.

나라는 바다에 접해 있고 산이 이어지며 땅이 넓으나 척박하여 수확이 적다. 해마다 가뭄이 들거나 혹은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 풍속은 완악하고 어리석으며 때때로 병장기를 다루고 활쏘기를 익힌다. 땅에 나무가 나지 않는다. 또한 홀로모스처럼 돌을 쌓아 집을 만들고, 말린 생선을 사용하여 소, 양, 말, 낙타를 먹인다고 한다.

[해설]

목골도속은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수도인 모가디슈(Mogadishu)이다. 건조한 기후와 석조 건축물, 그리고 어업 중심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다. 가축에게 말린 생선을 먹이는 풍습은 건조한 해안 지역의 특징이다.

불라와(不剌哇)

불라와는 목골도속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석란산 별라리에서 남쪽으로 가면 21일 낮밤에 이를 수 있다. 영락 14년부터 21년까지 무릇 네 번 입공하였는데 모두 목골도속과 함께였다. 정화 또한 두 번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선덕 5년에 정화가 다시 가서 사신 노릇을 했다.

그 나라는 바다 곁에 거주하며 땅은 넓으나 소금기가 많고 풀과 나무가 적으며, 또한 돌을 쌓아 집을 만든다. 소금 연못이 있다. 단지 나뭇가지를 그 속에 던져 넣었다가 이윽고 들어 올리면 소금이 곧 그 위에 엉긴다. 풍속은 순박하다. 밭은 경작할 수 없고 마늘과 파 외에는 다른 종자가 없어 오로지 물고기를 잡아 식량으로 삼는다. 산물로는 마하수라는 짐승이 있는데 모양이 노루와 같고, 화복록은 모양이 당나귀와 같으며, 그리고 코뿔소, 코끼리, 낙타, 몰약, 유향, 용연향 같은 종류가 있어 항상 이것으로 공물을 채운다.

[해설]

불라와는 소말리아의 항구 도시 브라바(Brava/Barawa)이다. '화복록(花福祿)'은 얼룩말(Zebra)을 묘사한 것이다. 무늬가 있는(花) 당나귀 같다는 뜻이다.

죽보(竹步)

죽보는 또한 목골도속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영락 연간에 일찍이 입공하였다. 그 지역은 인구가 번성하지 않고 풍속은 자못 순박하다. 정화가 그 땅에 이르렀다. 땅에 또한 풀과 나무가 없고 돌을 쌓아 거처하며 해마다 가뭄이 많은 것이 모두 목골도속과 같다. 산물로는 사자, 금전표(표범), 타제계(타조), 용연향, 유향, 금박, 후추 등의 종류가 있다.

[해설]

죽보는 소말리아의 줌보(Jumbo) 혹은 주바(Juba) 강 하구 지역이다.

아단(阿丹)

아단은 고리의 서쪽에 있는데 순풍이면 22일 낮밤에 이를 수 있다. 영락 14년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토산물을 바쳤다. 사신이 돌아갈 때 정화에게 명하여 칙서와 채색 비단을 가지고 함께 가서 하사하게 했다. 이로부터 무릇 네 번 입공하니 천자 또한 후하게 하사하였다. 선덕 5년, 해외의 여러 번국이 오랫동안 조공을 빠뜨리니 다시 정화에게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가서 널리 알렸다. 그 왕 말립극나사아가 곧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8년에 경사에 이르렀다. 정통 원년에 비로소 돌아갔다. 이후로 천조(명나라)가 다시는 사신을 통하지 않았고 먼 번국의 조공 사신 또한 오지 않았다. 전세인 양, 수, 당나라 때 아울러 단단국이 있었는데 혹자가 곧 그 땅이라고 말한다.

땅은 기름지고 조와 보리가 넉넉하다. 사람들의 성품은 강인하고 사나우며 기병과 보병 정예 졸개 7, 8천 명이 있어 이웃 나라가 두려워한다. 왕과 나라 사람들은 모두 회회교를 받든다. 기후는 항상 온화하고 1년에 윤달을 두지 않는다. 그 시간을 정하는 법은 달을 기준으로 삼는데, 만약 오늘 밤 초승달을 보면 내일이 곧 월삭(초하루)이 된다. 사계절이 일정하지 않아 독자적인 음양가가 있어 추산한다. 꽃이 피는 날을 봄의 시작으로 삼고, 잎이 지는 날을 가을의 시작으로 삼으며, 일식과 월식, 비바람과 조석을 모두 예측할 수 있다.

그 왕은 중국을 매우 높인다. 정화의 배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몸소 우두머리들을 거느리고 와서 맞이하였다. 나라에 들어와 조서를 선포하기를 마치니, 그 아랫사람들에게 두루 타일러 온갖 진귀한 보물을 내어 서로 교역하였다. 영락 19년에 환관 주씨 성을 가진 자가 가서 고양이 눈 보석(묘안석) 무게 2돈 가량 되는 것과, 높이 2자 되는 산호나무 몇 가지, 또 큰 진주, 금박, 여러 색깔의 아고(보석) 등 기이한 보물과 기린, 사자, 꽃무늬 고양이, 사슴, 금전표, 타계, 흰 비둘기를 사서 돌아왔는데 다른 나라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채소, 과일, 가축은 모두 갖추어져 있으나 유독 거위와 돼지 두 가지는 없다. 시장 가게에 서적이 있다. 장인이 만든 금 장신구는 여러 번국보다 뛰어나다. 적은 것은 오직 풀과 나무가 없다는 것이고, 그 거처 또한 모두 돌을 쌓아 만든다. 기린은 앞발 높이가 9자, 뒷발은 6자, 목 길이는 1장 6자 2치이며, 짧은 뿔이 있고 소 꼬리에 사슴 몸인데 조와 콩, 떡과 먹이를 먹는다. 사자는 모양이 호랑이와 비슷한데 검고 누런색에 무늬가 없고, 머리가 크고 입이 넓으며 꼬리가 뾰족하고, 우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 온갖 짐승이 보면 모두 땅에 엎드린다.

가정 연간에 사방 언덕에서 아침 해를 맞이하는 제단(방구조일단)의 옥작(옥술잔)을 만들 때, 천방(메카), 합밀 등 여러 번국에서 붉고 누런 옥을 구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어떤 통역관이 말하길 이 옥은 아단에서 나는데 토루반에서 서남쪽으로 2천 리 떨어진 곳이며, 그 땅에 두 산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스스로 암수가 되거나 혹은 스스로 운다며, 청하건대 영락, 선덕 때의 고사를 따라 무거운 뇌물을 가지고 가서 구입하자고 하였다. 황제가 부서의 논의를 따라 그만두었다.

[해설]

아단은 예멘의 아덴(Aden)이다. 인도양 무역의 핵심 요충지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고 묘사된다. 이곳에서 거래된 '기린'은 실제 기린(Giraffe)을 의미하며, 상세한 묘사(앞발이 길고 뒷발이 짧으며 목이 긴 특징)가 이를 증명한다.

라살(剌撒)

라살은 고리에서 순풍으로 20일 낮밤이면 이를 수 있다. 영락 14년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니 정화에게 명하여 답하게 했다. 후에 무릇 세 번 조공했는데 모두 아단, 불라와 등 여러 나라와 함께였다. 선덕 5년에 정화가 다시 칙서를 가지고 가서 사신 노릇을 했는데, 끝내 다시는 조공하지 않았다. 나라는 바다 곁에 거주하며 기후는 항상 덥고 밭이 척박하여 수확이 적다. 풍속은 순박하고 상례와 장례에 예절이 있다. 일이 있으면 귀신에게 기도한다. 풀과 나무가 나지 않고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는다. 거처하는 집은 모두 죽보 등 여러 나라와 같다. 산물로는 유향, 용연향, 천리타(낙타) 같은 종류가 있다.

[해설]

라살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나, 예멘의 무칼라(Mukalla) 인근의 알-아사(Al-Ahsa) 혹은 그 주변 아라비아 해안 지역으로 추정된다.

마림(麻林)

마림은 중국과 거리가 매우 멀다. 영락 13년에 사신을 보내 기린을 바쳤다. 장차 이르려 할 때 예부상서 여진이 표문을 올려 하례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지난번 유신이 《오경사서대전》을 바칠 때 표문을 올리기를 청하여 짐이 허락하였으니, 이는 그 책이 다스림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기린의 있고 없음이 무슨 손익이 있겠는가, 그만두어라." 하였다. 이윽고 마림과 여러 번국 사신들이 기린 및 천마, 신록 등 여러 물건을 바치니 황제가 봉천문에 나아가 받았다. 백관이 머리를 조아려 칭송하고 하례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이는 황고(돌아가신 아버지)의 두터운 덕이 이룬 바이며 또한 경들이 도와준 덕분이기에 먼 곳의 사람들이 다 온 것이다. 지금부터 계속 더욱 마땅히 덕을 잡고 짐의 미치지 못함을 이끌어주시오." 하였다. 14년에 또 토산물을 바쳤다.

[해설]

마림은 케냐의 말린디(Malindi)이다. 이곳에서 바친 기린은 명나라 조정에서 전설 속의 성수(聖獸) '기린'으로 받아들여져 큰 경사가 되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겉으로는 이를 아버지 홍무제의 덕으로 돌리며 겸손을 표하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했다.

홀로모스(忽魯謨斯)

홀로모스는 서양의 큰 나라이다. 고리에서 서북쪽으로 가서 25일이면 이를 수 있다. 영락 10년, 천자가 서양의 가까운 나라들은 이미 바다를 건너와 보물을 바치고 궁궐 아래서 머리를 조아리는데 먼 나라들은 아직 복종하지 않는다 하여, 이에 정화에게 명하여 새서를 가지고 여러 나라에 가게 하고, 그 왕에게 비단, 채색 비단, 사라를 하사하고 왕비 및 대신들에게도 모두 하사함이 있었다. 왕이 곧 배신 이즉정을 보내 금잎 표문을 받들고 말과 토산물을 바쳤다. 12년에 경사에 이르렀다. 예관에게 명하여 연회를 베풀고 하사하며 말값을 쳐주었다. 돌아갈 때 왕과 왕비 이하에게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무릇 네 번 조공하였다. 정화 또한 두 번 사신으로 갔다. 그 후 조정 사신이 가지 않으니 그 사신 또한 오지 않았다.

선덕 5년에 다시 정화를 보내 그 나라에 조서를 선포하였다. 그 왕 사이불정이 이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8년에 경사에 이르니 연회와 하사함을 더하였다. 정통 원년에 자와 배에 부쳐 귀국하였다. 그 후로 드디어 끊어졌다.

그 나라는 서해의 끝에 위치한다. 동남쪽의 여러 오랑캐 나라 및 대서양 상선, 서역 상인들이 모두 와서 무역하므로 보물이 가득 넘친다. 기후는 추위와 더위가 있고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잎이 지며, 서리는 있으나 눈은 없고 이슬이 많고 비가 적다. 땅이 척박하여 곡식과 보리가 적지만 다른 지방에서 실어 오는 자가 많으므로 가격이 매우 싸다. 백성은 부유하고 풍속은 후하며, 혹 재앙을 만나 가난해지면 대중이 모두 돈과 비단을 주어 함께 구제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희고 건장하며 부녀자가 외출할 때는 사(실크)로 얼굴을 가린다. 시장에는 가게가 늘어섰고 온갖 물건이 갖추어져 있다. 오직 술을 금하여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의술, 점술, 기예는 모두 중화와 비슷하다. 교역에는 은전을 쓴다. 글은 회회 글자를 쓴다. 왕과 신하들은 모두 회교를 따르며 혼례와 상례는 모두 그 예법을 쓴다. 매일 재계하고 목욕하며 경건히 절하는 것이 다섯 번이다. 땅에 소금기가 많아 풀과 나무가 나지 않고 소, 양, 말, 낙타는 모두 말린 생선을 먹는다. 돌을 쌓아 집을 짓는데 3, 4층 되는 것도 있으며, 침실, 부엌, 화장실 및 손님 접대하는 곳이 다 그 위에 있다. 채소와 과일이 넉넉하여 호두, 파담(아몬드), 잣, 석류, 포도, 화홍, 만년조(대추야자) 등의 종류가 있다. 국경 안에 큰 산이 있어 사면의 색이 다르다. 하나는 붉은 소금 돌(암염)인데 쪼아서 그릇을 만들며, 음식을 담으면 소금을 치지 않아도 맛이 저절로 조화된다. 하나는 흰 흙인데 담벼락에 바를 수 있다. 하나는 붉은 흙, 하나는 누런 흙인데 모두 쓰기에 적합하다. 바치는 공물로는 사자, 기린, 타계, 복록, 영양(가젤)이 있고, 평상시 공물로는 큰 진주, 보석 종류가 있다.

[해설]

홀로모스는 페르시아만의 입구에 위치했던 호르무즈 왕국(Kingdom of Ormus)이다. 동서 무역의 핵심 허브로 막대한 부를 누렸다. 농사가 잘 안 되어 식량을 수입하고, 소금 산(암염)이 있다는 묘사가 정확하다. 이슬람 율법(금주, 하루 5번 기도)을 철저히 따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유산(溜山), 비라(比剌)

유산은 석란산 별라리에서 남쪽으로 가서 순풍을 타면 7일 낮밤에 이를 수 있다. 소문답랄에서 소모산을 지나 서남쪽으로 가면 10일 낮밤에 이를 수 있다. 영락 10년에 정화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4년에 그 왕 역속복이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그 후 세 번 조공했는데 모두 홀로모스 등 여러 나라와 함께였다. 선덕 5년에 정화가 다시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후에 끝내 오지 않았다.

그 산(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세 개의 돌문이 있어 모두 배가 통할 수 있다. 성곽은 없고 산에 의지해 모여 산다. 기후는 항상 덥고 땅이 척박하여 곡식이 적고 보리가 없으며 토착인은 모두 물고기를 잡아 말려서 식량으로 삼는다. 왕과 아랫사람들은 모두 회회인이며 혼례와 상례 등 여러 예절은 홀로모스와 비슷한 점이 많다. 산 아래에 8류(여덟 개의 섬 무리)가 있는데 혹은 말하길 밖에 다시 3천 류(3천 개의 섬)가 있다고 하며, 배가 혹 바람을 잘못 만나 그곳에 들어가면 곧 침몰한다.

또 비라국, 손라국이라는 곳이 있다. 정화가 또한 일찍이 칙서를 가지고 가서 하사하였다. 중화와 거리가 매우 멀어 두 나라의 조공 사신은 끝내 오지 않았다.

[해설]

유산은 몰디브(Maldives) 제도이다. '류(溜)'는 산호섬(Atoll)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몰디브는 이슬람 국가였으며, 조개껍데기(자안패)와 말린 생선(가쓰오부시의 원조 격)이 주요 특산물이었다. '비라'와 '손라'는 정확한 위치가 불분명하나 인근의 섬나라나 동아프리카 해안의 도시국가로 추정된다.

남무리(南巫里)

남무리는 서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영락 3년에 사신을 보내 새서와 채색 비단을 가지고 그 나라를 위로하였다. 6년에 정화가 다시 가서 사신 노릇을 했다. 9년에 그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는데 급란단, 가이륵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왔다. 그 왕에게 금으로 짠 비단, 금수 놓은 용무늬 옷, 금을 입힌 휘장과 우산 덮개 등 여러 물건을 하사하고 예관에게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하사하고 보냈다. 14년에 다시 조공하였다. 정화에게 명하여 그 사신과 함께 가게 했는데 후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해설]

남무리는 수마트라섬 북단 아체 지방에 위치했던 라무리(Lamuri) 왕국이다.

가이륵(加異勒)

가이륵은 서양의 작은 나라이다. 영락 6년에 정화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불러 타일러 금 비단, 사라를 하사하였다. 9년에 그 추장 갈복자마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토산물을 바쳤다. 명하여 연회 및 관대, 채색 비단, 보초(지폐)를 하사하였다. 10년에 정화가 다시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고, 그 후 무릇 세 번 입공하였다. 선덕 5년에 정화가 다시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8년에 또 아단 등 11개국과 함께 와서 조공하였다.

[해설]

가이륵은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의 카얄(Kayal)이다.

감파리(甘巴里)

감파리 또한 서양의 작은 나라이다. 영락 6년에 정화가 그 땅에 사신으로 가서 그 왕에게 금 비단, 사라를 하사하였다. 13년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였다. 19년에 다시 조공하니 정화를 보내 답하였다.

선덕 5년에 정화가 다시 그 나라를 불러 타일렀다. 왕 두와랄찰이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여 8년에 경사에 도착하였다. 정통 원년에 자와 배에 부쳐 귀국하게 하고 칙서를 내려 왕을 위로하였다.

그 이웃 국경에 아발파단, 소아란 두 나라가 있는데 또한 6년에 정화에게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불러 타이르게 하였으며 하사함도 같았다.

[해설]

감파리는 인도 남부의 코임바토르(Coimbatore) 혹은 칸야쿠마리(Kanyakumari)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

급란단(急蘭丹)

급란단은 영락 9년에 왕 마하랄사고마아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0년에 정화에게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그 왕을 장려하게 하고 금 비단, 사라, 채색 비단을 하사하였다.

[해설]

급란단은 말레이 반도의 켈란탄(Kelantan)이다.

사리만이(沙里灣泥)

사리만이는 영락 14년에 사신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니 정화에게 명하여 폐백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했다.

[해설]

사리만이는 인도 서해안의 주르파탄(Jurfattan) 혹은 카나노르(Cannanore) 지역으로 추정된다.

저리(底里)

저리는 영락 10년에 사신을 보내 새서를 받들고 그 왕 마하목을 불러 타이르고 융단, 금으로 짠 비단, 채색 비단 등 여러 물건을 하사하였다. 그 땅은 소납박아(자운푸르)와 가까우며 아울러 그 왕 역불랄금에게도 하사하였다.

[해설]

저리는 인도의 델리(Delhi)이다. 당시 델리 술탄국을 의미한다. '마하목'은 술탄 마흐무드 샤(Mahmud Shah)를 가리킨다.

천리달(千里達)

천리달은 영락 16년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그 사신에게 관대, 꿰맨 실, 사라, 채색 비단 및 보초를 하사하였다. 돌아갈 때 그 왕에게 하사함을 더하였다.

[해설]

천리달은 오만의 칼하트(Kalhat)로 추정된다.

실라비(失剌比)

실라비는 영락 16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 사신에게 관대, 금으로 짠 비단, 습의(옷), 채색 비단, 백금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그 왕에게도 넉넉히 하사하였다.

[해설]

실라비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확하나 페르시아만 혹은 아라비아 해안의 항구도시로 보인다.

고리반졸(古里班卒)

고리반졸은 영락 연간에 일찍이 입공하였다. 그 땅은 척박하고 곡식이 적으며 산물 또한 적다. 기후가 고르지 않아 여름에 비가 많고 비가 오면 곧 춥다.

[해설]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나 인도양 연안의 소국으로 보인다.

라니(剌泥)

라니는 영락 원년에 그 나라 안의 회회인(무슬림) 하지 마하몰 기라니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는데, 인하여 후추를 가지고 와서 백성과 매매하였다. 관리가 그 세금을 거두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세금을 거두어 이익을 좇는 백성을 억누르는 것은 어찌 이익을 위함이겠는가. 지금 먼 곳 사람이 의를 사모하여 왔는데 이에 그 재화를 취하면 얻는 것이 얼마나 되겠으며 국체를 손상함이 많을 것이다. 그만두어라." 하였다. 라니 외에 몇 나라가 있다. 하라비, 기라니, 굴찰니, 사라제, 팽가나, 팔가의, 오사라척, 감파, 아와, 타회라고 한다. 영락 연간에 일찍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 나라의 풍토와 산물은 상고할 수 없다.

[해설]

라니는 인도 구자라트 지방의 란데르(Rander)로 추정된다. 당시 번성한 무역항이었다.

백갈달(白葛達), 흑갈달(黑葛達)

백갈달은 선덕 원년에 그 신하 화자 리일사가 사신으로 와서 입공하였다. 그 사신이 말하기를 "풍랑을 만나 배가 부서져 공물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국주의 정성스럽고 충성된 마음을 위로 전달할 길이 없습니다. 이는 사신의 죄이오니 오직 성천자께서 은혜로 용서하시고 관대를 하사하시어, 돌아가 국주를 뵙고 배신이 실로 궁궐 뜰에 나아갔음을 알게 해주시면 거의 책망을 면할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고 이웃 나라 조공선에 부쳐 귀국하게 하였으며 타일러 말하기를 "창졸간에 풍랑을 잃은 것을 어찌 인력으로 제어할 수 있겠는가. 돌아가 너의 주인에게 말하길 짐이 왕의 정성을 가상히 여기는 것은 물건에 있지 않다고 하라." 하였다. 연회와 하사품은 모두 예법대로 하였다. 하직하고 돌아갈 때 황제가 예관에게 이르기를 "날씨가 점차 추워지고 바닷길이 머니 노자와 의복을 하사하라." 하였다. 그 나라는 토지가 척박하고 불교를 숭상하며 교역에는 철전을 쓴다.

또 흑갈달이 있는데 역시 선덕 때 와서 조공하였다. 나라가 작고 백성은 가난하며 부처를 숭상하고 형벌을 두려워한다. 소와 양이 많고 또한 철을 주조하여 돈으로 쓴다.

[해설]

백갈달은 이라크의 바그다드(Baghdad)를 음차한 것이다. 다만 본문에서 '불교를 숭상한다'고 기록된 것은 오류이거나, 당시 이슬람을 불교의 일종으로 오해했거나, 혹은 다른 지역과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티무르 제국 이후의 혼란기를 겪던 서아시아 정세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불롬(拂菻)

불롬은 곧 한나라의 대진(Da Qin)이다. 환제 때 비로소 중국과 통하였다. 진(晋)과 위(魏) 때는 모두 대진이라 하였고 일찍이 입공하였다. 당나라는 불롬이라 하였고 송나라도 그대로 따랐으며 또한 자주 입공하였다. 그러나 《송사》에서 역대 왕조가 일찍이 조공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아마도 그것이 대진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나라 말기에 그 나라 사람 날고륜이 중국 시장에 들어왔는데 원나라가 망하여 돌아가지 못했다. 태조(홍무제)가 이를 듣고 홍무 4년 8월에 불러서 보고, 조서를 주어 돌아가 그 왕에게 타이르게 명하여 말하기를 "송나라가 다스림을 잃은 뒤로 하늘이 그 제사를 끊었다. 원나라가 사막에서 일어나 중국의 주인이 된 지 백여 년, 하늘이 그 혼미하고 음란함을 싫어하여 또한 그 명을 끊어버렸다. 중원이 소란한 지 18년, 군웅들이 처음 일어날 때 짐은 회우의 베옷 입은 평민으로 의를 일으켜 백성을 구하였다. 하늘의 영험함을 입어 문무 여러 신하를 받아들이고, 동으로 장강을 건너 병사를 훈련하고 선비를 기른 지 14년이 되었다. 서쪽으로 한왕 진우량을 평정하고 동으로 오왕 장사성을 포박하고, 남으로 민(복건), 월(광동)을 평정하고 파, 촉을 평정하였으며, 북으로 유, 연을 평정하여 온 천하를 편안히 하고 우리 중국의 옛 강역을 회복하였다. 짐은 신민의 추대를 받아 황제 자리에 즉위하여 천하의 국호를 대명이라 정하고 연호를 홍무라 하니 지금 4년이 되었다. 무릇 사방 오랑캐 여러 나라에 모두 관원을 보내 알렸으나, 오직 너희 불롬은 서해 넘어 멀리 떨어져 있어 미처 알리지 못했다. 이제 너희 나라 백성 날고륜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알리게 한다. 짐이 비록 옛 선철왕에는 미치지 못하여 만방이 덕을 품게 하지는 못하나, 천하로 하여금 짐이 사해를 평정한 뜻을 알게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에 조서로 알린다." 하였다. 이윽고 다시 사신 보랄 등을 보내 칙서와 채색 비단을 가지고 불러 타이르니 그 나라가 이에 사신을 보내 입공하였다. 그 후에는 다시 오지 않았다.

만력 연간에 대서양 사람이 경사에 이르러 말하기를 천주 예수가 여덕아(유대/Judea)에서 태어났는데 곧 옛 대진국이라 하였다. 그 나라는 개벽 이래로 6천 년인데 사서에 기재된 바 세대가 서로 전승되고 만사만물의 원시가 상세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 천주가 인류를 처음 낳은 나라라고 하는데 말이 자못 허황되어 믿을 수 없다. 그 물산과 보배의 성대함은 전사에 나타난 바와 같다.

[해설]

불롬은 역사적으로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혹은 십자군 국가, 넓게는 서아시아와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명나라 초기 홍무제 때의 기록에 등장하는 '날고륜'은 원나라 말기에 대도(베이징)에 와 있던 가톨릭 대주교 니콜라우스(Nicolaus de Bentra) 혹은 이탈리아 상인으로 추정된다. 후반부 만력제 때의 기록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도착과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이태리아(意大里亞)

이태리아는 대서양 가운데 있는데 예로부터 중국과 통하지 않았다. 만력 연간에 그 나라 사람 이마두(마테오 리치)가 경사에 이르러 《만국전도》를 만들고 말하기를 천하에 5대주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아세아주(아시아)인데 가운데 무릇 백여 국이 있고 중국이 그중 하나라 했다. 둘째는 구라파주(유럽)인데 가운데 무릇 70여 국이 있고 이태리아가 그중 하나라 했다. 셋째는 리미아주(리비아/아프리카)인데 또한 백여 국이다. 넷째는 아묵리가주(아메리카)인데 땅이 더 크고 영토가 서로 이어져 있어 남북 2주로 나뉜다. 마지막으로 묵와랄니가주(마젤라니카/남극 대륙 및 오세아니아)를 얻어 다섯째가 된다. 그리하여 영역 안의 대지가 다하였다. 그 설명이 황당하고 아득하여 상고할 수 없으나 그 나라 사람들이 중국 땅에 가득 차 있으니 곧 그 땅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속일 수는 없다.

대개 구라파 여러 나라는 모두 천주 예수교를 받드는데 예수는 여덕아(유대)에서 태어났고 그 나라는 아세아주 가운데 있으며 서쪽으로 구라파에 교를 행하였다. 그가 처음 태어난 것은 한나라 애제 원수 2년 경신년(기원전 1년)인데, 1581년을 지나 만력 9년에 이르러 이마두가 비로소 바다 9만 리를 건너 광주의 향산오(마카오)에 도착하니 그 교가 드디어 중국 땅에 물들게 되었다. 29년에 경사에 들어왔는데 환관 마당이 그 토산물을 바치며 자칭 대서양 사람이라 하였다.

예부에서 말하기를 "《회전》에는 오직 서양 소리국만 있고 대서양은 없으니 그 참과 거짓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기거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진공하니 먼 곳에서 의를 사모하여 특별히 와서 보물을 바치는 자와는 다릅니다. 또한 그가 바친 《천주》 및 《천주모도(성모 마리아 그림)》는 이미 불경스러우며, 가지고 온 것 중에 또 신선뼈(성유물) 등 여러 물건이 있습니다. 무릇 신선이라 칭하면 스스로 능히 하늘로 날아오를 텐데 어찌 뼈가 있겠습니까? 이는 당나라 한유가 말한바 흉하고 더러운 나머지라 궁궐에 들이기에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하물며 이런 토산물을 신들의 부서에서 번역하고 검사하지도 않고 바로 진상하니, 내신(환관)이 함부로 올린 잘못과 신들의 직무를 유기한 죄는 모두 사양할 수 없습니다. 성지를 받들어 부서로 보냈는데도 부서에 나아가 심사와 번역을 받지 않고 사사로이 승려의 집(절)에 머무니 신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러 번국이 조공하면 관례대로 답례 하사품이 있고 그 사신에게는 반드시 연회와 상이 있으니, 바라건대 관대를 하사하여 귀국하게 하고 양경(남경과 북경)에 몰래 거주하며 내국인과 교왕하여 별달리 일을 꾸미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8월에 또 말하기를 "신들이 의논하여 이마두를 귀국하게 하려 명을 기다린 지 5개월이나 윤음(임금의 말)을 내리지 않으시니, 먼 곳 사람이 울적하고 병들어 돌아가고 싶어 함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그 정황과 말이 간절함을 살피건대, 참으로 상방의 하사품을 원하지 않고 오직 산에 살고 들에 묵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새와 사슴을 오래 가둬두면 더욱 깊은 숲과 무성한 풀을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 인지상정이 진실로 그러합니다. 바라건대 속히 하사품을 나누어주고 강서 등지로 보내 그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에서 자취를 의탁하여 늙어가게 하소서." 하였으나 역시 답이 없었다.

이윽고 황제가 그 멀리서 온 것을 가상히 여겨 머물 곳을 빌려주고 밥을 주며 하사함이 후하였다. 공경 이하가 그 사람을 중히 여겨 모두 더불어 교제하였다. 마두(리치)가 편안히 여겨 드디어 머물러 살며 떠나지 않다가 38년 4월에 경사에서 죽었다. 서쪽 성곽 밖에 장사 지내게 해주었다.

그해 11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역관들의 추산이 많이 틀리자 조정의 논의가 장차 수정하려 하였다. 이듬해 오관정 주자우가 말하기를 "대서양 귀화인 방디아(판토하),웅삼발(드 우르시스) 등이 역법에 깊이 밝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역서는 중국 서적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마땅히 번역하여 올리게 하여 채택하는 데 자료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예부시랑 옹정춘 등이 인하여 홍무 초기에 회회역과를 설치했던 전례를 모방하여 방디아 등으로 하여금 함께 측량하고 시험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이를 따랐다.

마두가 중국에 들어온 뒤 그 무리들이 더욱 많이 왔다. 왕풍숙(바뇨니)이라는 자가 있어 남경에 거주하며 오로지 천주교로 대중을 미혹하니 사대부 및 마을의 소민들이 간간이 유혹되었다. 예부낭중 서여가(徐如珂)가 이를 미워하였다. 그 무리가 또 스스로 풍토와 인물이 중화보다 월등히 낫다고 자랑하니, 여가가 이에 두 사람을 불러 붓과 종이를 주며 각자 기억하는 바를 쓰게 하였다. 모두 어긋나고 오류가 있어 서로 맞지 않으니 이에 쫓아내자고 발의하였다. 44년에 시랑 심최, 급사중 안문휘 등과 함께 상소하여 그 사설이 대중을 미혹함을 배척하고, 또 그들이 불랑기(포르투갈)가 이름을 빌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급히 쫓아낼 것을 청하였다. 예과급사중 여무자 또한 말하기를 "이마두가 동으로 온 뒤 중국에 다시 천주의 교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남경(유도)의 왕풍숙, 양마노(디아스) 등이 군중을 선동하여 미혹한 자가 만 명을 내려가지 않고 초하루와 보름에 조회하고 절하는 자가 천으로 헤아립니다. 무릇 번국과 통하는 것과 사도(이단)는 아울러 금지함이 있습니다. 지금 공연히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니 백련교, 무위교 등 여러 종교와 한가지입니다. 또한 호경(마카오)을 왕래하며 오(마카오) 안의 여러 번국과 통모하는데도 담당 관청이 쫓아내지 않으니 국가의 금령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받아들여 12월에 이르러 왕풍숙 및 방디아 등을 모두 광동으로 보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명이 내려진 지 오래되었으나 미루고 행하지 않았고 담당 관청 또한 감독하여 보내지 않았다.

46년 4월, 방디아 등이 주소하기를 "신과 선신 이마두 등 10여 명은 바다 9만 리를 건너 상국(중국)의 문물을 관광하고 외람되이 대관의 녹을 먹은 지 17년입니다. 근래 남북에서 탄핵하여 배척하고 물리치자고 논의합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신 등은 수행하고 도를 배우며 천주를 받드는데 어찌 사악한 모의로 감히 악업에 떨어지겠습니까. 오직 성명(황제)께서 불쌍히 여겨주시어 바람 편을 기다려 귀국하게 해주소서. 만약 바다 섬에 기거하면 더욱 의심을 키울 터이니, 바라건대 남경 등 여러 곳의 배신들과 아울러 일체 너그럽게 용서해주소서." 하였으나 답이 없었고, 이에 앙앙불락하며 떠났다. 왕풍숙은 이내 성명을 바꾸고 다시 남경에 들어와 예전처럼 종교를 행하였으나 조정 선비들이 살피지 못했다.

그 나라는 대포를 잘 만드는데 서양의 것보다 더욱 크다. 이미 내지로 전해 들어와 중국 사람들이 많이 모방하였으나 능히 쓰지는 못했다. 천계, 숭정 연간에 동북쪽에 전쟁이 있어(청나라와의 전쟁) 자주 마카오 사람을 불러 도성으로 들어오게 하여 장수와 병사들에게 학습하게 하니 그 사람들 또한 힘을 다하였다.

숭정 때 역법이 더욱 거칠고 어긋나니 예부상서 서광계가 청하여 그 무리 나아곡(로(Rho), 탕약망(아담 샬) 등으로 하여금 그 나라의 신법을 가지고 서로 참고하고 비교하여, 국을 열고 편찬하고 수하게 하였다. 재가하였다. 시간이 지나 책이 완성되니 곧 숭정 원년 무진년을 역원(달력의 기원)으로 삼고 이름을 《숭정력》이라 하였다. 책이 비록 반포되어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그 법이 《대통력》보다 정밀하다고 보아 식자들은 취할 만하다고 여겼다.

그 나라 사람으로 동쪽으로 온 자들은 대개 총명하고 특출난 선비들로 뜻이 오로지 포교에 있고 녹봉과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은 책은 중국 사람들이 말하지 않던 것이 많았으므로 한때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숭상하였다. 사대부 중 서광계, 이지조 같은 무리가 으뜸으로 그 설을 좋아하였고 또 그 문장을 윤색해 주었으므로 그 교가 갑자기 흥하였다.

당시 중국 땅에 명성을 떨친 자로는 다시 용화민(롱고바르디), 필방제(삼비아시), 애여략(알레니), 등옥함(트리고) 등의 사람들이 있었다. 화민, 방제, 여략 및 웅삼발은 모두 이태리아국 사람이고, 옥함은 열이마니국(독일/Germania) 사람이며, 방디아는 의서파니아국(스페인/Hispania) 사람이고, 양마노는 파이도와이국(포르투갈/Portugal) 사람인데 모두 구라파주의 나라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풍속과 물산은 과장된 것이 많고, 또한 《직방외기》 등의 책이 있기에 자세히 기술하지 않는다.

[해설]

이태리아(이탈리아) 조는 명나라 말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마테오 리치(이마두)의 도착, 세계지도(곤여만국전도)의 제작, 서양 과학과 천문학의 소개, 그리고 대포(홍이포) 기술의 전래 등을 다룬다. 유교적 관점에서 이들을 배척하려는 움직임(남경 교안 등)과 서광계 등 일부 사대부들이 이들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역법(숭정력)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공존했던 역사를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에서 선교사들의 국적을 구분(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등)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명사(明史) 권327 열전 제215 외국8


달단

달단은 곧 몽골이니 옛 원나라의 후예이다. 태조 홍무 원년(1368년), 대장군 서달이 군사를 이끌고 원나라 수도를 취하자 원나라 군주는 북평에서 요새 밖으로 달아나 개평에 머물렀으며, 자주 그 장수 예수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소란하게 하였다. 이듬해 상우춘이 이를 격파하고 군사가 개평으로 진격하여 종왕 경손과 평장 정주를 사로잡았다.

[해설]

여기서 달단(타타르)은 명나라가 북원(몽골)을 낮춰 부르던 호칭이다. 명 태조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원나라의 수도 대도(북경)를 점령하자, 원 순제(토곤 테무르)가 몽골 고원의 개평(상도)으로 도망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원나라 군주는 응창으로 달아났고 그 장수 코케 테무르(왕보보)가 정서에 웅거하여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3년(1370년) 봄, 서달을 대장군으로 삼아 서안으로 나가 정서를 공격하게 하고, 이문충을 좌부장군, 풍승을 우부장군으로 삼아 거용관으로 나가 응창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문충이 흥화에 이르러 평장 죽정을 사로잡고 다시 낙타산에서 원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마침내 응창으로 달려갔다. 도착하기 전에 원나라 군주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나아가 그 성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원나라 군주의 손자 마이다리팔라 및 그 비빈, 대신, 보물과 옥새, 서적 등을 획득했다. 태자 아유르시리다르는 홀로 수십 기병을 이끌고 달아났다. 서달 또한 심아욕구에서 코케 테무르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여 쫓아냈다. 태조는 마이다리팔라를 숭례후에 봉하고 원나라 군주에게 순제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에 옛 원나라의 여러 장수 강문청 등과 왕자 실독아 등이 전후하여 귀부하였다. 유독 코케 테무르만이 태자 아유르시리다라를 옹위하여 화림(카라코룸)에 거처하며 여러 번 조서를 내려 회유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해설]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난 후(북원), 명나라는 계속해서 공세를 펼쳤다. 코케 테무르(왕보보)는 북원의 명장으로 명나라군을 괴롭혔으나 결국 패배했다. 원 순제가 죽고 태자 아유르시리다르(소종 빌레구트 칸)가 뒤를 이었다. 화림은 몽골 제국의 옛 수도 카라코룸이다.


5년(1372년) 봄, 대장군 서달, 좌부장군 이문충, 정서장군 풍승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세 길로 나누어 정벌하게 했다. 대장군 서달은 중로를 통해 안문으로 나갔으나 전투가 불리하여 요새를 지켰다. 풍승의 군대는 서쪽으로 난주에 머물렀다. 우부장군 부우덕이 먼저 나아가 전전하다가 소림산에 이르렀고, 풍승 등의 병력이 합세하여 그 평장 불화를 베고 상도려 등 소속 관리와 백성 8천 3백여 호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마침내 이집내로를 경유하여 과주, 사주에 이르러 다시 연이어 그들을 격파했다. 이문충은 동쪽으로 거용관을 나가 구온에 이르렀는데 원나라 장수가 진영을 버리고 달아나자, 이에 가벼운 기병을 이끌고 노구하로부터 질주하여 나아가 토라하에서 만자 하라장을 격파하고 아로혼하까지 추격하고 또 칭해까지 추격하여 그 관속의 자손과 군사들의 가족 1천 8백여 명을 사로잡아 경사로 보냈다. 서달 등은 얼마 후 소환되었다. 이듬해 봄, 서달, 이문충 등을 보내 서북쪽 변경을 방비하게 했다. 원나라 군사가 무주, 삭주를 침범하니 서달이 진덕, 곽자흥을 보내 격파했다. 얼마 안 있어 서달 등이 다시 회유에서 코케 테무르의 군사를 크게 격파했다. 당시 원나라 군사가 전후하여 백등, 보덕, 하곡을 침범했으나 번번이 수비 장수에게 패배했고, 유독 무녕, 서주만이 잔혹하게 파괴되어 태조가 그 백성들을 내지로 옮겼다.

[해설]

홍무 5년의 북벌은 명나라 건국 초기의 대규모 군사 작전이었으나, 서달이 툴라 강 전투에서 코케 테무르에게 대패하는 등 명나라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다. 이는 명나라가 몽골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7년(1374년) 여름, 도독 남옥이 흥화를 함락시켰다. 이문충 또한 비장을 보내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아 베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고주 대석애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종왕, 대신 타타실리 등을 베었으며 전모산에 이르러 노왕을 베고 그 비 몽케투를 사로잡았다. 가을, 태조는 옛 원나라 태자가 사막을 떠돌며 부자가 단절되고 후사가 없으므로 숭례후(마이다리팔라)를 북쪽으로 돌려보내며 글을 써서 타일렀다. 또 2년 뒤, 그 부하 구주 등이 서쪽 변경을 도적질하다가 패하여 달아났다.

[해설]

명 태조는 붙잡아 두었던 원나라 황손 마이다리팔라를 돌려보내 북원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거나 유화책을 쓰려 했다.


홍무 11년(1378년) 여름, 옛 원나라 태자 아유르시리다르가 죽자 태조가 직접 글을 지어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 지냈다. 아들 토구스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그 승상 여아, 만자 하라장, 국공 탈화적, 평장 완자 불화, 내아 불화, 추밀지원 애족 등이 무리를 옹위하고 응창, 화림에 있으며 때때로 요새 아래에 출몰했다. 태조가 여러 번 옥새가 찍힌 서신을 하사하여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았다. 13년(1380년) 봄, 서평후 목영의 군사가 영주를 나와 황하를 건너 하란산을 지나 유사를 밟고 화림에서 탈화적, 애족 등을 사로잡아 그 부곡을 모두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완자 불화 또한 사로잡혔다. 이듬해 봄, 서달 및 부장군탕화, 부우덕이 내아 불화를 정벌하여 하북에 이르러 회산을 습격해 참획한 것이 심히 많았다.

[해설]

아유르시리다르가 죽고 토구스 테무르(천원제)가 즉위했다. 명나라는 지속적으로 몽골의 잔존 세력을 토벌했다.


당시 코케 테무르는 이미 먼저 죽었고 여러 거물급 우두머리들은 차례로 평정되거나 풍문을 듣고 귀부하였는데, 유독 승상 나하추만이 20만 무리를 거느리고 금산에 웅거하며 자주 요동을 엿보았다. 20년(1387년) 봄, 송국공 풍승을 대장군으로 명하고 영천후 부우덕, 영창후 남옥 등을 인솔하여 병사 20만으로 그를 정벌하게 했으며, 먼저 사로잡았던 원나라 장수 나이라우를 돌려보냈다. 풍승의 군대가 통주에 주둔하고 남옥을 보내 큰 눈을 틈타 경주를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여름, 군사가 금산을 넘었는데 임강후 진용이 길을 잃어 적진에 빠져 죽었다. 나이라우가 돌아가 조정이 구휼하는 은혜로운 말로 그 무리에게 알리니 이에 전국공 관동이 와서 항복했다. 나하추는 나이라우의 말을 듣고 이미 마음이 흔들렸는데 다시 대군에게 핍박당하자 거짓으로 사람을 대장군 영영에 보내 정성을 바치는 척하며 병력을 엿보았다. 풍승이 남옥을 보내 항복을 받게 했다. 사자가 풍승의 군대를 보고 돌아와 보고하니 나하추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이 무리를 갖지 못하게 하는구나." 마침내 수백 기병을 이끌고 남옥에게 나아가 항복했다. 얼마 후 벗어나려 하다가 정국공 상무에게 상처를 입어 가지 못했다. 도독 경충이 마침내 무리로 그를 옹위하여 풍승을 뵙게 하니 풍승이 그를 후하게 예우하고 경충으로 하여금 함께 먹고 자게 했다. 전후하여 그 부곡 20여만 명이 항복했는데 나하추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흩어진 자가 4만 명이었고 획득한 치중과 가축, 말은 100여 리에 뻗쳤다. 풍승이 군사를 돌리는데 도독 복영이 3천 기병으로 뒤를 맡았다가 흩어졌던 병졸들에게 기습을 당해 죽었다. 가을, 풍승 등이 표문으로 나하추 소속 관속 200여 명, 장교 3,300여 명, 금은동인 100과, 호부패면 125건, 말 290여 필을 올리며 하례했다. 태조는 나하추를 해서후에 봉하고 전후로 하사한 것이 심히 후했으며 아울러 나이라우에게 천호를 제수했다.

[해설]

나하추는 만주 지역에 웅거하던 원나라의 강력한 군벌이었다. 그의 항복은 명나라가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북원 세력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하추가 이미 항복했으나 황제는 옛 원나라의 남은 도적들이 끝내 변경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 여겨, 곧 군중에서 남옥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당승, 곽영을 부장군으로, 경충, 손각을 좌우참장으로 삼아 군사 15만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게 했다. 겨울, 원나라 장수 탈탈 등이 남옥에게 항복했다. 이듬해 봄, 남옥이 대군을 이끌고 대녕을 경유하여 경주에 이르러 토구스 테무르가 포어아해(부이르 호수)에 있다는 것을 듣고 샛길로 달려 나아가 백안정에 이르렀으나 적이 보이지 않자 군사를 돌리려 했다. 정원후 왕필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성주(황제)의 위덕을 받들고 10만여 무리를 이끌고 깊이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소득 없이 어찌 복명하겠습니까?" 하니 남옥이 이에 땅을 파서 밥을 짓고 하룻밤을 달려 포어아해에 이르렀다. 새벽에 적진과의 거리가 80리였다. 때마침 큰 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려 낮에도 어두워 군사의 행군을 아는 자가 없었고 적은 방비하지 않았다. 왕필이 선봉이 되어 곧바로 육박하여 마침내 그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태위, 만자 수천 명을 베었다. 토구스 테무르는 그 태자 천보노, 지원 날겁래, 승상 실열문 등 수십 기병과 함께 달아났고, 그 차자 지보노 및 비주 50여 명, 우두머리 3천, 남녀 7만여 명, 말과 낙타, 소, 양 10만 마리를 획득하고 갑옷과 무기를 모아 불태웠다. 또 그 장수 하라장의 진영을 격파하여 그 무리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냈다. 이에 막북(사막 북쪽)이 평정되었다. 승전보가 이르자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지보노 등에게 돈과 폐백을 하사하고 관청에 명하여 공급을 해주게 했다. 이윽고 남옥이 원나라 군주의 비를 사통했다는 말이 있어 황제가 노하니 비는 부끄럽고 두려워 자살했다. 지보노가 원망하는 말을 하니 황제가 그를 유구(류큐)에 거주하게 했다.

[해설]

이것이 유명한 '포어아해(부이르 호수) 전투'이다. 남옥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북원의 주력군을 괴멸시킨 전투로, 이 패배로 인해 원나라의 황실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몽골은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토구스 테무르는 간신히 도망쳤지만 세력을 잃었다.


토구스 테무르가 도망친 후 장차 화림의 승상 교주에게 의지하려 하여 가다가 토라하에 이르러 그 부하 예수데르에게 습격을 당해 무리가 다시 흩어지고 홀로 날겁래 등 16기하고만 함께 했다. 마침 교주가 와서 맞이하여 함께 코케 테무르에게 가서 의지하고자 했으나 눈이 많이 내려 출발하지 못했다. 예수데르의 군사가 갑자기 들이닥쳐 그를 목 졸라 죽이고 아울러 천보노도 죽였다. 이에 날겁래, 실열문 등이 와서 항복하니 그들을 전녕위에 두었다. 얼마 안 있어 날겁래가 실열문에게 습격당해 죽고 무리가 무너지자 조서를 내려 타안 등의 위소에 그들을 초무하게 하니 와서 항복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23년(1390년) 봄, 영국공 부우덕 등에게 명하여 북평의 병사로써 연왕을 따르게 하고, 정원후 왕필 등은 산서의 병사로써 진왕을 따르게 하여 교주 및 내아 불화, 아로첩목아 등을 정벌하게 했다. 연왕이 고북구로 나가 내아 불화의 진영이 이도에 있음을 정탐하여 알고 큰 눈을 무릅쓰고 달려 나아가니 적과의 거리가 하나의 사막뿐인데도 적은 알지 못했다. 먼저 지휘 관동을 보내니 관동은 옛날 내아 불화와 친했으므로 한번 보자 서로 붙잡고 울었다. 잠시 후 대군이 그 진영을 압박하니 내아 불화가 놀라 달아나려 하자 관동이 그를 멈추게 하고 인도하여 왕을 뵙게 하니 음식을 하사하고 위로하며 돌려보냈다. 내아 불화가 기쁨이 분에 넘쳐 마침내 교주 등과 함께 와서 항복했다. 한참 뒤 내아 불화 등이 반란을 모의하여 주살되자 적은 더욱 쇠약해졌다. 태조는 또한 연왕, 진왕 등 여러 왕을 변경의 울타리가 되는 번진으로 봉하고 해를 걸러 대장을 보내 요새 아래를 순행하며 여러 위소의 병졸을 감독해 둔전하게 하고, 신중을 기하도록 경계하여 적이 오면 번번이 이를 격파했다. 적은 토구스 테무르 이후로 부족의 장수들이 어지럽게 다투어 5대를 전하여 쿤 테무르에 이르렀는데 모두 시해당하여 다시는 제호를 알지 못했다. 구이리치(귀력적)라는 자가 있어 찬탈하여 즉위하고 가한이라 칭하며 국호를 없애고 드디어 달단(타타르)이라 칭했다.

[해설]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면서 쿠빌라이 가문의 직계 혈통이 끊기거나 힘을 잃었고, 몽골은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명나라는 연왕 주체(훗날 영락제) 등을 북방에 배치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이후 몽골은 '원(Yuan)'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타타르(달단)로 불리게 되며, 서쪽의 오이라트(와라)와 대립하게 된다. 구이리치는 오이라트 계열 혹은 비원나라 황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성조(영락제)가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통교할 것을 타일러 은과 폐백을 하사하고 아울러 그 지원 아루타이, 승상 마아합잡 등에게도 주었다. 당시 구이리치가 오이라트와 서로 원수져 죽이며 자주 요새 아래를 오가니 황제가 변경 장수들에게 칙서를 내려 각기 병사를 엄히 하여 대비하게 했다.

영락 3년(1405년), 두목 소호아, 찰한 달로화 등이 전후하여 귀순해 왔다. 한참 뒤 아루타이가 구이리치를 죽이고 별실팔리에서 원나라의 후예 분야시리(본아실리)를 맞이하여 가한으로 옹립했다.

6년(1408년) 봄, 황제가 곧 글을 써서 분야시리에게 타일렀다. "원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한 후로 순제의 후손 아유르시리다르부터 쿤 테무르에 이르기까지 무릇 6대를 전했으나 순식간에 한 사람도 제명에 죽은 자를 듣지 못했다. 나의 황고 태조 고황제께서는 원씨 자손에 대해 마음을 다해 구휼하여 귀순하는 자는 번번이 북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토구스 테무르를 보내 돌아가게 하여 뒤를 이어 가한이 되게 한 것과 같은 일은 남북의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다. 짐의 마음이 곧 황고의 마음이다. 지금 원씨의 종묘 제사가 끊어지기가 실오라기 같은데, 거취의 기미와 화복의 연유가 나뉘니 너는 마땅히 살펴서 대처하라." 그러나 듣지 않았다.

이듬해, 그 부곡 완자 테무르 등 22명을 사로잡았는데, 황제가 이로 인하여 다시 급사중 곽기를 시켜 글을 가지고 가게 했다. 곽기가 피살되자 황제가 노했다. 가을, 기국공 구복을 대장군으로, 무성후 왕총, 동안후 화진을 부장군으로, 정안후 왕충, 안평후 이원을 좌우참장으로 명하여 정예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북쪽을 토벌하게 하고, 기회를 잃지 말며 가볍게 적을 범하지 말고 한번 거병하여 이기지 못하면 다시 거병하기를 기다리라고 타일렀다. 당시 분야시리는 이미 오이라트에게 습격당해 격파되어 아루타이와 함께 노구하로 옮겨 거주하고 있었다. 구복이 천 기병을 이끌고 먼저 달려가 유격병을 만나 격파했다. 군사가 모이지 않았는데 구복이 승세를 타고 강을 건너 적을 추격하니 적이 번번이 패한 척하며 물러갔다. 여러 장수들이 황제의 명으로써 구복을 말렸으나 구복은 듣지 않았다. 적의 무리가 갑자기 이르러 포위하니 다섯 장군이 모두 죽었다. 황제가 더욱 노했다.

[해설]

영락제는 초기에는 유화책을 썼으나 사신이 살해당하고 구복의 10만 대군이 전멸하는 참사가 벌어지자 직접 친정을 결심하게 된다. 분야시리는 울제이 테무르 칸이다.


이듬해, 황제가 직접 50만 무리를 거느리고 요새를 나갔다. 분야시리가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아루타이와 함께 서쪽으로 가려 했으나 아루타이가 따르지 않아 무리가 궤멸되어 흩어지니 군신이 비로소 각기 별도로 부락을 이루었다. 분야시리는 서쪽으로 달아나고 아루타이는 동쪽으로 달아났다. 황제가 오난하까지 추격하니 분야시리가 맞서 싸웠다. 황제가 군사를 지휘하여 분발해 치니 한 번 함성에 그들을 패배시켰다. 분야시리는 치중과 가축을 버리고 7기병으로 달아났다. 오난하는 원 태조(칭기즈 칸)가 처음 일어난 땅이다. 군사를 돌려 정로진에 이르러 아루타이를 만나니 황제가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아루타이는 오고 싶었으나 무리들이 불가하다 하여 마침내 싸웠다. 황제가 정예 기병을 이끌고 크게 소리치며 충격하니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고 아루타이가 말에서 떨어져 마침내 대패하고 100여 리를 쫓아 달아나게 하고서야 돌아왔다. 겨울, 아루타이가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니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해설]

영락제의 제1차 몽골 친정이다. 분야시리와 아루타이 세력을 각각 격파했다. 아루타이는 동몽골의 유력자로 훗날 명나라와 오이라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2년 뒤, 분야시리가 오이라트의 마하무 등에게 피살되었다. 아루타이는 이미 자주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고 황제는 모두 후하게 보답했으며 아울러 지난번 사로잡았던 그의 동복형제와 누이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이때 이르러 (아루타이가) 마하무 등이 그 군주를 시해하고 또 멋대로 답리파를 옹립했다고 주조하며, 정성을 바쳐 내부(귀순)하여 옛 주인을 위해 복수하기를 청했다. 천자가 의롭게 여겨 화녕왕에 봉했다. 이로부터 해마다 혹 한 번, 혹은 두 번 조공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12년(1414년), 황제가 오이라트를 정벌했다. 아루타이가 사신을 보내 부장 이하가 내조하여 회합했다. 쌀 50석, 말린 고기, 술과 마른 밥, 채색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14년(1416년), 오이라트를 전쟁에서 패배시켰으므로 사신을 보내 포로를 바쳤다. 19년(1421년), 아루타이의 조공 사신이 변경에 이르러 여행객을 위협하고 약탈하니 황제가 사신을 타일러 경계하고 거두게 하였으나, 이로 말미암아 교만하고 건방져져서 오지 않았다.

아루타이가 내부한 것은 오이라트에게 곤경을 치러 궁색해져 남쪽으로 와서 요새 밖에서 잠시 숨을 돌리려 생각한 것이었다. 황제가 받아들여 봉하고 어머니와 처를 모두 왕태부인, 왕부인으로 삼았다. 수년간 모여 살며 가축을 기르니 날로 번성해졌고 드디어 우리 사신을 업신여겨 구류했다. 그 조공 사신이 돌아갈 때 약탈을 많이 행했고 부락 또한 때때로 와서 요새를 엿보았다. 20년(1422년) 봄, 흥화에 크게 쳐들어왔다. 이에 조서를 내려 친히 그를 정벌했다. 아루타이가 대군이 나감을 듣고 두려워하니 그 어머니와 처가 모두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대명 황제가 너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기필코 반역을 하는가!" 이에 그 치중과 말과 가축을 활란해 곁에 모두 버리고 그 처자식을 데리고 곧바로 북쪽으로 옮겨갔다. 황제가 명하여 그 치중을 불태우고 그 말과 가축을 거두고 마침내 회군했다.

[해설]

아루타이는 세력을 회복하자 다시 명나라를 배반했다. 영락제는 이에 대응해 3차 친정을 감행한다.


이듬해 가을, 변경 장수가 아루타이가 장차 입구(침략)하려 한다고 말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의 뜻은 짐이 필시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 여길 것이니 마땅히 먼저 요새 아래에 머물며 그를 기다릴 것이다." 마침내 영양후 진무를 선봉으로 나누어 정하고, 숙외산에 이르렀으나 적이 보이지 않았고 왕자 에센 투간이 처자와 부속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는 것을 만났다. 황제가 충용왕에 봉하고 성명을 하사하여 금충이라 했다. 충용왕이 경사에 이르러 자주 적을 공격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잠시 기다려라."

22년(1424년) 봄, 개평 수비 장수가 아루타이가 변경을 도적질한다고 주소하니 뭇 신하들이 황제에게 충용왕의 말대로 하기를 권했다. 황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군사가 답란납목아하에 머물렀는데 첩자를 잡아 아루타이가 멀리 도망친 것을 알았다. 황제 또한 전쟁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 이에 조서를 내려 아루타이의 죄악을 드러내고 그 소속으로 와서 항복하는 자는 용서하고 죽이지 말게 했다. 수레를 돌려 돌아오다가 유목천에서 붕어했다. 얼마 안 있어 아루타이가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는데 인종이 이미 등극하여 조서를 내려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직공을 닦는 것이 영락 때와 같았다.

[해설]

영락제는 5차례나 몽골 친정을 감행했으나 아루타이를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5차 원정 귀환길에 병사했다.


당시 아루타이는 자주 오이라트에게 패하여 부곡이 이산되었다. 그 부하 파적 등이 전후하여 귀순하니 조정에서 모두 관직을 주고 돈과 폐백을 하사하고 관청에 조서를 내려 공급을 대주게 했다. 이후로 와서 귀순하는 자들도 모두 전례와 같이 했다. 아루타이는 날로 위축되어 이에 그 속하를 이끌고 동쪽으로 올량합으로 달아나 요동 요새에 주목했다. 여러 장수들이 출병하여 기습 공격하기를 청했으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선덕 9년(1434년), 아루타이는 다시 토크토아 부카에게 습격당해 처자가 죽고 가축이 거의 다 없어졌으며 홀로 그 아들 실내간 등과 함께 모납산, 찰한뇌랄 등지로 옮겨 살았다. 얼마 안 있어 오이라트의 토곤이 아루타이 및 실내간을 습격하여 죽이니, 이에 아루타이의 아들 아복지암 및 그 손자 며느리 속목답사 등이 상하고 패하여 의지할 곳이 없어 와서 내부를 구걸했다. 황제가 불쌍히 여겨 어루만져 주었다.

[해설]

동몽골의 강자였던 아루타이는 결국 서몽골(오이라트)의 토곤 타이시와 토크토아 부카 칸에게 패배하여 죽었다. 이는 오이라트의 전성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사건이다.


아루타이가 죽은 후, 그가 예전에 옹립했던 아태 왕자 및 소속 도르지 벡 등이 다시 토크토아 부카에게 곤경을 당하여 이집내로로 숨어들어 살았다. 겉으로는 정성을 바친다고 하면서 자주 감주, 양주를 입구했다. 정통 원년(1436년), 장군 진무가 도르지 벡을 평천에서 패배시키고 소무산까지 추격하여 참획한 것이 자못 있었다. 2년 겨울, 도독 임례를 총병관으로, 장귀, 조안을 부장으로, 상서 왕기를 독사로 명하여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이듬해 여름, 다시 도르지 벡 등을 석성에서 패배시켰다. 아태와 도르지가 합하자 다시 올로내 땅에서 그들을 패배시키고 흑천까지 추격하고 또 조력구까지 이르러 사막 천 리를 나가 동서로 협공하니 적이 거의 다하였고 전후로 그 부장 150명을 획득했다. 이에 아태, 도르지 벡 등이 와서 귀순했다.

얼마 안 있어 토크토아 부카가 아태 등을 잡아 죽였다. 토크토아 부카는 옛 원나라의 후예로 달단(동몽골)의 우두머리였다. 오이라트의 토곤이 이미 아루타이를 쳐죽이고 그 부락을 모두 거두었으며 현의왕, 안락왕 두 왕의 무리를 겸병하여 스스로 가한이 되고자 했다. 무리들이 불가하다 하여 이에 토크토아 부카를 옹립하고 아루타이의 무리를 그에게 속하게 했으며 스스로 승상이 되어 겉으로는 받드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그 호령을 받지 않았다.

[해설]

오이라트의 토곤 타이시는 칭기즈 칸의 직계 혈통(황금씨족)이 아니었기에 칸이 되지 못하고, 대신 토크토아 부카(타이순 칸)를 허수아비 칸으로 세우고 실권을 장악했다.


토곤이 죽고 아들 에센이 뒤를 이으니 더욱 사납고 스스로 영웅인 체하여 여러 부족이 모두 그에게 굴복했으며 토크토아 부카는 가한의 이름만 갖추었을 뿐이었다. 토크토아 부카가 해마다 와서 조공하니 천자가 모두 후하게 보답하여 여러 번국에 비하여 더함이 있었고 글을 보내 달단 가한이라 칭하고 하사품이 그 비에게까지 미쳤다. 14년(1449년) 가을, 에센이 대거 입구를 모의하자 토크토아 부카가 말리며 말했다. "우리들이 입고 먹는 것이 대명에 힘입음이 많은데 차마 어찌 이 짓을 하겠는가." 에센이 듣지 않고 말하기를 "가한이 하지 않으면 내 마땅히 스스로 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길을 나누어 토크토아 부카로 하여금 요동을 침략하게 하고 스스로는 무리를 옹위하여 대동을 따라 들어왔다. 황제가 친히 정벌하다가 토목에서 함몰되었다. 경황제(경태제)가 감국으로부터 즉위하고 황제를 태상황제로 높였다. 이듬해 가을, 상황이 에센의 거처로부터 돌아왔다. 일은 오이라트 열전에 실려 있다.

[해설]

이것이 명나라 역사상 최대의 치욕인 '토목의 변'이다. 에센 타이시가 침공하자 명 영종(정통제)이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친정했다가 포로가 되었다. 북경 방어전(우겸의 활약) 후 에센은 영종을 돌려보냈다.


토크토아 부카는 상황이 돌아온 후 공물을 바치는 것이 더욱 부지런했다. 일찍이 에센의 누이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았는데 에센이 그를 태자로 세우고자 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에센은 또한 그가 중국과 내통하여 장차 자기를 해칠까 의심하여 마침내 병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했다. 에센이 토크토아 부카를 죽이고 그 처자와 가축을 거두어 여러 부속에게 나누어 주고 스스로 가한이 되었다. 이때가 경황제 2년(1451년)이었다. 조정에서는 에센을 오이라트 가한이라 칭했다.

얼마 안 있어 소속 아라 지원에게 피살되었다. 달단 부장 패라(볼라이)가 다시 아라를 쳐부수고 토크토아 부카의 아들 마르코르기스를 구하여 옹립하고 소왕자(작은 왕자)라 불렀다. 아라가 죽자 패라와 그 속하 모리해 등이 모두 부족 내에서 웅시하니 이에 달단이 다시 치성해졌다.

[해설]

에센은 황금씨족이 아님에도 칸을 칭했다가 반발을 사서 암살당했다. 이후 몽골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볼라이(패라)가 타이순 칸의 아들 마르코르기스를 옹립했다. 명나라는 이때부터 몽골의 칸을 '소왕자'라고 통칭하기 시작했다.


경태 6년(1455년)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영종이 복벽하고 도독 마정을 보내 옛 백안 테무르의 처에게 폐백을 하사했다. 패라가 그를 억류하고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하례하며 옥새를 바치고자 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말했다. "옥새는 이미 진짜가 아니며 설령 진짜라 해도 또한 진나라의 상서롭지 못한 물건일 뿐이니 바치고 안 바치고는 너의 편한 대로 하라. 다만 우리 사신을 억류하여 너의 화를 재촉하지 말라." 당시 적이 자주 위원 등 여러 위소를 침구하니 여름에 정원백 석표가 마아산에서 그들을 패배시켰다.

천순 2년(1458년), 패라가 대거 섬서를 침구하니 안원후 유부 등이 막았으나 번번이 패배하고도 작은 승리를 꾸며서 보고했다. 이듬해 봄, 적이 안변영에 들어오니 석표 등이 격파했으나 도독 주현, 지휘 이감 등이 전사했다. 4년(1460년) 다시 유림을 침구하니 창무백 양신이 막아 물리쳤다. 재차 들어오니 금계욕에서 패배시켰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섬서의 여러 변경을 크게 약탈하니 조정 신하들이 각 수비 장수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으나 황제가 용서했다. 5년(1461년) 봄, 도적이 평로성에 들어와 지휘 허옹 등을 유인하여 매복에 들게 해 죽였다. 변경의 보고가 날로 위급해지자 시랑 백규, 도어사 왕굉에게 명하여 군대를 시찰하게 했다. 가을, 패라가 화친을 구하니 황제가 첨승을 시켜 칙서를 가지고 가서 타일러주게 했다. 패라가 사신을 보내 첨승을 따라와 조공하며 대동의 옛 조공길을 고쳐 섬서 난현을 경유하여 들어오기를 청하니 허락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그 속하 모리해 등을 규합하여 하서로 들어왔다. 이듬해 봄, 백규 등이 서쪽 변경을 나누어 순시했는데 백규는 고원천에서 적을 만나고 왕굉은 홍애자천에서 적을 만나 모두 격파했다. 황제가 옥새가 찍힌 글을 하사하여 장려하고 패라의 사신에게 칙서를 내려 여전히 대동을 따라 조공하게 했다.

[해설]

패라(볼라이)가 명나라 북변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상황이다.


당시 마르코르기스가 다시 패라와 서로 원수져 죽였다. 마르코르기스가 죽자 무리들이 함께 멀런 Khan(마가고아길사)을 옹립했는데 이 또한 소왕자라 불렀다. 이로부터 달단 부장들이 더욱 각기 전횡했다. 소왕자는 드물게 중국과 통교했고 대를 전한 차례를 고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패라 등은 매년 입조하여 조공하면서도 자주 침략하고 약탈하며 요새 아래를 오가면서 서쪽으로 오이라트를 공격한다는 것을 핑계로 삼았고, 또 자주 3위를 위협하고 겁박했다. 7년(1463년) 겨울, 조공 사신이 관문에 이르렀으나 황제가 물리쳤고 대학사 이현이 말하여 이에 그쳤다. 8년(1464년) 봄, 어사 진선이 말했다. "달단 부락은 패라가 가장 강하여 또 은밀히 3위의 여러 번국을 불러 서로 결탁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내조하여 우리에게 상과 연회를 요구하며 우리의 허실을 엿보았으니 그 변경을 범하려는 정황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변경 관문의 수비 신하들은 구습을 답습하여 태만하고 성보를 수리하지 않으며 갑옷과 무기가 날카롭지 않고 군사들이 훈련하지 않으며 심지어 부유한 자는 월전을 내고 한가로이 지내고 가난한 자는 굶주림과 추위에 닥쳐 도망치고 숨습니다. 변경의 방비가 해이해졌으니 위급할 때 무엇을 믿겠습니까. 비오니 변경에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칙서를 내려 이전의 폐단을 통렬히 고치게 하소서. 그 진수, 방어 등의 관리 또한 마땅히 때에 맞게 내치고 올려서 원컨대 능력 있는 자는 분발할 줄 알고 게으른 자는 경계할 줄 알게 하소서. 요새의 요해처에는 혹은 관군을 더하고 혹은 영보를 설치하고 혹은 돈대를 사용하여 모두 처치가 마땅함을 얻어야 하며, 해마다 대신을 보내 순시하게 하여 원컨대 변방에 방비가 있게 하면 도적의 기운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보고를 듣고 알았다고 했다.

[해설]

'3위'는 명나라에 귀순하여 몽골족 거주지에 설치된 올량합(우량카이) 3위를 말한다 (타이닝, 푸위, 도얀). 이들은 명과 몽골 사이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성화 원년(1465년) 봄, 패라가 올량합 9만 기병을 유인하여 요하에 들어오니 무안후 정굉이 막아 물리쳤다. 가을, 흩어져 연수를 약탈했다. 겨울, 다시 크게 들어왔다. 창무백 양신에게 명하여 산서 병사를 이끌고 도어사 항충은 섬서 병사를 이끌고 막게 하니 조금 물러갔다. 얼마 안 있어 다시 하곡을 건너 황보천보를 포위하니 관군이 힘써 싸우자 이에 군사를 이끌고 갔다.

처음에 달단이 올 때는 혹은 요동, 선부, 대동에 있거나 혹은 영하, 장랑, 감숙에 있어 오고 감이 무상하여 근심이 된 지 오래지 않았다. 경태 초기에 비로소 연경을 범했으나 부락이 적어 감히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천순 연간에 아라출(아로출)이라는 자가 있어 속하를 이끌고 몰래 하투(오르도스)에 들어와 거주하니 마침내 서쪽 변경에 핍박해 가까워졌다. 하투는 옛 삭방군으로 당나라 장인원이 3개의 수항성을 쌓은 곳이다. 땅은 황하 남쪽에 있으며 영하로부터 편두관에 이르기까지 길이 2천 리에 뻗쳐 있고 물과 풀이 풍요로우며 밖으로는 동승위가 된다. 동승의 밖은 땅이 평평하게 퍼져 있어 적이 오면 기병 하나도 숨길 수 없으므로 명나라 초기에 지켰으나 후에 넓고 멀어서 내지로 옮겼다. 이때 이르러 패라와 소왕자, 모리해 등이 전후하여 계속 이르러 중국인을 납치하여 향도로 삼고 연수를 초략함이 빈 때가 없으니 변경의 일이 가시밭 같아졌다.

[해설]

'하투(河套)'는 황하가 '几'자 모양으로 굽어 흐르는 오르도스 지역이다. 이곳은 수초가 풍부하고 명나라 방어선 안쪽으로 파고든 형태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몽골이 이곳을 점거하면서 명나라 변경, 특히 섬서와 산서 지역이 큰 위협을 받게 된다.


2년(1466년) 여름, 연수에 크게 들어왔다. 황제가 양신을 총병관으로, 도독 조승을 부관으로 명하여 경군 및 여러 변경의 병졸 2만 명을 이끌고 토벌하게 했다. 양신이 먼저 일을 논의하러 궁궐로 가다가 도착하지 않았다. 적이 흩어져 평량을 약탈하고 영주 및 고원에 들어가 장구하여 정녕, 융덕 여러 곳을 도적질했다. 겨울, 다시 연수에 들어와 참장 탕윤적이 전사했다.

얼마 안 있어 여러 부족이 내부에서 다투어 패라가 멀런 Khan을 시해하고 모리해가 패라를 죽이고 다시 다른 가한을 옹립했다. 아라출이란 자가 다시 모리해와 서로 원수져 죽이니, 모리해가 마침내 그가 옹립한 가한을 죽이고 아라출을 쫓아내고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이윽고 강을 건너 대동을 약탈했다. 3년(1467년) 봄, 황제가 무녕후 주영 등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했다. 마침 모리해가 다시 통공을 구걸하고 별부 추장 보루나이 또한 사람을 보내 내조했다. 황제가 허락하고 주영 등에게 조서를 내려 요새 위에 주둔하게 했다.

4년(1468년) 가을, 급사중 정만리가 올린 말에 "모리해가 오랫동안 조공하지 않고 변경을 엿보니 그 정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이 헤아리건대 그가 패배할 수 있는 점이 세 가지 있습니다. 우리 변경 땅과 겨우 2~3일 거리이니 그는 객이고 우리는 주인이니 첫째요, 여러 부족을 겸병하여 말을 달려 쉼이 없어 이미 교만하고 또 피로하니 둘째요, 근래에 흩어져 물과 풀을 쫓아 부락이 넷으로 나뉘고 병력이 하나가 아니니 셋입니다. 마땅히 정병 2만을 뽑아 매 3천 명을 1군으로 하여 날랜 장수에게 통솔하게 하고 그 상벌을 엄히 하여 모리해가 있는 곳을 탐지하게 하고 군사를 잠복시켜 그를 치면 반드시 격파할 것입니다." 황제가 장하게 여겼으나 쓸 수는 없었다. 겨울에 연수를 도적질했다. 이듬해 봄에 재차 들어오니 수비 장수 허녕 등이 번번이 격파했다. 겨울에 다시 3위를 규합하여 입구하니 연수, 유림이 크게 소란했다.

6년(1470년) 봄, 대동 순무 왕월이 유격 허녕을 보내 격파했다. 양신 등도 또한 호시구에서 크게 격파했다. 당시 보루나이가 아라출과 합하고 별부 베그 아르슬란(비가사란), 보로후(패라홀) 또한 들어와 하투에 웅거하며 오래 살 계책을 세웠다. 연수가 위급을 알리니 황제가 주영을 장군으로 명하고 왕월로 하여금 군무를 참찬하게 하여 적을 막게 했다. 주영이 이르러 자주 승전보를 알리니 왕월 등이 모두 승진하고 상을 받았으며 공을 논하여 주영을 세습 후로 삼았으나 적은 하투에 웅거하기를 예전과 같이 했다.

7년(1471년) 봄, 주영이 전쟁과 수비 두 가지 계책을 올렸으나 조정의 논의가 식량이 부족하고 말이 궁핍하여 나아가 토벌하기 어렵다 하여 변장에게 명하여 수비에 신중을 기해 만전을 도모하기를 청했다. 이에 이부시랑 엽성이 변경을 순시하고 연수 순무 여자준 및 왕월과 함께 변경의 담(장성)을 쌓고 대와 보를 설치할 것을 의논했다. 겨울, 적이 요새로 들어와 참장 전량이 패배했으나 왕월 등이 구원하지 못했다. 병부상서 백규가 대장군을 가려서 보내 적을 전문적으로 상대하게 하기를 청했는데 마침 엽성이 돌아오고 왕월 또한 일을 계획하러 북경에 오니 이에 조정의 논의를 모아 병력을 크게 일으켜 하투를 수색하기를 청했다. 황제가 무정후 조보를 장군으로 삼아 여러 길을 절제하게 하고 왕월은 그대로 독사하게 했다. 적이 연수에 크게 들어왔는데 조보가 막지 못하여 마침내 소환하고 영진백 유취로 대신하게 했으나 유취 또한 공이 없었다. 그런데 모리해, 보루나이, 아라출이 조금 쇠퇴하고 만두울(만두루)이 하투에 들어와 가한을 칭하고 베그 아르슬란을 태사로 삼았다.

[해설]

오르도스(하투) 지역을 두고 명나라와 몽골의 공방이 계속된다. 명나라는 장성을 수축하고(유림변장 등) 토벌군을 보냈으나 몽골의 기동력에 고전했다. 만두울(만두하이 카툰의 첫 남편)이 대칸이 되었다.


9년(1473년) 가을, 만두울 등이 보로후와 함께 위주를 침구했다. 왕월이 적이 모두 떠나고 그 노약자들은 홍염지에 둥지를 틀고 있음을 정탐하여 알고, 이에 허녕 및 유격 주옥과 함께 가벼운 기병을 이끌고 밤낮으로 질주하여 이르러 나누어 그 진영에 육박해 전후로 협공하여 크게 격파했다. 다시 위주에서 요격했다. 만두울 등이 패하여 돌아왔으나 가축과 움막이 탕진되고 처자가 모두 죽거나 없어져 서로 돌아보고 슬피 울며 떠났다. 이로부터 다시는 하투에 거주하지 않아 변경의 근심이 조금 그쳤다. 간혹 변경을 도적질했으나 감히 깊이 들어오지 못했고 또한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처음에 베그 아르슬란이 딸을 만두울에게 시집보내고 가한으로 옹립했었다. 한참 뒤 보로후를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러 더욱 방자해졌다. 만두울의 부하 토로간, 이스마일(역사마인)이 그를 죽이기를 모의했다. 얼마 후 만두울 또한 죽고 여러 강한 추장들이 잇달아 거의 다 없어지니 변경 사람들이 조금 어깨를 쉴 수 있었다.

[해설]

왕월의 홍염지 기습전은 명나라 중기 몽골전의 큰 승리 중 하나다. 이로 인해 오르도스에 웅거하던 몽골 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다. 만두울 칸이 죽은 후, 바투 몽케(훗날의 다얀 칸)가 등장할 무대가 마련된다.


당시 중관(환관) 왕직이 은혜를 믿고 권세를 부리며 변경의 공로써 스스로를 세우고자 생각하니 왕월, 주영이 그에게 붙었다. 16년(1480년) 봄, 변경 장수가 상소하여 전해 듣기로 적이 장차 강을 건널 것이라 하니 급히 주영을 장군으로 삼았다. 왕직과 왕월이 군사를 감독하여 변경에 이르렀는데 기약에 미치지 않아 위녕해자에서 적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또 대동에서 패배시켰다. 주영을 공작으로 올리고 세습을 주었으며 왕월은 위녕백에 봉하고 왕직은 녹을 더하여 300석에 이르렀다. 얼마 안 있어 조서를 내려 왕월로 주영을 대신하여 총병으로 삼았다. 이에 이스마일 등이 더욱 무리를 규합하여 변경을 도적질하니 요동 요새에까지 미쳤다. 가을, 적 3만 기병이 대동을 침구하여 진영이 50리에 이어졌고 사람과 가축 수만 명을 살육하고 약탈했다. 총병 허녕이 막다가 병사가 패하여 승전보(거짓)로 알렸다. 적이 이미 이득을 얻자 장구하여 순성천에 들어와 혼원, 삭주 여러 주를 흩어져 약탈했다. 선부 순무 진굉, 총병 주옥이 힘써 싸워 물리쳤다. 산서 순무 변용, 참장 지옥 등이 힘을 다해 막았으나 적은 가면 번번이 다시 와서 성화 말년에 이르기까지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스마일이 죽고 입구하는 자가 다시 소왕자라 칭했는데 또 바얀 몽케(백안 맹가) 왕이 있었다. 홍치 원년(1488년) 여름, 소왕자가 글을 받들어 조공을 구하며 자칭 대원 대가한이라 했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너그럽게 받아들이는데 힘써 이를 허락했다. 이로부터 바얀 몽케 왕 등과 자주 입공하였으나 점차 하투 안을 오가며 출몰하여 도적이 되었다. 8년(1495년), 북부 이브라힘(역복랄인) 왕 등이 하투에 들어와 주목했다. 이에 소왕자 및 토로간의 아들 화사이(화체)가 서로 의지하여 날로 강해져 동서 여러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그해 요동에 세 번 들어와 살육과 약탈이 많았다. 이듬해 선부, 대동, 연수 여러 경계가 모두 잔혹하게 당했다.

[해설]

소왕자(다얀 칸)가 등장하여 몽골을 재통일하기 시작한다. 바얀 몽케(볼코 지농)는 다얀 칸의 아버지이다. (명사 기록은 다소 혼동이 있을 수 있음). 다얀 칸 시기에 몽골은 다시 강력해져 명나라를 위협했다.


11년(1498년) 가을, 왕월이 이미 여러 변경을 절제하게 되어 이에 가벼운 병사를 이끌고 하란산 뒤에서 적을 습격하여 격파했다. 이듬해 적이 무리를 옹위하여 대동, 영하 경계에 들어오니 유격 왕고가 패하고 참장 진공, 부총병 마승이 머무르며 나아가지 않아 모두 사형을 논했다. 당시 평강백 진예가 총병이 되고 시랑 허진이 독사가 되었으나 오랫동안 공이 없어 탄핵을 받아 물러나고 보국공 주휘, 시랑 사림으로 대신하게 하고 태감 묘규가 감군했다.

13년(1500년) 겨울, 소왕자가 다시 하투에 거주했다. 이듬해 봄, 이부시랑 왕오가 적을 막는 8가지 계책을 올렸다. 첫째 묘산(조정의 계산)을 정할 것, 둘째 주장을 중시할 것, 셋째 법령을 엄히 할 것, 넷째 변경 백성을 구휼할 것, 다섯째 널리 모집할 것, 여섯째 간첩을 쓸 것, 일곱째 병사를 나눌 것, 여덟째 기이한 계책을 낼 것이었다. 황제가 담당 관청에 명하여 알게 했다. 당시 적이 8천 기병으로 동쪽 요동 요새 아래에 주둔하여 장승보를 쳐들어와 살육하고 약탈함이 거의 다하였다. 가을, 주휘 등이 5길의 군사로 밤에 하투에서 적을 습격하여 참수 3급을 하고 가축 천여 마리를 몰고 돌아왔는데 상이 심히 후했다. 소왕자가 10만 기병으로 화마지, 염지로부터 들어와 고원, 영하 경계를 흩어져 약탈하니 삼보(관중 지역)가 진동하고 죽임이 참혹했다.

15년(1502년) 호부상서 진굉으로 섬서를 총제하게 했다. 여름, 적이 요동 청하보에 들어와 밀운에 이르렀다가 선회하여 서쪽으로 편두관을 약탈했다. 가을, 다시 5천 기병으로 요동 장안보를 범하니 부총병 유상이 막아 참수 51급을 하니 적이 이에 물러갔다. 이듬해 조금 평온했다.

17년(1504년) 봄, 적이 글을 올려 조공을 청하니 허락했으나 끝내 이르지 않았다. 여전히 대동에 들어와 돈군(봉화대 군사)을 죽이고 선부 및 장랑을 범하니 수비 장수 위용, 백옥 등이 막아 물리쳤다. 이듬해 봄, 적 3만 기병이 영주를 포위하고 다시 흩어져 내지를 약탈하니 지휘 구월, 총병 이상이 공격하여 쫓아냈다. 적이 대거 선부를 입구하니 총병 장준이 막다가 대패하고 비장 장웅, 목영이 전사했다.

무종(정덕제)이 뒤를 잇자 다시 주휘, 사림에게 명하여 나가 막게 했다. 겨울, 적이 진이소에 들어와 지휘 유경이 죽었다. 다시 화마지로부터 담을 허물고 들어와 융덕, 정녕, 회녕 여러 곳을 약탈하니 관중이 크게 소란하여 양일청을 총제로 삼았다. 이때가 정덕 원년(1506년) 봄이었다.

유근이 권세를 부려 감군이 모두 내시이니 양일청이 직무를 얻지 못하고 떠났고 문귀, 재관이 잇달아 일을 맡았다. 2년, 적이 영하, 장랑 및 정요후위 여러 경계에 들어오니 수비 장수들이 모두 체포되어 심문당했다.

4년(1509년), 적이 자주 대동을 침구했다. 겨울, 재관이 화마지에서 적을 막다가 매복에 걸려 죽었다. 총병 마앙이 별부 이브라힘(역패래)과 목과산에서 싸워 이기고 365급을 베고 말과 가축 6백여 마리, 군기 2천 9백여 점을 획득했다.

이듬해 북부 이브라힘과 소왕자가 서로 원수져 죽였다. 이브라힘이 서해(청해)로 숨어들어 알독시와 합하고 조서(티베트 서쪽)에 속한 번인들을 핍박하고 위협하여 여러 번 입구했다. 순무 장익, 총병 왕훈이 제어하지 못하여 점차 깊이 들어오니 변경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했다. 8년(1513년) 여름, 무리를 옹위하고 천(사천?)으로 와서 사신을 보내 장익의 처소에 이르러 변경 땅에 주둔하고 목축하며 조공 닦기를 구걸했다. 장익이 금과 비단으로 꾀어 멀리 옮겨가게 하니 이브라힘이 마침내 서쪽으로 오사장(티베트)을 약탈하고 그곳을 점거했다. 이로부터 조, 민, 송반이 편안한 해가 없었다.

[해설]

몽골 내부의 갈등으로 이브라힘 등이 청해(칭하이)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명나라 서쪽 변경과 티베트 지역까지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소왕자가 자주 입구하여 살육과 약탈이 더욱 참혹했다. 다시 5만 기병으로 대동을 공격하고 삭주로 달려가 마읍을 약탈했다. 황제가 함녕후 구월에게 명하여 총병으로 삼아 막게 하니 만전위에서 싸워 3급을 베었으나 잃고 죽은 것은 10배였는데 승전보로 알렸다. 이듬해 가을, 적이 진영 수십 개를 잇대어 선부, 대동 요새를 침구하고 별도로 만 기병을 보내 회안을 약탈했다. 총제 총란이 위급을 알리니 태감 장영에게 명하여 선부, 대동, 연수의 병사를 감독하게 하고 도독 백옥을 대장으로 삼아 총란을 협조하여 수비하게 하니 경사에 계엄을 내렸다. 이윽고 적이 회안을 넘어 울주로 달려가 평로성 남쪽에 이르니 총란 등이 미리 독이 든 밥을 밭 사이에 두어 농가의 새참처럼 해두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적이 이르러 중독되고 매복이 갑자기 발동하여 죽은 자가 많았다. 그해 소왕자 부장 부르하이(복아해)가 내부의 난 때문에 다시 서해로 달아나 웅거하며 출몰하여 서북쪽 변경을 도적질했다.

11년(1516년) 가을, 소왕자가 7만 기병으로 길을 나누어 들어와 총병 반호와 가가만에서 싸웠다. 반호가 재차 싸워 재차 패하고 비장 주춘, 왕당이 전사했다. 장영이 노영파에서 만났으나 부상을 입고 거용으로 달아났다. 적이 마침내 선부를 범하여 무릇 성보 20개를 쳐부수고 사람과 가축 수만을 살육하고 약탈했다. 반호가 세 관직을 박탈당하고 여러 장수들이 차등 있게 벌을 받았다.

12년(1517년) 겨울, 소왕자가 5만 기병으로 유림으로부터 입구하여 총병 왕훈 등을 응주에서 포위했다. 황제(정덕제)가 양화에 행차하여 친히 부서를 정하고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고 죽기로 싸우니 적이 조금 물러갔다. 다음 날 다시 와서 공격하여 진시(오전 7~9시)부터 유시(오후 5~7시)까지 100여 합을 싸웠는데 적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니 평로, 삭주까지 추격하다가 큰 바람과 검은 안개를 만나 낮에도 어두워져 황제가 이에 돌아오고 조정에 승전보를 알리게 했다. 이후 해마다 변경을 범했으나 감히 크게 들어오지는 못했다.

[해설]

정덕제의 '응주 대첩'이다. 무종 정덕제는 무예를 좋아하고 군사를 부리기를 즐겨 스스로 '총독군무위무대장군총병관'이라 칭하고 친히 출정하여 소왕자(다얀 칸)와 싸웠다. 명나라 황제가 직접 전선에서 칼을 휘두른 드문 사례이다.


가정 4년(1525년) 봄, 만 기병으로 감숙을 침구했다. 총병 강석이 고수돈에서 막아 그 우두머리를 베었다. 이듬해 대동 및 선부를 범하고 이브라힘이 다시 하란산 뒤에 주목하며 자주 변경을 소란하게 했다. 이듬해 봄, 소왕자가 두 번 선부를 침구했다. 참장 왕경, 관산이 전후하여 전사했다. 가을, 수만 기병으로 영하 요새를 범하니 상서 왕헌이 총병 정경 등으로 하여금 패배시키고 300여 급을 베었다. 이듬해 봄, 산서를 약탈했다. 여름, 대동 중로에 들어오니 참장 이진이 막아 물리쳤다. 겨울, 다시 대동을 침구하여 지휘 조원이 전사했다.

11년(1532년) 봄, 소왕자가 통공을 구걸했으나 명을 얻지 못하자 노하여 마침내 10만 기병을 옹위하고 입구했다. 총제 당룡이 허락하기를 청했으나 황제(가정제)는 듣지 않았다. 당룡이 연이어 싸워 자못 참획이 있었다.

당시 소왕자가 가장 부강하여 활 당기는 자가 10여 만이고 가축과 보화가 많았는데 조금 전쟁을 싫어하여 이에 막사를 동쪽으로 옮겨 토만(투멘)이라 칭했다. 서북쪽 변경에 있는 여러 부락을 나눈 자가 심히 많았다. 지농(길낭)이라 하고 알탄(엄답)이라 하는 자들은 소왕자에게 종부 항렬(숙부뻘)이 되는데 하투에 웅거하며 웅강하고 교활하며 병사를 좋아하여 여러 부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서로 이끌고 여러 변경을 유린했다.

[해설]

다얀 칸 사후 몽골은 다시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다. 대칸의 권위는 약해지고(찰합이부), 우익의 투메드부(알탄 칸)와 오르도스부(지농)가 실권을 장악하여 명나라를 압박했다. 여기서 '토만'은 투멘 자삭투 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나, 명사에서는 동쪽의 대칸 세력을 통칭하기도 한다.


12년(1533년) 봄, 지농이 무리를 옹위하고 하투 내에 주둔하며 장차 연수를 범하려 했는데 변경 신하들이 대비가 있자, 이에 갑자기 5만 기병으로 서쪽으로 강을 건너 이브라힘, 부르하이 양 부락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부르하이는 장랑, 영하의 변경 근심거리가 된 지 오래였고 역랑골, 토루판 등 여러 번국이 모두 그들을 고통스러워했으며 일찍이 속국 첩목가를 통해 공시를 구했으나 조정이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때 이르러 당룡이 부르하이가 쇠패하여 멀리 옮겨가 서해(청해)가 평안함을 얻었으므로 화친하는 일을 다시 논하지 말기를 청했다.

지농 등이 서해를 격파하고 이윽고 몰래 선부 영닝 경계에 들어와 크게 약탈하고 갔다. 겨울, 진원관을 범하니 총병 왕효, 부총병 양진이 유문에서 패배시키고 또 봉와산에서 추격하여 패배시키니 적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이듬해 봄, 대동을 침구했다. 가을, 다시 화마지로부터 들어와 범하니 양진 및 총병 문류가 막아 물리쳤다.

15년(1536년) 여름, 지농이 10만 무리로 하란산에 주둔하고 병사를 나누어 양주를 침구하니 부총병 왕보가 막아 57급을 베었다. 또 장랑 경계에 들어오니 총병 강석이 분수령에서 만나 세 번 싸워 세 번 이겼다. 또 연수 및 영하 변경에 들어왔다. 겨울, 다시 대동을 범하고 들어와 선부, 대동 요새를 약탈하니 총제 시랑 유천화, 총독 상서 양수례 및 순무 도어사 초서가 힘을 다해 막았다.

19년(1540년) 가을, 초서가 총병 백작 등으로 하여금 적을 만전우위 경계에서 세 번 패배시키고 백여 급을 베었다. 유천화는 총병 주상문으로 하여금 흑수원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고 지농의 아들 소십왕을 베었다. 이듬해 봄, 양수례가 총병 이의로 하여금 진삭보에서 적을 막게 하고 총병 양신으로 하여금 감숙에서 적을 막게 하여 모두 이겼다.

가을, 알탄과 그 속하 아불해(아바하이?)가 사신 석천작을 보내 대동 요새에서 화친을 청하니 순무 사도가 보고했으나 조서를 내려 물리쳤다. 상서 번계조로 하여금 선부, 대동 병사를 감독하게 하고 상금을 걸어 알탄, 아불해의 머리를 샀다. 마침내 대거 안으로 쳐들어와 알탄이 석령관을 함락시키고 태원으로 달려갔다. 지농은 평로위를 경유하여 들어와 평정, 수양 여러 곳을 약탈했다. 총병 정장, 유격 주우가 전사하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죄를 얻었으나 번계조만 홀로 상을 받았다.

21년(1542년) 여름, 적이 다시 석천작을 보내 조공을 구했다. 대동 순무 용대유가 유인하여 포박하고 조정에 올리며 거짓으로 계책을 써서 사로잡았다고 말했다. 황제가 기뻐하여 용대유를 병부시랑으로 발탁하고 변경 신하 중 승진하고 상받은 자가 수십 명이었으며 석천작을 저잣거리에서 찢어 죽였다. 적이 분노하여 입구하고 삭주를 약탈하고 광무에 이르러 태원을 경유해 남쪽으로 내려가 심, 분, 양원, 장자가 모두 잔혹하게 당했다. 다시 흔, 곽, 대를 따라 북으로 가서 기현에 주둔했다. 참장 장세충이 힘써 싸웠으나 적이 그를 몇 겹으로 포위했다. 사시(오전 9~11시)부터 신시(오후 3~5시)까지 살상이 서로 비슷했다. 이윽고 장세충이 화살이 다하여 피살되고 백호 장선, 장신이 함께 죽었으며 적은 마침내 안문 옛길을 따라 갔다. 가을, 다시 삭주에 들어왔다. 지농이 죽고 여러 아들 랑 타이지 등이 하서에 흩어져 살아 세력이 이미 나뉘었으나 알탄만이 홀로 성하여 해마다 자주 연수 여러 변경을 소란하게 했다.

[해설]

알탄 칸(엄답)은 명나라에 무역(조공)을 끊임없이 요구했으나 명 조정은 이를 거부하고 사신을 죽이는 등 강경책을 고수했다. 이에 분노한 알탄 칸은 대규모 약탈을 감행하며 명나라 깊숙이 침투했다. '석천작 사건'은 명나라 관료의 기만과 조정의 오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23년(1544년) 겨울, 소왕자가 만전우위로부터 들어와 울주 및 완현에 이르렀다. 경사에 계엄을 내렸다.

24년(1545년) 가을, 알탄이 연수 및 대동을 범하니 총병 장달이 막아 물리쳤다. 또 발합욕을 범하니 참장 장봉, 지휘 유흠, 천호 이찬, 생원 왕방직 등이 모두 전사했다. 마침 총독 시랑 옹만달, 총병 주상문이 양화에서 병사를 엄히 하여 방비하니 적이 군사를 이끌고 갔다. 이듬해 여름, 알탄이 다시 사신을 보내 대동 요새에 이르러 조공을 구하니 변경 병졸이 그를 죽였다. 가을, 다시 와서 청하니 옹만달이 다시 상소하여 알렸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적이 10만 기병으로 서쪽으로 보안에 들어와 경양, 환현을 약탈하고 동쪽으로 가서 만 기병으로 금, 의를 침구했다. 총독 삼변 시랑 증선이 참장 이진 등을 이끌고 곧바로 마량산 뒤 적의 소굴을 쳐부수고 백여 급을 베니 적이 비로소 물러갔다.

증선이 하투를 수복할 것을 의논하니 대학사 하언이 이를 주장했다. 황제가 바야흐로 하언을 쓰려고 하여 증선에게 방략을 올리게 하고 편의대로 종사하게 했다. 이듬해 여름, 옹만달이 다시 말했다. "적이 겨울부터 봄에 걸쳐 자주 조공을 구하는데 말이 공손하니 마땅히 허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듣지 않고 옹만달이 속이고 더럽힌다고 책망했다. 증선이 병사를 모으고 요새를 수리하여 번번이 적을 격파했다. 이윽고 황제의 뜻이 변하여 하언과 증선이 마침내 죄를 얻어 서시에서 참수되었다. 적은 더욱 분을 품고 맘껏 하려고 생각했으나 조정 신하들은 감히 하투 수복 일을 말하지 못했다.

[해설]

증선과 하언은 하투 수복을 주장했으나 엄숭 등의 정치적 모략으로 인해 처형당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서 적극적인 북벌론은 사라지게 된다.


28년(1549년) 봄, 선부 적수애를 범했다. 파총 지휘 강한, 동양이 전사하고 전군이 전멸했으며 마침내 영닝, 대동을 범했다. 총병 주상문이 조가장에서 막아 크게 패배시키고 그 우두머리를 베었다. 마침 옹만달이 회래로부터 구원하러 오고 선부 총병 조국충이 경보를 듣고 또한 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다시 연이어 패배시켰다. 이 해에 서쪽 요새를 범한 것이 다섯 번이었다.

29년(1550년) 봄, 알탄이 위녕해자로 주둔을 옮겼다. 여름, 대동을 범하여 총병 장달, 임춘이 죽었다. 적이 군사를 이끌고 가며 화살을 전하여 여러 부족이 대거할 것을 알렸다. 가을, 조하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고북구에 이르니 도어사 왕여효가 계진의 병사를 이끌고 막았다. 적이 거짓으로 활을 가득 당겨 안쪽으로 향하는 척하고 별도로 정예 기병을 보내 샛길로 담을 허물고 들어왔다. 왕여효의 병사가 무너지고 마침내 회유를 크게 약탈하고 순의를 포위하고 통주에 이르렀으며 병사를 나누어 사방을 약탈하고 호거의 마방을 불태웠다. 기전(경기 지역)이 크게 진동했다.

적의 대군이 경사를 범하니 대동 총병 함녕후 구란, 순무 보정 도어사 양수겸 등이 각기 근왕병을 이끌고 이르렀다. 황제가 구란을 대장군으로 삼아 여러 군을 호위하게 했다. 구란과 양수겸이 모두 나약하여 감히 싸우지 못했고 병부상서 정여기는 두려워하고 시끄럽기만 할 뿐 할 바를 몰라 문을 닫고 지키기만 했다. 적이 3일 밤낮을 불태우고 약탈하다가 군사를 이끌고 갔다. 황제가 정여기와 양수겸을 주살했다. 적이 장차 백양구로 나가려 하는데 구란이 그 뒤를 밟았다. 적이 갑자기 동쪽으로 돌아와 구란이 뜻하지 않게 나오자 병사가 무너져 사상자가 천여 명이었다. 적은 이에 서서히 고북구를 경유하여 요새를 나갔다. 여러 장수들이 버려진 시신을 거두어 베어 80여 급을 얻고 승전보로 알렸다.

[해설]

'경술의 변'이다. 알탄 칸이 북경 성벽 아래까지 진격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다. 명나라의 방어 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드러난 사건이다. 엄숭의 당파인 정여기는 처형당했고, 구란이 실권을 잡게 된다.


바야흐로 알탄이 도성에 육박했을 때 사로잡은 마방 내관 양증을 놓아주어 글을 가지고 성에 들어가 조공을 구하게 했다. 보신 서계 등이 마땅히 계책으로써 화친하고 타일러 요새 밖으로 물러가 주둔하게 한 다음 변경 신하를 통해 청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알탄이 돌아가 아들 탈탈을 보내 화친을 진술했다. 당시 구란이 바야흐로 권력을 잡아 이에 마시(말 시장)를 열어 적을 적중시킬 것을 의논했다. 병부랑중 양계성이 상소하여 이를 다투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듬해 봄, 시랑 사도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고 백금 10만을 주어 대동에서 시장을 열고 다음으로 연수, 영하에 미쳤다. 배반한 사람 소근, 여명진이란 자는 예전에 죄 때문에 도망하여 적에게 들어갔는데 백련사교를 끼고 그 무리 조전, 구부, 주원, 교원 여러 사람과 함께 알탄을 인도하여 환란이 되었다. 알탄이 시장을 마치고 곧바로 들어와 약탈했다. 변경 신하들이 책망하자 소근 등을 핑계로 삼았다. 소근이 속임수 기술이 있어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했다. 적이 시험해 보았으나 효험이 없자 마침내 소근과 여명진을 포박했으나 조전, 구부 등은 끝내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알탄이 다시 소와 말로 곡식과 콩을 바꿀 것을 청하고 직역과 고칙을 구했으며 또 몰래 하서 여러 부족과 약속하여 안으로 쳐들어와 여러 변경의 담을 무너뜨렸다. 황제가 이를 미워하여 조서를 내려 마시를 파하고 사도를 소환했다. 이로부터 적이 날마다 서쪽 변경을 침략하고 약탈하니 변경 사람들이 크게 곤란을 겪었다.

[해설]

마시(개시)를 열어 평화를 도모했으나, 상호 불신과 한인 배반자(백련교도)들의 농간으로 실패하고 다시 전란이 시작되었다. 조전 등은 몽골로 망명하여 알탄 칸을 도운 한인들이다.


31년(1552년) 봄, 적 2천 기병이 대동을 침구하니 지휘 왕공이 평천돈에서 막다가 전사했다. 여름, 동쪽으로 요동 요새에 들어와 백호 상록, 지휘 요대모, 유동, 유계기 등을 삼도구에서 포위하니 네 사람이 모두 전사했다. 방어 지휘 왕상이 구원하러 가서 사아산에서 크게 싸워 살상이 서로 비슷하니 적이 버려두고 갔다. 천호 엽정서가 100명을 이끌고 왕상을 도왔다. 다음 날 왕상이 상처를 싸매고 다시 납려산에서 적을 요격하여 죽기로 싸웠는데 화살이 다하여 마침내 휘하 장사 300명과 함께 모두 죽었다. 엽정서는 상처를 입고 죽었다가 다시 깨어났고 적 또한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그해 무릇 대동을 4번 범하고 요양을 3번, 영하를 1번 범했다. 이듬해 봄, 선부 및 연수를 범했다. 여름, 감숙 및 대동을 범했다. 수비 장수가 막았으나 번번이 패했다. 가을, 알탄이 다시 대거 입구하여 혼원, 영구, 광창을 함락시키고 삽전, 부도 등 골짜기를 급히 공격했다. 고원 유격 진봉, 영하 유격 주옥이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가서 크게 싸워 물리쳤다. 적이 병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울주를 범하고 서쪽으로 대, 번치를 약탈했다. 이윽고 부, 연에 20일간 주둔하며 연경 여러 성을 살육하고 약탈함이 거의 두루 미쳤고, 이에 영을 중부로 옮겨 경, 원을 노려보다가 마침 비가 오래 내리자 갔다. 당시 소왕자 또한 틈을 타서 도적이 되어 선부 적성을 범했다. 얼마 안 있어 알탄이 다시 만 기병으로 대동에 들어와 마음대로 팔각보까지 약탈했다. 순무 조시춘이 막아 대충령에서 적을 만났으나 총병 이래가 전사하고 군이 전멸하여 조시춘은 겨우 몸만 피했다.

33년(1554년) 봄, 선부 시구보에 들어왔다. 여름, 다시 영하를 범하여 대동 총병 악무가 매복에 걸려 죽었다. 가을, 계진의 담을 공격하여 백 갈래 길로 병진했다. 경보가 하루에 수십 번 이르러 경사에 계엄을 내렸다. 총독 양박이 힘을 다해 막아 지키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밤에 그 진영을 기습하니 적이 놀라고 소란하여 이에 달아났다. 이듬해 자주 선부, 계진을 범하여 참장 조경규, 이광계, 정벽이 전후하여 전사했다. 조정이 다시 상금을 걸어 알탄의 머리를 사는데 만금과 백작을 주기로 했고, 구부, 주원을 잡는 자는 300금과 3품 무관직을 주기로 했다. 당시 구부 등은 적 중에 있으면서 망명자들을 불러 모아 풍주에 거주하며 성을 쌓아 스스로 호위하고 궁전을 짓고 논을 개간하여 호를 판승(판셩)이라 했다. 판승은 중국 말로 집(屋)이다. 조전이 적을 가르쳐 더욱 공격하고 싸우는 일을 익히게 했다. 알탄이 그를 심히 아껴 매번 입구할 때마다 반드시 조전의 처소에 술을 차려두고 계책을 물었다.

[해설]

'판승(板升)'은 몽골어 '바이싱(집, 건물)'을 음차한 것으로, 몽골 지역에 정착한 한인들의 농경 정착촌을 말한다. 이들은 명나라의 수탈이나 죄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로, 알탄 칸에게 농경 기술과 공성 기술 등을 제공했다.


35년(1556년) 여름, 적 3만 기병이 선부를 범했다. 유격 장굉이 맞아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겨울, 대동 변경을 약탈하고 이어 섬서 환, 경 여러 곳을 약탈하니 수비 장수 손조, 원정 등이 물리쳤다. 그해 토만(투멘)이 재차 요동을 범했다.

이듬해 적이 2만 기병으로 대동 변경을 나누어 약탈하고 수비 당천록, 파총 왕연을 죽였다. 알탄의 동생 노파도(올드 바투르)가 다시 무리 수만을 옹위하고 하류구에 들어와 영평 및 천안을 범하니 부총병 장승훈이 힘써 싸우다 죽었다. 여름, 갑자기 선부 마미량을 범하여 참장 기면이 전사했다. 가을, 다시 대동 우위 경계에 들어와 70여 보를 공격해 부수고 살육하고 납치한 것이 심히 많았다. 겨울, 알탄의 아들 셍게(신애)에게 첩 도송채가 있었는데 부목 수령가와 사통하여 주살될까 두려워 와서 항복했다. 총독 양순이 스스로 기이한 공이라 자랑하며 궁궐로 보냈다. 셍게가 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이에 대동 여러 돈보를 마음대로 약탈하고 우위를 몇 겹으로 포위했다. 양순이 두려워하여 이에 적이 조전, 구부와 바꾸기를 원한다고 거짓으로 말했다. 본병(병부상서) 허론이 편하다고 여겨 이에 도송채를 보내 밤에 요새를 빠져나가게 하고 속여서 서쪽으로 달아나게 한 뒤 몰래 셍게에게 알리니 셍게가 잡아 죽였다. 적은 양순이 무능함을 알고 우위 포위를 더욱 급히 하고 다시 병사를 나누어 선부, 계진을 범했다. 서쪽 변경이 진동하고 우위의 봉화가 끊어진 지 6개월이었다. 대학사 엄숭이 허론과 의논하여 우위를 버리고자 했다. 황제가 듣지 않고 여러 신하에게 조서를 내려 병사를 내고 식량을 마련하게 하고 병부시랑 강동으로 양순을 대신하게 했다. 당시 옛 장수 상표가 식량을 보내러 포위된 성에 들어가 힘을 다해 막아내며 곡식이 다하자 소와 말을 먹고 집을 헐어 땔감으로 썼으나 사졸들은 변할 뜻이 없었다. 상표가 때때로 출병하여 돌격해 싸워 알탄의 손자와 사위 및 그 부장 각 한 명을 사로잡았다. 마침 황제가 보낸 시랑 강동 및 순무 양선, 총병 장승훈 등이 각기 병사를 엄히 하여 나아가니 포위가 이에 풀렸다. 다시 영창, 양주 및 선부 적성을 약탈하고 감주를 14일간 포위하다 비로소 물러갔다. 토만 또한 자주 요동을 침구했다.

[해설]

양순의 무능과 엄숭의 실정으로 대동 우위가 고립되어 큰 위기를 맞았으나 상표의 분전과 구원군의 도착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38년(1559년) 봄, 노파도와 셍게가 대거 입범을 모의하여 회주에 주둔하고 그 첩자로 하여금 거짓으로 동쪽으로 내려간다고 칭하게 했다. 총독 왕여가 살피지 못하고 급히 병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가고 호령을 자주 바꾸니 적이 마침내 틈을 타 계진 반가구로 들어와 왕여가 죄를 얻었다. 여름, 대동을 범하고 선부 동서 두 성을 돌아다니며 약탈하고 내지에 열흘간 주둔하다가 마침 비가 오래 내려 물러갔다.

39년(1560년), 적이 희봉구 밖에 무리를 모아 계진을 엿보았다. 대동 총병 유한이 나가 회하에서 그 막사를 치니 적이 조금 멀리 옮겨갔다. 가을, 유한이 다시 참장 왕맹하 등과 함께 풍주를 쳐서 150명을 사로잡아 베고 판승을 거의 다 불태웠다. 이 해에 대동, 연수, 계, 요 변경을 침구함이 빈 날이 없었다. 이듬해 봄, 적이 하서로부터 얼음을 밟고 입구하여 수비 왕세신, 천호 이호가 전사했다. 가을, 선부 및 거용을 범했다. 겨울, 섬서, 영하 요새를 약탈했다. 이윽고 다시 병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가서 개주를 함락시켰다.

41년(1562년) 여름, 토만이 무순에 들어왔다가 총병 흑춘에게 패배했다. 겨울, 다시 봉황성을 공격하니 흑춘이 2일 밤낮을 힘써 싸우다 죽었다. 카이진(해금)의 살육과 약탈이 더욱 심했다. 겨울, 알탄이 자주 산서, 영하 요새를 범했다. 연수 총병 조가기 정예 졸병을 나누어 비장 이희정 등으로 하여금 동쪽 신목보로 나가 반파산에서 적의 막사를 치게 하고, 서집중 등은 서쪽 정변영으로 나가 교맥호에서 적의 기병을 공격하게 하여 모두 이기고 119급을 베었다.

42년(1563년) 봄, 적이 선부 적수애에 들어오니 유한이 물리쳤다. 적이 마침내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자주 요동 요새를 범했다. 가을, 총병 양조가 패하여 죽었다. 당시 계료총독 양선이 3위의 우두머리 통한을 가두어 묶고 그 여러 아들로 하여금 번갈아 인질이 되게 했다. 통한은 셍게의 처부(장인)였는데 셍게를 견제하고자 바랐으나 3위가 모두 원망했다. 겨울, 순의, 삼하를 크게 약탈했다. 여러 장수 조진, 손빈이 전사하고 경사에 계엄을 내렸다. 대동 총병 강응웅이 밀운에서 막아 패배시키니 적이 물러갔다. 조서를 내려 양선을 주살했다. 이듬해, 토만이 요동에 들어오니 도어사 유도가 여러 장수의 수비 공로를 올리며 말하기를 바닷물이 갑자기 불어나 적 기병 중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고 했다. 황제가 "바다의 신이 영험을 나타냈다" 하고 관청에 명하여 제사 지내고 알리게 하니 유도 등이 모두 상을 받았다. 겨울, 적이 섬서를 범하여 판교, 향찰아 여러 곳을 크게 약탈했다.

44년(1565년) 봄, 요동 영전 소단산을 범하여 참장 선보곤, 유격 양유번이 죽었다. 여름, 숙주를 범하니 총병 유승업이 막아 두 번 싸워 모두 이겼다. 가을, 알탄의 아들 황 타이지(황대길)가 가벼운 기병을 거느리고 선부 세마림으로부터 돌입하여 흩어져 내지를 약탈했다. 파총 강여동이 정예 졸병 200명으로 암장보에 매복했다가 갑자기 타이지를 만나 육박했다. 타이지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부하들이 빼앗아 갔다. 타이지가 부상을 입어 하루를 넘겨 비로소 깨어났다. 이듬해 알탄이 누차 동서 여러 요새를 범했다. 여름, 청하 수비 낭득공이 장능욕구에서 막아 이겼다. 겨울, 대동 참장 최세영이 번피령에서 적을 막다가 아들 대조, 대빈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당시 구부가 죽고 조전이 적 중에서 더욱 권세를 부려 알탄을 황제로 높이고 궁전을 지었다. 기일(날짜)을 정해 대들보를 올리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대들보가 떨어져 몇 사람이 다쳤다. 알탄이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 거처하지 못했다. 병부시랑 담륜이 계진에서 병사를 잘 다스리니 조전이 이에 알탄에게 계진을 가볍게 범하지 말라고 설득했고, 대동 병사가 약하니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해설]

황 타이지(황대길)는 알탄 칸의 아들이다 (청 태종 홍타이지와는 다른 인물). 명나라와 몽골의 공방전은 계속되었고, 조전 등 한인 배반자들은 여전히 알탄 칸의 참모 역할을 했다.


융경 원년(1567년), 알탄이 자주 산서를 범했다. 가을, 다시 무리 수만으로 길을 셋으로 나누어 정평, 삭주, 노영, 편두관 여러 곳에 들어왔다. 변경 장수가 막지 못하여 마침내 장구하여 가람 및 분주를 공격하고 석주를 격파하여 지주 왕량채를 죽이고 그 백성을 도륙했으며 다시 효의, 개휴, 평요, 문수, 교성, 태곡, 습주 사이를 크게 약탈하여 남녀 죽은 자가 수만이었다. 일이 알려지자 여러 변경 신하들이 차등 있게 처벌받았다. 3위가 토만을 꾀어 동시에 입구하여 계진, 창려, 무녕, 낙정, 노룡이 모두 유린당했다. 유격 기병이 난하에 이르러 경사가 진동했다가 3일 만에 이에 군사를 이끌고 갔다. 여러 장수들이 추격했는데 적이 의원구로 나갔다. 마침 큰 안개가 껴서 길을 잃고 봉퇴애에 떨어져 인마가 서로 깔려 죽은 자가 자못 많으니 여러 장수들이 나아가 그 머리를 베었다.

2년(1568년), 적이 시구를 범하여 수비 한상충이 전사했다. 당시 병부시랑 왕숭고가 서쪽 변경을 진수하고 총병 이성량이 요동을 지키며 자주 병사로써 요새 밖에서 요격했다. 적이 대비가 있음을 알고 입구가 조금 드물어졌다.

4년(1570년) 가을, 황 타이지가 금주를 침구하니 총병 왕치도, 참장 낭득공이 10여 기병으로 적에게 들어가 죽었다. 겨울, 알탄에게 손자 바한나기(파한나길)라는 자가 있었는데 알탄의 셋째 아들 테베(철배) 타이지의 아들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알탄의 처소에서 자랐다. 장성하여 처 비길을 얻었다. 바한이 다시 오아 도사(오르도스?)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곧 알탄의 외손녀로 용모가 아름다워 알탄이 그녀를 빼앗았다. 바한이 분해 마침내 그 속하 아력가 등 1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 대동 순무 방봉시가 그를 받아들이고 총독 왕숭고에게 알렸다. 왕숭고가 상소하여 말했다. "바한이 귀순해 온 것은 무리를 옹위하고 내부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마땅히 관작을 주고 관사와 식량을 풍족히 하고 수레와 말을 꾸며 주어 알탄에게 보여야 합니다. 알탄이 급해지면 판승의 여러 반역자 조전 등을 묶어 보내게 하고, 듣지 않으면 즉시 바한을 주살하겠다고 위협하여 그를 좌절시키고, 또 그렇지 않으면 이로 인하여 무마하고 받아들여 한나라가 오환을 속국으로 둔 고사처럼 하여 그 옛 부락을 불러 모아 요새 가까이 옮기게 하소서. 알탄이 늙어 죽고 황 타이지가 서면 바한을 돌아가게 하여 그 무리로써 타이지와 대항하게 하고 우리가 군사를 멈추고 돕는 것입니다."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바한에게 지휘사를 제수하고 아력가는 정천호로 삼았다.

[해설]

'알탄 칸의 손자 바한나기 투항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명나라와 몽골 관계의 대전환점이 된다. 왕숭고는 이를 이용하여 몽골과의 평화 협상을 시도한다.


알탄이 바야흐로 서쪽으로 토번을 약탈하다가 이를 듣고 급히 이끌고 돌아와 여러 부족과 약속하여 입범하려 하니 왕숭고가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 병사를 엄히 하여 막게 했다. 적이 사신을 보내 명을 청하니 왕숭고가 역관 포숭덕을 보내 말했다. "조정에서 바한을 대우함이 심히 후하니 다만 판승의 여러 반역자 조전 등을 묶어 아침에 보내면 바한은 저녁에 돌아갈 것이다." 알탄이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물리고 말했다. "내가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난은 조전 등에게서 비롯되었다. 만약 천자께서 은혜로 나를 왕에 봉하여 북방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로 삼아주신다면 누가 감히 환란이 되겠는가. 곧 내가 죽더라도 내 손자가 습봉할 것이니 저들이 중국의 입고 먹음을 얻고서 차마 덕을 배반하겠는가?" 이에 더욱 사신을 보내 포숭덕과 함께 와서 봉을 구걸하고 또 말을 바치며 중국의 무쇠솥, 베, 비단과 호시(무역)할 것을 청하고, 따라서 조전, 이자형 등 몇 사람을 잡아 와서 바쳤다. 왕숭고가 이에 황제의 명으로 바한을 보내 돌아가게 하니 바한이 오히려 연연해하며 감격하여 울며 두 번 절하고 갔다. 알탄이 손자를 얻고 크게 기뻐하며 표를 올려 사례했다.

왕숭고가 인하여 상소하여 말했다. "조정에서 만약 알탄의 봉공을 허락하신다면 여러 변경이 수년의 편안함이 있을 것이니 때를 타서 방비를 수리할 수 있습니다. 설령 적이 맹약을 배반하더라도 우리가 수년간 축적한 재력으로써 전쟁과 수비에 종사하는 것이 일 년 내내 명령에 달려가 스스로 구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다시 8가지 일을 조목별로 청했다. 첫째, 봉호와 관작을 의논하는 것. 여러 부족의 항렬은 알탄이 높으니 마땅히 왕호를 내리고 인신을 주어야 한다. 그 큰 가지인 노파도, 황 타이지 및 지농의 장자 지능(길능) 등은 모두 도독을 제수한다. 동생과 조카, 자손으로 우신 다라한(올신 달아한) 등 46개 가지는 지휘를 제수한다. 알탄의 여러 사위 10여 가지는 천호를 제수한다. 둘째, 조공 액수를 정하는 것. 매년 한 번 입공하되 알탄은 말 10필, 사신 10명이다. 노파도, 지능, 황 타이지는 8필, 사신 4명이다. 여러 부장은 각기 부락의 크기로 차등을 두어 큰 자는 4필, 작은 자는 2필, 사신은 각 2명이다. 통틀어 세공 말은 500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사신은 150명을 넘지 못하게 한다. 말은 3등급으로 나누어 상 등급 30필은 어용으로 올리고 나머지는 차등 있게 값을 주며 늙고 여윈 것은 들이지 않는다. 그 사신은 매년 60명만 북경에 들어오게 허락하고 나머지는 국경에서 기다린다. 사신이 돌아갈 때 말 값으로 비단과 베, 여러 물건을 사게 허락한다. 보답하는 상을 주는데 그 상의 액수는 3위 및 서번 여러 나라에 견주어 한다. 셋째, 조공 시기와 조공 길을 의논하는 것. 봄철 및 만수성절에 사방에서 와서 동참하는 모임으로써 하여 사신과 말 및 표문을 대동 좌위로부터 검사하여 들이고 호상을 준다. 변경에 머무르는 자는 각 성의 순무와 총병에게 나누어 보내 검사하고 상을 준다. 북경에 들어가는 자는 압송하여 거용관으로부터 들어온다. 넷째, 호시를 세우는 것. 그 규정은 홍치 초년 북부 3위의 조공 전례와 같이 한다. 번인은 금, 은, 소, 말, 가죽, 말꼬리 등의 물건으로써 하고 상인은 단, 주, 포목, 가마솥 등의 물건으로써 한다. 시장을 여는 날 오는 자는 300명으로 요새 밖에 주둔하고 우리 병사 500명이 시장에 주둔하며 기간은 한 달로 다한다. 시장 장소는 섬서 3변은 원래 세웠던 장보가 있고, 대동은 좌위 북쪽 위원보 요새 밖으로 응해야 하며, 선부는 만전우위, 장가구 요새 밖으로 응해야 하고, 산서는 수천영 요새 밖으로 응해야 한다. 다섯째, 무마하고 상 주는 것을 의논하는 것. 시장을 지키는 병사와 사람에게는 베 2필, 부장에게는 단 2필, 주 2필을 준다. 좋게 변경에 이르는 자는 온 사신의 대소를 참작하여 헤아려 상과 호상을 더한다. 여섯째, 귀순을 의논하는 것. 통공한 후에 항복하는 자는 죄의 유무를 나누지 않고 거두어 받아들이지 않는다(돌려보낸다?). 그 중국인으로 포로 되었다가 바르게 돌아온 자는 조사하여 별다른 도둑질이 없으면 이에 들어오기를 허락한다. 일곱째, 경권을 살피는 것. 여덟째, 교활한 꾸밈을 경계하는 것.

[해설]

왕숭고의 '봉공(봉작과 조공)' 제안이다. 이는 명나라와 몽골 간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평화 공존과 무역을 모색하는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알탄 칸은 '순의왕(順義王)'에 봉해지게 된다.


상소가 들어가니 조정 신하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했다. 황제가 끝내 왕숭고의 말을 따라 조서를 내려 알탄을 순의왕에 봉하고 붉은 곤룡포 한 벌을 하사했다. 쿤둘리하(곤도력하), 황 타이지에게 도독동지를 제수하고 각기 붉은 사자무늬 옷 한 벌, 채색 비단 4표리를 하사했다. 빈투(빈토) 타이지 등 10인에게 지휘동지를 제수하고, 나무르(나목아) 타이지 등 19인에게 지휘첨사를 제수하고, 다라한(달아한) 타이지 등 18인에게 정천호를 제수하고, 아바이(아배) 타이지 등 12인에게 부천호를 제수하고, 캬(흡) 타이지 등 2인에게 백호를 제수했다. 쿤둘리하는 곧 노파도이다. 병부가 왕숭고의 의논을 채택하여 시장의 법령을 정했다. 가을 시장이 성사되어 무릇 말 500여 필을 얻었고 알탄 등에게 채색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서부 지능 및 그 조카 체진(절진) 등도 또한 시장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홍산돈 및 청수영에 시장을 주었다. 시장이 성사되자 또한 지능을 봉하여 도독동지로 삼았다. 이윽고 알탄이 금자경(불경) 및 라마승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주었다. 왕숭고가 다시 옥새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도금한 은인을 주었다. 알탄이 늙어서 부처에게 아첨하여 다시 해남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사찰 현판으로 앙화를 하사했다. 알탄은 항상 청산에 멀리 거처했는데 두 아들이 있어 빈투라 하는 자는 송산에 거주하며 난주의 북쪽에 해당했고, 병투라 하는 자는 서해에 거주하며 하주의 서쪽에 해당했는데 함께 호시를 구하며 몹시 사납고 건방졌다. 알탄이 타일러서 또한 점차 순해졌다.

이로부터 여러 부족을 단속하여 입범하지 않게 하고 해마다 와서 공시하니 서쪽 요새가 편안해졌다. 그러나 동부 토만(투멘 자삭투 칸)이 자주 무리를 옹위하고 요동 요새를 도적질했다. 총병 이성량이 탁산에서 패배시키고 580여 급을 베었으며 수비 조보가 다시 장승보에서 패배시켰다.

[해설]

알탄 칸과의 평화(융경화의)가 성립되어 서북 변경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요동 쪽의 동부 몽골(투멘 칸)은 여전히 명나라와 대립했다. 명장 이성량이 요동에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신종(만력제)이 즉위하자 빈번하게 입범했다.

만력 6년(1578년), 이성량이 유격 진득의 등을 거느리고 동창보에서 적을 쳐서 부장 9명을 베고 나머지 목 884급을 얻으니 총독 양몽룡이 알렸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교외 사당에 제사 지내고 알리며 황극문에 나아가 승전보를 포고했다.

7년(1579년) 겨울, 토만 4만 기병이 금천영에 들어왔다. 양몽룡, 이성량 및 총병 척계광 등이 이미 미리 대학사 장거정의 방략을 받아 힘을 합쳐 방비하고 막으니 적이 비로소 물러갔다. 이로부터 적이 자주 들어왔으나 이성량 등이 자주 패배시키고 번번이 그 거괴를 베었으며 또 때때로 요새 밖에서 습격하여 참획한 바가 많았다. 적이 두려워하여 조금 잦아드니 이성량은 마침내 공으로써 영원백에 봉해졌다.

[해설]

요동의 이성량과 계주의 척계광이 협력하여 동부 몽골을 막아냈다. 장거정의 개혁과 국방 강화책이 효과를 보았다.


알탄은 시장에 나아간 후로 조정을 섬김이 심히 삼갔다. 부하 병졸 중에 변경 백성을 약탈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처벌하여 다스렸고 또한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니 조정 또한 후하게 상을 더해 주었다. 10년(1582년) 봄, 알탄이 죽으니 황제가 특별히 제단 일곱을 내려 제사하고 채색 단 12표리, 베 100필을 하사하여 넉넉히 구휼함을 보였다. 그 처 하툰(삼낭자)이 아들 황 타이지 등을 이끌고 표를 올리고 말을 바쳐 사례하니 다시 폐백과 베를 차등 있게 하사했다. 황 타이지를 봉하여 순의왕으로 삼고 이름을 걸경하로 고쳤다. 즉위 3년 만에 죽으니 조정이 구휼하는 전례를 예와 같이 했다.

15년(1587년) 봄, 아들 체리크(차력극)가 뒤를 이었다. 그 처 삼낭자는 옛날 알탄이 빼앗은 외손녀로서 며느리가 된 자인데, 3명의 왕(알탄, 황 타이지, 체리크)을 거쳐 짝이 되었고 병권을 주관하며 중국을 위해 변경을 지키고 요새를 보전하니 무리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했다. 이에 칙서를 내려 충순부인에 봉하니 선부, 대동에서 감숙에 이르기까지 병사를 쓰지 않은 지 20년이었다. 체리크가 서쪽으로 먼 변경을 순행하는데 하투 부락의 장토라이(장독뢰) 등이 수당에 웅거하고 부시그투(복실토), 후라치(화락적) 등이 망랄, 날공 두 내에 웅거하여 자주 감, 양, 조, 민, 서녕 사이를 범했다. 다른 부락 대략 수십 종이 요새 아래에 출몰하며 순종과 반역이 일정치 않았다. 황제가 이를 미워하여 19년(1591년) 조서를 내려 아울러 체리크의 시상(시장 상)을 정지했다. 이윽고 체리크가 변경을 두드려 복종을 바치고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으나 유독 장토라이, 부시그투 등은 도적질함이 예전과 같았다. 그해 겨울, 별부 밍안(명안), 투메이(토매)가 나누어 유림 변경을 범하니 총병 두동이 막아 500명을 참획하고 밍안을 죽였다.

[해설]

'삼낭자(에르케 투하 카툰)'는 알탄 칸의 처이자 뛰어난 여성 지도자로, 알탄 사후에도 실권을 쥐고 명나라와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3대의 순의왕과 결혼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명나라는 그녀를 충순부인에 봉했다.


20년(1592년), 영하의 반장 보바이(배배) 등이 부시그투, 장토라이 등을 꾀어 대거 입구하니 총병 이여송이 격파했다. 22년(1594년), 연수 순무 이춘광이 주소했다. "하투 부락이 정성을 바친 지 오래되었는데, 밍안이 죽임을 당한 후로 도적의 원한이 깊고 서하(영하의 보바이의 난)가 반역을 도운 후로 공시가 끊어졌으니 연수 진영이 연이어 일이 많습니다. 지금 동서 각 부가 모두 화친을 구걸하나 부시그투는 사심을 품어 헤아리기 어렵고 변경은 길고 병사는 적어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적의 정황을 살피고 시세를 살펴야 합니다. 적이 입범하면 혈전해야 하고 우연히 혹 작게 잃더라도 마땅히 관리의 논죄를 너그럽게 해야 합니다. 만약 적이 진심으로 순종을 바치면 기회를 보아 무마하기를 의논하되 전쟁 대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황제가 병부에 명하여 각 변경에 알려 경계하게 했다. 가을, 부시그투가 고원에 들어와 유격 사견이 전사했다. 연수 총병 마귀가 막아 달을 넘겨서야 비로소 물러갔다. 온 섬서가 진동했다. 그해 동부 차오화(초화)가 진무보를 범하니 총병 동일원이 싸워 크게 격파했다. 이듬해 봄, 송부 재승 등이 섬서를 범하니 총독 엽몽웅이 감독하여 물리쳤다. 가을, 해부 영소복이 서녕을 범하니 총독 삼변 이민이 참장 달운, 유격 백택 및 마기살, 복이가 등 소속 번인들에게 격문을 보내 매복하여 요격하게 해서 대패시키고 683급을 베었다. 승전보가 들리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또 소속 번인들이 효명했다 하여 전 총제 정락의 공을 추서하고 상을 정락에게까지 미치게 했다.

[해설]

보바이의 난(영하의 난) 당시 몽골 세력이 개입했다. 이여송이 이를 진압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다.


24년(1596년) 봄, 총독 이민이 정병으로 길을 셋으로 나누어 요새를 나가 부시그투의 진영을 습격하여 도합 409급을 베고 말과 가축, 기계를 수천 획득했다. 후라치 부락 무리가 다시 조주를 엿보니 이민이 참장 주국주 등을 보내 망랄천 뇌에서 쳐서 136급을 베었다. 가을, 주리투(착력토), 아치투(아적토), 후라치 등이 공모하여 서쪽 변경을 범하고 차오화 또한 무리를 옹위하여 광녕을 범하니 수비 장수들이 모두 병사를 엄히 하여 물리쳤다. 25년 가을, 해부가 감진을 도적질하니 관군이 공격하여 쫓아냈다. 겨울, 차오화가 토만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요동을 도적질해 살육하고 약탈한 것이 셀 수 없었다. 이듬해 여름, 다시 요동을 도적질하니 총병 이여송이 멀리 나가 소굴을 치다가 죽었다. 겨울, 이민 등이 길을 나누어 나가 송산에서 후라치 등을 습격하여 쫓아내고 그 땅을 수복했다.

[해설]

명나라의 영웅 이여송이 요동에서 몽골군을 추격하다 전사했다.


27년(1599년) 조서를 내려 체리크의 시상을 회복했다. 당시 이민 등이 송산을 쌓으니 여러 부족이 어지럽게 반란하여 연수, 영하의 수비 신하들이 함께 쳐서 죽이고 사로잡은 갑옷 입은 머리가 거의 3천이었다. 이듬해 주리투, 재승, 장토라이 등이 통관을 구걸했으나 불허했다. 변경 신하 왕견빈 등이 다시 청하니 조서를 내려 하투 부락의 공시를 회복했다.

31년(1603년), 해부가 자주 섬서 요새에 들어오니 병비부사 이자실, 총병 소여훈, 달운 등이 공격하여 쫓아냈다. 33년(1605년) 여름, 동부 재새가 경운보 수비 웅약를 유인하여 죽이니 조서를 내려 그 시상을 혁파했다.

35년(1607년) 여름, 총독 서삼외가 말했다. "하투의 부락은 하동의 부락과 다릅니다. 동부는 일이 하나로 통일되어 약속하고 맹세함이 정해져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투 부락은 42가지로 나뉘어 각기 서로 웅장이라 하여 부시그투는 헛된 이름만 위에 세웠을 뿐입니다. 서쪽은 후라치가 가장 교활하여 요구하고 협박함이 가장 만족을 모르고, 가운데는 바이얀타이(파언태)가 아비 밍안의 죽음 때문에 변경을 범하지 않는 해가 없으며, 동쪽은 사계가 시장 감독을 다투며 차오화와 붕당을 지어 멋대로 합니다. 서쪽 변경이 시끄러운 것이 하루가 아닙니다. 그러나 무리가 비록 10만이라 부르나 42가지로 나뉘어 많은 자는 불과 2~3천 기병이고 적은 자는 1~2천 기병일 뿐입니다. 마땅히 그 세력을 나누어 그 정성을 받아들여 먼저 순종하는 자는 상을 얻게 하고 뒤에 이르는 자는 거절하고 토벌해야 합니다. 여전히 모름지기 주전론으로써 국위를 펼쳐야 합니다." 당시 이미 재새 및 후라치 여러 부족의 복공시를 허락했었다.

얼마 안 있어 체리크가 죽고 후사가 없어 충순부인이 소속을 이끌고 여전히 공직을 바쳤다. 서부 은딩(은정), 다이칭(대청)이 자주 무리를 옹위하고 동서 변경을 범했다. 연수 부락 멩케시리(맹극십력) 또한 상을 끼고 있다는 이유로 항상 변경을 따라 초략했다. 부시그투가 충순과 혼인하고자 했으나 충순이 거절했다. 그 소속 소낭 타이지, 오로 타이지 등이 각기 서로 굽히지 않아 봉호가 오랫동안 정해지지 않았다. 41년(1613년), 부시그투가 비로소 충순과 혼인하니 동, 서 여러 부장이 모두 상황을 갖추어 봉을 청했다. 충순부인이 이윽고 죽자 조서를 내려 부시그투를 봉하여 순의왕으로 삼고, 바한 비길이 평소 공손함을 바쳤다 하여 충의부인에 봉했다. 부시그투는 체리크의 손자로 습봉했을 때 이미 조금 쇠퇴하여 제어하는 바는 산서, 대동 두 진 밖의 12부족뿐이었다. 그 부장 오로, 소낭 및 우신 타이지 등은 병력이 모두 순의왕과 대등했다. 조정은 선대 총독 도종준의 말로 인하여 각기 승진과 상을 전례와 같이 주었다.

그해 차오화가 링단 칸(호돈토)을 규합하여 세 번 요동을 범했다. 링단 칸은 찰한아(차하르) 땅에 거주하여 또한 차하르 왕자라 하는데 원나라의 후예이다. 그 조상 다라이순(타래손)이 처음에 선부 요새 밖에 주목했는데 알탄이 바야흐로 강성하여 병합될까 두려워하여 이에 막사를 요동으로 옮기고 복여 잡부를 거두어 자주 계진 서쪽을 들어와 약탈했고 4대를 전하여 링단 칸에 이르러 드디어 더욱 성해졌다. 이듬해 여름, 차오화가 다시 재새, 난토와 합하여 3만 기병으로 들어와 약탈하고 평로, 대녕에 이르렀다. 이윽고 무마와 상을 구하니 허락했다.

[해설]

'호돈토(虎墩兔)'는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인 링단 칸(리그단 칸)이다. 차하르부를 이끌었다. 당시 만주(후금)의 누르하치가 흥기하자 링단 칸은 이에 맞서려 했으나 명나라와 몽골, 후금 사이의 복잡한 정세 속에 쇠락의 길을 걷는다.


42년(1614년), 멩케시리가 회원 및 보녕을 침구했다. 연수 총병관 병충 등이 격파하고 221급을 베었다. 이듬해 차하르부가 자주 요동을 범했다. 이윽고 의주를 약탈하고 대안보를 공격해 함락시키니 병사와 백성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44년(1616년), 총병 두문환이 자주 하투 부락 멩케시리 등을 연수 변경에서 격파하니 후라치, 바이얀타이 및 지능, 체진, 다이칭, 사계 동서 여러 부족이 모두 두려워하여 전후하여 와서 공시를 청했다.

46년(1618년), 우리 대청(청나라)의 병사가 일어나 무순 및 개원을 공략하니 차하르부가 틈을 타 무리를 옹위하고 상을 요구했다. 서부 아운의 처 만단 또한 만 기병으로 석당로로부터 들어와 계진 백마관 및 고가, 풍가 여러 보를 약탈했다. 유격 주만량이 막다가 포위되었다. 격문이 하루에 수십 번 이르러 안팎에 계엄을 내렸다. 잠시 후 만단 또한 관을 두드려 통공을 구걸했다.

47년(1619년), 대청 병사가 재새 및 북관(여진)의 금태석, 포양고 등을 멸했다. 금태석의 손녀가 링단 칸의 며느리였으므로 이에 계료총독 문구, 순무 주영춘 등이 이익으로 꾀어 차오화 여러 부족과 연결하게 하여 대청 병사를 막으려 하고 백금 4천을 주었다. 이듬해 태창 원년(1620년)이 되어 상을 더하여 4만에 이르렀다. 링단은 이에 중국을 돕는다고 큰소리치며 요구하고 색출함이 만족이 없었다.

[해설]

누르하치의 후금(청)이 급부상하자 명나라는 '이오제오(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 정책으로 링단 칸에게 막대한 은을 주며 후금을 견제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링단 칸은 돈만 챙기고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명나라를 압박했다.


천계 원년(1621년) 가을, 지능이 연수 변경을 범하니 유림 총병 두문환이 공격해 패배시켰다. 이듬해 봄, 다시 연안 황화욕을 크게 약탈하여 깊이 600리를 들어와 주민 수만을 살육하고 약탈했다. 3년(1623년) 봄, 은딩이 무리를 규합하여 다시 서쪽 변경을 약탈하니 관군이 쳐서 패배시켰다. 이듬해 봄, 다시 옛 소굴로 들어오기를 모의하여 송산을 범하다 수비 신하 풍임 등에게 패배했다. 여름, 마침내 해서 고륙 타이지 등을 규합하여 감숙을 범하니 총병 동계서가 쳐서 300여 급을 베었다. 그해 다이칭이 상을 받는 문제로 변경에서 시끄럽게 구니 변경 사람들이 격살했다. 다이칭은 링단 칸의 가까운 속하인데 변경 신하들이 목숨 값으로 은 1만 3천여 냥을 매년 주기로 의논하니 링단이 앙심을 품고 더욱 날아가 버릴(떠날) 생각을 했다. 얼마 안 있어 대청 병사가 차오화를 습격해 격파하니 그 소속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반은 차하르에 귀속되었다. 당시 부시그투가 더욱 쇠퇴하여 호령이 여러 부족에게 행해지지 않았고 부장 간얼매 등이 해마다 자주 연수 여러 변경을 범했다. 칠경 타이지 및 오목 비길, 모걸탄 비길 등도 또한 각기 무리를 옹위하고 오가며 요새 아래를 엿보았다.

숭정 원년(1628년), 링단 칸이 하라친 및 백언 타이지, 부시그투 여러 부족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하고 마침내 승세를 타고 선부, 대동 요새를 입범했다. 가을, 황제(숭정제)가 플랫폼에 행차하여 총독 왕상건을 불러 방략을 물으니 왕상건이 대답하여 말했다. "차하르를 막는 길은 마땅히 그들끼리 서로 공격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부시그투는 서쪽 하투 안으로 달아났고 백 타이지는 몸만 빠져나왔으며 하라친 소속은 많이 사로잡혀 쓸 수가 없습니다. 영소복이 가장 강하여 약 30만 명이니 부시그투 소속을 합하고 아울러 도얀 36가 및 하라친의 남은 무리를 연락하면 차하르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얽어매는 것보다는 무마하여 쓰는 것이 낫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차하르가 무마를 받지 않으려 하면 어찌하오?" 대답했다. "마땅히 조용히 농락해야 합니다." 황제가 말했다. "화친하지 않으면 어찌하오?" 왕상건이 다시 비밀히 주소하니 황제가 좋게 여겨 가서 독사 원숭환과 함께 계획하게 했다. 왕상건이 변경에 이르러 원숭환과 의논이 합치되어 모두 서쪽이 안정되어야 동쪽이 스스로 편안해질 것이며 링단이 화친하지 않으면 동서가 아울러 급해지니 인하여 매년 차하르에게 금 8만 1천 냥을 주어 기미(고삐를 맴)를 보이기로 정했다.

대동 순무 장종형이 상소하여 말했다. "차하르가 선부, 대동에 와서 신성에 주둔하며 대동과의 거리가 겨우 200리인데 석 달을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굶주리고 궁핍하기 때문이며 차하르는 우리와 같습니다(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차하르는 무마 자금을 목숨으로 믿고 있는데 2년 동안 얻지 못하여 물자가 이미 고갈되었고 식량이 다하고 말이 지쳐 죽은 뼈가 풀 덤불을 이루었습니다. 차하르가 화친을 바라는 것은 풍년을 바라는 것과 다름없는데 우리가 그들에게 금과 비단, 소와 양, 차와 과일, 쌀과 곡식을 무수히 보내주는 것은 우리가 마침 그 욕망에 적중하는 것입니다. 차하르가 으르렁대고 사납고 거만함은 귀와 눈으로 차마 보고 들을 수 없는데 바야흐로 화친을 급히 함이 오히려 이와 같습니다. 가령 차하르의 병마를 풍족하고 배부르게 한다면 그들이 업신여기고 미쳐 날뛰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왕상건이 말했다. "화친의 국면이 이루어지려 하는데 다시 어지럽히는 것은 이미 차하르에게 불신을 보이는 것이요 또한 나라를 위하는 계책이 아닙니다." 상소가 들어가니 황제가 왕상건의 의논을 옳다 하고 장종형에게 다르게 하지 말라고 조서를 내렸다.

[해설]

명나라 말기, 링단 칸(차하르)을 달래어 후금을 막으려 했으나 링단 칸은 오히려 서쪽의 몽골 부족들을 공격하여 통합하려 했다. 명나라는 막대한 돈을 링단에게 주었으나 효과는 의문시되었다.


이듬해 가을, 링단이 다시 무리를 옹위하고 연수 홍수탄에 이르러 상을 더해줄 것을 구걸하다 이루지 못하자 즉시 요새 밖을 마음대로 약탈하니 총병 오자면이 막아 물리쳤다. 이윽고 동쪽으로 대청 병사에 붙어 용문을 공격했다. 얼마 안 있어 대청 병사에게 공격당했다. 6년(1633년) 여름, 차하르가 대청 병사가 이름을 듣고 부락 무리를 모두 몰아 강을 건너 멀리 달아났다. 이때 달단 여러 부족이 전후하여 대청에 귀부하였다. 이듬해, 대청 병사가 마침내 여러 부족을 올소하 남쪽 언덕에 크게 모아 군율을 반포했다. 링단은 이미 죽었고 이에 상도성까지 추격하여 차하르의 처자와 부락 무리를 모두 사로잡았다.

그 후 하투 부락이 해마다 영하, 감숙, 양주 경계에 들어오니 순무 진기유, 총병 마세룡, 독사 홍승주 등이 번번이 격파했다. 하투 부락 간얼매 또한 총병 유세록에게 참수되었다. 명나라 대에 이르기까지 변경이 편안함이 없어 중원에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데 이르렀다. 일을 맡은 자들이 알탄 등과 공시하던 편안함에 익숙해져 차하르가 동쪽에서 방자함을 보고도 해마다 금전 수십만을 내어 아침저녁으로 구차하게 편안하기를 바라고 또 거두어 쓸 수 있기를 바랐으나 끝내 얻지 못했다. 그 뒤에 미쳐서는 명나라가 망하지 않았는데 차하르가 먼저 죽고 여러 부족이 모두 꺾여 대청으로 들어갔다. 국가 재정은 더욱 곤란해지고 변경 일은 더욱 위급해지고 조정의 의논은 더욱 어지러워져 명나라 또한 마침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달단의 땅은 동쪽으로 올량합에 이르고 서쪽으로 오이라트에 이른다. 홍무, 영락, 선덕 대를 당하여 국가가 전성하여 자못 융색(오랑캐의 법도/통제)을 받았으나 배반하고 복종함이 또한 일정치 않았다. 정통 이후로 변경 방비가 해이해지고 명성과 위엄이 떨치지 못했다. 여러 부장들이 대부분 영웅호걸의 자질로서 그 사납고 강함을 믿고 번갈아 나와 중화와 대항했다. 변경의 화가 마침내 명나라와 더불어 시작하고 끝났다 한다.



명사(明史) 권328 열전 제216 외국9


오이라트(瓦剌)

오이라트는 몽골의 한 부족으로 타타르(韃靼)의 서쪽에 있다. 원나라가 망하자 그 강한 신하인 뭉케테무르(猛可帖木兒)가 이곳을 점거했다. 그가 죽자 무리는 셋으로 나뉘었는데, 그 우두머리는 마하무(馬哈木), 타이핑(太平), 바투볼라(把禿孛羅)였다.

[해설]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의 서부에 거주하던 서몽골 부족 집단이다. 명나라는 몽골을 크게 동쪽의 타타르(북원)와 서쪽의 오이라트로 구분하여 불렀다. 원나라 멸망 후 몽골 세력이 분열되었음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성조(영락제)가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다. 영락 초기에 다시 진무 답합첩목아(答哈帖木兒) 등을 여러 차례 보내 유시하고, 아울러 마하무 등에게 무늬가 있는 비단 등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6년 겨울, 마하무 등이 난답실(暖答失) 등을 보내 역 사(亦剌思)를 따라와 말을 조공하고 봉작을 청했다.

이듬해 여름, 마하무를 특진금자광록대부 순녕왕(順寧王)에 봉하고, 타이핑을 특진금자광록대부 현의왕(賢義王)에 봉했으며, 바투볼라를 특진금자광록대부 안락왕(安樂王)에 봉하고 인신과 고명을 하사했다. 난답실 등에 대한 연회와 하사는 전례와 같이 했다.

8년 봄, 오이라트가 다시 말을 조공하고 은혜에 사례했다. 이로부터 해마다 한 번씩 들어와 조공했다.

[해설]

영락제는 몽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오이라트의 세 유력자에게 각각 왕 작위를 수여하여 분열을 조장하고 관리하는 이이제이 정책을 폈다. 순녕왕 마하무가 훗날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원나라 군주 분야시리(本雅失里)가 그 부하 아루타이(阿魯台)와 함께 막북(고비사막 북쪽)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마하무가 병사를 이끌고 이를 습격하여 격파했다.

8년,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분야시리와 아루타이의 군대를 격파하자, 마하무가 글을 올려 일찍이 적을 멸망시킬 계책을 세웠다고 청했다.

10년, 마하무가 드디어 분야시리를 공격하여 죽였다. 다시 글을 올려 옛 원나라의 전국옥새를 바치고 싶으나 아루타이가 와서 가로챌까 염려되니 중국이 그를 제거해 주기를 청했다. 또한 토구스 테무르의 아들이 중국에 있으니 돌려보내 줄 것과, 부하들이 전투에 많이 참여하여 공로가 있으니 상을 내려줄 것, 그리고 오이라트의 병마가 강하니 군사 무기를 내려달라고 청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오이라트가 교만해졌구나. 그러나 따질 거리는 못 된다"라고 하고, 그 사신에게 상을 주어 보냈다.

[해설]

오이라트가 동몽골의 타타르(원나라 잔존 세력)를 공격하여 세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명나라는 타타르를 견제하기 위해 오이라트를 이용했으나, 오이라트가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마하무가 칙사를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으며, 다시 감숙과 영하에서 타타르에 귀부했던 자들을 자기들이 친하게 지내던 자들이라 하여 돌려달라고 청했다. 황제가 노하여 환관 해동(海童)에게 명하여 그를 엄히 꾸짖게 했다.

겨울, 마하무 등이 음마하(飲馬河)에 군대를 모으고 장차 침범하려 하면서, 말로는 아루타이를 습격한다고 퍼뜨렸다. 개평(開平)의 수비 장수가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친정을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해설]

오이라트의 세력이 커지자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는 과정이다. 명나라 영락제는 몽골 세력이 통일되거나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친정)을 나갔다.

이듬해 여름, 황제가 홀란홀실온(忽蘭忽失溫)에 주필했다. 3부가 국경을 쓸고 들어와 싸움을 걸자, 황제가 안원후 유승, 무안후 정형 등을 지휘하여 먼저 맛보게 하고, 직접 철기를 이끌고 달려나가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왕자 10여 명을 베고 부하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높은 산 두 곳을 넘고 토라하(土剌河)에 이르렀다. 마하무 등이 몸만 빠져나와 달아나니 이에 군사를 되돌렸다.

[해설]

이것이 영락제의 제2차 몽골 원정이다. 명나라 군대가 오이라트 군대를 툴라 강 근처에서 크게 격파한 사건이다.

이듬해 봄, 마하무 등이 말을 바치고 사죄하며, 또한 전에 억류했던 사신을 돌려보냈는데 그 말이 겸손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오이라트는 본래 따질 거리가 못 된다"라고 하고, 그 헌상물을 받고 그 사신을 객관에 머물게 했다.

이듬해, 오이라트가 아루타이와 싸워 패하여 달아났다. 얼마 안 있어 마하무가 죽고 해동이 돌아와 말하기를, 오이라트가 명을 거역한 것은 순녕왕(마하무) 때문이며, 순녕왕이 죽었으니 현의왕과 안락왕은 모두 어루만져 달랠 수 있다고 했다. 황제가 이에 다시 해동을 시켜 가서 타이핑과 바투볼라를 위로하게 했다.

16년 봄, 해동이 오이라트 공물 사신과 함께 왔다. 마하무의 아들 토곤(脫懽)이 작위 습습을 청하니 황제가 순녕왕에 봉했다. 해동 및 도독 소화이회 등이 채색 비단을 가지고 가서 타이핑, 바투볼라 및 동생 앙크에게 하사하고, 따로 사신을 보내 죽은 순녕왕을 제사 지냈다. 이로부터 오이라트가 다시 조공을 받들었다.

[해설]

마하무가 죽고 그의 아들 토곤이 뒤를 이었다. 토곤은 훗날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이다. 명나라는 여전히 오이라트 내부의 여러 왕들을 회유하여 관리하려 했다.

20년, 오이라트가 하밀(哈密)을 침략하자 조정이 이를 꾸짖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게 했다.

22년 겨울, 오이라트의 부하 사인달리(賽因打力)가 귀순해 오니, 명하여 진무하는 바로 삼고 채색 비단, 옷, 안장 얹은 말을 하사하고, 관청에 명하여 공급 도구를 주게 했다. 이후로 귀순하는 자는 모두 이 예를 따랐다.

선덕 원년, 타이핑이 죽고 아들 네레후(捏烈忽)가 뒤를 이었다. 이때 토곤이 아루타이와 싸워 그를 패배시키니, 아루타이는 모납산(母納山)과 찰한뇌랄(察罕腦剌) 사이로 달아났다.

선덕 9년, 토곤이 아루타이를 습격하여 죽이고 사신을 보내 알리며 옥새를 바치겠다고 청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왕이 아루타이를 죽여 대대로 내려오던 원수를 갚았음을 보았으니 매우 잘한 일이다. 다만 왕이 말한 옥새는 전해 내려온 지가 오래되어 진짜가 여기에 있지 않다. 왕이 얻었으니 왕이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고, 저사(비단) 50필을 하사했다.

[해설]

토곤이 동몽골의 아루타이를 제거하고 몽골 초원의 패권을 장악해가는 과정이다. 명나라 선덕제는 토곤이 바치겠다는 옥새가 가짜일 것이라 여기거나 혹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기 위해 완곡히 거절하고 있다.

정통 원년 겨울, 성국공 주용이 말하기를 "근래 오이라트의 토곤이 병사로 타타르의 도르지 베그(朵兒只伯)를 핍박하여 쫓아내니, 아마도 그를 병합하여 날로 강성해질까 두렵습니다. 각 변방에 칙서를 내려 비축을 넓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황제가 이를 가납했다.

얼마 안 있어 토곤이 내부에서 그 현의왕, 안락왕 두 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모두 차지하여 스스로 가한(칸)이라 칭하고자 했으나, 무리들이 불가하다고 하여 이에 토크토아 부카(脫脫不花)를 함께 세우고, 먼저 병합했던 아루타이의 무리를 그에게 귀속시켰다. 스스로는 승상이 되어 막북에 거주하니 하라친 등 여러 부족이 모두 이에 속했다.

이윽고 도르지 베그를 습격하여 격파하고, 다시 도얀(朵顏)의 여러 위(衛)를 위협하고 꾀어내어 요새 아래를 엿보았다.

[해설]

토곤이 오이라트 내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칭기즈 칸의 후예인 토크토아 부카를 꼭두각시 칸으로 세운 뒤 실권을 장악한 상황이다. 이는 오이라트 제국의 전성기를 예고한다.

4년, 토곤이 죽고 아들 에센(也先)이 뒤를 이어 태사(太師) 회왕(淮王)이라 칭했다. 이에 북부 몽골이 모두 에센에게 복속되었고, 토크토아 부카는 헛된 이름만 갖추어 다시는 서로 제어하지 못했다.

매번 조공을 들어올 때 군주와 신하가 나란히 사신을 보내니 조정에서도 두 개의 칙서로 답하였고, 하사품이 매우 후하여 그 처자와 부장들에게까지 미쳤다.

옛 관례에 오이라트 사신은 50명을 넘지 못했다. 조정의 작위와 상을 탐내어 해마다 늘려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여러 번 칙서를 내렸으나 약속을 받들지 않았다. 사신이 오가며 살육과 약탈을 많이 자행하고, 또 다른 부족을 끼고 함께 와서 중국의 귀중하고 얻기 어려운 물건을 요구하고 강요했다. 조금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문득 트집을 잡아 도발하니 하사하는 재물이 해마다 늘어났다.

에센이 하밀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왕과 왕모를 사로잡았다가 이윽고 돌려보냈다. 또 사주(沙州), 적근(赤斤) 몽골의 여러 위와 혼인 관계를 맺고 우량카를 격파하고 조선을 위협했다. 변방 장수들이 반드시 큰 도적이 될 것임을 알고 여러 번 소를 올려 알렸으나, 단지 방어를 경계하라는 칙서를 내릴 뿐이었다.

[해설]

에센 타이시의 등장이다. 그는 몽골 고원을 사실상 통일하고 주변 위구르 지역과 조선, 여진족까지 위협했다. 명나라에 대한 무리한 조공 무역 요구는 결국 전쟁의 불씨가 된다.

11년 겨울, 에센이 우량카를 공격하고 사신을 대동에 보내 식량을 구걸하며 아울러 수비 태감 곽경(郭敬)을 보기를 청했다. 황제가 곽경에게 칙서를 내려 만나지 말고 식량을 주지 말라고 했다.

이듬해, 다시 선부 수비 장수 양홍(楊洪)에게 글을 보냈다. 양홍이 이를 알리니, 양홍에게 칙서를 내려 그 사신을 예우하고 답하게 했다.

얼마 후 그 부하 무리 중에 귀순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에센이 침입을 모의하는데 토크토아 부카가 말렸으나 에센이 듣지 않았고, 곧 여러 번국과 약속하여 함께 중국을 배반하기로 했다고 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물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이때 조정 사신이 오이라트에 이르렀는데, 에센 등이 청하고 구걸하는 바가 있으면 허락하지 않음이 없었다. 오이라트 사신이 오면 다시 3천 명으로 늘리고, 또 그 숫자를 허위로 꾸며 식량을 타냈다. 예부가 실제 인원을 조사하여 주니, 청한 바의 5분의 1밖에 얻지 못하자 에센이 크게 부끄러워하고 노했다.

[해설]

토목의 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에센은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는데, 명나라가 사절단의 규모를 제한하고 보상을 줄이자 이에 불만을 품고 침공을 결심하게 된다.

14년 7월, 드디어 여러 번국을 꾀어내고 위협하여 길을 나누어 대거 침입했다. 토크토아 부카는 우량카를 이끌고 요동을 침략하고, 아라 지원(阿剌知院)은 선부를 침략하여 적성을 포위했으며, 또 별도의 기병을 보내 감주를 침략하고, 에센은 직접 대동을 침략했다. 참장 오호가 묘아장(貓兒莊)에서 전사하고 위급함을 알리는 문서가 잇달아 도착했다.

태감 왕진(王振)이 황제를 끼고 친정을 하려 하니, 신하들이 대궐에 엎드려 만류하며 다투었으나 얻지 못했다.

대동 수장 서녕후 송영, 무진백 주면, 도독 석형 등이 에센과 양화(陽和)에서 싸웠는데, 태감 곽경이 감군이 되어 장수들이 모두 제제를 받아 군율을 잃으니 군대가 전멸했다. 송영과 주면은 죽고 곽경은 풀 속에 숨어 면했으며, 석형은 달아나 돌아왔다.

황제의 수레가 대동에 머물렀는데 연일 비바람이 심하고 또 군중에서 밤마다 놀라는 일이 잦아 사람들이 두려워하니, 곽경이 은밀히 왕진에게 말하여 비로소 군대를 돌렸다.

황제의 수레가 돌아와 선부에 머물 때 적의 무리가 군의 뒤를 습격했다. 공순후 오극충이 막다가 패하여 죽었다. 성국공 주용, 영순백 설수가 4만 명을 이끌고 뒤이어 가서 요아령(鷂兒嶺)에 이르렀는데, 복병이 일어나 모두 함몰되었다.

[해설]

토목의 변의 전개 과정이다. 환관 왕진의 전횡으로 준비 없는 친정이 이루어졌고, 명나라 정예군이 각개격파 당하며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있다.

다음 날, 토목(土木)에 이르렀다. 여러 신하들이 회래(懷來)로 들어가 지키자고 의논했으나, 왕진이 치중(짐수레)을 돌아보다가 급히 멈추게 하니 에센이 드디어 추격하여 따라잡았다.

토목은 지대가 높고 우물을 2장이나 팠으나 물을 얻지 못했는데, 물 긷는 길은 이미 적에게 점거당했고 무리들이 목말라하는데 적의 기병은 더욱 늘어났다.

다음 날, 적이 대군이 멈추어 가지 않는 것을 보고 거짓으로 물러나니, 왕진이 급히 영을 내려 영지를 옮겨 남쪽으로 가게 했다. 군이 막 움직이려 할 때 에센이 기병을 모아 사방에서 찌르고 들어오니, 병졸들이 앞다투어 달아나 행렬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적이 진영을 뛰어넘어 들어오니 6군이 크게 무너져 사상자가 수십만에 달했다. 영국공 장보, 부마도위 정원, 상서 광야, 왕좌, 시랑 조내, 정현 등 50여 명이 죽었고 왕진 또한 죽었다.

황제가 몽진(포로가 됨)하고 환관 희령이 따랐다. 에센은 황제의 수레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착각하여 믿지 않다가, 보고 나서는 예를 매우 공손히 하여 황제를 받들어 그 동생 바얀 테무르(伯顏帖木兒)의 영영에 머물게 하고, 먼저 사로잡았던 교위 원빈(袁彬)으로 하여금 모시게 했다.

에센이 장차 역모(황제를 해침)를 꾸미려 했는데 마침 큰 천둥과 비가 내려 에센이 타던 말이 진동하여 죽고, 다시 황제가 자는 막사에 기이한 상서러움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에센이 황제를 옹위하여 대동성에 이르러 금과 폐백을 요구하니 도독 곽등(郭登)이 백금 3만 냥을 주었다. 곽등이 다시 황제를 탈환하여 성으로 들이려 모의했으나 황제가 이를 말려 이루지 못했고, 에센은 드디어 황제를 옹위하고 북쪽으로 갔다.

[해설]

명나라 역사상 최대의 치욕인 '토목의 변'이다. 황제(정통제, 영종)가 포로가 되고 수많은 고위 관료와 정예군이 전멸했다. 명나라는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9월, 성왕(郕王)이 감국으로부터 즉위하여 황제(경태제)가 되고, 황제를 태상황제로 높였다.

에센이 상황을 모시고 돌아간다고 거짓으로 칭하고 대동, 양화를 거쳐 자형관(紫荊關)에 이르러 이를 공격해 들어오니, 곧바로 전진하여 경사(베이징)를 범했다.

병부상서 우겸(于謙)이 무청백 석형, 도독 손당 등을 감독하여 막게 했다. 에센이 대신들을 불러내어 상황을 영접하게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석형 등이 더불어 싸워 여러 차례 그들을 패배시켰다. 에센이 밤에 달아나 양향(良鄉)으로부터 자형관에 이르러 크게 약탈하고 나갔다.

도독 양홍이 다시 그 남은 무리를 거용관에서 크게 격파하니, 에센은 그대로 상황을 모시고 북으로 갔다.

에센이 밤에 항상 황제의 막사 위를 보면 붉은 빛이 번쩍이며 마치 용이 서린 듯한 것을 멀리서 보고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겼다. 에센이 또 누이동생을 상황에게 바치려 했으나 상황이 물리치니 더욱 경복하여, 때때로 양과 말을 잡아 술자리를 마련하여 장수를 빌고 머리를 조아려 군신의 예를 행했다.

[해설]

에센이 포로로 잡은 영종을 앞세워 베이징을 공격했으나(경사 보위전), 우겸 등의 활약으로 실패하고 물러나는 과정이다. 명나라는 경태제를 새로 옹립하여 에센의 협박(황제 인질극)을 무력화시켰다.

경태 원년, 에센이 다시 상황을 받들고 대동에 이르렀으나 곽등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전히 상황을 탈취하려고 꾀하자 에센이 이를 알아채고 물러갔다.

처음에 에센은 중국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는데, 경사를 침범하고 나서 중국의 군사가 강하고 성지가 견고함을 보고 비로소 크게 낙담했다. 마침 중국이 이미 도적 같은 환관 희령을 꾀어내어 베어 죽여 그 간첩을 잃었고, 토크토아 부카와 아라 지원이 다시 사신을 보내 조정과 화친하며 모두 부하를 거두어 돌아가니, 에센 또한 병사를 쉬게 할 뜻을 굳혔다.

가을, 황제가 시랑 이실, 소경 나기, 지휘 마정 등을 보내 옥새가 찍힌 서신을 가지고 가서 토크토아 부카와 에센을 유시하게 했다. 그런데 토크토아 부카와 에센이 보낸 피아마흑마 등이 이미 도착해 있었으므로, 황제가 이에 다시 도어사 양선, 시랑 조영으로 하여금 지휘, 천호 등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

에센이 이실에게 말하기를 "두 나라의 이익을 위해 속히 화친해야 하니, 영접하는 사신이 저녁에 도착하면 대가가 아침에 출발할 것이오. 다만 마땅히 한두 명의 대신을 보내야 할 것이오"라고 했다.

이실이 돌아가고 양선 등이 도착하여 상황을 받들어 영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에센이 말하기를 "상황이 돌아가면 마땅히 그대로 천자가 되는가?" 하니, 양선이 말하기를 "천자의 자리는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고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에센이 양선을 인도하여 상황을 뵙게 하고, 드디어 연회를 베풀어 상황이 떠나는 것을 전송했다. 에센이 땅에 앉아 비파를 타고 처첩들이 술을 받들었는데, 양선을 돌아보며 "도어사도 앉으시오"라고 했다. 양선이 감히 앉지 못하니 상황이 말하기를 "태사가 앉으라 하니 앉으시오"라고 했다. 양선이 뜻을 받들어 앉았다가 즉시 일어나 그 사이를 주선했다. 에센이 양선을 돌아보며 "예의가 있구나"라고 했다.

바얀 등도 또한 각기 전송 잔치를 마치자, 에센이 흙으로 대를 쌓고 상황을 대 위에 앉게 한 뒤, 처첩과 부장들을 거느리고 그 아래에서 줄지어 절하고 각기 기물과 음식물을 바쳤다.

상황이 떠나니 에센과 부하 무리가 모두 반나절 길을 전송했는데, 에센과 바얀이 이에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말하기를 "황제께서 가시니 언제 다시 서로 뵙겠습니까!" 하고 한참 만에 떠났다. 그대로 그 두목 70명을 보내 경사까지 전송하게 했다.

[해설]

영종의 귀환(탈문의 변 이전 상황) 과정이다. 에센은 더 이상 영종을 데리고 있어봤자 이득이 없음을 깨닫고 명나라와 화친하며 영종을 돌려보낸다.

상황이 돌아온 후, 오이라트가 해마다 와서 조공하니 상황이 있는 곳에서도 또한 따로 바치는 것이 있었다. 이에 황제(경태제)는 오이라트와 관계를 끊고자 하여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에센이 이것을 청하자 상서 왕직, 김렴, 호영 등이 잇달아 관계를 끊으면 도발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사신을 보내면 앞선 일이 있어 마침 불화만 키울 뿐이다. 지난번 오이라트가 침입할 때 어찌 사신이 없어서 그랬겠느냐?"라고 하고, 인하여 에센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전번에 사신이 갔을 때 소인배들의 말이 짧고 길어 드디어 우호를 잃게 되었다. 짐이 이제 다시 보내지 않는데 태사가 이를 청하니 심히 유익함이 없다"라고 했다.

[해설]

돌아온 영종(상황)과 현 황제인 경태제 사이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명나라의 대 오이라트 강경책을 보여준다.

에센과 토크토아 부카가 내부에서 서로 시기했다. 토크토아 부카의 처는 에센의 누이였는데, 에센이 그 누이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자 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에센 또한 그가 중국과 내통하여 장차 자기를 도모할까 의심하여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했다.

토크토아 부카가 패하여 달아나자 에센이 추격하여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아 그 사람과 가축을 여러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드디어 승세를 타고 여러 번국을 핍박하고 위협하여 동으로는 건주, 우량카에 미치고 서로는 적근 몽골, 하밀에 미쳤다.

3년 겨울, 사신을 보내 내년 정월 초하루를 하례하니, 상서 왕직 등이 다시 답하는 사신을 보내어 보답하기를 청했다. 병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병부상서 우겸이 말하기를 "신은 사마(병부)의 직책을 맡아 전쟁만 알 뿐이니, 인사(외교)를 행하는 것은 감히 들을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여, 조서를 내려 여전히 사신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

[해설]

에센이 명목상의 칸인 토크토아 부카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과정이다. 우겸은 여전히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듬해 겨울, 에센이 자립하여 가한(칸)이 되고, 그 차남을 태사로 삼아 내조하였는데, 국서에 '대원 천성(田盛) 대가한'이라 칭하고, 끝에는 '첨원(添元) 원년'이라 했다. 천성(田盛)은 천성(天聖)을 말하는 것이다. 답신에는 '오이라트 가한'이라고 칭했다.

얼마 안 있어 에센이 다시 도얀의 소속 부족을 황하 모납 땅으로 핍박하여 옮겼다. 에센은 강함을 믿고 날로 교만해져 주색에 빠졌다.

6년, 아라 지원이 에센을 공격하여 죽였다. 타타르부의 볼라이(孛來)가 다시 아라를 죽이고 에센의 모친과 처, 그리고 그 옥새를 빼앗았다. 에센의 여러 아들 화아홀답 등은 간간하(干趕河)로 옮겨 살고, 동생 보두 왕(伯都王), 조카 우르후나(兀忽納) 등은 가서 하밀에 의지했다. 보두 왕은 하밀 왕모의 동생이다.

영종이 복벽하고 3년, 하밀이 봉작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보두 왕에게 도독첨사를 제수하고 우르후나에게 지휘첨사를 제수했다. 에센이 죽은 후로부터 오이라트는 쇠퇴하여 부하들이 흩어지니 그 계승의 대와 순서를 상고할 수 없다.

[해설]

황금씨족(칭기즈 칸 가문)이 아닌 에센이 칸을 칭하자 몽골 내부의 반발로 암살당하고, 오이라트 제국은 급격히 붕괴된다. '영종 복벽'은 영종이 '탈문의 변'을 통해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천순 연간에 오이라트의 아시테무르(阿失帖木兒)가 여러 번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조정에서는 그가 에센의 손자라 하여 전례에 따라 후하게 상을 주었다. 또 차리크(撦力克)라는 자가 있어 항상 볼라이와 원수가 되어 죽이고 싸웠다. 또 바이이사하(拜亦撒哈)라는 자가 있어 항상 하밀과 함께 와서 조회했다. 그 우두머리는 크세(克捨)라 하는데 꽤 강성하여 자주 타타르의 소왕자(이틀)를 규합하여 침입했다. 크세가 죽자 양한왕(養罕王)이 웅거하며 칭하고 정예병 수만을 거느렸으며 크세의 동생 아사(阿沙)가 태사가 되었다.

성화 23년, 양한왕이 변방을 침범하려 모의하자 하밀의 한신(罕慎)이 와서 알렸다. 양한이 불리해져 떠나면서 하밀에게 원한을 품고 군사를 돌려 그 대토라(大土剌)를 약탈했다.

[해설]

에센 사후 분열된 오이라트의 상황과 타타르, 하밀 등 주변 세력과의 끊임없는 분쟁을 묘사한다.

홍치 초, 오이라트 중에 태사라 칭하는 자가 하나는 화아홀력(火兒忽力)이라 하고 하나는 화아고도온(火兒古倒溫)이라 하는데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투루판(土魯番)이 하밀을 점거하자 도어사 허진이 금과 비단으로 두 부족을 후하게 꾀어내어 군사로써 그들을 공격해 쫓아내게 했다. 그 부장 부류왕(卜六王)이란 자는 파사활(把思濶)에 주둔했다.

정덕 13년, 투루판이 숙주(肅州)를 침범했다. 수비 신하 진구주가 인하여 부류왕에게 채색 비단을 보내 허점을 틈타 투루판의 3개 성을 습격하여 격파하게 하니 살상하고 사로잡은 것이 만으로 헤아렸다. 투루판이 핍박을 두려워하여 그들과 화친했다.

가정 9년, 다시 혼인을 의논하다가 서로 원수와 틈이 생겼다. 투루판은 더욱 강해지고 오이라트는 자주 곤경에 처하고 패했으며, 또 소속 부족이 문득 스스로 서로 해치고 많이 중국으로 귀순했으며, 하밀이 다시 틈을 타서 침략했다. 부류왕이 지탱하지 못하고 또한 내부로 귀부하기를 구했다. 조정이 허락하지 않고 관 밖으로 내보냈는데 마친 바를 알지 못한다.

[해설]

오이라트가 서쪽의 신흥 강자인 투루판(모굴리스탄 칸국)에게 밀려 쇠퇴하는 과정이다. 명나라 중기 이후 오이라트는 명나라의 위협이 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도얀(朵顏), 후위(福余), 태녕(泰寧)

도얀, 후위, 태녕은 고황제(주원장)가 설치한 3위(三衛)이다. 그 땅은 우량카(兀良哈)로 흑룡강 남쪽, 어양(漁陽) 요새 북쪽에 있다. 한나라의 선비, 당나라의 토욕혼, 송나라의 거란이 모두 그 땅이다. 원나라 때는 대녕로(大寧路)의 북쪽 경계였다.

[해설]

명나라 초기에 설치된 '우량카 3위'에 대한 설명이다. 이들은 남만주와 동몽골 지역에 거주하던 몽골화된 여진족 혹은 몽골 부족들로, 명나라에 복속하여 자치권을 얻은 집단이다.

고황제가 천하를 차지하자 동쪽 오랑캐의 요왕, 혜녕왕, 도얀 원수부가 서로 잇달아 내부로 귀부하기를 청했다. 드디어 옛 회주(會州) 땅에 나아가 대녕도사 영주 제위를 설치하고 아들 권(權)을 녕왕(寧王)으로 봉하여 진수하게 했다. 이윽고 자주 타타르에게 약탈당했다.

홍무 22년, 태녕, 도얀, 후위 3위 지휘사사를 설치하여 그 두목들로 하여금 각기 그 무리를 거느리고 성원(울타리)이 되게 했다.

대녕으로부터 앞으로 희봉구(喜峰口)에 저항하고 선부와 가까운 곳을 도얀이라 하고, 금주, 의주로부터 광녕을 거쳐 요하에 이르는 곳을 태녕이라 하며, 황니와(黃泥窪)로부터 심양, 철령을 넘어 개원에 이르는 곳을 후위라 했다. 유독 도얀이 땅이 험하고 강했다. 오래지 않아 모두 배반하여 떠났다.

[해설]

명 태조 주원장이 북방 방어를 위해 설치한 3위의 위치와 역할이다. 이들은 명나라의 변경 방어선 역할을 했으나 충성심은 유동적이었다.

성조(영락제)가 연왕으로서 정난(靖難)을 일으킬 때, 녕왕이 그 뒤를 밟을까 걱정하여 영평(永平)으로부터 대녕을 공격하여 들어갔다. 녕왕을 위협할 것을 모의하고, 인하여 3위에 후한 뇌물을 주어 오라고 설득했다. 성조가 떠날 때 녕왕이 교외에서 전송했는데, 3위가 따르다가 한 번 소리치니 모두 일어나 드디어 녕왕을 옹위하고 서쪽으로 관에 들어갔다. 성조가 다시 그중 3천 명을 뽑아 기병(기습병)으로 삼아 전투에 종군하게 했다.

천하가 평정되자 녕왕을 남창으로 옮기고 행도사를 보정으로 옮겼으며, 드디어 대녕 땅을 모두 베어 3위에게 주어 이전의 공로를 보상했다.

[해설]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와 벌인 내전(정난의 변)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량카 3위의 기병을 이용했다는 내용이다. 그 대가로 전략적 요충지인 대녕 지역을 이들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훗날 명나라 북방 방어의 큰 구멍이 된다.

황제(영락제)가 즉위한 초기에 백호 배아실리 등을 보내가서 알렸다. 영락 원년에 다시 지휘 소상도(蕭尚都)를 시켜 칙유를 가지고 가게 했다. 이듬해 여름, 두목 토르호차(脫兒火察) 등 294명이 소상도를 따라와 말을 조공했다.

토르호차를 좌군도독부 도독첨사로, 하르우다이(哈兒兀歹)를 도지휘동지로서 도얀위의 일을 관장하게 명하고, 안추(安出) 및 토부신(土不申)을 모두 도지휘첨사로서 후위위의 일을 관장하게 했으며, 후라반후(忽剌班胡)를 도지휘첨사로서 태녕위의 일을 관장하게 했다. 나머지 357명에게는 각각 지휘, 천백호 등의 관직을 제수했다. 고명과 인신, 관대 및 백금, 지폐와 비단, 옷을 하사했다. 이로부터 3위의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3년 겨울, 조공 온 두목 아산(阿散)을 태녕위 장위사 도지휘첨사로 명하고, 그 도르도오(朵兒朵臥) 등에게 각각 차등 있게 승진 상을 주었다.

[해설]

영락제가 논공행상을 통해 3위의 지배층에게 명나라 관직을 수여하고 관계를 공고히 하는 과정이다.

4년 겨울, 3위가 기근이 들자 말로써 쌀을 바꾸기를 청했다. 황제가 관리에게 명하여 그 말의 높고 낮음을 매겨 각각 값을 배로 하여 주게 했다.

오래지 않아 은밀히 타타르에 붙어 변경 수비대를 약탈하고, 다시 말 무역을 핑계로 와서 엿보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엄히 꾸짖고 말로써 죄를 속죄하게 했다.

12년 봄, 요동에 말 3천 필을 납부하니 황제가 수장 왕진(王真)에게 칙서를 내려 말 한 필당 베 4필을 주게 했다. 이윽고 다시 배반하여 아루타이에게 붙었다.

20년, 황제가 친히 아루타이를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그들을 공격하여 굴열하(屈烈河)에서 그 무리를 대패시키고, 참수하고 귀를 벤 것이 셀 수 없었으며 항복해 온 자는 풀어주고 죽이지 않았다.

[해설]

3위는 명나라와 몽골(타타르)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명나라는 경제적 지원(말 무역)으로 통제하려 했으나, 그들이 배반하자 영락제가 직접 응징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3위가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을 허락했다. 홍희 원년, 안추가 아뢰기를 그 인신을 도적에게 빼앗겼으니 다시 주기를 청하여 허락했다. 겨울, 3위 두목 아자투(阿者禿)가 귀순하니 천호를 제수하고 지폐와 비단, 옷, 안장 얹은 말을 하사하고 관청에 명하여 공급 도구를 주게 했다. 이후로 귀순하는 자는 모두 이 예를 따랐다.

선종(선덕제) 초, 3위가 영평과 산해관 사이를 약탈하니 황제가 장차 친히 토벌하려 했는데, 3위 두목들이 모두 사죄하고 조공하니 처음과 같이 받아들였다.

7년, 태녕위의 인신을 다시 주었다. 가을, 도얀 두목 하라하손, 후위 두목 안추, 태녕 두목 토호치 등이 조정을 공손히 섬긴 지 오래되었다 하여 직금, 채색 비단 등을 차등 있게 더하여 하사했다.

[해설]

영락제 사후 인종, 선종 시기의 유화적인 정책이다. 배반과 귀순이 반복되고 있다.

정통 연간에 여러 번 요동, 대동, 연안 경계를 침략했다. 독석 수비 양홍이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그 두목 도란테무르를 사로잡았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오이라트 에센에게 붙었는데, 태녕의 주치(拙赤)가 에센에게 딸을 시집보내어 처로 삼게 하고, 모두 은밀히 그들의 이목이 되었다. 조공 들어올 때는 문득 이름을 바꾸고 또한 그 인신을 서로 돌려썼으며, 또 동쪽으로 건주 병사와 합세하여 광녕 전둔에 들어왔다.

황제가 그 반복됨을 미워하여 9년 봄, 성국공 주용에게 명하여 공순후 오극충과 함께 희봉구로 나가게 하고, 흥안백 서형은 계령(界嶺)으로, 도독 마량은 유가구(劉家口)로, 도독 진회는 고북(古北)으로 나가게 하여 각각 정예병 만 명을 거느리고 나누어 토벌하게 했다. 주용 등이 변경을 어지럽힌 자를 잡아 대궐로 보내고 아울러 약탈당한 사람과 가축을 빼앗아 돌아왔다.

[해설]

토목의 변 직전, 3위가 오이라트의 에센과 결탁하여 명나라를 위협하는 상황이다. 명나라는 대규모 토벌군을 보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못했다.

주치 등이 비하위(肥河衞)의 사신을 억류하고 죽였다. 비하위 두목 별리그가 격로곤질련에서 싸워 주치를 대패시켰다. 오이라트가 다시 길을 나누어 차단하고 죽였으며, 건주 또한 군사를 내어 공격하니 3위가 크게 곤란해졌다.

12년 봄, 총병 조의, 참장 호원, 도독 초례 등이 동쪽 변경을 나누어 순찰하다가 3위가 침입하는 것을 만나 공격하여 32명의 머리를 베고 70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해, 오이라트의 사이칸 왕이 다시 도얀의 나이르부카를 공격하여 죽이고 크게 약탈하여 갔다. 에센이 뒤이어 이르니 도얀, 태녕이 모두 지탱하지 못하고 항복을 청했고, 후위만 홀로 뇌온강(腦溫江)으로 달아나 피하니 3위가 더욱 쇠퇴했다.

오이라트가 강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배반하지 못하고 여전히 해마다 와서 조공을 바쳤으나, 단지 중국의 하사품을 이롭게 여길 뿐이었다. 또한 마음속으로 변방 장수들이 토벌하고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있어 항상 몰래 보복을 도모했다.

14년 여름, 대동 참장 석형 등이 다시 전계산(箭谿山)에서 변경을 도적질한 자들을 공격하여 50명을 사로잡거나 베니 3위가 더욱 원망했다. 가을, 오이라트를 인도하여 크게 쳐들어오니 영종이 드디어 이 전쟁으로 북쪽으로 잡혀갔다.

[해설]

3위가 오이라트와 명나라, 그리고 건주여진 사이에서 공격받아 쇠퇴하는 모습이다. 결국 명나라에 원한을 품고 오이라트의 앞잡이가 되어 토목의 변(영종이 북쪽으로 잡혀감)을 돕게 된다.

경태 초, 조정이 여전히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타일렀다. 3위는 에센의 지시를 받아 자주 때가 아닌데도 조공을 들어와, 사신을 많이 보내 오가며 중국을 정탐했다.

이윽고 에센이 그들을 학대하여 부리고 다시 도얀 소속 부족을 황하 모납 땅으로 핍박하여 옮기니, 3위가 모두 견디지 못하고 드디어 은밀히 오이라트의 정세를 중국에 보내고 변경 가까이에 주둔하기를 청했다.

옛 제도에 3위는 매년 3번 조공하며 그 공물 사신은 모두 희봉구를 통해 검사하고 들어오는데, 급한 보고가 있으면 영평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이때 3위 사신 중에 독석 및 만전우위로부터 오는 자가 있었다. 변방 신하가 이를 말하니 칙서를 내려 금지했다.

천순 연간에 일찍이 틈을 타서 여러 변경을 약탈하고 다시 타타르의 볼라이와 몰래 내통하여 매번 그들을 위해 향도(길잡이)가 되었다. 보낸 사신이 볼라이의 사신과 함께 뵈었다. 중국이 타타르를 후대하니, 상을 더해 줄 것을 청했다가 얻지 못하자 크게 분노하여 드디어 더욱 볼라이와 결탁했다.

[해설]

에센 사후, 3위는 다시 명나라와 타타르 사이에서 이익을 챙기려 한다. 타타르의 침입을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하며 명나라 변경을 괴롭혔다.

성화 원년, 두목 도로간(朵羅干) 등이 병사를 이끌고 볼라이를 따라 요하에 크게 쳐들어왔다. 이윽고 다시 서쪽으로 마오리하이(毛里孩)에 붙고 동으로 해서(해서여진) 병사와 합쳐 자주 요새를 들어왔다. 또 때때로 홀로 광녕, 의주 사이를 출몰했다.

9년, 요동 총병 오신이 편장 한빈 등으로 하여금 흥중(興中)에서 그들을 패배시키고 맥주(麥州)까지 추격하여 62급을 베고 말과 가축, 기계를 수천이나 획득했다.

그해, 희봉구 수장 오광이 뇌물을 탐하다가 3위의 마음을 잃어 3위가 침범해 들어오니 오광이 감옥에 갇혀 죽었다. 이듬해 다시 개원을 약탈하니 경운 참장 주준이 격퇴했다.

14년, 조서를 내려 3위의 마시(말 시장)를 복구했다. 처음에 국가가 요동에 마시 3곳을 설치했는데 하나는 성 동쪽, 하나는 광녕으로 모두 3위를 대우하기 위함이었다. 정통 연간에 그 무리가 자주 배반하여 이를 파했었다. 마침 타타르의 만두루(滿都魯)가 포악하고 강하여 3위를 침략하고 약탈하니 3위 두목들이 모두 요새 아래로 달아나 피했다. 자주 굶주리고 곤란하여 마시를 복구해 달라고 재차 사차 청했으나 불허했다. 이때에 이르러 순무 진월이 황제에게 말하여 비로소 허락했다.

만두루가 죽고 이스마인(亦思馬因)이 병권을 주관하자 3위가 다시 자주 곤경을 당했다.

[해설]

성화 연간의 상황이다. 타타르의 압박을 받은 3위가 명나라에 경제적 구원(마시 개설)을 요청하고 명나라가 이를 허락하여 회유하는 모습이다.

22년(실제로는 23년), 타타르의 별부 나하이(那孩)가 3만의 무리를 이끌고 대녕, 금산에 들어와 노하를 건너 3위 두목 바얀 등을 공격하여 죽이고 사람과 가축 만여를 약탈해 갔다. 3위가 이에 서로 이끌고 노약자를 데리고 변경 요새로 달아나 숨었다. 변방 신하 유잔이 이를 알리니 조서를 내려 꼴과 식량을 주어 넉넉히 구휼하게 했다.

[해설]

타타르의 공격으로 생존 위기에 처한 3위를 명나라가 인도적으로 지원하는 장면이다. 이는 그들을 방패막이로 쓰기 위함이다.

홍치 초, 항상 고북, 개원 경계를 도적질하고 약탈하니 수비 신하 장옥, 총병 이고 등이 계책으로 유인하여 그 시장에 온 자 300명을 베었다. 드디어 북으로 토로간(脫羅干)과 결탁하여 복수하겠다고 청하며 자주 광녕, 영원 여러 곳을 침략했다.

이때 해서의 상구(尚古)라는 자가 조공을 통하지 못하여 중국을 배반하고 자주 병사로써 여러 번국이 조공 들어오는 것을 막으니 여러 번국이 아울러 원망했다. 조정이 이윽고 상구의 귀순을 허락하니, 무녕 맹크테무르 등이 모두 상구를 핑계로 요양을 침입하여 살육하고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다.

타타르 소왕자가 자주 3위를 약탈하니 3위가 인하여 각기 관문을 두드려 죄를 바쳤는데 조정이 허락했으나, 겉으로만 공손할 뿐이었다.

[해설]

홍치 연간, 해서여진과의 갈등 및 타타르의 압박 속에서 3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묘사한다.

도얀 도독 화당(花當)이란 자는 험한 지형을 믿고 교만하여 자주 조공을 늘리고 상을 더해 달라고 청했으나 불허했다.

정덕 10년, 화당의 아들 바르손(把兒孫)이 천 기를 이끌고 점어관(鮎魚關)을 훼손하고 마란곡(馬蘭谷)에 들어와 크게 약탈하여 참장 진건이 전사했다. 다시 500기로 판장곡(板場谷)에 들어오고, 천 기로 신산령(神山嶺)에 들어왔으며, 또 천여 기로 수개동(水開洞)에 들어왔다. 일이 알려지자 부총병 계용에게 명하여 막게 했다. 화당이 물러가 홍라산(紅羅山)에 주둔하며 바르손을 숨기고 그 아들 다하(打哈) 등을 시켜 입조하여 죄를 청하게 하니 조서를 내려 풀어주고 묻지 않았다.

13년, 황제가 대희봉구에 순행하여 장차 3위 두목을 불러 모두 관 아래로 나오게 하여 연회하고 위로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바르손이 변방을 범했을 때 조정이 조서를 내려 그 직책을 삭탈했다. 바르손이 죽자 그 아들 보거(伯革)가 조공했다.

[해설]

정덕 연간 도얀위의 화당과 그의 아들 바르손이 일으킨 반란과 약탈이다.

가정 9년, 조서를 내려 보거에게 아버지의 작위를 주었는데, 다하가 스스로 화당의 아들로서 직책을 얻지 못했다 하여 노해서 드디어 선후로 냉구, 찰애, 희봉구 사이를 약탈했다. 참장 원계훈 등이 방어를 실수하여 모두 체포되어 처벌받았다.

17년 봄, 지휘 서호가 태녕부 9인을 유인하여 죽이니 그 두목 바당하이(把當亥)가 무리를 이끌고 대청보를 침략했는데 총병 마영이 공격하여 베었다. 그 부하 바손(把孫)이 도얀의 부중을 이끌고 다시 들어오니 진수 소감 왕영이 더불어 싸우다가 패했다.

22년 겨울, 묘전곡(墓田谷)을 공격하여 포위하고 수비 진순을 죽이니 부총병 왕계조 등이 구원하러 갔다가 격파하고 30여 급을 베었다. 그해, 조서를 내려 옛날 설치한 3위 마시를 파하고 아울러 새로 설치한 목시(나무 시장)도 파했다. 가을, 3위가 다시 타타르를 인도하여 요주를 침략하고 사하보에 들어오니 수장 장경복이 전사했다.

[해설]

가정 연간, 내부의 작위 계승 분쟁과 명나라 관리의 실책이 겹쳐 변경 분쟁이 격화되고 무역(마시, 목시)이 중단되는 상황이다.

3위가 번갈아 범한 것은 실로 도얀부의 하주아(哈舟兒), 진통사(陳通事)가 한 짓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중국인인데 사로잡혀서 드디어 3위에게 쓰였다.

29년, 타타르의 알탄(俺答)이 경기 동쪽을 범하려 모의하자 하주아가 조하천(潮河川)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알탄이 병사를 백묘(白廟)로 옮겨 고북에 가까워지자, 하주아가 적이 이미 물러가서 변경 수비가 느슨하다고 거짓말을 하니 알탄이 드디어 합자동안, 조유구를 경유해 들어와 곧바로 경기 지방(베이징 근교)을 범했다.

이윽고 알탄이 마시를 열기를 청하자 하주아가 다시 오가며 유인하고 막았다. 30년, 계료 총독 하동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여 경사로 보내니 베어 죽였다.

[해설]

가정제 때의 대사건인 '경술의 변'(알탄 칸의 베이징 포위) 당시 3위에 포로로 잡혀있던 중국인 배신자들이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내용이다.

도얀의 통한(通罕)이란 자는 알탄의 아들 셍게(辛愛)의 장인이다. 42년, 고북의 초병이 관을 나갔다가 도얀에게 맞아 죽었다. 갑자기 통한이 관문을 두드려 상을 요구하니 부총병 호진이 복병을 두어 그를 잡았다. 총독 양선이 셍게를 견제할 계책으로 삼아 이에 통한을 구금하고 그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번갈아 인질이 되게 했다. 3위가 매우 원망하여 드디어 알탄을 인도하여 순의 및 삼하를 들어와 약탈하니 양선이 죄를 입었다.

[해설]

타타르(투메드부 알탄 칸)와 명나라, 그리고 그 사이의 3위의 복잡한 인질 외교와 실패를 보여준다.

만력 초, 도얀의 장앙(長昂)이 더욱 강해져 상을 끼고 요구하다가 이루지 못하자 자주 무리를 규합하여 들어와 약탈하고 여러 번국의 조공 길을 차단했다.

12년 가을, 다시 토만(土蠻)을 인도하여 4천 기로 삼산, 삼도구, 금천 여러 곳을 나누어 약탈했다. 수비 신하 이송이 장앙 등을 급히 토벌하기를 청했으나 조정의 의논이 따르지 않고 겨우 그 월상을 삭감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천 기로 유가구를 범하니 관군이 막아 살상이 서로 비슷했다. 이에 장앙이 더욱 발호하고 제멋대로 하여 동으로 토만과 결탁하고 서쪽으로 백홍대(白洪大)와 혼인하여 여러 변경을 소란하게 했다.

17년 타타르 동서 2부와 합하여 요동을 침략하니 총병 이성량이 쫓아내어 관군이 크게 패배시키고 800명을 섬멸했다.

또 2년 뒤 독석로를 크게 약탈했다. 22년 다시 무리를 옹위하고 중후소를 범하여 소둔대(小屯臺)를 공격해 들어오니 부총병 조몽린, 진득의 등이 힘써 싸워 물리쳤다. 이듬해 몰래 희봉구로 들어오니 관군이 그 두목 소랑아(小郎兒)를 사로잡았다.

[해설]

만력 연간의 상황이다. 요동 총병 이성량 등의 활약이 나오지만, 장앙이 이끄는 도얀위는 여전히 변경의 골칫거리였다. '토만'은 차하르부의 투멘 자사그투 칸을 의미한다.

29년, 장앙이 동호리(董狐狸) 등과 함께 모두 귀순하여 영전(寧前)의 목시를 복구하기를 청하니 허락했다.

34년 겨울, 다시 타타르의 반부시, 백언 타이지 등을 규합하여 만 기로 산해관을 핍박하니 총병 강현모가 공격하여 쫓아냈다. 장앙이 다시 3천 기로 의원계를 엿보았는데 변경 장수가 대비하고 있자 이에 물러갔다. 선회하여 희봉구에 이르러 스스로 말하기를 반, 백이 침입한 것은 자기는 미리 알지 못했다고 했다. 수비 신하가 갖추어 보고하니 조서를 내려 장앙의 조공 시장을 복구하고 어루만져 상 주는 것을 전례와 같이 하게 했다.

[해설]

명나라 말기, 3위는 여전히 약탈과 화친을 반복하며 생존을 도모했다.

장앙이 죽고 여러 아들이 점차 쇠퇴하여 3위가 모두 조용해졌다. 숭정 초, 차하르(插漢)와 조락올소(早落兀素)에서 싸워 승리하고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만으로 헤아려 승첩을 고했다. 얼마 안 있어 모두 대청(청나라)에 복속되었다고 한다.

[해설]

명나라 최후의 시기(숭정 연간). '차하르'는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인 리그단 칸을 의미한다. 3위는 리그단 칸과 싸워 이기기도 했으나, 결국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청나라)에 흡수되면서 명나라 기록에서 사라진다.

 



명사(明史) 권329 열전 제217 서역1

하밀위

하밀(Hami)은 가욕관(嘉峪關)에서 동쪽으로 1,600리 떨어져 있으며, 한나라 때의 이오루(伊吾盧) 땅이다. 후한 명제(明帝)가 의화도위(宜禾都尉)를 두어 둔전을 관장하게 했다. 당나라 때는 이주(伊州)가 되었다. 송나라 때는 회흘(回紇, 위구르)에 들어갔다. 원나라 말기에 위무왕(威武王) 납홀리(納忽里)로 하여금 이곳을 진무하게 했으며, 얼마 뒤 숙왕(肅王)으로 고쳤는데 그가 죽자 동생 안크테무르(安克帖木兒)가 뒤를 이었다.

[해설]
하밀(하미)은 현재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하미시를 말한다. 이곳은 중국 본토에서 서역(중앙아시아)으로 나가는 관문인 가욕관 서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다. 명나라는 이곳을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현지 유력자를 통해 간접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여기서 언급된 '위'는 명나라의 군사 행정 구역 단위인 위소(衛所)를 의미한다.

홍무(명 태조) 연간에 태조가 이미 위구르 땅을 평정하고 안정등처위(安定等衛)를 설치하여 점차 하밀을 압박해 들어갔다. 안크테무르가 두려워하여 장차 귀순하려 했다.

성조(영락제) 초기에 관리를 보내 초유(招諭)하고 말 시장(馬市)을 열어 교역할 것을 허락하니, 곧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말 190필을 바쳤다. 영락 원년(1403년) 11월에 (사신이) 서울(남경)에 도착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하사품을 더하여 내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값을 치러 그 말 4,740필을 거두어들이게 했으며, 좋은 말 10필을 골라 내구(황실 마구간)에 들이고 나머지는 변방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주었다.

이듬해 6월에 다시 조공하며 봉작을 청하니, 이에 충순왕(忠順王)으로 봉하고 금인(金印)을 하사했으며 다시 말을 바쳐 사은했다. 얼마 뒤 이북(迤北, 북원)의 카간 귀력적(鬼力赤, 구이리치)이 그를 독살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병으로 죽었다고 알렸다. 3년 2월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내리고, 그의 형의 아들 탈탈(脫脫, 토크토)을 왕으로 삼아 옥대(玉帶)를 하사했다. 탈탈은 어려서 포로가 되어 중국에 들어왔는데, 황제가 노예들 중에서 그를 발탁하여 숙위(황제 경호)에 서게 했다가 작위를 잇게 하려 한 것이다. 그 나라가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관리를 보내 물으니 감히 어기지 못하고 돌아와서 그 무리를 주관하기를 청했다. 이에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채색 비단을 하사했고, 곧이어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쳐 사은했다.

[해설]
명나라는 하밀을 서역 경영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충순왕(충성스럽고 순종적인 왕)'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무역을 허가했다. 탈탈은 본래 하밀의 왕족이었으나 포로가 되어 명나라 궁궐에서 자란 인물로, 명나라 황제는 친중국 성향의 그를 왕으로 세워 하밀을 통제하려 했다.

4년 봄, 감숙 총병관 송성(宋晟)이 상주하기를, 탈탈이 할머니에게 쫓겨났다고 했다. 황제가 노하여 칙서를 내려 그 우두머리들을 꾸짖어 말하기를 "탈탈은 조정이 세운 바인데, 설령 과실이 있더라도 주상하지 않고 마음대로 쫓아내었으니 이는 조정을 업신여긴 것이다. 노인이 늙어 망령되었다 해도 우두머리들 또한 조정을 알지 못하는가? 즉시 맞아들여 잘 보좌하고 할머니를 효로써 섬기게 하라."라고 했다. 이로 말미암아 탈탈이 돌아올 수 있었고 할머니와 우두머리들이 각기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3월에 하밀위(哈密衞)를 세우고 그 우두머리 마합마화자(馬哈麻火者) 등을 지휘, 천백호 등의 관직으로 삼았으며, 또 주안(周安)을 충순왕의 장사(長史)로, 유행(劉行)을 기선(紀善)으로 삼아 보도하게 했다. 겨울에 우두머리 19명에게 도지휘 등의 관직을 제수했다.

이듬해 송성이 상주하기를 우두머리 육십(陸十) 등이 난을 일으켰다가 이미 주살되었는데 다른 변고가 있을까 염려되니 병사를 청하여 방어하게 해달라고 했다. 황제는 송성에게 병사를 내어 호응하게 했으나, 안크테무르의 처자가 가서 귀력적에게 의탁하고 있어 혹시라도 적을 유인하여 하밀을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송성에게 칙서를 내려 삼가 대비하게 했다. 송성이 죽자 하복(何福)으로 대신하게 하고, 또 하복에게 칙서를 내려 성심을 다해 충순왕을 어루만지게 했다. 마침 우두머리들이 파총(把總) 1명을 두어 국정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청하자, 황제가 하복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파총을 두는 것은 왕을 한 명 더 늘리는 것이니, 정령이 통일되지 않으면 아랫사람들이 어디를 따르겠는가."라며 그 논의를 중지시켰다. 이로부터 매년 조공하며 모두 넉넉히 하사함을 받았고 그 사신들은 모두 품계가 오르고 관직을 제수받았다.

[해설]
명나라는 하밀에 '위(衞)'를 설치하고 명나라 관직 체계를 이식하여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 파총 설치를 거부한 것은 하밀 왕의 권위를 유지시켜 명나라의 대리 통치 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황제는 탈탈을 각별히 아꼈으나, 탈탈은 도리어 조정의 사신을 업신여기고 술에 빠져 정신이 혼미하여 나랏일을 돌보지 않으니, 그 부하 매주(買柱) 등이 번갈아 간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황제가 이를 듣고 노하여 8년 11월에 관리를 보내 칙서로 훈계하게 했다. (사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탈탈이 급병으로 죽었다. 부고가 들리자 관리를 보내 제사를 내렸다. 도지휘동지 하라하나(哈剌哈納)를 도독첨사로 발탁하여 그 땅을 진수하게 하고 칙서와 백금,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또 탈탈의 사촌동생 토력테무르(兔力帖木兒)를 봉하여 충의왕(忠義王)으로 삼고 인신과 고명, 옥대를 하사하여 대대로 하밀을 지키게 했다. 10년에 말을 바쳐 사은했고, 이로부터 조공을 닦는 것이 삼가했으므로 옛 왕의 할머니 또한 자주 조공을 바쳤다.

17년, 황제는 서역을 왕래하는 조정의 사신들을 충의왕이 예를 다해 맞이하므로 중관(환관)에게 명하여 비단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고, 그 어머니와 처에게 금주(金珠), 관복, 채색 비단을 하사했으며 그 부하 우두머리들에게도 주었다. 그 사신과 경내의 회회(무슬림)들이 얼마 뒤 말 3,500여 필과 담비 가죽 등 여러 물건을 바치니, 조를 내려 보돈 3만 2천 정과 비단, 포백 1천을 하사했다. 21년에는 낙타 330마리, 말 1천 필을 바쳤다.

인종이 즉위하자 그 나라에 조서를 내렸다. 홍희 원년(1425년)에 다시 입공하여 즉위를 하례했다. 인종이 붕어하고 선종이 왕통을 잇자 그 왕 토력테무르 또한 죽어 사신이 와서 슬픔을 알렸다.

선덕 원년(1426년)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내리고, 옛 왕 탈탈의 아들 복답실리(卜答失里)에게 명하여 충순왕을 잇게 했으며, 또한 등극하여 사면령을 내렸으므로 명하여 그 나라 안에서도 사면하게 하고, 다시 말을 바쳐 사은했다. 이듬해 동생 북두노(北斗奴) 등을 보내 내조하고 낙타와 말, 방물을 바쳤다. 북두노에게 도독첨사를 제수하고, 인하여 중관에게 명하여 왕을 타일러 옛 충의왕의 동생 탈환테무르(脫歡帖木兒)를 북경으로 보내게 했다. 3년에 복답실리가 나이가 어리므로 탈환테무르에게 명하여 충의왕을 잇게 하고 함께 나랏일을 다스리게 했다. 이로부터 두 왕이 함께 조공하여 1년에 혹 3~4번 이르렀고, 혼취할 예물을 주상하여 구하면 명하여 모두 주었다.

[해설]
충순왕과 충의왕, 두 왕이 공존하는 체제가 되었다. 이는 하밀 내부의 권력 균형을 맞추거나 혹은 명나라가 분할 통치를 용인한 것으로 보인다.

정통 2년(1437년), 탈환테무르가 죽어 그 아들 탈탈탑목아(脫脫塔木兒)를 봉하여 충의왕으로 삼았으나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얼마 뒤 충순왕 또한 죽어 그 아들 도와답실리(倒瓦答失里)를 봉하여 충순왕으로 삼았다. 5년에 사신을 보내 세 번 조공하니, 조정의 논의가 번거롭다 여겨 매년 한 번 조공하는 것으로 정했다.

당초 성조(영락제)가 충순왕을 봉한 것은 하밀이 서역의 요충지이므로 그들로 하여금 조정의 사신을 영접하고 보호하며 여러 번(蕃)을 통솔하여 서쪽 변경의 병풍이 되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 왕들은 대개 용렬하고 나약했으며, 또 그 땅에는 종족들이 섞여 살았다. 하나는 회회(무슬림), 하나는 위구르(불교도 위주였다가 점차 이슬람화), 하나는 하라회(哈剌灰)였는데, 그 우두머리들이 서로 통속되지 않아 왕이 능히 제재하지 못했다. 대중의 마음은 흩어지고 국세는 점차 쇠퇴했다. 도와답실리가 즉위함에 미쳐 도독 피랄납(皮剌納)이 몰래 오이라트의 맹가복화(猛可卜花) 등과 내통하여 왕을 죽이려다 이기지 못했다. 왕의 부친이 살아있을 때 사주(沙州)의 반란 도망자 100여 가를 받아들였는데, 여러 번 왕에게 칙서를 내려 돌려보내라 했으나 겨우 그 반만 보냈고, 그 조공 사신이 또한 자주 역참의 관리와 졸병을 욕보이고 통사를 꾸짖었으며 사방의 조공 사신들이 모여 크게 연회하는 날에도 악한 말로 욕설을 퍼부었으나 천자가 죄를 가하지 않고 다만 사신을 신중히 가려 보내라고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그 땅은 북쪽으로 오이라트(瓦剌), 서쪽으로 토로번(土魯番), 동쪽으로 사주, 한동, 적근 등 여러 위(衞)가 있어 모두와 원한을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웃 나라들이 번갈아 침략했다. 한동의 병사가 성 밖까지 이르러 사람과 가축을 약탈해 갔다. 사주와 적근이 선후로 군사를 내어 침략하여 모두 크게 얻어갔다. 오이라트의 추장 에센(也先, 야선)은 왕의 어머니 노온답실리(弩溫答失里)의 남동생이었는데, 그 또한 병사를 보내 하밀성을 포위하고 우두머리를 죽이고 남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소, 말, 낙타를 약탈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왕의 어머니와 처를 취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면서 왕을 위협하여 와서 보라고 하니 왕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지 못하고 자주 사신을 보내 어려움을 고했다. 칙서를 내려 여러 부에게 우호를 닦으라고 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고, 오직 왕의 어머니와 처만 돌아올 수 있었다.

[해설]
하밀의 쇠퇴와 주변 정세를 설명한다. 하밀은 인종 구성이 복잡하여 단결이 어려웠고, 왕권은 약했다. 북쪽의 몽골계 오이라트(와라)와 서쪽의 토로번(투르판)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 특히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는 명나라 정통제(영종)를 포로로 잡았던 '토목의 변'을 일으킨 강력한 군주로, 하밀 역시 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10년, 에센이 다시 왕의 어머니와 처 및 동생, 그리고 사마르칸트의 조공 사신 100여 명을 아울러 약탈하고, 또 자주 왕에게 와서 보라고 재촉했다. 왕은 겉으로는 조정의 명에 따랐으나 실제로는 에센을 두려워했다. 13년 여름, 친히 오이라트에 나아가 몇 달을 머물다가 비로소 돌아왔는데, 사신을 보내 천자를 속여 말하기를 조정의 명을 지키느라 감히 가지 못했다고 했다. 천자가 칙서를 내려 칭찬했다. 얼마 뒤 그 거짓임을 알고 엄한 조서로 문책했으나 그 왕은 끝내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 에센이 바야흐로 동쪽을 침범하여 다시 옛 땅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이 때문에 하밀이 조금 편안함을 얻었다.

경태 3년(1452년) 그 신하 날열사(揑列沙)를 보내 조공하고 관직을 제수해 달라고 청했다. 이보다 앞서 사신이 서울에 이르면 반드시 은혜로운 명을 더했었다. 이때 우겸(于謙)이 중추(병부)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말하기를 "하밀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감히 오이라트와 내통했습니다. 지금 비록 귀순하여 정성을 바친다고 하나 마음은 여전히 속이고 거짓됩니다. 만약 관질을 더해주면 상을 내림에 명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중지했다. 경태 연간이 끝날 때까지 사신으로서 관직을 제수받은 자가 없었다.

천순 원년(1457년), 도와답실리가 죽고 동생 복렬혁(卜列革)이 사신을 보내 슬픔을 알리니 곧 충순왕으로 봉했다. 이때 도지휘 마운(馬雲)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북(북원)의 추장 패가사란(癿加思蘭, 베기 아르슬란)이 길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마침 하밀 왕이 길이 이미 통했다고 보고하여 마운이 이에 가서 하밀에 이르렀다. 그러나 적병은 실제로 물러나지 않았고 또한 조정의 사신을 겁탈할 것을 모의하고 있었다. 황제는 왕이 적과 내통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사신을 보내 절실히 꾸짖었다.

4년, 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어머니 노온답실리가 국사를 주관했다. 당초 에센이 주살되자 그 동생 백도왕(伯都王) 및 조카 올홀납(兀忽納)이 달아나 하밀에 거주했다. 왕의 어머니가 그들을 위해 글을 올려 은혜를 구하니 백도왕에게 도독첨사를, 올홀납에게 지휘첨사를 제수했다. 복렬혁이 죽은 뒤로부터 친속 중에 계승할 만한 자가 없어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마땅히 습직할 자를 의논하게 했다. 우두머리 아지(阿只) 등이 말하기를 탈환테무르의 외손자 파탑목아(把塔木兒)가 관직이 도독동지이니 이을 만하다고 했다. 왕의 어머니는 신하가 군주를 이을 수는 없다고 하고, 안정왕(安定王) 아아찰(阿兒察)이 충순왕과 시조가 같으니 습봉을 청했다. 7년 겨울, 상주가 올라오니 예관이 말하기를 "패가사란이 하밀에 주인이 없는 것을 보고 그 땅을 점거하려 꾀하여 형세가 위급하니 그 청을 따르소서."라고 했다. 황제가 도지휘 하옥(賀玉)에게 명하여 가게 했다. (하옥이) 서령(西寧)에 이르러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으니 하밀 사신 고아로해아(苦兒魯海牙)가 먼저 가기를 청했으나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가 하옥을 체포하여 관리에게 넘기고, 도지휘 이진(李珍)으로 고쳐 명하였으며 안정, 한동에 칙서를 내려 사신을 보호하여 함께 가게 했다. 아아찰이 하밀에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로 힘써 사양하고 가지 않으니 이진은 이에 되돌아왔다.

[해설]
하밀 왕가의 대가 끊기고, 왕의 어머니인 노온답실리가 섭정을 하는 상황이다. 주변의 위협 속에 왕위를 이을 적임자를 찾지 못해 혼란이 가중되었다. 패가사란(베기 아르슬란)은 몽골계 군벌로 이 시기 하밀을 위협했다.

하밀은 본래 쇠미한데다 부인이 나라를 주관하니 무리가 더욱 흩어졌다. 패가사란이 틈을 타 그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크게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니 왕의 어머니가 친속과 부락을 이끌고 고욕(苦峪)으로 달아났으며, 오히려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 어려움을 고했다. 조정은 능히 구원하지 못하고 단지 그 나라 사람들에게 칙서를 내려 속히 마땅히 계승할 자를 의논하게 할 뿐이었다. 그 나라가 파괴되어 쇠잔해진 까닭에 (중국으로) 오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성화 원년(1465년), 예관 요기(姚夔) 등이 말하기를 "하밀이 말 200필을 조공하는데 사신은 260명이나 됩니다. 중국의 유한한 재물로 외번의 무익한 비용을 공급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조정 신하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여, 1년에 한 번 입공하되 200명을 넘지 못하게 정하고 재가했다.

이듬해 병부에서 말하기를 왕의 어머니가 고욕으로 피한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적병이 이미 물러갔으니 마땅히 옛 땅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하여 이를 따랐다. 얼마 뒤 조공 사신이 말하기를 그 땅이 춥고 굶주려 남녀 200여 명이 따라와 먹을 것을 구걸하니 귀국할 수 없다고 했다. 명하여 사람당 쌀 6말, 포 2필을 주어 보냈다.

당초 나라 사람들이 파탑목아를 세우기를 청했으나 왕의 어머니가 긍정하지 않아 왕이 없는 지가 8년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두머리들이 번갈아 글을 올려 청했는데 말이 지극히 애처로웠다. 이에 파탑목아를 우도독으로 발탁하여 국왕의 일을 섭행하게 하고 고명과 인신을 하사했다. 5년, 왕의 어머니가 늙고 병들었음을 진술하며 약물을 구하자 황제가 즉시 하사했다. 얼마 뒤 오이라트, 토로번과 더불어 사신 300여 명을 보내와 조공하니 변방의 신하가 보고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조공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는데 지금 앞선 사신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뒤의 사신이 또 이르렀고, 또한 오이라트는 강한 도적이며 지금 하밀과 함께 왔으니, 하밀이 그 세력을 끼고 이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면 즉 오이라트가 그 일을 빌려 변방을 엿보는 것이라고 했다. 황제가 이에 그 헌납을 물리치고 변방 신하로 하여금 연회를 베풀어주고 돌려보내게 했다. 조공 사신이 굳이 하사품을 받지 않고 반드시 대궐에 직접 나아가고자 하니, 이에 명하여 10분의 1만 북경에 가게 했다.

8년, 파탑목아의 아들 한신(罕愼)이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직위를 잇기를 청했다. 황제가 허락했으나 국사를 주관하도록 명하지는 않아 나라 안의 정령이 나오는 곳이 없었다. 토로번의 속단(速檀, 술탄) 아력(阿力, 알리)이 기회를 틈타 그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왕의 어머니를 사로잡고 금인을 빼앗았으며 충순왕의 손녀를 첩으로 삼고 그 땅을 점거하여 지켰다. 9년 4월, 일이 알려지자 명하여 변방 신하에게 삼가 경계를 갖추게 하고 한동, 적근 등 여러 위에게 칙서를 내려 협력하여 싸우고 지키게 했다. 곧이어 도독동지 이문(李文), 우통정 유문(劉文)을 보내 감숙으로 가서 경략하게 했다. 숙주(肅州)에 도착하여 금의천호 마준(馬俊)을 보내 칙서를 받들고 가서 타일러 깨우치게 했다. 이때 알리는 그 누이의 남편 아란(牙蘭)을 남겨 하밀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왕의 어머니와 금인을 데리고 이미 토로번으로 돌아갔다. 마준이 도착하여 조정의 명으로 타일렀으나 (아란은) 말로 대항하며 불손했고 마준을 한 달 넘게 억류했다. 하루는 아란이 갑자기 와서 말하기를 대군 3만이 당일 서쪽에서 온다고 하니, 알리가 이에 마준 등을 연회로 위로하고 왕의 어머니를 가마 태워 나와서 보게 했다. 왕의 어머니는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다가 밤에 몰래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나를 위해 천자께 주상하여 속히 병사를 보내 하밀을 구원해 주시오."라고 했다. 유문 등이 이를 보고하니, 드디어 도독 한신 및 적근, 한동, 메크리(乜克力) 여러 부에 격문을 돌려 병사를 모아 나아가 토벌하게 했다. 10년 겨울, 병사가 복륭길아천(卜隆吉兒川, 불룽기르 강)에 이르렀는데, 첩자가 보고하기를 알리가 무리를 모아 항거하고 또 다른 부족과 결탁하여 한동, 적근 두 위를 약탈하려 꾀한다고 했다. 유문 등은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두 위에게 명령하여 돌아가 본토를 지키게 했으며, 한신 및 메크리, 위구르의 무리는 물러나 고욕에 거주했고 유문 등 또한 이끌고 숙주로 돌아왔다. 황제는 이에 한신에게 명하여 임시로 국사를 주관하게 하고, 그 청으로 인하여 쌀과 포를 주었으며 또 곡물 종자를 하사했다. 유문 등은 공 없이 돌아왔다.

[해설]
토로번(투르판)의 술탄 알리가 하밀을 점령하고 하밀 왕가를 인질로 잡았다. 명나라는 무력 개입을 시도했으나 성과 없이 물러났고, 하밀 유민들은 고욕(가욕관 인근)으로 피난하여 명나라의 보호를 요청하는 상황이 되었다.

토로번이 오랫동안 하밀을 점거하자 조정은 변방 신하에게 명하여 고욕성을 쌓고 하밀위를 그 땅으로 옮겼다. 18년 봄, 한신이 한동, 적근 두 위를 규합하여 병사 1,300명을 얻고 자신의 부대와 합쳐 총 1만 명으로 밤에 하밀성을 습격하여 깨뜨리니 아란이 달아났다. 기세를 타서 잇달아 8개 성을 수복하고 드디어 돌아가 옛 땅에 거주했다. 순무 왕조원(王朝遠)이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아울러 두 위도 장려했다. 왕조원이 한신을 봉하여 왕으로 삼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토로번 또한 마음을 고쳐 교화로 향하여 한신과 화의를 의논하니, 마땅히 때를 타서 안무하여 왕의 손녀와 금인을 찾아오게 하여 왕의 어머니를 따라 함께 국사를 관장하게 하고, 하밀 나라 사람들 또한 한신을 봉해달라고 빈다고 했다. 조정의 논의가 따르지 않아 이에 좌도독으로 승진시키고 백금 100냥, 채색 비단 10 표리(겉감과 안감)를 하사했으며, 특별히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위로했으며 장수와 병사들을 차등 있게 승진시키고 상주었다.

홍치 원년(1488년), 그 나라 사람들의 청을 따라 한신을 봉하여 충순왕으로 삼았다. 토로번의 알리가 이미 죽고 그 아들 아흑마(阿黑麻, 아흐마드)가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는데, 거짓으로 한신과 결혼을 맺자고 하여 유인해서 그를 죽이고 그대로 아란으로 하여금 그 땅을 점거하게 했다. 하밀 도지휘 아무랑(阿木郎)이 달려와 구원을 요청하니 조정 신하들이 토로번 조공 사신을 타일러 침범한 땅을 돌려주게 하고 아울러 적근, 한동에 칙서를 내려 함께 흥복을 도모할 것을 청했다. 이듬해 하밀의 옛 부하 작복도(綽卜都) 등이 무리를 이끌고 아란을 공격하여 그 동생을 죽이고 그 반역한 신하 자반복(者盼卜) 등의 인축을 빼앗아 돌아왔다. 일이 알려지자 품계를 올리고 상을 더했다. 이보다 앞서 한신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는데 돌아오기도 전에 난을 만나, 그 동생 엄크볼라(奄克孛剌)가 부족 무리를 이끌고 변방으로 달아나니 조정은 명하여 한신에게 하사하려던 것을 그 동생에게 돌려주어 하사하게 했다. 아흑마가 하밀을 떠날 때 겨우 60명을 남겨 아란을 돕게 했다. 아무랑이 그 병력이 적고 약함을 엿보고 변방 신하에게 청하여 적근, 한동의 병사를 징발해 밤에 그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니 아란이 달아났고 참획한 것이 매우 많아 조서를 내려 장려하고 하사했다.

[해설]
하밀을 수복했던 한신이 충순왕에 봉해졌으나, 투르판의 새 술탄 아흐마드의 계략(거짓 혼인 동맹)에 속아 살해당했다. 하밀은 다시 투르판의 손에 들어갔다.

이때를 당하여 아흑마는 매우 흉포하고 오만하여 스스로 땅이 중국과 멀다 하여 자주 천자의 명을 거역했다. 하밀을 격파함에 미쳐 조공 사신이 빈번히 이르렀는데 조정이 여전히 그들을 선대하니 이로 말미암아 더욱 중국을 경시했다. 황제는 이에 그 하사품을 박하게 하고, 혹은 사신을 구류하거나 조공 물품을 물리치며 칙서로 꾸짖어 죄를 뉘우치게 했다. 얼마 뒤 충순왕의 족손(무리를 같이하는 손자뻘 친척) 섬파(陝巴)를 찾아내어 장차 보좌하여 세우려 했다. 아흑마가 점차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3년에 사신을 보내 관문을 두드리고 하밀과 금인을 바쳐 돌려보내고 구류된 사신을 석방하기를 원했다. 천자가 그 조공을 받아들이고 여전히 앞선 사신을 머무르게 했다. 이듬해 과연 성과 인신을 가지고 와서 돌려주니 이에 마문승(馬文升)의 말을 따라 그 구류했던 사신을 돌려보냈다. 마문승이 또 말하기를 "번인(蕃人)은 종족을 중시하고 또 본래 몽골에 복종합니다. 하밀에는 예로부터 회회, 위구르, 하라회 세 종족이 있고 북쪽 산에는 또 소열독(小列禿), 메크리가 있어 서로 침략하고 핍박하니 몽골의 후예를 얻어 진무하게 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지금 안정왕의 족인인 섬파는 곧 옛 충의왕 탈탈의 가까운 속친인 종손이니 하밀을 주관할 만합니다."라고 했다. 천자가 그렇다 여기고 여러 번(蕃) 또한 함께 섬파를 마땅히 세워야 한다고 주상했다. 5년 봄, 섬파를 세워 충순왕으로 삼고 인신과 고명, 관복 및 성을 지키는 무기를 하사했으며 아무랑을 도독첨사로 발탁하여 도독동지 엄크볼라와 함께 그를 보좌하게 했다.

[해설]
명나라는 하밀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 몽골계 혈통인 섬파를 찾아내어 왕으로 세웠다. 이는 하밀 주변의 부족들이 몽골의 권위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여러 번(蕃)이 섬파에게 호궤(음식과 물품으로 위로함)와 하사품을 요구했으나 얻지 못하자 모두 원망했다. 아무랑이 또 메크리 사람들을 끌어들여 토로번의 소와 말을 약탈하니 아흑마가 노하여, 6년 봄에 몰래 병사를 내어 밤에 하밀을 습격하고 그 사람 100여 명을 죽이니 도망친 자와 항복한 자가 각각 절반이었다. 섬파와 아무랑은 대토랄(大土剌)에 의거하여 지켰다. 대토랄은 중국 말로 대토대(크고 높은 흙 구조물)이다. 3일을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아무랑이 급히 메크리, 오이라트 두 부의 병사를 징발하여 구원하게 하니 모두 패하여 떠났다. 이에 섬파를 사로잡고 아무랑을 잡아 지해(사지를 찢음)했다. 아란이 다시 점거하여 지키며 아울러 변방 신하에게 글을 보내 아무랑의 죄를 호소했다. 이때 토로번의 선후 조공 사신들이 모두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변방 신하가 그 글이 불손하고 또 참람되게 가한(카간)을 칭하므로, 장수를 명하고 병사를 보내 먼저 아란을 토벌해 없앤 뒤 곧바로 토로번에 쳐들어가 아흑마의 머리를 베고 섬파를 찾아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렇지 않으면 칙서를 내려 엄히 꾸짖어 섬파를 돌려보내게 하고 이에 그 죄를 용서하자고 했다. 조정의 논의가 뒤의 계책을 따라, 수신(지방관)으로 하여금 조공 사신을 구류하고 몇 사람만 놓아주어 돌아가게 하여 칙서를 가지고 가서 화복(재앙과 복)을 타일러 보이게 했다. 황제가 그 청대로 하고 조정에서 대신을 추천하게 하여 감숙으로 가서 경략하게 했다.

[해설]
섬파는 인망을 얻지 못했고, 결국 토로번의 재침공으로 사로잡혔다. 명나라는 무력 토벌 대신 외교적 압박(사신 구류, 칙서 전달)을 선택했다.

당초 하밀의 변고가 들리자 구준(邱𤀹)이 마문승에게 말하기를 "서쪽 변경의 일이 중하니 공이 한번 가야만 하오."라고 했다. 마문승이 말하기를 "국가에 일이 있으면 신하된 의리로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는 법이오. 그러나 번인은 이익을 즐기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니 자고로 서역이 중국의 근심거리가 된 적은 없었소. 천천히 안정시켜야 하오."라고 했다. 구준이 다시 이를 말하자 마문승이 가기를 청했다. 조정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북쪽의 도적(몽골)이 강하니 병부상서가 멀리 나갈 수 없다고 하여, 이에 병부우시랑 장해(張海), 도독동지 구겸(緱謙) 두 사람을 추천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두 사람에게 지시를 주었으나 두 사람은 모두 용렬한 인재여서 단지 토로번 사람을 보내 그 주인을 타일러 침범한 땅을 바치고 돌려주게 하고 감주(甘州)에 머물며 기다렸다. 이듬해 아흑마가 사신을 보내 관문을 두드리고 조공을 구하며 거짓으로 말하기를 섬파 및 하밀을 돌려주기를 원하니 조정 또한 그 사신을 돌려달라고 빌었다. 장해 등이 이를 보고하고 다시 칙서를 내려 선유(널리 타일러 알림)하기를 청했다. 조정의 논의가 말하기를, 앞서 이미 칙서를 내렸는데 지금 만약 다시 내리면 국체를 손상함이 있으니 마땅히 장해 등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람을 보내 타일러야 한다고 했다. 명을 따르지 않으면 그대로 앞선 사신을 억류하고 또한 새로운 사신을 모두 관문 밖으로 몰아내어 영구히 조공을 허락하지 말며, 그대로 수신과 더불어 적근, 한동 여러 부의 병사에게 격문을 보내 바로 하밀을 쳐서 아란을 습격해 베라고 했다. 만약 탈 기회가 없으면 가욕관을 봉쇄하고 그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다. 섬파는 비록 왕에 봉해졌으나 그가 돌아오든 아니든 중국에는 손익이 없으니 마땅히 따로 현명한 자를 택해 대신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황제는 섬파가 이미 중국에 손익이 없다면 하밀 성지가 이미 파괴되었는데 만약 바치고 돌려주면 마땅히 어찌 처리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조정 신하들이 다시 말하기를 섬파는 곧 안정왕 천분(千奔)의 조카이자 충순왕의 손자이니, 지난번 왕에 봉한 것은 한 지방을 진무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지금 포로가 되었으니 나약함을 알 수 있고 설령 다시 돌아온다 해도 형세상 다시 서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그 왕작을 혁파하고 감주에 살게 하며 안정왕에게 호궤와 하사품을 주고 다시 세우지 않는 이유를 타일러야 합니다. 도독 엄크볼라로 하여금 하밀의 일을 총괄하게 하고, 회회 도독 사역호선(寫亦虎仙), 하라회 도독 배질력미실(拜迭力迷失) 등과 더불어 세 종족의 번인을 나누어 거느려 그를 보좌하게 하소서. 또한 고욕의 성과 해자를 수리하고 무릇 감주, 양주에 흩어져 사는 번인들을 모두 그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소와 농기구, 식량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섬파가 돌아오지 않으면 굳이 찾을 필요가 없으니, 우리가 섬파를 급하게 여기지 않으면 저들이 장차 스스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황제가 모두 그 말대로 하여 장해 등에게 칙유했다. 장해 등은 칙서를 보고 장차 섬파를 버리려 함을 알고 매우 기뻐하며, 즉시 그 조공 사신을 쫓아내고 가욕관을 닫고 고욕성을 수리하고 떠돌아다니는 번인들을 그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는 소를 올리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8년 정월에 서울에 이르니 언관들이 번갈아 글을 올려 그 경략에 공이 없음을 탄핵하여 아울러 옥리에게 넘겨져 품계가 강등되었고 하밀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해설]
명나라 조정 내부의 논의 과정이다. 섬파를 구출하는 것보다 하밀 지역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실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파견된 장해 등이 무능하여 성과를 내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마문승이 뜻을 예리하게 하여 흥복을 꾀하여, 허진(許進)을 등용하여 감숙을 순무하게 하여 이를 도모하게 했다. 허진이 대장 유녕(劉寧) 등과 함께 몰래 군사를 이끌고 밤에 습격하니 아란은 달아나고 그 남은 졸개들을 베었으며 남은 무리들을 어루만져 항복시키고 돌아왔다. 명나라 초기 이래로 관군이 그 땅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는데 여러 번이 비로소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고 아흑마 또한 섬파를 돌려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하밀이 자주 파괴되어 들어와 사는 유민들은 아침저녁으로 도적을 근심했다. 아흑마가 과연 다시 와서 공격했으나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자 마침내 흩어져 갔다.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궁핍하여 지키기 어렵다 여겨 집들을 모두 불태우고 숙주로 달아나 구제를 구했다. 변방 신하가 이를 보고하니 조를 내려 소와 농기구, 곡물 종자를 하사하고 아울러 떠돌아다니는 세 종족 번인들과 적근에 기거하는 하밀 사람들을 징발하여 모두 고욕 및 과주, 사주로 가게 하여 스스로 농사짓고 목축하게 하여 흥복을 도모하게 했다.

이때 하밀에는 왕이 없어 엄크볼라가 우두머리가 되었다. 10년에 그 무리 사역호선 등을 보내 조공하니 폐백 5천을 주어 그 값을 갚았으나, 사신이 오히려 오랫동안 머물며 크게 방자하게 굴며 으르렁거렸다. 예관 서경(徐瓊) 등이 그 죄를 극론하니 이에 그들을 몰아내어 가게 했다. 이때 여러 번이 조정이 관문을 닫고 조공을 끊어 들어오지 못하게 되자 모두 아흑마를 원망하니, 아흑마가 뉘우치고 섬파 및 하밀의 무리를 송환하고 조공을 예전처럼 통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조정의 논의가 번문(番文, 공식 외교 문서)이 없으면 갑자기 허락할 수 없으니 반드시 문서를 갖추게 한 뒤 그 청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섬파는 전의 논의에서 폐위되었으니 지금은 잠시 감주에 거주하게 하고 뭇 우두머리들이 모두 진심으로 귀복하기를 기다린 뒤 하밀의 성과 해자를 수복하고 옛 업을 회복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황제가 모두 이를 따랐다. 겨울, 왕월(王越)을 기용하여 삼변(三邊)의 군무를 총제하고 겸하여 하밀을 경리하게 했다. 11년 가을, 왕월이 말하기를 하밀은 버릴 수 없고 섬파 또한 폐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옛 봉작을 유지하게 하고 먼저 하밀로 돌아가게 해야 하며, 성을 수리하고 집을 짓는 비용을 헤아려 주고 세 종족 번인과 적근, 한동, 소열독, 메크리 여러 부에게 호궤와 하사품을 주어 전의 노고를 장려하고 또한 훗날의 공효를 책임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황제 또한 재가했다. 이로부터 하밀이 다시 편안해졌고 토로번 또한 조공을 닦는 것이 삼가했다.

[해설]
허진의 군사 작전 성공과 경제 제재(조공 중단)가 효과를 거두어 토로번이 굴복하고 섬파를 돌려보냈다. 명나라는 섬파를 다시 왕으로 복귀시키고 하밀을 재건했다.

엄크볼라는 한신의 동생으로 섬파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당사자가 이를 근심하여 섬파로 하여금 한신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여 우호를 맺게 했다. 섬파는 술을 즐기고 가렴주구하여 대중의 마음을 잃었고 부하 아볼라(阿孛剌) 등이 모두 원망했다. 17년 봄, 몰래 아흑마를 얽어 그 어린 아들 진테무르(眞帖木兒)를 맞이하여 하밀을 주관하게 했다. 섬파가 두려워하여 가족을 이끌고 고욕으로 달아났다. 엄크볼라와 사역호선이 숙주에 있었는데, 변방 신하가 두 사람이 번의 무리에게 신복 받는 바가 되므로 명하여 돌아가 섬파를 보좌하게 하고 백호 동걸(董傑)과 함께 가게 했다. 동걸은 담력이 있었다. 이미 하밀에 도착하니 아볼라가 그 무리 5명과 약속하여 밤에 병사로써 겁탈하려 했다. 동걸이 이를 알고 엄크볼라 등과 모의하여 아볼라 등을 불러 일을 의논하다가 즉석에서 베니 그 아랫사람들이 드디어 감히 배반하지 못했다. 이에 섬파로 하여금 하밀로 돌아오게 하고 진테무르를 토로번으로 돌려보냈다. 진테무르는 나이가 13세였는데 그 어머니가 곧 한신의 딸이었으므로, 아버지가 이미 죽고 형 만속아(滿速兒, 만수르)가 뒤를 이어 술탄이 되어 여러 동생과 서로 원수처럼 죽인다는 것을 듣고 두려워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엄크볼라에게 의지하기를 원하여 말하기를 "나의 외할아버지입니다."라고 했다. 변방 신하가 섬파와의 불화를 염려하여 감주에 거주하게 했다. 18년 겨울, 섬파가 죽고 그 아들 배아즉(拜牙卽)이 스스로 술탄이라 칭하니 명하여 충순왕으로 봉했다.

[해설]
섬파의 무능으로 다시 내분이 일어났다. 토로번의 왕자 진테무르가 개입되었으나 명나라의 기민한 대처(동걸의 활약)로 수습되었다. 진테무르는 형 만수르와의 권력 투쟁을 피해 명나라에 망명했다.

정덕 3년(1508년), 사역호선이 입공하는데 통사와 함께 가지 않고 스스로 변방 신하의 문첩을 가지고 투항해 들어왔다. 대통사 왕영(王永)이 노하여 상소를 올려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사역 추장(사역호선) 또한 왕영이 뇌물을 요구했다고 주상했다. 왕영은 포방(豹房, 황제의 유희 장소)에 공봉하며 총애를 믿고 방자하고 횡포했다. 조를 내려 죄를 따지지 말고 양쪽 다 훈계하여 타일렀다. 사역 추장은 이로부터 더욱 조정을 경시하고 몰래 딴마음을 품었다.

당초 배아즉이 직위를 잇자 만수르가 통교하여 화친하고 또 사신을 보내 진테무르를 구하니 변방 신하가 주는 것이 편하다고 말했다. 추신(병부)이 말하기를 토로번은 악을 쌓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하밀을 부식하여 성세가 점차 커지는 것을 보고 이에 말을 낮추어 조공을 구하며 동생을 돌려달라는 것으로 명분을 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그 동생을 머무르게 하는 것은 정히 옛사람이 그 친애하는 자를 인질로 잡는 뜻에 부합하니 급히 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황제가 이를 따랐다. 6년에 비로소 사역호선에게 명하여 도독 만하라삼(滿哈剌三)과 함께 그를 보내 서쪽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하밀에 이르러 엄크볼라가 그를 멈추게 하려 했으나 두 사람이 불가하다 했다. 보호하여 토로번에 이르자 드디어 나라의 사정을 만수르에게 전하고 또한 배아즉을 꾀어 배반하게 했다. 배아즉은 본래 어리석고 멍청하며 성품이 또 음란하고 포악하여 마음속으로 속부가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했는데, 만수르가 또 달콤한 말로 유인하니 곧 엄크볼라와 함께 가려 했으나 (엄크볼라가) 따르지 않아 숙주로 달아났다. 8년 가을, 배아즉이 성을 버리고 배반하여 토로번에 들어갔다. 만수르는 화자(火者) 타지딩(他只丁)을 보내 하밀을 점거하게 하고 또 화자 마흑목(馬黑木)을 보내 감숙에 이르러 말하기를 배아즉이 나라를 지킬 수 없어 만수르가 장수를 보내 대신 지키게 했다고 하며 호궤와 하사품을 구걸했다.

[해설]
하밀 내부의 배신자 사역호선이 토로번의 만수르와 결탁하여 하밀 왕 배아즉을 꼬드겨 망명하게 만들었다. 하밀은 다시 토로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9년 4월, 일이 알려지자 도어사 팽택(彭澤)에게 명하여 가서 경략하게 했다. 팽택이 이르기도 전에 적이 병사를 보내 고욕, 사주를 나누어 약탈하고 소리쳐 말하기를 나에게 금폐 1만을 주면 곧 성과 인신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팽택이 감주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번인은 이익을 즐기니 이로 인하여 화친할 수 있다고 했다. 통사 마기(馬驥)를 보내 타일러 침범한 땅과 왕을 돌려주게 하고 마땅히 무거운 상을 주겠다고 했다. 만수르가 거짓으로 허락하니 팽택이 곧 폐백 2천과 백금 술그릇 1벌을 주었다. 11년 5월,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통사를 보내 국위를 선양하고 중상으로 요약하니, 그 추장이 허물을 뉘우치고 순종을 바쳐 즉시 금인 및 하밀 성을 내어주었습니다. 만하라삼, 사역호선 두 사람은 타지딩을 소환하고 아울러 탈취했던 적근위의 인신을 돌려주었습니다. 오직 충순왕만이 다른 곳에 있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효로한 사람들의 공을 기록하시고 신에게는 해골을 하사하시어(은퇴를 허락하시어) 전리로 돌아가게 해주소서."라고 했다. 황제가 즉시 명하여 조정으로 돌아오게 했다. 충순왕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타지딩 또한 긍정하여 물러나지 않고 다시 중상을 요구하다가 비로소 성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해설]
팽택은 뇌물을 주어 사태를 무마하려 했으나 속임수에 당했다. 서류상으로는 하밀을 수복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왕도 돌아오지 않았고 토로번 군대도 철수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듬해 5월, 감숙 순무 이곤(李昆)이 상언하기를 "만수르의 첩문을 얻었는데 이르기를 배아즉은 복위할 수 없고 설령 옛 땅으로 돌아온다 해도 이미 인심을 잃었으니 안정왕 천분의 후예를 따로 세워달라고 빕니다. 이 말이 참으로 그렇습니다. 만약 반드시 그가 나라를 회복하게 하려면 만수르 형제에게 칙서를 내려 송환하게 하고, 거듭 비단을 후하게 하사하여 그가 순종하기를 바라야 합니다."라고 했다. 조정의 논의가 "서쪽 변경을 경략한 지 이미 3년이 넘었는데 충순왕은 끝내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마땅히 군사를 일으키고 조공을 끊어야지 그 요구를 들어주어 우리의 위중함을 손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과 인신이 돌아왔고 국체가 갖추어져 있으니, 마땅히 칙서를 내려 만수르가 국은을 배반하고 구하고 취함에 만족함이 없음을 꾸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제에게 적당히 하사하여 그로 하여금 속히 충순왕을 돌려보내게 해야 합니다. 따르지 않으면 관문을 닫고 조공을 끊으며 병사를 엄히 하여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를 따랐다.

당초 사역호선은 만수르와 깊이 결탁하여 역모를 주창했다. 얼마 뒤 틈이 생겨 만수르가 그를 죽이려 하자 크게 두려워하여 타지딩에게 구해달라고 빌고 뇌물로 폐 1,500필을 허락하고 기약을 정해 숙주에 이르면 주기로 했으며, 또 그를 꾀어 입공(침략)하게 하며 말하기를 숙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만수르가 기뻐하여 그 사위 마흑목과 함께 입공하게 하여 허실을 엿보고 또한 그 뇌물을 징수하게 했다. 변방 신하가 함께 온 화자 살자아(撒者兒)가 곧 화자 타지딩의 동생이라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그 무리 호도사역(虎都寫亦)과 아울러 감주에 구류하고, 사역호선을 감독하여 관문 밖으로 내보내려 했으나 두려워하며 가려 하지 않았다. 타지딩이 그 동생이 구류되었다는 말을 듣고 노하여 다시 또 하밀성을 빼앗고 만수르에게 청하여 옮겨 와 거주하게 했으며, 병사를 나누어 사주를 위협해 점거하고 무리를 옹위하여 쳐들어와 토아패(兔兒壩)에 이르렀다. 유격 예녕(芮寧)과 참장 장존례(蔣存禮), 도지휘 황영(黃榮), 왕종(王琮)이 각기 병사를 이끌고 가서 막았다. 예녕이 먼저 사자패(沙子壩)에 도착하여 적을 만났다. 적이 무리를 다해 예녕을 포위하고 병사를 나누어 여러 장수를 묶어두니 예녕이 거느린 700명이 모두 전사했다. 적이 숙주성에 육박하여 허락했던 폐물을 요구했다. 부사 진구주(陳九疇)가 굳게 지키고 또한 먼저 그 내응을 끊으니 적이 일이 누설되고 구원병이 이를 것을 염려하여 크게 약탈하고 떠났다.

12년 정월, 위급함을 알리는 문서가 들리니 조정의 논의가 다시 팽택에게 명하여 군무를 총제하게 하고 중관 장영(張永), 도독 극영(郤永)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서쪽을 정벌하게 했다. 적이 돌아와 과주(瓜州)에 이르자 부총병 정렴(鄭廉)이 엄크볼라의 병사와 합쳐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79급을 베었다. 적이 이에 달아나 떠났고 또 오이라트와 서로 공격하다가 힘이 대적하지 못하여 글을 보내 화친을 구하니 팽택 등이 이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해설]
사역호선의 이중 간첩 행위와 뇌물 문제로 인해 대규모 침공이 발생했다. 명군 700명이 전멸하는 패배를 겪었으나, 진구주의 방어와 오이라트의 견제로 위기를 넘겼다.

이보다 앞서 사역호선과 아들 미아마흑목(米兒馬黑木), 사위 화자 마흑목 및 그 무리 실배연답(失拜煙答)이 모두 내응했다 하여 감옥에 갇혔는데 실배연답은 매를 맞아 죽었다. 사태가 평정됨에 미쳐 사역호선에게 칼을 씌워 북경으로 보내 형부의 감옥에 가두고 그 아들은 그대로 감주에 가두었다. 실배연답의 아들 미아마합마(米兒馬黑麻)는 사역호선의 처조카 사위였는데 입공하여 북경에 있다가, 왕경(王瓊)이 팽택을 무너뜨리고자 함을 탐지하고 장안문으로 돌입하여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금의위 감옥에 내려졌다. 마침 병부와 법사(사법 관청)가 감숙에 가서 심문하여 보고하기를 청했는데, 왕경이 이로 인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고자 하여 과도관(과관과 도관) 2명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이듬해 조사가 이르러 팽택에게는 연좌될 바가 없었다. 왕경이 노하여 팽택이 기망하고 나라를 욕보였다고 탄핵하여 서민으로 내쳤다. 이곤, 진구주가 변란을 격발시켰다 하여 연좌시켜 옥리에게 잡아내리고 아울러 무거운 견책을 받게 했다. 이듬해 사역호선 또한 감형되어 사형을 면했고, 드디어 돈녕(錢寧, 정덕제의 총신)에게 줄을 대어 그 사위와 함께 황제의 좌우를 모시게 되었다. 황제가 그를 좋아하여 국성(황제의 성, 주씨)을 하사하고 금의지휘를 제수하여 남쪽으로 정벌가는 어가를 호종하게 했다.

[해설]
정덕제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보여준다. 간신 돈녕과 결탁한 하밀의 배신자 사역호선이 오히려 복권되어 황제의 측근이 되고, 충신들은 탄압받았다. 왕경과 팽택의 정쟁이 서역 정책에 악영향을 미쳤다.

만수르가 변방을 침범한 뒤 자주 조공을 통하기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15년, 먼저 약탈했던 장졸 및 충순왕의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시 조공을 구했다. 조정의 논의가 허락했으나 왕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순안어사 반방(潘倣)이 힘써 말하기를 조공은 마땅히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듬해 세종(가정제)이 뒤를 잇자 양정화(楊廷和)가 사역호선이 중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어 돌아가면 반드시 변방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 하여, 유조(임금의 유언) 안에서 그 죄를 나열하고 그 아들, 사위와 아울러 주살했으며 진구주를 등용하여 감숙 순무로 삼았다.

이때 만수르가 매년 와서 조공하니 조정이 예전처럼 대우했고 또한 다시 충순왕의 일을 묻지 않았다. 가정 3년(1524년) 가을, 2만 기병을 옹위하여 숙주를 포위하고 병사를 나누어 감주를 침범했다. 진구주 및 총병관 강석(姜奭) 등이 힘써 싸워 패배시키고 타지딩을 베니 적이 이에 물러갔다. 일이 알려지자 병부상서 김헌민(金獻民)에게 명하여 서쪽을 토벌하게 했는데, 난주(蘭州)에 도착하니 적이 이미 오래전에 물러가서 이에 이끌고 돌아왔다. 진구주가 이로 인하여 힘써 말하기를 적은 안무할 수 없으니 관문을 닫고 조공을 끊으며 오로지 변방의 방어를 굳건히 해달라고 빌어 허락을 받았다. 이듬해 가을, 적이 다시 숙주를 침범하고 병사를 나누어 참장 운모(雲冒)를 포위했으며 대군으로 남산에 이르렀다. 진구주는 이때 이미 해직되었고 다른 장수의 구원병이 이르자 적이 비로소 달아났다.

[해설]
가정제 즉위 후 사역호선을 처형하여 정의를 바로세웠으나, 만수르의 침공은 계속되었다. 명나라는 강경책(폐관절공)과 유화책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이때를 당하여 번인이 자주 변방의 성을 침범했으나 당국자들은 능히 국위를 떨쳐 변방을 위해 복수하고 치욕을 씻지 못했고, 한두 명의 새로 등용된 권신들은 도리어 이를 빌려 원한을 갚았다. 이로 말미암아 봉강의 옥사가 일어났다. 백호 왕방기(王邦奇)는 평소 양정화, 팽택에게 유감이 있었는데, 6년 봄에 상언하기를 "지금 하밀이 나라를 잃고 번의 도적이 안으로 침범하는 것은, 팽택이 번에게 뇌물을 주고 화친을 구하고 양정화가 사역호선을 논죄하여 죽인 소치입니다. 이 두 사람을 주살하면 거의 하밀을 회복할 수 있고 변경에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계악(桂萼), 장총(張璁)의 무리가 이를 핑계로 큰 옥사를 일으키고자 하여 양정화, 팽택을 배척하여 서민으로 만들고 그 자제와 친당들을 모두 법리(재판)에 두니 자살하는 자도 있었다. 다시 급사, 금의위 관리를 보내 조사하게 했다. 번의 추장 아란이 말하기를 감히 천조에 죄를 얻으려 한 것이 아니며 변방을 침범한 까닭은 사역호선, 실배연답 두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성과 인신을 바쳐 전의 죄를 속죄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일이 병부에 내려지니 상서 왕시중(王時中) 등이 말하기를 "번의 추장이 조공을 빈 것이 서너 차례인데 앞서 이미 총제상서 왕헌(王憲)에게 내려보내 그 조공 사신을 통해 꾸짖었습니다. 청한 바가 마땅히 망령되지 않을 것이나 다만 그 말이 아란에게서 나왔으니 참으로 조공을 구하는 글이 아니며 혹은 거짓으로 우리와 화친하려 하는 것입니다. 만약 과연 죄를 뉘우친다면 반드시 먼저 성과 인신 및 약탈한 인축을 돌려보내고 주동자를 함거에 실어 보내며 관문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비로소 들어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계악은 전의 옥사가 끝나지 않아 반드시 다시 큰 옥사를 일으키고자 하여, 아란을 인질로 남겨두고 역관을 보내 그 주인을 타일러 침범한 땅을 돌려주게 하기를 청했다. 그리고 예부, 병부상서 방헌부(方獻夫), 왕시중 등과 협의하여 도발하고 격동시키는 말을 만들어, 번인이 글을 올린 네 무리가 모두 허물을 전의 관리에게 돌리니 비록 말에 꾸미고 덮음이 많으나 또한 일이 일어남에 원인이 있다고 했다. 마땅히 관리를 보내 변란을 격발시킨 허실을 엄히 조사하여 그 마음을 복종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앞의 의논과 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진구주가 승전을 보고할 때 만수르와 아란이 이미 포석(대포와 돌) 아래 죽었다고 말했는데 두 사람은 실제로 죽지 않았었다. 황제가 진실로 이를 의심했다. 계악 등의 의논을 보고 더욱 변방 신하들의 기망을 의심하여, 직접 수백 언의 조서를 써서 진구주를 절실히 꾸짖고 그를 죽이려 했으며 수보(재상) 양일청(楊一清)에게 편당을 지어 비호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드디어 관리를 보내 진구주를 체포했다. 상서 김헌민, 시랑 이곤 이하 연루된 자가 40여 명이었다.

[해설]
'대례의(大禮議)' 사건으로 가정제와 대립했던 양정화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계악과 장총이 하밀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들은 양정화가 사역호선을 죽여서 변방의 환란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적장 아란의 말을 근거로 충신들을 탄압했다.

7년 정월, 진구주가 체포되어 옥에 내려졌다. 계악 등은 반드시 그를 죽이고 아울러 양정화, 팽택을 연루시키려 했다. 형부상서 호세녕(胡世寧)이 힘써 구원하여 황제가 조금 깨달아 죽음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 보냈으며 팽택, 김헌민 등은 모두 관직에서 떨어졌다. 번의 추장은 기세가 더욱 교만해졌는데 계악이 또 왕경을 천거하여 삼변을 감독하게 하고 진구주가 가두었던 번의 사신을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내고 조공 통교를 허락했다. 번의 추장은 끝내 죄를 뉘우치지 않고 업신여기고 희롱함이 예전과 같았다. 이때 아란이 그 주인에게 죄를 얻어 부락을 거느리고 귀순해 오니 변방 신하가 받아주었다. 만수르가 노하여 그 부하 호력납찰아(虎力納咱兒)로 하여금 오이라트 2천여 기병을 이끌고 숙주를 침범하여 노관보(老鸛堡)에 이르렀는데, 마침 사마르칸트 조공 사신이 보루 안에 있어 적이 불러서 더불어 이야기했다. 유격 팽벽(彭𤀹)이 급히 병사를 이끌고 공격했다. 적이 말하기를 통화(화친)의 소식을 묻고자 한다고 했으나 팽벽이 듣지 않고 나아가 싸워 깨뜨렸다. 적은 적근으로 달아나 사람을 시켜 번문을 가지고 조공을 구하며 죄를 오이라트에게 미루었으나 말이 많이 패악하고 오만했다. 왕경은 당시 권세가의 뜻에 영합하여 반드시 안무를 의논하고자 하여, 인하여 말하기를 번인이 바야흐로 뉘우치니 마땅히 사정을 참작하여 죄를 사면하고 병사를 멈추고 백성을 쉬게 해야 한다고 했으며, 아울러 팽벽 및 부사 조재(趙載)의 공적을 올렸다. 상소가 병부에 내려졌다.

초기에 호세녕이 진구주를 구원할 때 하밀을 버리고 지키지 말자고 하며 말하기를 "배아즉이 토로번으로 돌아간 지 오래되어 설령 옛 땅으로 돌아온다 해도 또한 그들의 신하와 속국일 뿐이며 그 다른 족예 중에 이을 만한 자가 없습니다. 회회 일종은 일찍이 그들에게 귀순했습니다. 하라회, 위구르 두 족속은 도망하여 숙주에 붙은 지 이미 오래되어 관문 밖으로 몰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밀을 장차 어떻게 흥복하겠습니까? 비록 충순왕의 적파를 얻어 금인을 주고 병식으로 도와준다 해도 누가 더불어 지키겠습니까? 불과 1~2년이면 다시 빼앗긴 바 되어 저들의 부강함만 더해주고 우리 황명만 욕보이며 헛되이 다시 성과 인신을 얻게 하여 훗날 요협(요구하고 위협함)할 바탕만 되게 할 뿐입니다. 비옵건대 성명(성상)께서 깊이 헤아리시어 선대 조정의 화녕(和寧), 교지(交阯, 베트남)의 고사처럼 하밀을 내버려 두고 묻지 마소서. 만약 그들이 침략하여 어지럽히지 않으면 조공 통교를 허락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관문을 닫고 끊어서 외번으로써 중국을 피폐하게 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다. 잼사 곽도(霍韜)가 힘써 그 그름을 반박했다. 이때에 이르러 호세녕이 병부를 관장하게 되어 상언하기를 "번의 추장은 변하고 속임이 다단하여, 우리 숙주를 취하고자 하면 점차 간사한 회회들을 내지에 심어놓습니다. 일이 발각되면 반간계를 많이 풀어 우리 보필하는 신하를 무너뜨립니다. 지난번 조공을 허락하여 사신이 막 관문에 들어왔는데 적병이 이미 이르러 하서(가욕관 서쪽)가 거의 위태로웠습니다. 이에 관문을 닫는 것과 조공을 통하는 것의 이해가 명백합니다. 지금 왕경 등은 이미 적이 우리 성보에 육박하여 우리 병졸을 묶고 대거 거사한다고 소리쳐 천조를 공갈한다고 말하고서, 또 적이 바야흐로 두려워하고 뉘우치니 마땅히 그대로 조공 통교를 허락해야 한다고 말하니 어찌 스스로 모순됩니까. 곽도는 또 적에게 인신과 번문이 없는 것을 의심하지만 신이 이르건대 설령 인신이 있다 한들 또한 어찌 족히 의거하겠습니까. 다만 그 술책에 빠져 우리 충신을 이간하고 우리 변방의 방비를 느슨하게 하지 말아야 할 따름입니다. 아란은 본래 우리에게 속한 번인으로 저들에게 약탈당해 갔다가 지금 몸을 묶어 귀순해 왔으니 일이 반정에 속하므로 마땅히 즉시 어루만져 등용해야 합니다. 저들의 이반한 자를 불러들이면 우리 울타리에 보탬이 됩니다. 하밀을 흥복하는 것에 이르러는 신 등이 그윽이 생각건대 중국이 급할 바가 아닙니다. 무릇 하밀은 세 번 세워지고 세 번 끊어졌는데 지금 그 왕이 이미 적에게 등용되었고 백성은 다 유망했습니다. 가령 다시 다른 종족을 세운다 해도 그들이 강하면 입공하고 약하면 적을 쫓을 것이니 침략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신하가 되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세워도 이익이 없고 마침 번의 추장이 끼고서 간사한 이익을 취하게 할 뿐이라고 여깁니다. 비옵건대 왕경에게 새서(옥새 찍은 조서)를 내려 감숙 수신과 회동하여 번의 사신을 보내 만수르를 타일러 입공한 상황을 힐문하게 하소서. 만약 모른다고 핑계 대면 호력납찰아를 함거에 실어 보내게 하소서. 혹은 일이 오이라트에서 나왔다면 그 사람을 묶어 스스로 속죄하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 사신을 억류하고 병사를 보내 토벌하여 위엄과 신의가 병행되게 하면 적이 거두고 감출 줄 알 것입니다. 다시 왕경에게 칙서를 내려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도모하여 힘써 후사를 잘할 계책을 구하게 하고, 번과 통하여 조공을 받는 것은 권의(임시방편)로 삼고 식량을 족히 하고 국경을 굳건히 하는 것을 영구한 계책으로 삼게 한다면 봉강이 심히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했다. 상소가 들어가니 황제가 깊이 그렇다 여기고 왕경에게 명하여 숙계하고 상세히 처리하여 번인의 말을 가볍게 믿지 말라고 했다.

[해설]
호세녕의 현실적인 제안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다. 하밀 재건을 포기하고, 대신 자체 방어력을 키우며 투르판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되었다. 하밀은 사실상 포기되었다.

이듬해 이르러 감숙 순무 당택(唐澤) 또한 하밀은 쉽게 흥복되지 않으니 오로지 자치할 계책을 도모하기를 청했다. 왕경이 좋게 여겨 이를 근거로 상주하니 황제가 재가했다. 이로부터 하밀을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으며 토로번에게 조공 통교를 허락하니 서쪽 변경이 이를 빌려 어깨를 쉬었다(휴식했다). 하밀은 훗날 실배연답의 아들 미아마흑목의 소유가 되어 토로번에 복속했다. 조정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매년 한 번 조공하게 하여 여러 번과 다르게 했고, 융경, 만력 조정에 이르기까지 조공이 끊이지 않았으나 충순왕의 묘예(후손)는 아니었다.

[해설]
결국 하밀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투르판의 지배를 받는 일개 지방이 되었다. 명나라는 명분상 하밀의 조공을 계속 받았으나, 실제로는 충순왕의 혈통이 아닌 투르판의 대리인들이었다.

류성

류성(柳城, 류청)은 일명 노진(魯陳, 루천) 또는 유진성(柳陳城)이라 하며, 곧 후한의 유중(柳中) 땅으로 서역 장사가 다스리던 곳이다. 당나라 때 유중현을 두었다. 서쪽으로 화주(火州)와 70리, 동쪽으로 하밀과 1,000리 떨어져 있다. 큰 하천(대천)을 지나는데 길가에 해골이 많고 전해지길 귀신과 도깨비가 있어 여행객이 이르거나 늦으면 동료를 잃고 많이들 헤매다 죽는다고 한다. 대천을 나와 유사(흐르는 모래, 사막)를 건너면 화산(화염산) 아래에 성이 우뚝 솟아 너비가 2~3리인 곳이 있는데 곧 류성이다. 사면이 모두 전원이고 흐르는 물이 감돌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땅은 기장, 보리, 콩, 삼에 알맞고 복숭아, 오얏, 대추, 오이, 표주박의 등속이 있다. 포도가 가장 많은데 작으면서 달고 씨가 없어 소자포도(鎖子葡萄, 건포도용)라 한다. 가축으로는 소, 양, 말, 낙타가 있다. 기후는 항상 온화하다. 토착민은 순박하고 남자는 추결(상투)을 하며 부인은 검은 포를 뒤집어쓰고 그 어음은 위구르와 비슷하다.

[해설]
류성은 현재 신장 투르판 시의 루천(Lukchun)이다. 이곳은 투르판 분지의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였다. '대천'과 '유사'에 대한 묘사는 험난한 고비 사막의 여정을 보여준다. 씨 없는 포도는 지금도 이 지역의 특산물이다.

영락 4년(1406년), 유테무르(劉帖木兒)가 별실팔리(비슈발리크)에 사신으로 갈 때 인하여 명하여 채색 비단을 가지고 류성 추장에게 하사하게 했다. 이듬해 그 만호 와적랄(瓦赤剌)이 곧 사신을 보내 내공했다. 7년, 부안(傅安)이 서역에서 돌아올 때 그 추장이 다시 사신을 보내 따라와서 입공했다. 황제가 곧 명하여 부안에게 비단을 가지고 가서 보답하게 했다. 11년 여름, 사신을 보내 백아아흔태(白阿兒忻台)를 따라 입공했다. 겨울, 만호 관음노(觀音奴)가 다시 사신을 보내 부안을 따라 입공했다. 20년 하밀과 함께 양 2천 마리를 바쳤다.

선덕 5년, 우두머리 아흑파실(阿黑把失)이 와서 조공했다. 정통 5년, 13년에 아울러 입공했다. 그 뒤로는 다시 이르지 않았다.

류성은 화주, 토로번과 가까워 무릇 천조가 사신을 보낼 때나 그 추장이 입공할 때 많이들 그들과 함께했다. 훗날 토로번이 강해지자 두 나라(류성, 화주)가 아울러 멸하는 바가 되었다.

화주

화주(火州, 훠저우)는 또 이름이 하라(哈剌, 카라)이며 류성 서쪽 70리, 토로번 동쪽 30리에 있고 곧 한나라 차사전왕(車師前王)의 땅이다. 수나라 때는 고창국(高昌國)이었다. 당 태종이 고창을 멸하고 그 땅을 서주(西州)로 삼았다. 송나라 때는 회골(위구르)이 거주하며 일찍이 입공했다. 원나라 때는 화주라 이름하고 안정, 곡선 여러 위와 함께 통칭 위구르라 불렀으며 다루가치를 두어 감독하고 다스렸다.

[해설]
화주는 고대 고창국(가오창)의 수도였던 고창고성이 있는 곳이다. '하라'는 몽골어로 검다는 뜻 혹은 위구르의 옛 도읍 카라호자(Qocho)를 의미한다. 투르판 분지 중앙에 위치하며 매우 덥기 때문에 화주(Fire State)라 불렸다.

영락 4년 5월, 홍려시 승 유테무르에게 명하여 별실팔리 사신이 돌아가는 것을 보호하게 하고, 인하여 채색 비단을 가지고 가서 그 왕자 하산(哈散)에게 하사하게 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옥박(옥돌)과 방물을 바쳤다. 사신이 말하기를 회회로서 서울에 와서 장사하는 자들을 감주, 양주의 군사들이 많이들 사적으로 경계 밖으로 보내주어 변방의 업무를 누설한다고 했다. 황제가 어사에게 명하여 가서 조사하게 하고 또 총병관 송성에게 칙서를 내려 엄히 단속하게 했다. 7년 사신을 보내 하열(헤라트), 사마르칸트와 함께 와서 조공했다. 11년 여름, 도지휘 백아아흔태가 사신을 보내 엄적간(안디잔), 실라사(쉬라즈) 등 9개국과 함께 와서 조공했다. 가을, 진성(陳誠), 이섬(李暹) 등에게 명하여 새서와 문라, 사라, 포백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했다. 13년 겨울, 사신을 보내 진성을 따라와서 조공했다. 이로부터 오랫동안 이르지 않았다. 정통 13년 다시 조공했고 뒤에 드디어 끊어졌다.

그 땅은 산이 많은데 푸르고 붉어 불과 같으므로 화주라 이름했다. 기후는 덥다. 오곡과 축산은 류성과 같다. 성은 사방 10여 리이며 승려의 절이 민가보다 많다. 동쪽에 황성(버려진 성)이 있는데 곧 고창국의 도읍으로 한나라 무기교위가 다스리던 곳이다. 서북쪽으로 별실팔리와 연결된다. 나라가 작아 능히 자립하지 못하고 훗날 토로번에게 병합되는 바 되었다.

[해설]
"푸르고 붉어 불과 같다"는 화염산을 묘사한 것이다. "승려의 절이 민가보다 많다"는 구절은 이곳이 과거 불교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명나라 시기에는 이미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토로번

토로번(土魯番, 투르판)은 화주 서쪽 100리, 하밀에서 1,000여 리, 가욕관에서 2,600리에 있다. 한나라 차사전왕의 땅이다. 수나라 때는 고창국이었다. 당나라가 고창을 멸하고 서주 및 교하현을 두었으니 이곳은 곧 교하현 안락성이다. 송나라 때는 다시 고창이라 이름했고 회골이 점거하여 일찍이 입공했다. 원나라 때는 만호부를 두었다.

[해설]
토로번은 현재의 투르판이다. 고대 교하성(야르호토) 인근이다.

영락 4년 관리를 보내 별실팔리에 사신 갈 때 그 땅을 경유하므로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그 만호 색인테무르(賽因帖木兒)가 사신을 보내 옥박을 바치고 이듬해 서울에 도달했다. 6년, 그 나라 번승 청래(清來)가 제자 법천(法泉) 등을 거느리고 조공했다. 천자가 번의 풍속을 교화하여 이끌고자 하여 즉시 관정자혜원지보통국사(灌頂慈慧圓智普通國師)를 제수하고 제자 7명을 아울러 토로번 승강사(승려 관청) 관리로 삼고 하사함이 매우 후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무리가 오는 자가 끊이지 않았고 명마와 해청(사냥매) 및 다른 물건을 바쳤다. 천자 또한 자주 관리를 보내 장려하고 위로했다.

20년, 그 추장 윤길아찰(尹吉兒察)이 하밀과 함께 말 1,300필을 바치니 하사함이 더함이 있었다. 얼마 뒤 윤길아찰이 별실팔리 추장 왜사(歪思, 바이스 칸)에게 쫓겨나 서울로 달아나 돌아왔다. 천자가 그를 불쌍히 여겨 도독첨사로 삼고 옛 땅으로 돌려보냈다. 윤길아찰이 중국을 덕으로 여겨 홍희 원년 몸소 부락을 이끌고 내조했다. 선덕 원년에도 이와 같이 했다. 천자가 대우함이 매우 후했으나 나라로 돌아가 병으로 죽었다. 3년, 그 아들 만가테무르(滿哥帖木兒)가 내조했다. 얼마 뒤 도독 쇄각(鎖恪)의 동생 맹가테무르(猛哥帖木兒)가 내조하니 지휘첨사로 삼았다. 5년, 도지휘첨사 야선테무르(也先帖木兒)가 내조했다. 정통 6년, 조정 의논이 토로번이 오랫동안 조공을 잃었다 하여 미석아(米昔兒)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영을 내려 지폐와 비단을 가지고 그 추장 파랄마아(巴剌麻兒)에게 하사하게 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해설]
초기에는 투르판도 불교 승려가 조공을 올리는 등 불교적 색채가 있었고 명나라에 우호적이었다. 윤길아찰은 모굴리스탄 칸국(별실팔리)의 내분 과정에서 명나라의 지원을 받았다.

당초 그 땅은 우전(호탄), 별실팔리 여러 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 형세가 심히 미약했다. 훗날 화주, 류성을 침략하여 모두 병합하니 나라가 날로 강해졌고 그 추장 야밀력화자(也密力火者)가 드디어 참람되게 왕을 칭했다. 경태 3년에 그 처 및 부하 우두머리와 함께 각기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천순 3년 다시 조공했는데 그 사신 중에 품계가 오른 자가 24명이었다. 선후로 지휘 백전(白全), 도지휘 상빈(桑斌) 등에게 명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성화 원년(1465년), 예관 요기 등이 의논을 정하여 토로번은 3년 혹은 5년에 한 번 조공하되 조공 인원은 10명을 넘지 못하게 했다. 5년 사신을 보내 조공했는데 그 추장 알리가 스스로 술탄이라 칭하고 해청, 안마(안장 얹은 말), 망복(용 무늬 옷), 채색 비단, 기용(그릇)을 주상하여 구했다. 예관이 말하기를 물건이 금지된 것이 많아 다 따를 수 없다고 하여 명하여 채색 비단과 포백을 하사했다. 이듬해 다시 조공하여 호발사(비파의 일종), 쟁, 고라(북과 징), 혁등(가죽 등자), 고려포 여러 물건을 주상하여 구했다. 조정의 논의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토로번은 더욱 강해졌고 하밀은 주인이 없어 삭약해지니 알리가 이를 병탄하고자 했다. 9년 봄, 그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왕의 어머니를 잡고 금인을 빼앗았으며 병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떠났다. 조정이 이문 등에게 명하여 경략하게 했으나 공 없이 돌아왔다. 알리는 예전처럼 조공을 닦아 1년 중에 사신이 오는 자가 세 번이었으나 조정은 여전히 선대하고 일찍이 한마디 말로도 엄히 힐문하지 않았다. 조공 사신이 더욱 오만하여 순상(길들인 코끼리)을 구했다. 병부에서 말하기를 코끼리는 의전을 갖추는 데 쓰는 것으로 예법상 바치는 것은 있어도 요구하는 것은 없다고 하여 이에 그 청을 물리쳤다. 사신이 다시 말하기를 이미 하밀 성지와 오이라트 엄단왕(奄檀王)의 인마 1만을 얻었고 또 곡선 및 역사갈(亦思渴)의 우두머리 도랄화자(倒剌火只)를 수포(체포하여 거둠)했으니, 조정이 사신을 보내 길을 터서 왕래하며 화호하기를 빈다고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이서(서쪽)의 길이 막힘이 없으니 관리를 보낼 필요가 없다. 알리가 과연 진심으로 조공을 닦는다면 조정은 전의 허물을 계상하지 않고 그대로 예로써 대우하겠다."라고 했다. 사신이 다시 말하기를 적근 여러 위가 평소 원수가 있으니 장수와 병사를 보내 호행해주기를 빌고, 또 말하기를 알리가 비록 하밀을 얻었으나 단지 물산으로 조공을 채울 뿐이니 원컨대 사신의 가속을 변방에 인질로 잡히고 칙서를 내려 그 왕을 타일러 성과 인신을 헌납하게 해달라고 했다. 황제가 그 호행의 청을 따르고 칙서를 내려 알리를 타일러 왕의 어머니와 성, 인신을 바치면 곧 예전처럼 화호하겠다고 했다. 사신이 돌아가서 다시 다른 사신을 보내 재차 입공했으나 하밀을 돌려주지 않았다.

[해설]
알리 술탄 시기에 투르판은 급격히 팽창하여 하밀을 점령하고 명나라에 대등한 대우를 요구했다. 코끼리 같은 사치품을 요구하고 명나라의 군사 호위를 요청하는 등 외교적으로 명나라를 압박하고 조롱했다.

12년 8월, 감주 수신이 말하기를 번의 사신이 왕의 어머니는 이미 죽었고 성과 인신은 모두 보존되어 있으니 조정이 가서 타일러주기를 기다려 곧 바치겠다고 한다고 했다. 황제는 이미 그 조공 사신을 물리쳤다가 다시 북경에 들어오게 했다. 당시 대신들이 오로지 고식책(임시변통)에 힘써 먼 지방의 하찮은 오랑캐들이 거리낌이 없게 만들었다.

14년, 알리가 죽고 그 아들 아흑마가 뒤를 이어 술탄이 되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18년, 하밀 도독 한신이 몰래 군사를 내어 하밀을 쳐서 이겼다. 적장 아란은 달아났다. 아흑마가 자못 두려워했다. 조정의 논의가 한신이 공이 있다 하여 장차 세워 왕으로 삼으려 했다. 아흑마가 이를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한신은 충순왕의 족속이 아닌데 어찌 세울 수 있는가!"라고 했다. 이에 거짓으로 결혼을 맺자고 했다.

홍치 원년 몸소 하밀 성 아래에 이르러 한신을 꾀어 맹세하고는 그를 잡아 죽이고 다시 그 성을 점거했으며, 사신을 보내 입공하여 칭하기를 한신과 혼인을 맺었다고 하고 망복 및 구룡혼금슬란(용 무늬 금실 장식 옷) 등 여러 물건을 하사해달라고 빌었다. 사신이 감주에 이르렀는데 한신의 변고가 이미 들렸으나 조정은 또한 죄주지 않고 다만 돌려보내 그 주인을 타일러 침범한 우리 땅을 돌려주게 했다. 번의 도적이 중국이 상대하기 쉬움을 알고 명을 받들지 않고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예관이 의논하여 그 상을 박하게 하고 사신을 구류하니 번의 도적이 조금 두려워했다.

3년 봄, 사마르칸트와 함께 사자를 조공하며 성과 인신을 헌납하여 돌려주기를 원하니 조정 또한 그 사신을 돌려주었다. 예관이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말 것을 청했으나 황제는 따르지 않았다. 사신이 돌아감에 미쳐 내관 장불(張芾)에게 명하여 호행하게 하고 내각에 타일러 칙서를 기초하게 했다. 각신(내각 대학사) 유길(劉吉) 등이 말하기를 "아흑마는 천은을 배반하고 우리가 세운 한신을 죽였으니 마땅히 대장을 보내 곧바로 소굴을 쳐서 그 종족을 멸해야 비로소 중국의 분을 씻기에 족합니다. 혹 즉시 토벌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옛 제왕들처럼 옥문관을 봉쇄하고 그 조공 사신을 끊어야 대체를 잃지 않습니다. 지금 그 사신을 총애하여 후하게 우대하고 또 중사(환관)를 보내 반송하니 이것이 무슨 이치입니까! 폐하께서는 일을 하심에 성헌(조종의 법)을 준수하셔야 하는데, 아무 까닭 없이 번인을 대내(궁궐)로 불러 사자놀이를 보게 하고 어품(임금의 물건)을 크게 하사하여 자랑하고 나가게 하셨습니다. 도성 사람들이 이를 듣고 모두 놀라고 탄식하며 조종 이래로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어찌 만승의 존엄을 굽혀 기이한 짐승의 구경거리가 되시고 다른 언어와 다른 복색의 사람으로 하여금 맑고 엄한 땅에 섞이게 하십니까. 하물며 사신 만라토아(滿剌土兒)는 곧 한신의 장인인데 주인을 잊고 원수를 섬기며 하늘을 거스르고 무도합니다. 그런데 아흑마는 인마를 모아 숙주를 침범하려 꾀하며 이름은 비록 조공을 받든다고 하나 뜻은 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병부가 사신을 구류하자고 의논한 것이 정히 사의에 합당합니다. 만약 장불의 행차를 멈추지 않으면 저 사신이 본국에 돌아가 아흑마에게 반드시 중국 제왕은 정을 통하여 총애를 바랄 수 있고 대신들이 나라를 위해 도모해도 천자가 듣지 않으니 그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번적의 뜻을 자라게 하고 천조의 위엄을 덜어냄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상소가 들어가자 황제가 장불의 행차를 멈추고 각신들에게 군사를 일으키는 것과 조공을 끊는 것 두 가지 일을 물었다. 유길 등은 시세가 능하지 못하다고 하여 단지 그 하사품을 박하게 하기를 청했다. 인하여 말하기를 사자를 먹이는 데 날마다 양 2마리를 쓰니 10년이면 7,200마리요, 사자를 지키는데 날마다 교위 50명을 부리니 1년이면 1만 8천 명(공수)입니다. 만약 그 먹이를 끊어 스스로 죽게 내버려 둔다면 천 년 뒤에 전해져도 실로 미담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능히 쓰지 못했다.

[해설]
'사자 공헌' 사건이다. 아흑마는 사자를 바쳐 황제의 환심을 샀고, 홍치제(효종)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즐거워했다. 신하들은 투르판의 위협과 비용 문제를 들어 강력히 반대했다. 명나라 조정의 안일함과 황제의 호기심, 그리고 신권의 견제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가을, 또 사신을 보내 바닷길을 따라 사자를 조공하니 조정이 명하여 물리치게 했고 그 사신은 이에 몰래 서울에 이르렀다. 예관이 연도의 관리들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고 그대로 그 사신을 물리치니 이를 따랐다. 이때를 당하여 안팎이 다스려져 편안했고 대신 마문승, 경유(耿裕)의 무리가 모두 국체를 알아 조공 사신에 대해 삭감하는 바가 많으니 아흑마가 중국에 사람이 있음을 조금 알게 되었다. 4년 가을, 사신을 보내 재차 사자를 조공하며 금인 및 점거했던 11개 성을 돌려주기를 원했다. 변방 신하가 이를 보고하니 허락했고, 과연 성과 인신을 가지고 귀순했다. 이듬해 섬파를 봉하여 충순왕으로 삼고 하밀에 들였으며 아흑마의 사신에게 후하게 하사하고 먼저 구류했던 자들을 모두 석방하여 보냈다.

6년 봄, 그 앞선 사신 27명이 돌아가는데 아직 국경을 나서지 않았고 뒤의 사신 39명은 여전히 서울에 있었는데, 아흑마가 다시 하밀을 습격하여 함락하고 섬파를 잡아 갔다. 황제가 시랑 장해 등에게 명하여 경략하게 하고, 그 사신을 우대하여 나아가 알현할 수 있게 했다. 예관 경유 등이 간하여 말하기를 "조정이 외번을 제어함에는 마땅히 대체를 아껴야 합니다. 번의 사신이 작년에 도성에 들어온 뒤 오랫동안 선소(불러들임)하지 않다가 금년 3월 이래로 선소함이 두 번에 이르고 또 폐백과 양, 술을 하사하셨는데, 정히 (적이) 오만한 글을 투입할 때를 당하여 소인배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장차 조정의 은례가 옛날보다 더하다고 여겨 우리를 업신여겨서 그러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일이 국체에 관계되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이 도적은 굴강하고 무례하여 조정에 복종하지 않는 마음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보낸 사신은 반드시 그 친신이고 심복일 터인데 이에 금액(궁궐)에 출입하게 하여 조금도 막거나 한정함이 없습니다. 만일 간사한 도적이 엿보고 몰래 역모를 꾀한다면 비록 후회한들 어찌 미치겠습니까. 지금 그 사신 사역만속아(寫亦滿速兒) 등은 연회와 하사품이 이미 끝났는데도 오히려 가려 하지 않고 조정이 다시 선소할까봐 그렇다고 말합니다. 대저 먼 곳의 물건을 보배로 여기지 않으면 먼 곳의 사람이 이릅니다. 사자는 본래 들짐승으로 기이할 것이 없는데 어찌 위로 난여(임금의 수레)를 번거롭게 하여 자주 왕림하여 보시게 함으로써 거친 변방의 하찮은 오랑캐로 하여금 성안을 뵙게 하여 구실을 만드십니까."라고 했다. 상소가 들어가니 황제가 즉시 돌려보냈다. 장해 등이 감숙에 도착하여 조정의 의논을 준수하여 그 조공 물품을 물리치고 전후 사신 172명을 변방에 억류하고 가욕관을 닫고 영구히 조공 길을 끊었다. 그리고 순무 허진 등이 또 몰래 군사를 내어 바로 하밀을 치니 아란이 달아났고 아흑마가 점차 두려워했다. 그 이웃 나라들이 조공할 수 없게 되자 서로 아흑마를 원망했다. 10년 겨울, 섬파를 송환하고 관문을 두드려 조공을 구하니 조정의 논의가 허락했다. 12년, 그 사신이 재차 구하니 명하여 앞선 사신으로 광동에 안치된 자들을 모두 석방하여 보냈다.

[해설]
아흑마가 약속을 어기고 다시 하밀을 침공하자, 명나라는 강경책(사신 억류, 무역 중단, 군사 공격)으로 선회했다. 특히 이웃 부족들이 무역 중단으로 고통받자 투르판을 압박하게 된 것이 효과를 보았다.

17년, 아흑마가 죽고 여러 아들이 서려고 다투며 서로 원수처럼 죽였다. 얼마 뒤 장자 만수르가 뒤를 이어 술탄이 되어 예전처럼 조공을 닦았다. 이듬해 충순왕 섬파가 죽고 아들 배아즉이 습직했는데 어리석고 멍청하여 도리를 잃어 국내가 더욱 어지러웠다. 만수르는 흉포하고 교활하며 변하고 속임이 아버지보다 더하여 다시 하밀을 삼킬 뜻을 두었다.

정덕 4년, 그 동생 진테무르가 감주에 있었는데 조공 사신이 놓아 보내주기를 빌었다. 조정의 논의가 불허하여 이에 감주 수신으로 하여금 주상하여 보내게 했다. 돌아가자마자 변방의 정세를 그 형에게 알리고 함께 역모를 꾀했다. 9년 배아즉을 꾀어 배반하게 하고 다시 하밀을 점거했다. 조정이 팽택을 보내 경략하게 하여 성과 인신을 속환(값을 치르고 돌려받음)했다. 그 부하 타지딩이 다시 그곳을 점거하고 또 만수르를 인도하여 숙주를 침범했다. 이로부터 하밀은 다시 얻을 수 없었고 환란이 장차 감숙에 적중했다. 마침 조정의 대신들이 서로 경함(모함하여 해침)하니 번의 추장이 이를 엿보고 알고서 더욱 방자하게 참소하고 얽어맸으며, 적의 심복이 천자를 모시게 되어 중국의 국체가 크게 이지러졌고 적의 기염은 더욱 성해졌다.

[해설]
만수르 시대의 재침공과 명나라의 대응 실패를 요약한다. 정덕제의 실정과 조정 내분(간신 돈녕 등)이 외환을 키웠음을 비판한다.

15년 다시 조공 통교를 허락했다. 감숙 순안 반방이 말하기를 "번의 도적이 순리를 범하여 살육하고 약탈함이 참혹하여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비록 죄를 뉘우친다 하나 과연 전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속죄하기에 족합니까? 수년 이래로 비록 일찍이 관문을 닫았으나 능히 죄를 묻지 못했습니다. 지금 저들이 곤비함으로써 통교를 구하나 또한 장차 우리의 의향을 엿보고 우리의 허실을 탐지하여 우리의 훗날 도모를 늦추고 우리를 중리로 유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때에 조금 그 죄를 바로잡지 않으면 장차 더욱 경만하는 마음을 열어주고 반복하는 틈을 부를 것이니, 중국을 높이고 외번을 제어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물며 저 번문이 따르기 어려운 말을 고집하여 감히 거절하는 형상을 보이고, 죄를 뉘우쳐 통교를 구하는 날에 모만하고 불손한 말을 하니 그 변하고 속임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만약 오는 자를 막지 않는 것이 오랑캐를 제어하는 통상적인 법이라 하여 저 일의 그름을 다 생략하고 화친을 구하는 사신을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장차 은례를 탐하고 상으로 주는 식량을 배불리 먹으며 화시(무역)로 사적으로 판 것을 가득 싣고 돌아갈 것입니다. 바라는 바가 이미 족하면 교만한 뜻이 다시 싹터 조금만 마음에 차지 않으면 움직이면 핑계를 대니 반복하는 틈이 장차 눈앞에 있을 것입니다. 배반하면 일찍이 죄를 가하지 않고 도리어 약탈하는 이익을 얻으며, 오면 반드시 거절당하지 않고 도리어 하사하는 영광이 있으니 무엇을 꺼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르건대 마땅히 군색하고 절박한 때를 타서 애오라지 섭복(두려워 복종함)시킬 계책을 하여, 비록 그 회과하는 말을 받아들이더라도 잠시 그 내공하는 사신을 막고 칙서를 내려 그 순리를 범한 것을 꾸짖고 그대로 아직 다 돌려보내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보내게 해야 합니다. 그 번문에 의심스러운 것은 상세히 힐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존엄함과 천위는 범하기 어려움을 알게 해야 거의 배반이 싹트지 않고 귀복함이 오래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당시 왕경이 힘써 화의를 주장하여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여 적의 심복 사역호선이 주살되어 믿는 바를 잃자 다시 변방을 침범하려 꾀했다. 가정 3년 숙주를 도적질하고 감주를 약탈했으며 4년 다시 숙주를 도적질했으나 모두 실리(승리를 잃음)하고 떠났고, 이에 말을 낮추어 조공을 구했다. 마침 장총, 계악 등이 봉강의 옥사를 일으키고 드디어 몰래 만수르를 비호하여 다시 조공을 허락하니 의논이 이미 정해졌다. 적의 무리 아란은 본래 곡선 사람으로 어려서 번에게 약탈당했다가 자라서 교활하고 건장하여 알리가 누이를 시집보내 병사를 쥐고 등용했는데 오랫동안 서쪽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더니, 이때에 이르러 그 주인에게 죄를 얻어 7년 여름, 그 부하 2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테무르가(帖木兒哥), 토파(土巴)란 자가 있었는데 모두 사주의 번족으로 토로번이 부려 속하게 하여 해마다 부녀자와 우마를 징수하고 침략과 포학을 이기지 못하여 또한 그 족속 수천 장(천막)을 거느리고 와서 귀순했다. 변방 신하가 모두 내지에 처소하게 했다.

[해설]
가정제 초기의 '봉강의 옥' 사건을 다시 언급한다. 정치적 목적으로 만수르의 조공을 허락하고, 귀순해 온 아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혼란을 서술한다. 아란은 본래 명나라를 괴롭히던 적장이었으나 내분으로 귀순했다.

만수르가 노하여 그 부하 호력납찰아로 하여금 오이라트를 이끌고 숙주를 도적질하게 했다가 이기지 못하자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을 구했다. 총독 왕경이 허락하기를 청하자 잼사 곽도가 말하기를 "번인이 하밀을 공함한 이래로 의논하는 자들이 혹은 조공 통교를 청하고 혹은 조공을 끊을 것을 청했으나 성유(황제의 명령)에 반드시 회과하는 번문이 있은 연후에 허락하라 하셨습니다. 지금 왕경이 번역하여 올린 글은 모두 그 부하의 하찮은 오랑캐의 말이고 인신으로 증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허락하면 아마도 오랑캐의 마음이 더욱 교만해져 훗날 제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려되는 것 하나입니다. 하밀 성지는 비록 헌납하여 돌려준다고 칭하나 실제 증거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흥복하겠습니까. 혹자가 드디어 내버려 두고 묻지 말자고 의논하면 저들은 더욱 뜻을 얻어 반드시 또한 우리 한동을 겁주어 쫓고 우리 적근을 꾀어내며 우리 과주, 사주를 약탈하고 밖으로 오이라트와 연결하고 안으로 하서를 어지럽힐 것이니 변방의 경보가 쉴 때가 없을 것입니다. 우려되는 것 둘입니다. 아란은 번 추장의 심복으로 무리를 옹위하여 달려왔는데 저들이 간 곳을 모른다고 이르니, 거짓 항복하여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훗날 변방을 범하고 말하기를 내 반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저들의 반신을 돌려주지 않으면 저들도 우리 하밀을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서쪽 변경은 더욱 일이 많아지고 하밀은 끝내 흥복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우려되는 것 셋입니다. 아란이 옴에 날마다 식량을 주어 소비하는 것이 실로 많으나 오히려 기미책(고삐를 잡아 맴)이라 하여 부득이하다 합니다. 혹 번의 추장이 무리를 옹위하고 관문을 두드려 저 반역한 사람을 찾으면 장차 주겠습니까, 아니면 거절하겠습니까? 또한 혹 아란이 화심을 품고 안에서 변란을 얽어 안팎이 협응하면 무엇으로 막겠습니까? 우려되는 것 넷입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지금 섬서가 굶주리고 곤피하며 감숙이 고립되고 위태로우니 하밀은 버릴 만하다고 합니다. 신은 즉 말하기를, 하밀을 보전하는 것이 감숙, 섬서를 보전하는 것이며 감숙을 보전하는 것이 섬서를 보전하는 것이라 합니다. 만약 하밀이 지키기 어렵다 하여 하밀을 버린다면, 그런즉 감숙이 지키기 어려우면 또한 감숙을 버릴 것입니까? 옛날 문황(영락제)이 하밀을 세운 것은 원나라의 유얼(남은 자손)이 힘이 있어 능히 자립할 수 있었기에 인하여 세운 것입니다. 그들이 그 이름을 빌리고 우리가 그 이익을 누렸습니다. 지금 충순왕의 후사가 세 번 끊어졌으니 하늘이 폐한 바를 누가 능히 일으키겠습니까? 지금 여러 오랑캐 중에서 그 영웅호걸로서 능히 하밀을 지킬 자를 구하여 곧 금인을 주고 여러 번을 화합하여 모으게 하여 우리의 울타리가 되게 하면 족할 것인데, 반드시 충순왕의 후예를 구하여 세우려 하니 그 고루함을 많이 보게 됩니다."라고 했다. 상소가 들어가니 황제가 그 변방 계책에 마음 쓴 것을 가상히 여겨 병부에 내려 확실히 의논하게 했다. 상서 호세녕 등이 힘써 말하기를 아란은 버릴 수 없고 하밀은 굳이 흥복할 필요가 없으니 오로지 자치할 계책을 도모하기를 청한다고 하여 황제가 깊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번의 추장에게 조공 통교를 허락하고 하밀의 성과 인신 및 충순왕의 존망은 내버려 두고 다시 묻지 않으니, 하서가 조금 휴식을 얻었으나 만수르는 흉포하고 오만함이 더욱 심해졌다.

[해설]
곽도의 상소는 하밀 재건에 집착하지 말고 실리를 챙기자는 주장이었다. 결국 명나라는 하밀 왕가 복위를 포기하고 투르판의 실효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아란 등 귀순자를 받아들여 방어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12년 신하를 보내 세 가지 일을 주상했다. 하나는 순무 진구주의 죄를 추국하여 다스리기를 청함이요, 하나는 관리를 보내 화의를 의논하기를 청함이요, 하나는 반역한 사람 아란을 돌려주기를 청함이었다. 말이 많이 패악하고 오만했으나 조정은 능히 죄주지 못하고 단지 직공(조공의 직분)을 닦고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계할 뿐이었다. 그러나 사역호선이 주살되고 타지딩이 진중에서 죽고 아란이 또 항복하여 의뢰하던 바를 잃으니 형세가 또한 점차 고립되었고, 부하들이 각자 영웅이라 칭하며 왕을 칭하고 입공하는 자가 많게는 15명에 이르러 정권 또한 통일되지 않았다.

15년, 감숙 순무 조재가 변방의 일을 진술하여 말하기를 "번의 추장이 자주 복종하고 자주 배반하니 우리가 너무 후하게 어루만지고 너무 깊이 믿어 그 간교함을 더욱 자라게 했습니다. 금후 침범해 들어오면 마땅히 그 사신을 죽이고 그 종인(따라온 사람)을 양광(광동, 광서)으로 옮기고 관문을 닫고 거절해야 합니다. 설령 그들이 죄를 뉘우치더라도 다만 조공을 받드는 것만 허락하고 함부로 종인들을 돌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안으로 거리끼는 바가 있고 밖으로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저절로 감히 가볍게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자못 그 말을 채택했다.

24년(1545년), 만수르가 죽고 장자 사(沙, 샤)가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으며 그 동생 마흑목(馬黑木) 또한 술탄을 칭하고 하밀을 나누어 점거했다. 얼마 뒤 형제가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니 마흑목이 이에 오이라트와 결혼하여 형에게 대항하고 또한 사주를 개간하며 침범해 들어올 것을 꾀했다. 그 부하가 와서 고하니 마흑목이 이에 관문을 두드려 조공을 구하고 다시 내지에 안치해 주기를 구했다. 변방 신하가 타일러 그치게 하니 이에 옛 땅으로 돌아가 형과 함께 거처했다. 총독 장형(張珩)이 이를 보고하니 조를 내려 그 입공을 허락했다. 26년, 5년에 한 번 조공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 뒤 조공 기한은 법령과 같았으나 오는 사신이 더욱 많아졌다. 세종 말년에 이르러 번문이 248통에 이르렀다. 조정은 그 정을 어기기 어려워 모두 급여하고 하사했다.

[해설]
만수르 사후 투르판은 분열되었다. 명나라는 이 분열을 이용하여 형제간의 갈등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조공 무역을 관리했다.

융경 4년(1570년), 마흑목이 형의 직위를 잇고 사신을 보내 사은했다. 그 동생 쇄비(瑣非, 수피) 등 3명도 또한 각기 술탄을 칭하고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예관이 그 호궤와 하사품을 제재하고 마흑목을 수행하는 인원수에 붙이는 것을 허락하기를 청하여 재가했다. 만력 조정에 이르기까지 조공을 받드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명사(明史) 권330 열전 제218 서역2


서번(西番)은 즉 서강(西羌)인데 종족이 가장 많아 섬서로부터 사천, 운남의 서쪽 경계 밖까지 곳곳에 있다. 그중에서 하(河), 황(湟), 조(洮), 민(岷) 지역 사이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중국에 끼치는 근심이 더욱 심했다. 한나라의 조충국, 장환, 단경과 당나라의 가서한, 송나라의 왕소가 경영했던 곳이 모두 이 땅이다. 원나라는 부마 장고를 영복군왕으로 봉하여 서녕을 지키게 했고, 하주에 토번선위사를 설치하여 조주, 민주, 여주, 아주 등 여러 주를 예속시켜 번(番)의 무리를 통치하게 했다.

[해설]
이 문단은 명나라 서쪽 변경, 즉 현재의 감숙성, 청해성, 사천성 접경 지대에 거주하던 티베트계 및 강족 부족들인 서번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를 개괄하는 부분이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때부터 중국 왕조가 서쪽 오랑캐를 막기 위해 중요하게 관리했던 군사 요충지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홍무 2년, 태조가 섬서를 평정하고 즉시 관리를 파견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부르며 타일렀으나, 그 추장들은 모두 관망만 하였다. 다시 원외랑 허윤덕을 보내 부르니 그제야 많이 명을 따랐다. 이듬해 5월, 토번선위사 하쇄남보 등이 원나라에서 받은 금은패와 인장, 칙서를 가지고 와서 바쳤고, 마침 등유가 하주를 함락시키자 마침내 군영 앞으로 나아가 항복했다. 그 진서무정왕 복납랄 또한 토번의 여러 부족을 이끌고 와서 정성을 바쳤다. 겨울에 하쇄남보 등이 조정에 들어와 말과 토산물을 바쳤다. 황제가 기뻐하며 습의(옷)를 하사했다. 4년 정월 하주위(河州衛)를 설치하고 지휘동지 제수를 명하여 세습하게 했으며, 지원 타아지, 왕가노를 아울러 지휘첨사로 삼았다. 천호소 8개, 백호소 7개를 설치하고 모두 그 추장들에게 맡겼다. 복납랄 등도 경사(수도)에 이르러 정남위 지휘동지가 되었고, 그 무리인 상가타아지는 고창위 지휘동지가 되었는데 모두 대도시위(칼을 차고 황제를 모시는 직책)를 겸했다. 이로부터 번의 추장들이 날마다 이르렀다. 얼마 뒤 항복한 사람 마매, 왕와아를 아울러 하주위 지휘첨사로 삼았다. 또 서녕주 동지 이남가 등을 보내 그 추장들을 초무하니, 이르는 자들에게 모두 관직을 제수했다. 이에 서녕주를 고쳐 위(衛)로 삼고 남가를 지휘로 삼았다.

[해설]
명나라 건국 초기(홍무 연간), 주원장이 서북부 지역을 평정하면서 무력 토벌과 회유책을 병행하여 토착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과정을 묘사한다. 명나라는 이 지역에 직접 관리를 파견하기보다 기존 추장들에게 명나라의 관직(지휘동지, 천호 등)을 주고 그 지위를 세습하게 하는 기미정책(토착 세력을 이용해 제어함)을 썼음을 알 수 있다.

황제는 서번에서 말이 생산되므로 그들과 호시(무역)를 하였는데, 말이 점차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화폐가 중국과 달랐고, 초법(지폐 제도)을 고친 뒤로는 말이 들어오는 것이 적어지자 이를 근심했다. 8년 5월 중관(환관) 조성에게 명하여 나기, 능견(비단) 및 파차(차)를 가지고 가서 하주에서 무역하게 하니, 말이 조금 모였고 대개 그 값을 후하게 쳐서 갚아주었다. 조성이 또 황제의 덕과 뜻을 널리 알리니, 번인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여 서로 이끌고 궁궐에 나아가 은혜에 감사했다. 산후 귀덕 등 여러 주와 서번의 여러 부락이 모두 말을 가지고 와서 무역했다.

[해설]
명나라와 서번 사이의 중요한 경제적 관계인 '차마무역(Tea-Horse Trade)'의 시작을 보여준다. 중국은 전쟁에 필요한 말이 부족했고, 유목민인 서번은 비타민 공급원인 차가 필요했기에 국가 주도로 교역이 이루어졌다. 명나라는 이를 통해 부족들을 경제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12년, 조주 18족 번추 삼부사 등이 반란을 일으켜 납린의 7개 역참 땅을 점거했다. 정서장군 목영 등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고, 또 이문충에게 명하여 가서 군사 일을 계획하게 했다. 목영 등이 조주 옛 성에 이르니 도적들이 도망쳐 숨었는데, 추격하여 그 우두머리 몇 사람을 베고 가축을 모두 노획했다. 드디어 동롱산 남쪽 내(川)에서 땅을 측량하여 성을 쌓고 수자리(국경 수비)를 두었으며, 사신을 보내 주상했다. 황제가 답하기를 "조주는 서번의 문호이니 성을 쌓고 지켜 그 목구멍을 틀어쥐어라."라고 했다. 드디어 조주위(洮州衛)를 설치하고 지휘 섭위, 진휘 등 6명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얼마 뒤 이문충 등이 관군이 조주를 지키는데 식량 보급이 어렵고 백성이 고달프다고 말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조주는 서쪽으로 번융을 제어하고 동쪽으로 황주, 농주를 가려주니 한나라, 당나라 이래로 변방을 방비하는 요충지이다. 지금 번의 도적을 이미 물리쳤는데 버리고 지키지 않는다면 몇 년 뒤 번인들이 다시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작은 비용을 걱정하다가 큰 근심을 잊는 것이 어찌 좋은 계책이겠느냐. 노획한 소와 양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면 족히 2년의 군량은 될 것이다. 칙서대로 행하라."라고 했다. 이문충 등이 이에 감히 어기지 못했다.

[해설]
조주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과 이를 진압한 후 '조주위'라는 군사 기지를 설치하는 과정이다. 식량 조달의 어려움으로 철수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홍무제는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주둔을 강행시켰다. 이는 명나라가 서북방 방어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준다.

가을, 하쇄남보 및 진무 유온이 각기 가족을 데리고 내조했다. 중서성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하쇄남보는 귀부한 이래 신의가 매우 굳건하다. 예전에 사신으로 오사장(티베트)에 보냈는데 만 리 먼 길을 갔다가 돌아와서 말한 것이 모두 내 뜻에 부합했다. 지금 가족을 데리고 내조했으니 마땅히 예를 더하여 대우하라."라고 했다. 이에 쌀과 밀 각 30석을 하사하고 유온에게는 그 3분의 1을 주었다. 목영 등이 나아가 번의 도적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우두머리를 모두 사로잡았으며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자가 수만 명이었고 말, 소, 양 수십만 마리를 얻었다. 이로부터 여러 번족이 두려워하여 감히 도적질하지 못했다.

[해설]
협조적인 부족장에게는 후한 상을 내려 우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부족은 철저히 무력으로 진압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16년, 청해 추장 사랄파 등 7명이 귀순하니 문양이 있는 비단과 보초(지폐)를 하사했다. 이때 민주에도 위(衛)를 설치했는데, 번인들이 해마다 말로써 차와 바꾸니 말이 날로 번식했다. 25년에 또 중관 이섭을 하주에 보내 필리 등 여러 번족을 불러 칙서로 타일렀다. 다투어 말을 내어 바치니 1만 300여 필을 얻었고 차 30여만 근을 지급했다. 명을 내려 말을 하남, 산동, 섬서의 기병들에게 주게 했다. 황제는 여러 위(衛)의 장수와 병사들이 번인들에게 함부로 말을 요구하는 일이 있자, 관리를 보내 금패와 동패 신부(믿음을 증명하는 부절) 및 칙유를 가지고 가서 양주, 감주, 숙주, 영창, 산단, 임조, 공창, 서녕, 조주, 하주, 민주의 여러 번족에게 하사하게 했다. 유시하여 말하기를 "지난날 조정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차와 물건으로 갚아주었고 사사로이 징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근래 들으니 변방 장수들이 형편없어서 조정의 명을 핑계로 많이 괴롭히고 해를 끼쳐 너희들로 하여금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지금 특별히 금, 동 신부를 만들어 나누어 주니, 징발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조하여 서로 들어맞아야 시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위조이니 잡아 경사로 보내라. 죄를 주겠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요구하는 일이 마침내 끊어졌다.

[해설]
군인들이 원주민들을 수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장면이다. '신부(信符)'라는 인증 시스템을 도입하여 정당한 거래와 부당한 수탈을 구분하게 함으로써, 변경 지역의 안정을 꾀하고 차마무역을 체계화했다.

초기에 서녕의 번승(티베트 승려) 삼랄이 글을 보내 한동의 여러 부족을 불러 항복하게 했고, 또 연백 남천에 불찰(절)을 세워 그 무리를 거주하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조하여 말을 바치고 칙서를 내려 보호하고 지켜주기를 청하니 사액(절의 현판을 내림)을 하사했다. 황제가 청한 바를 따르고 액호를 내려 '구담사'라 했다. 서녕승강사를 세워 삼랄을 도강사로 삼았다. 또 하주에 번(티베트), 한(중국) 두 승강사를 세우고 아울러 번승을 임명했으며 부계(부절과 계약)로써 기록하게 했다. 이로부터 그 무리가 다투어 절을 세우면 황제가 그때마다 아름다운 이름을 내리고 칙서를 내려 보호하게 했다. 번승으로 오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해설]
명나라가 티베트 불교(라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서번 부족들을 통제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승려들에게 관직을 주고 절을 국가가 공인해 줌으로써 종교적 권위를 정치적 안정에 이용했다.

영락 연간에 여러 위(衛)의 승려 중 계율과 수행이 정밀하고 부지런한 자에게는 많이 라마, 선사, 관정국사의 호를 주었고, 더하여 대국사, 서천불자에 이르는 자도 있었는데, 모두 인장과 고명(임명장)을 주어 세습을 허락했고 또한 해마다 한 번씩 조공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여러 승려와 여러 위(衛)의 토관들이 경사(북경)로 모여들었다. 그 밖의 다른 종족들, 예를 들어 서녕 13족, 민주 18족, 조주 18족의 무리는 큰 것은 수천 명, 적은 것은 수백 명인데 또한 해마다 한 번씩 조공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고 연회와 하사품으로 우대했다. 서번의 세력이 더욱 나뉘고 그 힘이 더욱 약해지니 서쪽 변경의 근심 또한 더욱 적어졌다.

[해설]
영락제 시기(제3대 황제)에 이르러 종교 지도자들에게 '대국사', '서천불자' 등의 높은 칭호를 내리고 조공 무역을 허락하여 그들을 포섭했다. 이는 부족들을 잘게 쪼개어 단결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변경의 안보 위협을 줄이는 '이이제이' 및 분할 통치 전략의 일환이었다.

선덕 원년, 안정, 곡선 위를 토벌하는 것을 도운 공으로 국사 타사파영점 등 5인에게 대국사를 더하고 고명과 은인을 주어 품계를 정4품으로 했으며, 라마 착성 등 6인에게 선사를 더하고 칙명과 은인을 주어 품계를 정6품으로 했다.

[해설]
군사 작전에 협조한 승려들에게 벼슬을 높여주어 보상하는 내용이다.

정통 5년 섬서 진수 도독 정명, 도어사 진일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상소를 보니, 하주의 번민 영점 등이 앞서 죄를 피하여 결하리로 도망가 숨어 살면서 무리를 불러 모으고 밭을 점거하여 경작하면서 장부에 올려 세금을 내지 않고, 또 도망자를 숨겨주고 여행객을 약탈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자 한다고 했다. 짐은 생각건대 번인들의 성질이 완고하고 또한 저지른 죄가 사면령 이전의 일이니, 만약 급하게 군사를 가하면 아마도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두렵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타일러서 무리를 흩어 보내고 약탈한 소와 양을 돌려주게 하라. 군사는 즉시 진격하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말을 듣지 않으면) 군사를 가해도 늦지 않다. 너희들은 그것을 잘 살피라."라고 했다. 번인들이 과연 복종하였다. 7년에 다시 정명 및 도어사 왕상 등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진수하주 도지휘 유영이 주상한 것을 보니 '지난해 알이관 등 6족 3천여 명이 귀덕성 아래에 진을 치고 교역한다고 말하더니 뒤이어 둔전군을 약탈하고 크게 불지르고 살육을 저질렀으며, 착역잡족 번인들이 여러 차례 난천정 여러 곳에서 몰래 도적질을 했습니다. 지휘 장우가 2명을 사로잡았으나 훔친 말을 변상하게 하고는 책임을 그만 묻고 놓아주었습니다.'라고 했다. 법으로 논하자면 장우와 유영은 모두 마땅히 처벌해야 하나 지금은 우선 대죄(죄를 지은 채 직무를 수행함)하게 하라. 너희들은 즉시 관리를 보내 3사(도지휘사사, 포정사, 안찰사)의 당상관과 함께 친히 그 촌채에 이르러 이해관계를 깨우쳐주고 약탈한 것을 돌려주게 하며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라. 고치지 않으면 토벌하라. 대개 오랑캐를 부리는 도리는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고, 어루만져도 따르지 않으면 그런 연후에 병력을 쓰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 뜻을 체득하라."라고 했다. 번인들이 또한 복종하였다.

[해설]
정통제 시기, 번인들의 범죄와 반란에 대해 즉각적인 무력 토벌보다는 회유와 설득을 우선시하는 명나라 조정의 신중한 태도를 보여준다. '무고한 희생을 막고', '교화를 우선한다'는 유교적 통치 이념이 반영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군사 비용 절감과 변경 안정을 위한 실리적 판단이기도 했다.

성화 3년, 섬서 부사 정안이 말하기를 "조공하는 번승이 오사장(티베트 본토)에서 오는 자는 3분의 1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주, 민주의 절 승려들이 이름을 속여 거짓으로 조공하는 것입니다. 비루한 말 한 필을 바치고는 매번 후한 값을 받아 가고, 하사받은 폐백으로 전포(전투복)를 만들어 관군에게 대항합니다. 본래 기미(오랑캐를 묶어둠)하려던 것인데 더욱 도적질을 하게 만드니, 이는 국고를 비워 도적에게 양식을 대주는 꼴입니다."라고 했다. 상소가 예부에 내려지자 조정 신하들과 회의하여, 섬서의 문무 여러 신하에게 공문을 보내 조공 시기, 인원수 및 머물게 하거나 보낼 액수를 계산하여 정해서 보고하게 하기를 청하니, 재가했다. 얼마 뒤 주상이 올라오자, 오사장에서 오는 모든 자들은 사천을 경유하여 들어오게 하고 바로 조주, 민주로 오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법례로 정했다. 이듬해 겨울, 조주 번의 도적들이 무리를 모아 철성, 후천 두 채(진영)를 약탈하자 지휘 장한 등이 군사를 이끌고 막아내어 패주시키고 약탈당한 인구를 되찾아 돌아왔다.

[해설]
조공 무역의 허점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가짜 사절단의 폐단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현지 토착 승려들이 티베트 사절을 사칭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오히려 그 부로 명나라를 공격하자, 조공 루트를 제한하고 인원을 통제하는 등 규제를 강화했다.

5년, 순안 강맹륜이 말하기를 "민주의 번 도적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마을과 보루가 비었습니다. 최근 지휘 후태와 그 동생 통에게 명하여 반복해서 타일러 보이니, 생번(길들지 않은 번인) 인장, 점장 등 30여 족 추장 160여 명과 숙번(귀순한 번인) 율림 등 24족 추장 91명이 서로 말을 전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귀순해 왔으며, 또 약탈했던 사람과 가축을 돌려주고 요역과 세금을 바치기를 원했습니다. 소를 잡아 하늘에 고하고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미 부사 이비에게 명하여 편의에 따라 상을 주어 위로하고 조정의 은혜와 위엄을 선포하게 하니 모두 기뻐하며 뛰면서 돌아갔습니다. 오직 숙번 녹원 일족만이 악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병부에서 말하기를 "번인의 성품은 일정하지 않아 아침에 어루만져 주면 저녁에 배반하니 방비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변방 신하에게 유시하여 교화되는 자는 마음을 다해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고, 순리를 범하는 자는 기한을 정해 섬멸하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

[해설]
'생번(生番)'은 명나라의 통치권 밖에 있는 야생의 부족, '숙번(熟番)'은 명나라에 귀순하여 세금을 내는 부족을 뜻한다. 이들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회유책이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병부는 이들의 변덕스러움을 경계하며 항상 군사적 대비를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8년, 예관이 말하기를 "조주, 민주 여러 위(衛)에서 각 부족 번인을 보내 경사로 오는데 많을 때는 4천2백여 명에 이르니, 마땅히 채색 비단 사람마다 2 표리(옷감 단위), 비단도 그와 같이 주고, 보초는 29만 8천여 관을 주며 말값은 오히려 그 외에 있습니다. 정통, 천순 연간을 상고해 보면 각 번의 조공 사신은 3~5백 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성화 초기에 조주, 민주 여러 곳에서 함부로 숙번을 생번으로 속여 거짓으로 보냈기 때문에, 이미 정례를 두어 생번은 3년에 한 번 조공하되 큰 부족은 4~5명, 작은 부족은 1~2명이 경사로 오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게 했습니다. 성화 6년에 부사 등본서가 망령되이 스스로 불러들여 또다시 거짓으로 보냈기에 신의 부서(예부)에서 이미 거듭 약속을 밝혔습니다. 지금 부사 오비 등은 무비를 엄하게 정비하지 못하고 오로지 번과 내통하는 것만 일삼아 가까운 근심만 늦추려 합니다. 비옵건대 칙서를 내려 절실히 꾸짖으시고 힘써 전의 명령을 따르게 하소서."라고 했다. 황제 또한 그 말을 따랐다.

[해설]
조공 사절단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져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자 이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지방 관리들이 자신의 실적을 위해 또는 번인들과 결탁하여 규정보다 많은 인원을 올려보내는 비리를 저질렀음을 알 수 있다.

서녕은 즉 고대 황중(湟中)으로 그 서쪽 400리에 청해(靑海)가 있는데 또 서해라고도 하며, 물과 풀이 풍부하고 아름답다. 번인들이 고리처럼 둘러 살며 오로지 목축을 힘쓰고 날로 번성하여 평소 낙토(즐거운 땅)라 불렸다. 정덕 4년, 몽골 부족 추장 역부랄(이불라), 알이독시가 그 주인에게 죄를 얻어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청해가 풍요로움을 엿보고 습격하여 그곳을 점거하고 크게 불지르고 약탈했다. 번인들이 그 땅을 잃고 많이 멀리 이주했다. 그 남아 있는 자들은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 도리어 그들에게 부림을 당하고 속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감숙, 서녕에 비로소 '해적(海寇, 청해의 도적)'의 근심이 있게 되었다. 9년, 총제 팽택이 여러 도의 군사를 모아 장차 그 소굴을 부수려 했다. 도적들이 이를 정탐하여 알고 하주를 경유하여 황하를 건너 사천으로 달아나 송반, 무주 경계를 나와 바로 오사장으로 달아났다. 대군이 돌아오자 다시 청해(해상)로 돌아왔고 오직 알이독시만 도망갔다.

[해설]
명나라 중기 이후 서역 정세의 큰 변화를 설명한다. 북쪽의 몽골 세력(역부랄 등)이 내분을 피해 서쪽 청해(코코노르) 지역으로 밀려들어 왔다. 이들은 토착 티베트 부족들을 몰아내거나 복속시키고 명나라 변경을 위협하는 새로운 골칫거리(해적)가 되었다.

가정 2년, 상서 김헌민이 서쪽을 정벌하면서 논의하여 관리를 보내 초무하고 번신(제후의 신하)이 되기를 허락함이 선대 조정에서 안정위, 곡선위 등을 설치한 고사(옛일)와 같게 하자고 했다. 병부에서 총제 양일청에게 문서로 보내 헤아리게 했는데, 양일청의 뜻은 정벌에 있어서 말하기를 "도적의 정예 기병은 2~3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협박에 따르는 번인들인데 뼈에 사무치게 원망하여 늘 원수를 갚으려 하니 간첩으로 이용하여 대거 토벌하여 끊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논의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왕헌, 왕경이 잇따라 와서 대신했는데, 모두 병사가 적고 식량이 부족하다 하여 논의가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해설]
청해를 점거한 몽골 세력을 두고 '회유하여 위소로 만들 것인가(화친)' 아니면 '토벌하여 없앨 것인가(전쟁)'를 두고 명나라 조정 내에서 격론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결국 군수 물자 부족 등 현실적인 문제로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8년, 조주, 민주의 여러 번족이 자주 임조, 공창을 침범하여 내지가 소란스러웠다. 추신(중추원 신하) 이승훈이 말하기를 "번인들이 해적(청해 몽골)에게 침략당하여 날마다 안쪽으로 옮겨옵니다. 만약 두 도적이 서로 통하면 무엇으로 뒷수습을 하겠습니까. 옛날 조충국은 싸우지 않고 강족을 복종시켰고, 단경은 강족 백만을 죽였으나 내지가 텅 비고 피폐해졌으니 양자의 거리가 멉니다. 비옵건대 선제의 밝음을 넓히시어 오로지 충국과 같은 임무를 맡겨 방략을 제정하게 하시고 모두 왕경이 편의에 따라 종사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왕경이 이에 여러 논의를 모아 토벌과 회유를 병행했다. 먼저 총병관 유문, 유격 팽함을 보내 병마를 나누어 배치했다. 이듬해 2월 고원에서 진격하여 조주, 민주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화복(재앙과 복)을 타일러 보였다. 조주 동로의 목사 등 31족, 서로의 답록실 등 13족, 민주 서녕구 등 15족이 모두 회유를 받아들이니 흰 깃발을 주고 호상(음식과 상)하고 돌려보냈다. 오직 민주 동로의 약롱족, 서로의 판이 등 15족 및 민주 날즉 등 5족만이 험한 지형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군사를 나누어 먼저 약롱, 판이 두 부족을 공격하여 그 소굴을 뒤엎으니 날즉 등 여러 부족이 두려워하며 항복을 빌었다. 무릇 참수 360여 급, 평정 70여 족 하고 이에 회군했다. 이로부터 조주, 민주가 안녕을 얻었으나 서녕은 여전히 도적의 근심으로 고통받았다.

[해설]
몽골의 압박을 받은 티베트 부족들이 명나라 영토 안으로 밀려들어와 소란을 일으키자, 왕경이 총사령관이 되어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그는 조충국의 고사를 따라 회유를 우선하되 끝까지 저항하는 부족은 무력으로 진압하여 지역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청해 지역의 몽골 세력(해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11년, 감숙 순무 조재 등이 말하기를 "역부랄이 청해(해상)를 점거한 지 이미 20여 년인데, 그 무리인 복아해가 홀로 마음을 기울여 교화를 향하여 첩목가 등 속한 번인을 구해 와서 정성을 바쳤습니다. 마땅히 이로 인하여 그들을 어루만져, 혹은 말을 바치게 하거나 혹은 인질을 보내게 하거나 혹은 관직을 제수하고 인장을 주어 위소(衛所)를 건립하여 우리의 울타리로 삼는 것이 계책에 편리합니다."라고 했다. 상소가 막 올라갔을 때 마침 하투(오르도스) 추장 길낭이 무리를 이끌고 서쪽을 약탈하여 역부랄의 진영을 크게 격파하고 그 부락의 태반을 거두어 가버렸으며, 오직 복아해의 한 갈래만이 무리를 거두어 스스로 보전했다. 이로 말미암아 서녕 또한 휴식을 얻었고 귀순을 받아들이는 논의는 마침내 중단되었다. 당룡이 총제가 되었을 때 도적이 남쪽으로 송반을 약탈했다. 당룡은 그들이 소굴로 돌아와 여러 번족 및 다른 부족과 연결하여 근심거리가 될까 걱정하여 감숙 수신에게 주상하여 행하게 하기를, 병사를 훈련하고 곡식을 쌓아 섬멸할 계책을 세우게 했다. 당룡이 떠나자 일 또한 시행되지 않았다.

[해설]
청해의 몽골 세력 간의 내분(오르도스의 길낭이 역부랄을 공격)으로 명나라가 어부지리를 얻어 잠시 평화를 찾았다는 내용이다. 이를 기회로 복아해를 포섭하려 했으나 상황이 변하여 무산되었다. 명나라의 변방 정책이 장관(총제)의 교체에 따라 일관성 없이 흔들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20년 정월, 복아해가 금패와 좋은 말을 바치고 내통하기를 구했다. 병부에서 말하기를 "도적이 과연 정성을 다해 조공을 통한다면 진실로 서쪽 변경의 큰 이익입니다. 그러나 단지 말과 금패만 바쳤을 뿐 지난날처럼 아들을 보내 입시하게 하거나 추장이 입조하겠다는 청이 없으니 급하게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독무신(총독과 순무)에게 명하여 정황의 사실 여부를 정탐하게 하고 아울러 제어할 계책을 조목조목 따져 보고하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재가했다. 마침 도적의 세력이 점차 쇠약해지고 번인들 또한 점차 생업을 회복하니 그 논의는 다시 중단되었다.

24년 민주를 설치하여 공창부에 예속시켰다. 민주는 서쪽으로 가장 끝 변방에 임해 있어 번인과 한인이 섞여 산다. 홍무 연간에 토번 16족을 고쳐 16리로 삼고 위(衛)를 설치하여 다스려 조금씩 요역을 제공하게 했다. 주(州)를 설치한 뒤로부터 징발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이 날로 피폐해졌다. 또 번인은 세습 관직을 연모하는데 유관(파견된 관리)은 또 거주하기를 즐겨하지 않아 멀리 다른 곳에 치소를 두었다. 10여 년이 지나 독무가 합하여 상소를 올려 불편하다고 말하니 이에 예전처럼 위(衛)를 설치했다.

[해설]
민주 지역의 행정 구역을 군사 조직인 '위'에서 일반 행정 구역인 '주'로 바꾸었다가, 세금 부담 증가와 관리들의 기피, 토착민들의 불만으로 인해 다시 '위'로 환원하는 시행착오를 보여준다. 토착 세력에게 자치권을 주는 위소 체제가 이 지역에 더 적합했음을 시사한다.

이때 북부의 알탄(안답)이 창궐하여 해마다 선부, 대동 등 여러 진을 약탈했다. 또 청해가 풍요로움을 부러워하여, 38년에 아들 빈토, 병토 등 수만 무리를 이끌고 습격하여 그 땅을 점거했다. 복아해는 도망쳐 숨었고 드디어 여러 번족을 마음대로 약탈했다. 얼마 뒤 군사를 이끌고 떠나면서 빈토를 남겨 송산을 점거하게 하고 병토는 청해를 점거하게 하니 서녕 또한 그 환란을 입었다. 융경 연간에 알탄이 순의왕에 봉해지자 공물을 바치는 것을 삼갔고 두 아들 또한 기세를 거두었다.

[해설]
몽골의 강력한 지도자 알탄 칸의 등장과 그의 아들들이 청해 지역을 장악하는 과정이다. 이후 알탄 칸이 명나라와 화의를 맺고 '순의왕'에 봉해지면서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이때 오사장의 승려 중에 활불(생불)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여러 부족이 많이 그 가르침을 받들었다. 병토가 이에 불도를 닦는다는 명분으로 청해 및 가욕관 밖의 절을 짓기를 청하여 오래 거주할 계책을 세웠다. 조정 신하들이 많이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예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이미 나무를 채취하고 공사를 일으켰는데 다른 곳에 고쳐 짓게 하는 것은 형세상 불가능하니, 차라리 인하여 허락함으로써 그 선한 마음을 북돋아 주고 관 밖에서 청하는 것을 막는 편이 낫습니다. 하물며 중국이 오랑캐를 막는 것은 오직 변방 관문의 방비가 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오랑캐의 순종과 거역이 절의 원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허락했다. 병토는 청을 얻어내자 또 가까이서 번인을 위협하여 송반으로 길을 통하게 하여 활불을 맞이하게 했다. 사천 수신이 핍박당할까 두려워하여 알탄에게 명을 내려 그 아들을 단속하여 이웃 경계를 소란하게 하지 말라고 빌기를 청했다. 알탄이 말하기를, 병토는 단지 감숙에서 개시(시장 개방)를 허락하지 않고 영하는 또 길이 멀고 험난하기 때문이니 비록 금령이 있어도 다 제어할 수는 없다고 했다. 선대 총독 방봉시 또한 개시가 편리하다고 말했다. 황제가 섬서 독무를 문책하니 독무가 감히 어기지 못했다. 만력 2년 겨울, 병토는 감숙에서, 빈토는 장랑에서 시장을 여는 것을 허락하되 1년에 한 번으로 했다. 이윽고 절이 완성되자 '앙화'라는 액호를 하사했다.

[해설]
몽골 세력이 티베트 불교(겔룩파, 훗날 달라이 라마 계열)를 받아들이고 청해에 절을 짓는 과정이다. 이는 종교를 통해 티베트와 몽골의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는 이를 경계하면서도 무역(개시)을 허락하여 그들을 달래려 했다. '앙화사'는 몽골과 티베트 불교의 결합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원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역부랄이 청해를 점거했을 때 변방 신하들은 오히려 외적(외국 도적)으로 보았다. 이때에 이르러 알탄의 연고 때문에 마침내 속한 번인(속국)처럼 보았다. 여러 추장 또한 아비가 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감히 크게 변방의 근심이 되지는 않았으나 조주의 변란이 이에 일어났다. 초기에 조주 번인들이 하주의 간악한 백성이 물건을 빚졌다고 하여 내지를 침입해 약탈하자 다른 부족들도 기회를 타서 난을 일으켰다. 간악한 백성이 하주 참장 전당에게 알리니 전당이 말하기를 "이는 조주의 번인인데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했고, 조주 참장 유세영은 말하기를 "그들이 하주를 범했으니 내가 일을 그르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장수가 틈이 생겼다. 총독 석무화가 이를 듣고 두 사람 및 난주 참장 서훈, 민주 수비 주헌, 옛 조주 수비 사경에게 명하여 각기 병사를 이끌고 그 경계를 압박하여 이해관계를 깨우치게 했다. 번인들이 두려워하여 즉시 약탈한 사람과 가축을 돌려보냈다. 유세영은 주동자가 잡히지 않았으니 갑자기 그만둘 수 없다고 여기고 드디어 공격하여 격파하니 살상 및 불타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군율에 구리 뿔나팔을 불면 퇴병하게 되어 있었다. 전당은 이전의 유감을 품고 뿔나팔 소리를 기다리지 않고 가버렸고 여러 부대도 많이 병력을 물렸다. 주헌, 사경이 바야흐로 깊이 들어가 수색하고 체포하려 했는데 이웃 번인들이 그 세력이 고립된 것을 보고 포위하여 죽였다. 일이 알려지자 황제가 진노하여 전당, 유세영의 관직을 박탈하고 석무화 등을 절실히 꾸짖었다. 석무화가 이에 여러 군사를 모아 길을 나누어 진격하여 토벌하니 참수 140여 급, 불타 죽은 자 900여 명이고 가축 수십 무리를 노획했다. 여러 번족이 두려워하여 멀리 이주했고 항복해 온 자가 71족이며 주동자 4명의 머리를 베어 보내고 2명을 산 채로 묶어 바쳤으며 말, 소, 양 260마리를 보냈다.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니 군사가 돌아왔다.

[해설]
명나라 말기 군 기강의 해이와 지휘관들 간의 알력 다툼이 초래한 참사를 보여준다. 관할 구역 따지기와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작전이 엉망이 되었고, 결국 아군이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총독이 대규모 토벌을 통해 간신히 수습했지만, 명나라 군사력의 난맥상을 드러낸 사건이다.

병토가 청해를 점거한 이래 절진 타이지라는 자가 있었는데 하투 추장 길능의 조카이고 알탄의 종손이었다. 그를 따라서 서쪽으로 왔다. 여러 차례 번인을 약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알탄을 초청하여 가서 돕게 했다. 알탄은 평소 오이라트를 침략하고자 했기에 이에 활불을 맞이한다는 명분을 빌려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갔다. 상소를 올려 병토에게 도독을 제수하고 금인을 하사하며 또 차 시장(개시)을 열어달라고 청했다. 부(부서)의 논의가 허락하지 않았으나 다만 차를 조금 주었다. 알탄이 오이라트에 이르러 싸우다 패하고 돌아왔다. 이에 감숙 수신에게 글을 보내 길을 빌려 오사장으로 가겠다고 했다. 수신이 거절할 수 없어 드디어 감숙을 넘어 남쪽으로 가서 여러 추장과 청해(해상)에서 모였다. 번인들이 더욱 유린당하여 많이 도망쳐 옮겨갔다. 8년 봄, 비로소 활불의 말이라 하여 동쪽으로 돌아갔으나 절진의 동생 화락적 및 알탄의 서형의 아들 영소복은 드디어 청해에 머물러 떠나지 않았다. 8월 병토가 무리를 이끌고 번과 내지의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니 조서를 내려 시장과 포상을 끊었다. 알탄이 이를 듣고 글을 보내 달려가 절실히 꾸짖었다. 이에 약탈한 것을 모두 돌려주고 악한 짓을 한 자 6명을 잡아 바치고 스스로 소와 양 700마리를 벌로 냈다. 황제가 그 아비의 공순함을 가상히 여겨 은과 폐백을 하사하니, 즉시 소와 양을 그 부족 사람들에게 주고 악한 짓을 한 자는 넘겨주어 스스로 다스리게 했으며 예전처럼 조공과 시장을 허락하니 알탄이 더욱 은덕에 감동했다. 그러나 화락적이 번족을 침략하고 약탈하는 것을 쉬지 않아 수신이 절진 타이지에게 격문을 보내 단속하게 하니 또한 죄를 인정하고 복종했다. 알탄이 죽고 손자 체력극에게 전해지자 세력이 가벼워 여러 추장을 제어할 수 없었다.

[해설]
알탄 칸 사후 몽골 세력의 분열과 통제력 상실을 다룬다. 알탄 칸이 살아있을 때는 명나라와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으나, 그가 죽고 난 뒤 후계자들의 권위가 약해지자 각지의 몽골 추장(화락적, 영소복 등)들이 다시 명나라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16년 9월, 영소복의 부하 무리가 서녕에 난입한 자가 있었는데 부총병 이규가 마침 술에 취해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갔다. 부하 무리가 안장을 잡고 호소하려 했는데 이규가 칼을 뽑아 그를 베니 무리가 드디어 이규를 쏘아 죽였다. 부하 병졸들이 달려가 구하려 했으나 또한 많이 죽었다. 수신이 토벌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힐책했으나, 단지 주동자의 머리를 바치고 사람과 가축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그 때문에 꺼리는 바가 없어 더욱 제멋대로 침략하고 도둑질했다. 이때 병토 및 절진 타이지 또한 모두 죽고 병토의 아들 진상이 망라천으로 옮겨 주둔하고 화락적은 날공천으로 옮겨 주둔하여 서녕에 가까이 다가와 날마다 번족을 잠식했다. 번이 지탱할 수 없어 꺾여서 도적의 쓰임이 되었다. 체력극이 또 서행하여 그들을 도우니 세력이 더욱 치성해졌다. 18년 6월 옛 조주에 들어왔는데 부총병 이연방이 3천 명을 이끌고 막다가 전멸했다. 7월 다시 깊이 들어와 하주, 임조, 위원을 크게 약탈했다. 총병관 유승사와 유격 맹효신이 각기 한 부대를 이끌고 막았으나 모두 패했고 유격 이방 등이 죽었으며 서쪽 변경이 크게 흔들렸다. 일이 알려지자 상서 정락에게 명하여 나가서 경략하게 했다. 정락은 예전에 선부, 대동의 군을 감독하여 순의왕 및 충순부인을 어루만진 은혜가 있었다. 사신을 보내 체력극을 재촉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고 번을 부르는 명령을 크게 포고하여 오는 자는 모두 잘 대우해주니 이로부터 귀부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화, 진 두 추장은 죄가 무거운 것을 스스로 알고 또 하투 추장 복실토가 와서 돕는다는 말을 듣고는, 수천구에서 크게 패하고 체력극이 다시 장차 소굴로 돌아가려 하자 비로소 두려워했다. 장막을 옮겨 떠나고 그 무리 가복토 등을 망라천에 남겨두었다. 이듬해 총병관 우계선이 격파하여 패주게 했다. 정락이 다시 청해로 군사를 진격시켜 앙화사를 불태우고 그 남은 무리를 쫓아내고 돌아왔다. 번인들 중 생업을 회복한 자가 8만여 명에 이르러 서쪽 변경이 잠시 휴식을 얻었다. 얼마 뒤 다시 청해에 모여들었다.

[해설]
만력 연간, 서북 변경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몽골군이 명나라 장군들을 잇달아 죽이고 내지 깊숙이 침입했다. 명나라는 정락을 파견하여 외교적 영향력(알탄 칸 가문과의 인연)과 군사적 압박을 동시에 사용하여 몽골 주력군을 물러나게 하고, 몽골-티베트 연합의 상징인 앙화사를 불태워 버림으로써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3년 임조 총병관을 증설하여 유정에게 임무를 맡겼다. 얼마 안 되어 영소복의 여러 부족이 남천을 범하자 참장 달운이 크게 격파했다. 뒤이어 화, 진 두 추장이 서천을 범하자 달운이 또 쳐서 격파했다. 이듬해 여러 추장이 다시 번족을 약탈하고 장차 내지를 엿보려 했다. 유정의 부장 주국주가 망라천에서 막아내어 또 크게 격파했다. 27년 규합한 반란 묘족이 조주, 민주를 범하자 총병관 소여훈 등이 패배시키고 번인 250여 급, 도적 82급을 베었으며 번족 5천여 명을 어루만져 항복시켰다. 34년 다시 진번 흑고성에 들어왔다가 총병관 시국주에게 패배했다. 이로부터 여러 차례 들어와 노략질했으나 크게 뜻을 얻지는 못했다.

[해설]
명나라 말기의 명장들(유정, 달운 등)이 활약하며 국지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근본적인 위협은 제거되지 않고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섬서의 근심거리가 된 것에 3대 도적이 있었으니 하나는 하투, 하나는 송산, 하나는 청해였다. 청해의 땅이 가장 비옥하고 또 번인이 병풍처럼 가려주고 있어 근심이 오히려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숭정 11년, 이자성이 여러 차례 관군에게 패하여 조주로부터 번의 땅으로 빠져나갔다. 여러 장수가 끝까지 추격하자 다시 요새 안으로 달아나 들어오니 번족 또한 유린당했다. 15년 서녕 번족이 난을 일으키자 총말관 마광이 여러 장수를 감독하여 5길로 진격하여 토벌하고 참수 700여 급, 38족을 어루만져 항복시키고 돌아왔다. 이듬해 겨울, 이자성이 장수를 보내 감주를 함락시켰으나 홀로 서녕만 함락되지 않았다. 적장 신은충이 공격하여 격파하고 드디어 나아가 청해를 약탈했다. 여러 추장이 많이 항복하여 붙었고 명나라 왕실 또한 망했다.

[해설]
명나라 멸망 직전의 상황이다. 이자성의 난이 서북 변경까지 영향을 미쳤고, 명나라 최후의 순간까지 서녕 등지에서는 저항과 혼란이 계속되었음을 서술하며 명나라의 서역 경영이 끝났음을 알린다.

번에는 생(生), 숙(熟) 두 종류가 있다. 생번은 사납고 표독하여 제어하기 어렵다. 숙번은 말을 바치고 차를 받아 가며 자못 유순하게 복종했으나, 뒤에 점차 생번과 통하여 내지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청해를 도적(몽골)이 점거한 이래 번인들이 약탈을 견디지 못하여 사사로이 가죽과 폐백을 보내는 것을 '수신'이라 했고 때에 따라 더 보내는 것을 '첨파'라 했으며, 혹은 도리어 향도가 되어 내통하기를 거리낌 없이 했다. 중국이 말을 무역하는 일 또한 거의 이르지 않았으니, 대개 이미 밖을 막고 안을 호위한다는 애초의 뜻을 잃어버린 것이다.

[해설]
명나라의 서번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총평하는 부분이다. 원래 번인들을 이용해 외부의 적을 막으려 했으나(이이제이), 몽골의 압박에 못 이긴 번인들이 오히려 몽골에 협조하게 되면서 방어 체계가 무너졌음을 한탄하고 있다.

본래 태조가 갓 관중을 평정하고 즉시 한무제가 하서 4군을 창설하여 강(티베트)과 호(흉노)를 단절했던 뜻을 본받아 감숙에 중진(무거운 진영)을 건설하여 북으로는 몽골을 막고 남으로는 여러 번을 막아 그들이 서로 합치지 못하게 했다. 또 서녕 등 서쪽 위(衛)의 토관을 한관(중국 관리)과 함께 다스리게 하여 대대로 지키게 했다. 또한 차과사를 많이 설치하여 번인들이 말로써 차를 바꾸게 할 수 있었다. 부족의 우두머리 또한 때맞추어 조공하는 것을 허락하고 스스로 천자에게 이름과 호를 통하게 했다. 그 세력이 이미 나뉘고 또 이익에 마음이 움직여 감히 악한 짓을 하지 못했다. 설령 조금 준동함이 있어도 변방 장수가 편사(일부 군사)로 제어하면 때에 맞추어 평정되지 않음이 없었다. 변방 신하가 방비를 잃고 북쪽 도적이 경계를 넘어 난입하여 번족과 교통한 이래 서쪽 변경에 마침내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시기의 근심거리를 구명해보면 결국 도적(몽골)에게 있었지 번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논하는 자들은 태조의 제어함이 훌륭했다고 여겼다.

[해설]
명 태조 주원장의 초기 전략(한무제의 전략을 계승하여 몽골과 티베트를 분리시키는 전략)은 훌륭했으나, 후대 관리들의 무능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그 시스템이 붕괴되었음을 요약하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토착 번족이 아니라 외부에서 침입한 몽골 세력에게 있었다는 분석이다.

안정위(安定衛)

안정위는 감주 서남쪽 1500리에 있다. 한나라 때는 약강이었고 당나라 때는 토번의 땅이었으며 원나라가 종실 복연첩목아를 영왕으로 봉하여 진수하게 했다. 그 땅의 본래 이름은 살리외올아이며 너비가 천 리이고 동쪽은 한동에 가깝고 북쪽은 사주에 가까우며 남쪽은 서번과 접한다. 거주하는 성곽은 없고 펠트 천막을 집으로 삼는다. 낙타, 말, 소, 양이 많이 생산된다.

[해설]
안정위의 위치와 유래를 설명한다. 이곳은 유목 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원나라 왕족의 후예가 다스리던 곳이다.

홍무 3년 사신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불렀다. 7년 6월 복연첩목아가 그 부위 마답아 등을 시켜 내조하게 하고 갑옷, 칼, 검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태조가 기뻐하며 그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상을 주었으며, 관리를 보내 그 왕에게 후하게 하사하고 그 땅을 나누어 아단, 아진, 고선, 첩리 4부로 삼고 각기 인장을 내려주었다. 이듬해 정월 그 왕이 부복안불화를 보내 조공하고, 원나라가 준 금, 은 글자 패를 올리며 안정, 아단 두 위(衛)를 설치해 주기를 청하니 따랐다. 이에 복연첩목아를 안정왕에 봉하고 그 부족 사람 사라 등을 지휘로 삼았다.

[해설]
명나라 초기에 안정위가 설치되는 과정이다. 원나라의 관직을 버리고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9년 전 광동 참정 정구성 등에게 명하여 그 땅에 사신으로 가게 하여 왕과 그 부족 사람에게 옷과 비단을 하사했다. 이듬해 왕이 사라에게 시해당하자 왕자 판쟁실리가 복수하여 사라를 주살했다. 사라의 부장이 다시 왕자를 죽이니 부족 내부가 크게 어지러웠다. 번장 타아지파가 배반하여 사막으로 달아나다가 안정을 경유하면서 크게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그 인장을 빼앗아 가니 그 무리가 더욱 쇠약해졌다. 25년 남옥이 서쪽을 정벌하고 아진천을 돌았다. 토착 추장 사도 하잠 등이 두려워하여 산골짜기에 숨어 감히 나오지 못했다. 숙왕이 감주로 부임함에 이르러 승려를 보내 왕을 뵙고 관직을 제수하여 부족을 안정시키기를 구했다. 왕이 위하여 주상해 청하니 황제가 허락했다. 29년 행인 진성을 그 땅에 보내 다시 안정위를 세웠다. 그 추장 하해호도로 등 58명에게 모두 지휘, 천백호 등의 관직을 제수했다. 진성이 돌아오자 추장이 따라 입조하여 말을 바치고 은혜에 감사했다. 황제가 후하게 하사하고 다시 중관에게 명하여 은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했다.

[해설]
안정왕이 살해당하고 내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남옥의 대규모 원정 이후 명나라의 영향력이 다시 미치게 되어 안정위가 재건되었다.

영락 원년 관리를 보내 칙서로 살리 여러 부족을 어루만져 타일렀다. 이듬해 안정의 두목이 많이 내조하니 천호 삼즉 등 3명을 발탁하여 지휘첨사로 삼고 나머지는 차등 있게 관직을 주었으며 아울러 본 위(衛) 지휘동지 하삼 등에게 은과 비단을 하사했다. 얼마 안 되어 지휘 타아지속이 내조하여 차발마(세금으로 내는 말) 500필을 바치기를 원하니 하주위 지휘 강수에게 명하여 가서 받게 했다. 강수가 말하기를 "한동, 필리 여러 위가 바치는 말은 그 값이 모두 하주의 군민이 차를 운반하여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지금 안정은 멀어서 차를 운반하기가 심히 어려우니 비단으로 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여러 번이 말을 무역할 때 차를 쓰는 것은 이미 정해진 법례이다. 지금은 우선 청한 대로 따르되 뒤에는 예전처럼 차를 주라."라고 했다. 이에 제도를 정하여 상등 말은 비단 각 2필을 주고 그 아래는 차등을 두어 줄였다. 3년 하삼 등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두목 철력가장복 등을 천거하여 지휘 등의 관직을 삼기를, 또한 해마다 가축의 10분의 1을 바치기를 청하니 아울러 따랐다. 4년 고아정의 땅으로 옮겨 주둔했다.

[해설]
영락제 시기, 안정위와의 조공 무역(차마무역)이 구체화되는 과정이다. 거리가 멀어 차 운반이 어렵다는 건의에 일시적으로 비단을 지불수단으로 썼지만, 원칙적으로는 '차'가 주요 결제 수단이었음을 재확인했다.

초기에 안정왕이 피살될 때 그 아들 살아지실가가 그 형에게 피살되었고 부족이 무너져 흩어졌는데, 아들 역반단이 영장에 흘러들어 머물렀다. 11년 5월 무리를 이끌고 내조하여 집안의 어려움을 진술하고 관직을 제수해 주기를 빌었다. 황제는 그 조상이 앞장서서 귀부한 것을 생각하여 안정왕을 습봉하게 하고 인장과 고명을 하사했다. 이로부터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해설]
왕위 계승 분쟁으로 쫓겨났던 왕족 역반단이 명나라의 인정(책봉)을 받아 다시 안정왕이 되고 부족을 재건하는 이야기다.

22년 중관 교래희, 등성이 오사장에 사신으로 가다가 필력술강 황양천에 머물렀다. 안정 지휘 하삼의 손자 산가 및 곡선 지휘 산즉사 등이 무리를 이끌고 가로막아 겁탈하여 조정의 사신을 죽이고 낙타, 말, 물건을 모두 빼앗아 갔다. 인종이 크게 노하여 도지휘 이영에게 칙서를 내려 강수 등과 함께 토벌하게 했다. 이영 등이 서녕의 여러 위 군사 및 융분국사 가실아감장 등 12번족의 무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가 도적을 추격하니 도적이 멀리 달아났다. 이영 등이 곤륜산을 넘어 서쪽으로 수백 리를 가서 아령활의 땅에 이르러 안정의 도적을 만나 격파하고 참수 480여 급, 생포 70여 명, 낙타, 말, 소 14만여 마리를 얻었다. 곡선은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추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영은 이로써 회녕백에 봉해졌고 강수 등은 모두 품계가 올랐다. 대군이 돌아오자 지휘 하삼 등은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옛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해설]
안정위와 곡선위가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약탈한 사건에 대해 명나라가 대규모 보복 원정을 감행한 사건이다. 곤륜산을 넘는 원정 끝에 반란 세력을 응징했다.

선덕 원년, 황제가 관리를 보내 불러 타일러 생업을 회복한 자가 700여 명이었다. 황제가 아울러 채색 비단 표리를 하사하여 그 반측(배반과 복종을 오감)함을 편안하게 했다. 3년 봄 안정 및 곡선위 지휘 등 관리 53명에게 고명을 하사했다.
초기에 대군이 도적을 토벌할 때 안정 지휘 상가와 한동위 군사가 함께 징발 명령을 받들어 종군했다. 한동이 명령을 어기고 이르지 않고는, 그 관할 판납족이 상가의 군사가 멀리 나간 것을 엿보고 그 부락 내의 천막과 가축을 모두 약탈했다. 일이 알려지자 칙서를 내려 절실히 꾸짖고 속히 약탈한 것을 돌려주게 했으며 명령을 어기면 군사를 보내 토벌하겠다고 했다. 얼마 뒤 상가를 도지휘첨사로 승진시켰다.

[해설]
토벌전 이후 다시 회유책을 써서 부족들을 안치시키는 과정이다. 또한 친명파였던 '상가'가 명나라를 위해 종군하는 사이 다른 부족(한동위)이 빈집털이를 한 사건을 조정이 중재하는 모습도 나온다.

정통 원년 관리를 보내 칙서를 가지고 가서 안정왕 및 상가에게 유시하기를 "우리 조상 때 너희들이 천명을 따르고 조정을 받들며 정성을 바쳐 힘을 다해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으므로 조정의 은혜와 하사 또한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짐이 즉위함에 이르러 너희들이 다시 조정의 명을 준수하고 부하를 단속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이제 특별히 관리를 보내 짐의 뜻을 알리고 비단을 하사한다. 마땅히 더욱 하늘의 마음을 순종하고 충성을 도타이 하여 경계를 보전하고 이웃과 화목하며 영원히 태평의 복을 누리라."라고 했다. 3년 상가가 죽자 그 아들 나남분이 직책을 이었다. 9년 나남분이 무리를 이끌고 곡선의 사람과 가축을 약탈했다. 조정이 관리를 보내 돌려주라고 유시했으나 명을 받들지 않고 도리어 그 행장을 겁탈했다. 황제가 노하여 안정왕에게 칙서를 내려 추궁하여 다스리게 했다. 왕이 명을 받들고 또 사정을 진술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빌었다. 황제가 이에 용서하고 나라를 보전하고 이웃과 화목하라는 뜻으로 타일렀다. 11년 겨울 역반단이 죽자 아들 영점간사아가 습봉했다. 이때 왕이 나이가 어려 숙부 지휘동지 철사태파가 국사를 도왔는데 그 동료들이 많이 그 아래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왕이 그를 보내 내조하게 하여 품계를 올려주기를 주청하니 이에 도지휘첨사로 발탁했다. 경태, 천순, 성화 세 조정을 거치며 빈번히 들어와 조공했다.

[해설]
안정위의 내부 계승 문제와 이웃 부족(곡선)과의 갈등을 다룬다. 명나라는 칙서를 보내 중재하고 권위를 세워주려 노력했다.

홍치 3년, 영점간사아가 죽자 아들 천분이 습봉했다. 재량(제사 음식)과 마포를 하사하고 그 아비를 제사 지내라고 유시했다. 이보다 앞서 하밀 충순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조정의 논의가 안정왕이 그와 조상이 같으니 관리를 보내 한 사람을 택하여 그 후사로 삼자고 했으나 안정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안정에서 섬파를 찾아내어 책봉하여 충순왕으로 삼고 천분에게 명하여 그 가족을 보내게 했다. 천분이 노하여 말하기를 "섬파는 왕작을 이을 수 없고 작위는 응당 작이가가 가져야 한다."라고 했다. 작이가는 천분의 동생이다. 또 후한 상을 요구했다. 병부가 말하기를 "섬파는 실로 충순왕의 손자이며 평소 나라 사람들에게 복종을 받았습니다. 예전 하밀에 주인이 없을 때 사신을 보내 세울 만한 자를 취하려 했는데 작이가는 스스로 힘이 약함을 알고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일이 정해진 뒤에 이처럼 뒤집으려 하니 말하는 것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섬파가 마침내 섰다(왕이 되었다). 그러나 천분은 옹립이 자기 뜻이 아니었으므로 뒤에 하밀이 여러 차례 도적에게 당해도 끝내 구원해 주지 않았다. 17년 무리를 이끌고 사주를 침범하여 크게 약탈하고 갔다. 정덕 연간에 몽골 대추장 역부랄, 알이독시가 청해를 침범하여 점거하고 이웃 국경을 마음대로 약탈했다. 안정은 드디어 잔파되고 무리가 흩어져 도망갔다.

[해설]
안정위와 이웃 하밀위(Hami)의 왕위 계승 문제가 얽힌 복잡한 상황이다. 명나라가 개입하여 하밀왕을 세웠으나 안정왕 천분의 불만을 샀고, 이는 결국 두 부족 간의 불화로 이어졌다. 결국 몽골의 침입으로 안정위도 몰락하게 된다.

아단위(阿端衛)

아단위는 살리외올아의 땅에 있는데 홍무 8년에 설치했다. 뒤에 타아지파에게 잔파되어 그 위(衛)가 드디어 폐지되었다. 영락 4년 겨울, 추장 소설홀로찰 등이 내조하여 토산물을 바치고 위를 다시 설치하고 관리를 두기를 청하니 따랐다. 즉시 소설 등을 제수하여 지휘첨사로 삼았다.

[해설]
아단위는 설치와 폐지를 반복했던 작은 부족이다.

홍희 연간에 곡선 추장 산즉사가 조정 사신을 가로막고 겁탈할 때 아단 지휘 쇄로단을 위협하여 함께 가게 했다. 얼마 뒤 대군이 출정하자 쇄로단이 두려워하여 부하 무리를 이끌고 멀리 달아났고 그 인장을 잃어버렸다. 선덕 초기에 사신을 보내 초무했으나 쇄로단은 오히려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곡선에 의지하여 섞여 살았다. 6년 봄 서녕 도독 사소가 말하기를 "곡선위 진지한 등은 본래 별도의 한 부족인데 그 아비가 산즉사를 도와 반역했기 때문에 필력술강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 땅이 오사장의 큰 길목에 해당하여 다시 난을 일으킬까 두려우니 마땅히 토벌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사소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잔당 도적들이 궁박하여 용납될 땅이 없으니 마땅히 사람을 보내 그 죄를 용서하고 옛 생업을 회복하도록 명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에 진지한이 소속 부족을 이끌고 첩아곡 옛 땅으로 돌아와 살았다. 이듬해 정월 내조하니 천자가 기뻐하며 지휘동지를 제수하고 위(衛)의 일을 관장하게 했으며 지휘첨사 복답올로써 부관을 삼았다. 진지한이 인하여 말하기를 "아단 옛 성은 회회(이슬람) 경계에 있는데 첩아곡과는 1달 거리나 떨어져 있어 조공하기가 어려우니 본토로 옮기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천자가 그 청을 따르고 그대로 인장을 주고 새서(옥새 찍은 문서)를 내려 위로했다. 정통 조정에 이르기까지 자주 조공했으나 뒤에는 마친 바를 알 수 없다(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때 서역 땅에 또한 이름이 아단이라는 곳이 있어 조공 길이 하밀을 따라 들어오는데 이곳과는 두 지역이다.

[해설]
아단위가 반란에 휘말렸다가 다시 용서받고 복구되는 과정이다. 마지막에 서역(티무르 제국 쪽)에도 같은 이름의 지명이 있어 혼동하지 말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곡선위(曲先衛)

곡선위는 동쪽으로 안정과 접하고 숙주 서남쪽에 있다. 고대 서융이며 한나라 서강, 당나라 토번이었고 원나라가 곡선답림 원수부를 설치했다.
홍무 연간에 추장이 조공했다. 명하여 곡선위를 설치하고 그 사람을 관리로 삼아 지휘로 했다. 뒤에 타아지파의 난을 만나 부족 무리가 도망쳐 흩어져 안정위에 병입되어 아진 땅에 거주했다. 영락 4년 안정 지휘 하삼, 산즉사, 삼즉 등이 주상하기를 "안정, 곡선은 본래 두 위였는데 뒤에 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최근 토번 파독의 침략을 만나 편안히 살지 못하니 비옵건대 예전처럼 둘로 나누어 선대 조정의 옛 제도를 회복해 주소서."라고 하니 따랐다. 즉시 삼즉으로 지휘사를 삼아 위의 일을 관장하게 하고 산즉사를 부관으로 삼았다. 또 그 청을 따라 약왕회 땅으로 치소를 옮겼다. 이로부터 여러 차례 조공했다.

[해설]
곡선위의 연혁이다. 안정위와 합쳐졌다가 다시 분리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홍희 연간에 산즉사가 안정 부족 추장과 함께 조정 사신을 겁탈하고 죽였다. 얼마 뒤 대군이 가서 토벌하자 산즉사는 무리를 이끌고 멀리 도망쳐 감히 옛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선덕 초기에 천자가 그 죄를 사면하고 도지휘 진통 등을 보내 가서 초무하니 생업을 회복한 자가 4만 2천여 장(가구 단위)이었다. 이에 지휘 실자한 등을 보내 내조하여 사죄하고 낙타와 말을 바치니 처음과 같이 대우했다. 얼마 뒤 산즉사를 도지휘동지로 발탁하고 그 요속들도 모두 관직을 올려주고 고명을 주었다.

[해설]
앞서 언급된 사신 살해 사건 이후, 다시 명나라가 관용을 베풀어 부족을 재건시키는 과정이다. 4만여 가구라는 숫자는 당시 이 부족의 규모가 꽤 컸음을 짐작게 한다.

5년 6월, 조정 사신이 서역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산즉사가 자주 무리를 이끌고 오가는 조공 사신을 가로막고 겁탈하여 길을 막았다고 했다. 천자가 노하여 도독 사소를 대장으로 삼고 좌우 참장 조안, 왕혹 및 중관 왕안, 왕근을 거느리고 서녕 여러 위의 군사 및 안정, 한동의 무리를 감독하여 가서 정벌하게 했다. 사소 등의 병사가 그 땅에 이르자 산즉사는 먼저 도망갔고 그 무리 탈탈불화 등이 맞서 싸웠다. 여러 장수가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살상한 자가 매우 많았고 탈탈불화 및 남녀 340여 명을 생포했으며 낙타, 말, 소, 양 34만여 마리를 노획했다. 이로부터 서번이 두려워 떨었다. 산즉사는 본래 교활하고 사나워 천자가 그 죄를 용서했으나 여전히 악함을 믿고 고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잃자 이에 뉘우치고 두려워했다. 이듬해 4월 그 동생 부천호 견두 등 4명을 보내 말을 바치고 죄를 청했다. 다시 처음과 같이 대우하고 옛 땅으로 돌아와 살게 하고 그 포로를 돌려주게 했다.

[해설]
곡선위가 또다시 배반하고 약탈을 일삼자, 이번에는 명나라가 대규모 연합군(서녕, 안정, 한동군 포함)을 동원해 철저히 응징했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에야 다시 항복했다.

7년 그 지휘 나나한이 말하기를 "지난번 안정의 병사가 곡선을 토벌함을 따랐을 때, 신의 두 딸과 네 동생 및 지휘 상가 등의 가족 500명이 약탈당했습니다. 지금 산즉사는 이미 사면을 입었는데 신들의 친속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성명(황제)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했다. 천자가 주상을 보고 측은히 여겨 대신에게 말하기를 "짐이 항상 병사 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바로 무고한 자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이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것을 알았겠는가."라고 했다. 즉시 안정왕 역반단 등에게 칙서를 내려 약탈한 것을 모두 돌려주게 했다. 그해 산즉사가 죽자 그 아들 도립에게 명하여 직책을 잇게 하고 칙서를 내려 힘쓰게 했다. 10년 나나한을 도지휘첨사로 발탁하고 그 요속 중 직책이 나아간 자가 89명이었다. 정통 7년 사신을 보내 옥석을 바쳤다. 성화 연간에 토로번(투르판)이 강성해져 그 침략을 받았다.

[해설]
토벌전의 부작용으로 친명파 인사들의 가족이 약탈당하는 억울한 일이 발생하자 황제가 직접 개입하여 해결해 주는 모습이다.

홍치 연간에 안정왕자 섬파가 곡선에 거주했다. 조정 논의가 하밀에 주인이 없다 하여 맞이하여 충순왕으로 삼았다. 정덕 7년 몽골 추장 알이독시, 역부랄이 청해로 도망쳐 와 거주하니 곡선이 유린당하는 바가 되어 부족이 도망쳐 옮겨갔고 그 위(衛)가 마침내 망했다.

[해설]
곡선위의 멸망 과정이다. 안정위와 마찬가지로 몽골의 청해 진출로 인해 붕괴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안정, 아단, 곡선, 한동, 적근, 사주 여러 위를 설치하고 금패를 주어 해마다 말로써 차와 바꾸게 하니 이를 '차발'이라 일컬었다. 사주, 적근은 숙주에 예속시켰고 나머지는 모두 서녕에 예속시켰다. 이때 감주 서남쪽은 모두 번족이었는데 변방 신하의 기미(통제)를 받았고 오직 북면만 도적(몽골)을 방어했다. 뒤에 여러 위가 다 망하고 역부랄이 청해를 점거하고 토로번이 다시 하밀을 점거하여 관 밖을 핍박했다. 여러 위의 옮겨간 무리들이 또 감숙의 팔과 겨드랑이(가까운 곳)에 고리처럼 벌려 섰는데 사납고 표독하여 길들이기 어려웠다. 이에 하서는 밖으로 큰 도적을 막고 안으로 여러 번을 막으니 전쟁이 날로 급해졌다.

[해설]
명나라의 서역 방어선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총정리하는 문단이다. 초기에는 '위소'들을 완충지대로 삼아 안정을 유지했으나, 이 완충지대(여러 위)가 외부 세력(몽골, 투르판)에 의해 무너지면서 명나라 본토(감숙)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는 상황을 설명한다.

적근몽고위(赤斤蒙古衛)

적근몽고위. 가욕관을 나와 서쪽으로 20리를 가면 대초탄이라 하고, 또 30리를 가면 흑산아라 하며, 또 70리를 가면 회회묘라 하고, 묘 서쪽 40리에 선마성이 있는데 모두 돈대(봉수대)를 설치하고 요졸(망보는 병사)을 두었다. 성 서쪽 80리가 즉 적근몽고이다. 한나라 돈황군 땅이고 진나라 때는 진창군에 속했으며 당나라 때는 과주에 속했고 원나라 때도 같았으며 사주로에 속했다.

[해설]
적근몽고위의 상세한 지리적 위치와 연혁이다. 가욕관 서쪽의 주요 거점들을 나열하고 있다.

홍무 13년 도독 복영이 서쪽을 토벌하다가 백성에 머물며 몽골 평장 홀도첩목아를 사로잡았다. 적근참으로 진군하여 빈왕 역련진 및 그 부곡 1400명, 금인 하나를 획득했다. 군사가 돌아오자 다시 몽골 부족 사람에게 점거된 바 되었다.
영락 2년 9월, 탑력니라는 자가 있어 승상 고술의 아들이라 자칭했다. 소속 남녀 500여 명을 이끌고 합랄탈의 땅으로부터 귀순해 왔다. 조서를 내려 적근몽고소(천호소)를 설치하고 탑력니를 천호로 삼았으며 고명과 인장, 채색 비단, 습의를 하사했다. 8년 회회 합랄마아가 숙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탑력니를 구원병으로 약속했다. 거절하고 응하지 않고 부하를 이끌고 도적 6명을 잡아 바쳤다. 천자가 듣고 기뻐하며 조서를 내려 천호소를 고쳐 위(衛)로 삼고 탑력니를 지휘첨사로 발탁했으며 그 부하 3명에게 관직을 주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다. 또 이듬해 반란 도적 노적한을 숨겨주어 장차 토벌하려 했다. 시강 양영의 말을 써서 군사를 멈추고 진격하지 않는 대신 칙서를 내려 힐책하니, 탑력니가 즉시 노적한을 잡아와 바쳤다. 천자가 가상히 여겨 품계를 지휘동지로 올리고 하사함이 매우 후했다. 한참 뒤 죽자 아들 차왕실가가 습봉하여 법도대로 조공을 닦으니 지휘사로 승진했다. 선덕 2년 다시 도지휘동지로 승진했고 그 요속들도 많이 품계가 올랐다.

[해설]
적근몽고위의 성립과 초기 역사다. 몽골계 부족으로 명나라에 귀순하여 반란 진압에 협조하는 등 충성심을 보여 지위가 격상되었다.

정통 원년 그 부하 지휘 가아즉이 서역 아단의 공물을 약탈하고 사신 21명을 죽였다. 칙서를 내려 절실히 꾸짖고 약탈한 것을 돌려주게 했다. 얼마 뒤 몽골 탈환첩목아, 맹가불화와 싸워 이기고 사신을 시켜 승전보를 바치니 도지휘사로 승진했다. 5년, 조정 사신이 하밀을 오갈 때 차왕실가가 식량과 노새, 말을 갖추어 호송하니 도독첨사로 발탁했다. 이듬해 천자가 그 부하가 때때로 사주에 가서 도적질하거나 혹은 사주의 이름을 사칭하여 서역의 조공 사신을 겁탈한다는 것을 듣고 칙서를 보내 절실히 꾸짖었다.

[해설]
공을 세우기도 하고 말썽을 부리기도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명나라는 이를 적절히 통제하며 관리했다.

이때 오이라트(와랄) 병사가 강성하여 자주 이웃 국경을 침략했다. 차왕실가가 두려워하여 숙주로 옮겨 살고자 했다. 천자가 듣고 유시하여 중지시키고 경보가 있으면 변방 장수에게 달려와 알리게 했다. 8년 오이라트 추장 에센(야선)이 사신을 보내 말과 술을 보내며 차왕실가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고 사주 곤즉래의 딸을 동생의 아내로 맞이하고자 했다. 두 사람이 원하지 않아 아울러 조정의 명을 준수하여 감히 마음대로 혼인하지 못한다고 주상했다. 천자는 오이라트가 바야흐로 강성하므로 그 예의를 물리칠 수 없다고 여겨, 유시하여 각기 그 원함을 따르게 하고 아울러 이 뜻을 에센에게 알렸으나 두 사람은 끝내 원하지 않았다. 이듬해 차왕실가가 늙어서 일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칭했다. 조서를 내려 그 아들 아속에게 도독첨사를 제수하여 대신하게 했다. 에센이 다시 사신을 보내 혼인을 구하고 또한 친족을 보내 그 폐물을 받아 가기를 청했다. 아속은 그 속임수를 근심하여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으며 사람을 보내 좋은 땅으로 옮기기를 빌었다. 천자가 토지는 버릴 수 없다고 유시하고 두목들을 장려하고 인솔하여 스스로 강해지게 했다. 또 그 굶주리고 곤란함 때문에 변방 신하에게 곡식을 주게 하니 무마하고 구휼하는 것이 지극했다.

[해설]
강성해진 오이라트(에센 칸)의 압박 속에서 명나라에 충성하며 버티는 적근몽고위의 모습이다. 에센의 정략결혼 요구를 거절하고 명나라의 보호를 요청했으나, 명나라는 영토 사수를 명하며 물자만 지원했다.

이보다 앞서 고술이 서번 여자에게 장가들어 탑력니를 낳았고, 또 몽골 여자에게 장가들어 도지휘 쇄합자, 혁고자 두 사람을 낳았다. 각기 소속 부족을 셋으로 나누어 무릇 서번 사람은 왼쪽 장막에 거주하며 탑력니에게 속했고, 몽골 사람은 오른쪽 장막에 거주하며 쇄합자에게 속했으며, 스스로 가운데 장막을 거느렸다. 뒤에 고술이 죽자 여러 아들이 귀순하여 아울러 관직을 제수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아속의 세력이 성하여 오른쪽 장막을 겸병하고자 하여 자주 서로 원수처럼 죽였다. 쇄합자가 지탱할 수 없어 변방 장수에게 의논하여 소속 부족을 이끌고 안으로 속하기를 원했다. 변방 장수 임례가 경사로 보내 군사를 일으켜 그 부락을 거두어 주기를 청했다. 황제는 그 부족 사람들이 안으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대로 쇄합자를 감숙으로 돌려보내고 임례에게 가서 그 처자식을 데려오게 했다. 13년 변방 장수가 하밀 사신을 호송하여 고욕에 이르렀다. 적근 도지휘 총아가육 등이 무리를 이끌고 그 성을 포위하고 원망을 갚겠다고 성언했다. 관군이 나가 공격하여 총아가육을 사로잡았는데 얼마 뒤 도망갔다. 일이 알려지자 칙서를 내려 아속을 꾸짖고 범한 자를 묶어서 바치게 했다.

[해설]
적근몽고위 내부의 복잡한 혈통(서번과 몽골 혼혈)과 그로 인한 권력 다툼, 분열 과정을 설명한다.

경태 2년, 에센이 다시 사신을 보내 글을 가지고 혼인을 구했다. 마침 아속이 다른 곳에 가 있어 그 요속이 그 글을 가지고 와서 올렸다. 병부상서 우겸이 말하기를 "적근 등 여러 위는 오랫동안 우리의 울타리가 되었는데 에센이 까닭 없이 항복을 권하고 혼인을 맺으려는 것은 우리 병풍을 철거하려는 뜻입니다. 마땅히 변방 신하에게 군사를 정비하여 신중히 방비하게 하고 아울러 아속에게 칙서를 내려 힘을 다해 막아내고 경보가 있으면 달려와 보고하여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따랐다. 5년 에센이 더욱 겸병을 도모하여 사신을 보내 인장을 가지고 가서 아속에게 주고 위협하여 신하로 복종하게 했다. 아속이 따르지 않고 변방 신하에게 알렸다. 마침 에센이 피살되자 그만두었다.

[해설]
'토목의 변' 당시 명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에센과 우겸이 등장한다. 에센의 회유 공작에도 불구하고 적근몽고위는 명나라 편에 섰다.

천순 원년 도지휘 마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갈 때 명하여 아속에게 채색 비단을 하사하고 오가는 것을 호송하게 했다. 얼마 뒤 좌도독으로 품계를 올렸다. 성화 2년에 죽자 아들 와살탑아가 습봉을 청하니 즉시 아비의 관직을 제수했다. 그 부하 지휘 감반이 자주 변방 경계를 침범하고 도둑질하니 변방 장수가 유인하여 오게 해서 경사로 보냈다. 천자가 그 죄를 꾸짖고 하사품을 주어 돌려보냈다. 6년 그 부족 사람이 와살탑아가 어리고 약하며 그 숙부 걸파 등 2인이 부족의 신망을 받으니 명하여 도독으로 삼고 위의 일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와살탑아 또한 글을 올려 관직 하나를 주어 변방을 협동하여 지키게 해달라고 빌었다. 황제가 그 청을 따르고 아울러 지휘첨사를 제수했다. 이듬해 와살탑아가 죽자 아들 상복탑아가 이어 좌도독이 되었다.

[해설]
적근몽고위의 리더십 교체와 내부 사정을 다룬다. 어린 후계자 대신 실력 있는 숙부가 실권을 잡는 것을 명나라가 승인해 주는 유연함을 보였다.

9년 토로번이 하밀을 함락시키고 사신 3명을 보내 글을 가지고 도독첨사 곤장에게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고 불렀다. 곤장이 따르지 않고 그 사신을 죽여 그 글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천자가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 하사하고 또한 군사를 내어 공격해 토벌하게 했다. 곤장이 힘이 부족하다 하여 관군 수천을 보내 도와주기를 청했다. 조정 의논이 도독 이문 등을 위임하여 헤아리게 했다. 얼마 뒤 이문 등이 나아가 정벌하자 곤장이 과연 병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마침 이문 등이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나아가지 않자 그 병사 또한 돌아갔다.

[해설]
토로번(투르판)의 팽창과 이에 맞서는 적근몽고위의 활약이다. 명나라 정규군과의 연합 작전이 시도되었으나 지휘관의 소극적 태도로 무산되었다.

10년 상복탑아가 천 기병을 이끌고 숙주 경계에 들어와 장차 아년족 번인과 원수처럼 서로 죽이려 했다. 변방 신하가 이미 유시하여 물리쳤고, 병부에서 사람을 보내 대의로써 꾸짖고 원한이 있으면 변방 관리에게 나아가 호소하고 마음대로 서로 침략해서는 안 된다고 청하니 따랐다. 14년 그 부족 사람이 상복탑아가 어려서 일을 겪지 않았고 지휘첨사 가정(가정)이 무리의 마음을 얻었으니 품계를 한 단계 올려 위의 일을 총괄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상복탑아 또한 이름을 서명하여 미루어 사양했다. 한동 추장 또한 합하여 말하고 천거하며 또한 두 위의 번인들이 이로써 안정되기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황제가 그 말을 받아들여 가정을 도지휘첨사로 발탁하고 잠시 인무(인장과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 이때 토로번이 여전히 하밀을 점거하고 있었다. 하밀 도독 한신이 적근과 결탁하여 구원을 삼아 그 성을 회복하니 조서를 내려 포상했다.

[해설]
적근몽고위가 하밀 수복 작전에 기여한 내용이다.

19년 이웃 번인 야야극력이 침범하여 와서 크게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니 적근이 드디어 잔파되었다. 그 추장이 변방 신하에게 호소하여 곡식을 주었다. 또 그 성을 수리하게 하고 유랑하고 이동한 자들을 생업에 복귀하게 했으나 적근은 이로부터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홍치 연간에 아목랑이 하밀을 격파할 때 오히려 그 병사를 썼다. 뒤에 허진이 서쪽을 정벌할 때 또한 병사로써 와서 도왔다. 정덕 8년 토로번이 장수를 보내 하밀을 점거하고 드디어 적근을 크게 약탈하고 그 인장을 빼앗아 갔다. 팽택이 경략함에 이르러 비로소 인장을 가지고 와서 돌려주었다. 얼마 뒤 번의 도적이 숙주를 범하여 중국과 어려움이 되었다. 적근이 그 요충지에 해당하여 더욱 유린당했다. 부족 무리가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 모두 숙주 남산으로 안으로 옮겨오니 그 성이 마침내 비게 되었다.
가정 7년 총독 왕경이 여러 군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할 때 적근의 무리를 조사하니 겨우 천여 명이었다. 이에 상복탑아의 아들 쇄남속에게 도독을 제수하여 그 부족의 장막을 통솔하게 했다.

[해설]
적근몽고위의 몰락 과정이다. 주변 세력(야야극력, 투르판)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쇠퇴하다가 결국 본거지를 버리고 명나라 영토 내(숙주 남산)로 이주하여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사주위(沙州衛)

사주위. 적근몽고로부터 서쪽으로 200리를 가면 고욕이라 하고 고욕에서 남쪽으로 꺾어 서쪽으로 190리를 가면 과주라 하며, 과주로부터 서쪽으로 440리를 가면 비로소 사주에 도달한다. 한나라 돈황군 서역의 경계이며 옥문관, 양관과 아울러 서로 거리가 멀지 않다. 후위 때 비로소 사주를 두었고 당나라가 따랐으며 뒤에 토번에 함몰되었다. 선종 때 장의조가 주를 가지고 내지(당나라)에 붙어 귀의군을 설치하고 절도사를 제수했다. 송나라 때 서하에 들어갔고 원나라 때는 사주로였다.

[해설]
사주(현재의 돈황)의 역사 지리적 배경이다. 실크로드의 핵심 요충지로 옥문관, 양관이 위치한 곳이다. 장의조의 귀의군 이야기는 당나라 말기 사주의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홍무 24년 몽골 왕자 아로가실리가 국공 말대아파적, 사도 고아란 등을 보내 내조하여 말과 박옥(가공 안 된 옥)을 바쳤다. 영락 2년 추장 곤즉래, 매주가 무리를 이끌고 귀순해 왔다. 명하여 사주위를 설치하고 두 사람에게 지휘사를 제수하고 인장과 고명, 관대, 습의를 하사했다. 얼마 뒤 그 부하 적납이 와서 귀부하니 도지휘첨사를 제수했다. 5년 여름 감숙 총병관 송성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듣건대 적납은 본래 매주의 부곡(부하)이었는데 지금 관직이 그 윗자리에 있으니 높고 낮음의 윤리가 무너졌다. 이미 매주를 발탁하여 도지휘동지로 삼았다. 지금부터 마땅히 상세히 살펴 정하고 혹시라도 차례를 잃지 않게 하라."라고 했다. 8년 곤즉래를 도지휘첨사로 발탁하고 그 요속 중 품계가 나아간 자가 20인이었다. 매주가 죽자 곤즉래가 위의 일을 관장했고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22년 오이라트 현의왕 태평의 부하가 와서 조공하는데 도중에 도적에게 막히자 곤즉래가 사람을 보내 경사까지 호송했다. 황제가 가상히 여겨 채색 비단을 하사하고 얼마 뒤 도독첨사로 승진시켰다.

[해설]
사주위의 설치와 곤즉래, 매주 등 초기 지도자들의 이야기다. 곤즉래는 오랫동안 사주를 다스리며 명나라에 충성했다.

홍희 원년, 이력파리(일리) 및 살마아한(사마르칸트)이 전후하여 들어와 조공했는데 하밀 땅을 지나다가 아울러 사주 도적에게 가로막혀 겁탈당했다. 선종이 노하여 숙주 수장 비용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했다. 선덕 원년, 곤즉래가 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란하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 곡식 종자 백 석을 빌려주면 가을에 추수하여 관에 갚겠다고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번인은 곧 우리 백성인데 어찌 빌려준단 말인가?" 하고 즉시 주라고 명했다. 얼마 뒤 중관 장복을 그 땅에 사신으로 보내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7년에 또 가뭄 재해를 주상하여 칙서를 내려 숙주에서 식량 500석을 주게 했다. 얼마 뒤 하렬(헤라트) 조공 사신이 말하기를 사주를 지나다가 적근 지휘 혁고자 등에게 약탈당했다고 했다. 부의 논의가 적근 사람이 멀리 사주에 이르러 도적질했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황제가 곤즉래에게 명하여 살피게 하고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그가 이미 도적질을 했으니 다시 용납할 수 없다. 마땅히 본토로 몰아내고 다시 범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9년 사신을 보내 주상하기를 한동 및 서번이 자주 침략하고 모욕하며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여 편안히 살 수 없으니, 찰한 옛 성으로 옮겨 농사짓고 목축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황제가 칙서를 보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너희가 사주에 산 지 30여 년에 인구가 불어나고 가축이 풍요로운 것은 다 조정의 힘이다. 지난 해 하밀이 일찍이 너희가 침략하여 소란을 피운다고 주상했는데 지금 외부의 모욕 또한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다만 마땅히 분수를 따르고 직분을 지키며 경계를 보전하고 이웃과 화목하면 자연히 외환이 없을 것이다. 하필 동으로 옮기고 서쪽으로 옮겨 헛되이 수고로움을 취하려 하느냐."라고 했다. 또 한동, 서번에게 칙서를 내려 과연 사람과 가축을 침탈했다면 속히 돌려주라고 했다. 이듬해 또 하밀에게 침략당하고 또 오이라트가 핍박할까 두려워 스스로 설 수 없었다. 이에 부족 무리 200여 명을 이끌고 요새 아래로 와서 붙어 굶주리고 군색한 상황을 진술했다. 조서를 내려 변방 신하에게 곡식을 내어 구제하게 하고 또한 처치할 바를 논의하게 했다. 변방 신하가 고욕으로 옮길 것을 청하니 따랐다. 이로부터 다시 사주로 돌아가지 않고 다만 멀리서 그 무리를 거느릴 뿐이었다.

[해설]
사주위가 주변 세력(한동, 서번, 하밀, 오이라트)의 압박과 자연재해로 인해 쇠퇴하는 과정이다. 곤즉래는 안전한 곳으로 이주를 원했으나 명나라는 국경 방어를 위해 현지 고수를 명령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내지로 피난 오게 되었다.

정통 원년 서역 아단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데 한동 두목 가아즉 및 서번 야인에게 약탈당했다. 곤즉래가 명을 받들고 가서 추격하여 그 공물을 돌려받으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도독동지로 발탁했다. 4년 그 부하 도지휘 아적불화 등 130여 가구가 도망쳐 하밀로 들어갔다. 곤즉래가 조서를 받들어 찾았으나 주지 않았다. 조정이 충순왕에게 명하여 돌려주라 했으나 또한 주지 않았다. 마침 사신을 보내 그 새 왕을 책봉하게 되어 즉시 사람을 시켜 도망간 집들을 찾게 했다. 그러나 하밀은 겨우 도지휘 상가실력 등 84가구만 돌려주고 나머지는 여전히 보내지 않았다. 이에 한동 도지휘 반마사결이 오랫동안 사주에 머물며 목축하고 떠나지 않았고, 적근 도지휘 혁고자 또한 그 배반하고 도망한 자들을 받아들였다. 곤즉래가 여러 차례 조정에 호소하여 조정 또한 자주 칙서를 보내 힐책했으나 여러 부족이 많이 명을 받들지 않았다. 4년 8월 사람을 시켜 오이라트, 하밀의 일을 정탐하여 모두 그 실상을 얻어 보고했다. 황제가 기뻐하며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후하게 하사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 이북(몽골) 변방의 일을 보고하니 그 사신 2명의 관직을 올려주었다. 초기에 곤즉래가 사주를 떠날 때 조정이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고욕성을 수리하게 하고 수자리 병사를 거느리고 돕게 했다. 6년 겨울 성이 완성되자 내조하여 은혜에 감사하고 낙타와 말을 바치니 연회를 베풀고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7년 무리를 이끌고 하밀을 침범하여 그 사람과 가축을 획득하여 돌아왔다.

[해설]
사주를 떠나 고욕(苦峪)에 정착한 곤즉래의 활동이다. 비록 본거지는 잃었지만 여전히 명나라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충성했다. 주변 부족들과의 뺏고 뺏기는 갈등은 계속되었다.

9년 곤즉래가 죽자 장자 남가가 그 동생 극아라 영점 등을 거느리고 내조했다. 남가에게 도독첨사를, 그 동생에게 도지휘사를 제수하고 칙서를 내려 경계하고 타일렀다. 돌아온 뒤 그 형제들이 어그러져 다투고 부족 무리의 마음이 떠나 두 갈래가 되었다. 감숙 진장 임례 등이 그 군색하고 결핍함을 틈타 요새 안으로 옮기려 했다. 남가 또한 와서 말하기를 숙주의 소발화사에 거주하고 싶다고 했다. 임례 등이 드디어 11년 가을 도지휘 모합랄 등으로 하여금 남가와 함께 먼저 사주로 가서 그 무리를 어루만져 타일러 오게 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이르렀을 때 남가의 마음이 변하여 몰래 두 마음을 품으니 그 부하들이 많이 오이라트로 달아나려 했다. 임례 등이 군사를 진격시켜 핍박하여 마침내 그 전부를 거두어 요새로 들어와 감주에 거주하게 하니 무릇 200여 가구, 1230여 명이었고 사주는 마침내 비게 되었다. 황제는 그들이 핍박에 의해 왔으므로 정을 헤아릴 수 없다고 여겨 임례에게 그 편의를 깊이 계산하게 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내지에 편안히 거주하여 마침내 후환이 없었다. 사주는 한동 추장 반마사결의 소유가 되었다. 홀로 남가의 동생 쇄남분은 옮기는 것을 따르지 않고 오이라트로 도망가니 에센이 봉하여 기왕으로 삼았다. 임례가 그가 한동에 있는 것을 탐지하여 알고 기습하여 사로잡았다. 조정 신하들이 정법(사형)을 청했으나 황제는 그 부형의 공순함을 생각하여 죽음을 면하고 동창으로 유배 보냈다.

[해설]
사주위의 최후이다. 형제간의 내분과 명나라의 이주 압박 속에, 일부는 명나라 내지(감주)로 들어와 정착했고, 일부는 몽골(오이라트)로 도망쳤다. 이로써 사주(돈황) 지역은 명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나 한동위 등의 차지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투르판 등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보다 앞서 태종(영락제)이 하밀, 사주, 적근, 한동 4위를 가욕관 밖에 설치하여 서쪽 변경을 가려 막았다. 이때에 이르러 사주가 먼저 폐지되었고 여러 위 또한 점차 스스로 설 수 없게 되어 숙주에 마침내 일이 많아졌다.

[해설]
명나라 서북 방어 전략의 붕괴를 시사한다. 가욕관 밖 4개 위소가 무너지면서 방어선이 안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한동위(罕東衛)

한동위는 적근몽고 남쪽, 가욕관 서남쪽에 있으며 한나라 돈황군 땅이다. 홍무 25년 양국공 남옥이 도망가는 도적 기자의 손자를 한동 땅까지 추격하니 그 부족 무리가 많이 도망쳐 옮겨갔다. 서녕의 삼랄이 글을 써서 부르니 드디어 서로 이어 귀순해 왔다. 30년 추장 쇄남길랄사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한동위를 설치하고 지휘첨사를 제수했다.

[해설]
한동위의 위치와 설치 배경이다. 티베트계 부족으로 보인다.

영락 원년 그 형 답력습과 함께 내조하니 지휘사로 승진시켰다. 답력습에게 지휘동지를 제수하고 아울러 관대와 보초, 폐백을 하사했다. 이로부터 자주 조공했다. 10년 안정위가 주상하기를 한동이 자주 도둑이 되어 민가 300호를 약탈해 가고 다시 서번을 규합하여 관애(관문과 요새)를 가로막고 끊는다고 했다. 황제가 칙서를 내려 절실히 꾸짖고 약탈한 것을 돌려주게 했다. 16년 중관 등성을 그 땅에 사신으로 보냈다.

[해설]
한동위도 다른 부족들처럼 명나라에 조공하면서도 주변 부족을 약탈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였다.

홍희 원년 사신을 보내 즉위를 알리고 그 지휘동지 작아가에게 백금, 문양 있는 비단을 하사했다. 이때 관군이 곡선 도적을 정벌하는데 한동 지휘사 각리가가 종군하여 공이 있어 도지휘첨사로 발탁하고 고명을 하사하고 세습하게 했다. 그 지휘 나나가 주상하기를 소속 번민 1500명은 전례에 따라 차발마 250필을 바쳐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많이 적근으로 도망가 거주하니 초무하여 생업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황제가 즉시 명하여 부르게 하고 아울러 빚진 말을 면제해 주었다. 선덕 원년 곡선을 정벌한 공을 논하여 작아가를 도지휘동지로 발탁했다. 초기에 대군이 곡선을 토벌할 때 안정 부내 및 한동 밀라족 사람이 모두 놀라 도망갔다. 일이 평정되자 조서를 내려 지휘 진통 등에게 가서 부르게 했다. 이에 한동에서 생업을 회복한 자가 2400여 장, 남녀 1만 7300여 명이었고 안정 부족 사람들도 위(衛)로 돌아왔다.

[해설]
명나라의 군사 작전에 협조하여 지위를 높이고, 도망간 부족민들을 다시 불러모아 세력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정통 4년 한동, 안정이 무리를 합하여 서번 신장족을 침범하여 그 말, 소, 섞인 가축 만 단위로 약탈했다. 그 승려가 변방 장수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가축과 생산물이 텅 비어 해마다 바치는 차발마를 낼 곳이 없다고 했다. 황제가 두 위를 절실히 꾸짖고 그 잔인하고 포학하며 국법을 어기고 이웃 국경을 해친 죄를 나열하며 약탈한 것을 모두 돌려주게 했다. 또 승려에게 유시하여 옛 제도에 제한하지 말고 있는 대로 조공하게 했다. 이듬해 겨울 작아가가 반마사결과 함께 하밀을 침범하여 노약자 백 명, 말 백 필, 소와 양 헤아릴 수 없이 획득했다. 충순왕이 사신을 보내 찾았으나 주지 않았다. 황제가 듣고 다시 칙서를 내려 경계하고 타일렀다. 그러나 번인은 표절하고 약탈하는 것을 천성으로 삼아 천자가 비록 말이 있어도 다 따를 수는 없었다. 6년 여름 작아가와서 말을 바치니 연회를 베풀고 상을 주어 돌려보냈다. 9년 죽자 아들 상복아가가 직책을 이어 재량, 차, 베를 구하니 명하여 모두 주게 했다. 11년 도지휘사로 승진했다.

[해설]
한동위가 안정위와 연합하여 다른 부족을 약탈하는 등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모습이다. 황제의 명령도 잘 듣지 않는 통제 불능의 상태를 보여준다.

성화 9년 토로번이 하밀을 함락시켰다. 도독 이문이 서쪽을 정벌할 때 한동이 병사로써 와서 도왔다. 뒤에 도독 한신이 하밀을 회복할 때 또한 그 병사를 빌렸으니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하사했다. 18년 그 부하가 번족을 약탈하고 하청보에 침입한 자가 있었다. 도지휘 매침이 병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남녀 50여 명, 말, 소, 섞인 가축 4500여 마리를 빼앗아 돌아왔다. 변방 신하가 그 죄를 토벌하기를 청했으나 부의 신하가 어렵게 여겼다. 황제가 말하기를 "한동이 바야흐로 명령을 듣고 하밀을 협동하여 취하려 하고 아직 딴마음을 품은 형상이 없는데 어찌 작은 까닭으로 급하게 병사를 가하겠는가. 마땅히 유시하여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병사의 위엄을 빛내라(무력 시위하라)."라고 했다. 22년 변방 신하가 말하기를 "최근 관리를 보내 하밀에 가는데 토로번 사신 가족 400명과 함께 갔습니다. 길을 한동을 지나는데 도독 파마분 등에게 약탈당하고 조정 사신만 겨우 면했으니 토벌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명하여 사람을 보내 유시하기를 번인의 전례와 같이 화친을 의논하여 약탈한 물건을 돌려주게 하고 따르지 않으면 진격하라 했다.

[해설]
한동위는 하밀 수복전 등에서 명나라를 도왔기에, 명나라는 그들의 약탈 행위에 대해 즉각적인 토벌보다는 회유와 경고로 대응했다. 전략적 가치 때문에 봐주는 셈이다.

홍치 연간에 토로번이 다시 하밀을 점거했다. 병부 마문승이 그 성을 직접 공격하기를 의논하여 지휘 양저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양저가 말하기를 한동에 샛길이 있어 열흘이 안 되어 하밀에 도달할 수 있으니 마땅히 도적의 불의를 찔러 이로부터 진군해야 한다고 했다. 마문승이 말하기를 "만약 네 말과 같다면 한동 병사 3천을 먼저 가게 하고 우리 군사 3천이 뒤를 이어 각기 며칠 치 건량을 가지고 겸행(배로 속도를 냄)하여 습격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양저가 좋다고 칭했다. 마문승이 순무 허진에게 부탁하여 허진이 사람을 보내 한동에게 앞의 계책과 같이 하라고 유시했다. 마침 한동이 기일을 어기고 이르지 않아 관군은 그대로 큰 길을 따라 진격했고 도적은 도망칠 수 있었다. 12년 그 부족 사람이 서녕 융분족을 침범하여 인장과 고명 및 사람과 가축을 약탈해 갔다. 병부에서 도독에게 칙서를 내려 그 부하에게 선유하여 약탈한 물건을 숨기지 말고 주인에게 다 돌려주게 하고 명을 어기면 도독이 스스로 토벌하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해설]
토로번 공격 작전에서 한동위의 협조를 기대했으나 실패한 사례다. 한동위는 여전히 통제가 잘 안 되고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토로번이 날로 강해져 자주 이웃 국경을 침략하니 여러 부족이 모두 지탱할 수 없었다. 정덕 연간에 몽골 대추장이 청해에 들어오자 한동 또한 유린당하여 그 무리가 더욱 쇠약해졌다. 뒤에 토로번이 다시 하밀을 함락시키고 바로 숙주를 범했다. 한동이 다시 잔파되어 서로 이끌고 안으로 옮기기를 구하니 그 성이 마침내 버려지고 지켜지지 않았다. 가정 연간에 총독 왕경이 여러 부족을 안집(편안하게 모음)할 때 한동 도지휘 지단의 부락을 감주로 옮겼다.

[해설]
결국 몽골과 투르판의 협공 속에 한동위도 붕괴되어 감주(내지)로 이주하게 되었다.

한동좌위(罕東左衛)

한동좌위는 사주위 옛 성에 있는데 헌종(성화제) 때 비로소 세웠다. 초기에 한동 부족 사람 엄장이 종족과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자주 원수처럼 죽이니 이에 그 무리를 이끌고 사주 경계로 도망쳐 살았다. 조정이 즉시 경작과 목축을 허락하고 해마다 숙주에 말을 바치게 했다. 뒤에 부락이 날로 번성하여 더욱 한동의 통속을 받지 않았다. 그 아들 반마사결에 이르러 홍희 연간에 곡선을 토벌함을 따랐고 공이 있었으나 상이 미치지 않았다. 선덕 7년 스스로 조정에 진술하니 즉시 명하여 한동위 지휘사로 삼고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하사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주에 거주하며 본 위(한동위)로 돌아가지 않았다. 10년 도지휘사첨사로 승진했다.

[해설]
한동위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가 '한동좌위'가 되는 과정이다. 사주(돈황) 지역이 비자 그곳을 차지하고 세력을 키웠다.

정통 4년 사주위 도독 곤즉래가 반마사결이 그 땅을 침범하여 거주한다고 하여 보내 돌려보내 주기를 빌었다. 천자가 그 말과 같이 하여 칙서를 내려 선유했으나 반마사결은 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때 적근위 지휘 쇄합자가 사람을 죽인 이유로 사주 땅으로 도망갔는데 반마사결이 받아주었다. 쇄합자가 또 그 아들을 시켜 오사장에 가서 독약을 가져오게 하여 장차 돌아와 적근을 공격하려 했다. 적근 도독 차왕실가가 이로써 말하니 천자가 즉시 반마사결에게 칙서를 내려 이웃과 화목하고 경계를 보전하며 분쟁의 단서를 열지 말라고 했다. 한참 뒤 사주 전부가 모두 안으로 옮겨가자 사결이 드디어 그 땅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14년 감숙 진신 임례 등이 주상하기를 반마사결이 몰래 오이라트 에센과 통하고 근래에는 또 하밀과 병사를 겨루니 마땅히 본 위로 돌아가 살게 해야 한다고 했다. 천자가 다시 칙서를 내려 선유했으나 또한 명을 받들지 않았다. 얼마 뒤 품계를 올려 도지휘사로 했다. 경태, 천순 조정을 지나며 조공을 폐하지 않았다.

[해설]
반마사결은 사주 땅을 무단 점거하고 명나라의 명령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오이라트와 내통하기도 했으나, 명나라는 그를 완전히 내치지 못하고 관직을 주며 달래야 했다.

성화 연간에 반마사결이 죽고 손자 지크가 직책을 이었는데 부족 무리가 더욱 성해졌다. 그때 토로번이 강하여 하밀을 침범해 점거했다. 지크는 그들과 경계가 접하여 자기를 핍박할까 걱정하여 스스로 하나의 위(衛)가 되고자 했다. 15년 9월 주상하여 청하기를 한동, 적근의 예와 같이 위를 세우고 인장을 하사하여 서쪽 변경을 방어하게 해달라고 했다. 병부에서 말하기를 "근래 토로번이 하밀을 삼켜 한동 여러 위가 각기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여 서쪽 변경이 이 때문에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적근, 한동, 고욕이 또 각기 혐의와 틈을 품고 서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주를 다시 통리할 사람이 없다면 형세가 반드시 강한 적에게 병합될 것이니 변방이 더욱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마땅히 청한 바와 같이 즉시 사주 옛 성에 한동좌위를 설치하고 지크로 하여금 그대로 도지휘사가 되어 통치하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따랐다. 21년 감숙 수신이 말하기를 "북쪽 도적이 자주 사주를 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살육하고 약탈합니다. 또 흉년을 만나 사람들이 유랑하고 달아날 것을 생각합니다. 이미 곡식 500석을 보내 파종하게 했으니 비옵건대 사람들에게 월량을 주어 구제하게 하소서. 그 추장 지크가 적의 머리를 벤 공이 있으니 또한 비옵건대 아울러 서용하소서."라고 했다. 이에 지크를 도독첨사로 발탁하고 나머지는 재가했다.

[해설]
토로번(투르판)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가 공식적으로 '한동좌위'를 설치하고 지크를 임명하는 내용이다. 명나라는 이를 통해 무너진 서역 방어선을 재건하려 했다.

홍치 7년 지휘 왕영이 말하기를 "선대 조정에서 하밀위를 세워 서역의 요충지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여러 번이 조공 들어올 때 이곳에 이르러 반드시 잠시 쉬며 먹고 자게 했고 혹은 다른 도적에게 약탈당하면 인마가 접하여 호송할 수 있었으니 먼 곳을 부드럽게 대하는 도리가 지극했습니다. 지금 토로번이 그 땅을 도둑질하여 점거하고 오래도록 물러나지 않습니다. 듣건대 한동좌위는 하밀 남쪽에 있어 겨우 3일 거리이고 야야극력은 하밀 동북쪽에 있어 겨우 2일 거리이니 이는 모두 입술과 이(순망치한)의 땅이라 이해관계를 같이 합니다. 지난해 가을 토로번이 사람을 지크의 처소에 보내 귀부를 강요했으나 지크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야야극력 두목을 죽여 그 부족 사람들이 모두 원망을 갚으려 생각합니다. 마땅히 2부의 노고를 포상하고 힘을 합쳐 함께 공격하게 하여 영원히 그 근심을 없애야 하니 이 또한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하는(이이제이) 계책입니다."라고 했다. 상소가 병부에 내려졌으나 쓸 수 없었다(실행되지 않았다). 17년 오이라트 및 안정 부족 사람이 사주 사람과 가축을 크게 약탈했다. 지크가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 가욕관에 머리를 조아려 구제를 구했다. 천자가 이미 진휼하여 주고 다시 2부에 유시하여 원수를 풀고 싸움을 멈추며 병사를 얽어 분쟁을 부르지 말라고 했다.

[해설]
하밀을 되찾기 위해 한동좌위와 야야극력을 이용하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그 와중에 한동좌위는 오이라트와 안정위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다.

정덕 4년 지크 부내의 번족이 이웃 국경을 겁탈하고 약탈한 자가 있어 수신이 장차 토벌하려 했다. 병부에서 말하기를 "서융은 강하고 사나워 한나라, 당나라 이래로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조정이 하밀, 적근, 한동 여러 위를 세워 관직을 주고 칙서를 내려 개 이빨처럼 서로 견제하게(견아상제) 한 것은 단지 흉노의 오른팔을 자를 뿐만 아니라 또한 서쪽 땅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지금 번인이 서로 공격하는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기에 급하게 병사를 쓰려 합니까. 마땅히 도독 지크에게 칙서를 내려 여러 부족을 깨우쳐 타일러 잘못을 뉘우치고 병사를 쉬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재가했다.
지크가 죽자 아들 걸태가 이었다. 11년 토로번이 다시 하밀을 점거하고 병사로써 걸태를 위협하여 항복해 붙게 하고 드디어 숙주를 범했다. 좌위가 스스로 설 수 없어 서로 이끌고 숙주 요새 안으로 옮겼다. 수신이 막을 수 없어 인하여 어루만져 받아들였다.
걸태가 죽자 아들 일고가 이었다. 16년 가을 내조하여 상을 빌었다. 예관이 그가 전례를 넘었고 또한 상소를 올림에 통정사를 경유하지 않았다고 탄핵하며 관반자(사신 접대 관리)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따랐다.
걸태가 이미 안으로 옮긴 뒤 그 부하 첩목가, 토파 두 사람은 여전히 사주에 거주하며 토로번에게 복속되어 해마다 부녀자와 소, 말을 바쳤다. 마침 번의 추장이 징발하고 요구함이 가혹하고 급하자 두 사람이 원망했다. 가정 7년 여름 부족 5400명을 이끌고 귀순하니 사주는 드디어 토로번의 소유가 되었다.

[해설]
한동좌위 역시 토로번의 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내지로 이주했고, 남은 세력은 토로번에 흡수되거나 뒤늦게 명나라로 귀순했다. 사주(돈황)는 완전히 토로번의 손에 넘어갔다.

하매리(哈梅里)

하매리는 땅이 감숙과 가까우며 원나라 제왕 올납실리가 거주했다. 홍무 13년 도독 복영이 서량에서 병사를 훈련하다가 군사를 내어 땅을 공략하고 하매리의 길을 열어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하기를 청했다. 태조가 새서를 내려 말하기를 "땅을 공략한다는 청은 네 편의대로 들어주겠다. 그러나 장수는 모략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너는 삼가 소홀히 하지 말라."라고 했다. 복영이 드디어 진군했다. 올납실리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정성을 바쳤다. 이듬해 5월 회회(이슬람) 아로정를 보내 내조하고 말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문양 있는 비단을 하사하고 외오아(위구르) 땅에 가서 여러 번을 부르고 타일러 오게 했다. 23년 황제가 올납실리가 다른 부족과 원수처럼 죽인다는 것을 듣고 감숙 도독 송성 등에게 유시하여 병사를 엄히 하여 대비하게 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연안, 수덕, 평량, 영하에서 말로써 호시(무역)하기를 청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번인은 교활하고 속임수가 많다. 호시의 청이 우리를 엿보는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중국이 그 말을 이롭게 여기다가 그 해를 생각지 않으면 잃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마땅히 듣지 말라. 지금부터 오는 자는 모두 경사로 보내라."라고 했다. 이때 서역 회흘(위구르)로서 조공 오는 자가 많이 하매리에 의해 저지당했다. 다른 길을 따라오는 자가 있으면 또한 병사를 보내 가로막고 죽였다. 황제가 듣고 노했다. 8월 도독첨사 유진에게 명하여 송성과 함께 병사를 감독하여 토벌하게 했다. 유진 등이 양주를 경유해 서쪽으로 나가 밤을 타서 바로 성 아래에 이르러 사방에서 포위했다. 그 지원 악산이 밤에 성을 타고 내려와 항복했다. 여명에 올납실리가 말 300여 필을 몰고 포위를 뚫고 나갔다. 관군이 다투어 그 말을 취하자 올납실리는 가족을 이끌고 말 뒤를 따라 도망갔다. 유진 등이 그 성을 공파하고 빈왕 별아겁첩목아, 국공 성아타아지 등 1400명을 베고 왕자 별렬겁 부속 1730명, 금은 인장 각 1개, 말 630필을 획득했다. 25년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고 죄를 청했다. 황제가 받아들이고 백금과 문양 있는 비단을 하사했다.

[해설]
하매리는 나중에 '하밀위(Hami)'로 불리게 되는 곳의 초기 명칭이다. 명나라 초기에 복속되었으나, 서역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무역을 방해하자 명나라가 군사를 보내 정벌했다. 이후 다시 항복하여 명나라의 질서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명나라 서역 경영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된다.

 

 

 

명사(明史) 권331 열전 제219 서역3


오사장 대보법왕

오사장(위짱)은 운남 서쪽 경계 밖에 있으며, 운남 여강부에서 1천여 리, 사천 마호부에서 1천5백여 리, 섬서 서녕위에서 5천여 리 떨어져 있다. 그 땅에는 승려가 많고 성곽이 없다. 흙으로 쌓은 큰 대 위에서 무리를 지어 살며, 고기를 먹지 않고 아내를 얻지 않으며, 형벌도 없고 병기도 없으며 질병이 드물다. 불경이 매우 많은데 능가경이 만 권에 이른다. 흙으로 쌓은 대 밖에는 고기를 먹고 아내를 얻는 승려도 있다.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는 파스파(팔 사파)를 높여 대보법왕으로 삼고 옥인을 하사했으며, 그가 죽자 황천지하 일인지상 선문보치 대성지덕 보각진지 좌국여의 대보법왕 서천불자 대원제사라는 호를 내렸다. 이로부터 그 제자로서 계승하는 자는 모두 제사(제국의 스승)라고 칭하였다.

홍무(명 태조) 초기에 태조는 당나라 때 토번의 난을 거울삼아 이를 제어하고자 생각했다. 오직 그 풍속이 숭상하는 바를 따라 승려를 등용하여 선으로 인도하게 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 널리 불러 타일렀다. 또한 섬서행성 원외랑 허윤덕을 그 땅에 보내 원나라 때의 옛 관료들을 천거하여 경사(수도)로 와서 관직을 받게 했다. 이에 오사장의 섭제사 남가파장복이 먼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홍무 5년 12월에 경사에 도착했다. 황제가 기뻐하여 붉은 비단 가사 및 신발, 모자, 돈과 물품을 하사했다. 이듬해 2월 몸소 입조하여 천거한 옛 관료 60명을 올렸다. 황제가 모두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섭제사를 치성불보국사로 고치고 옥인과 채색 비단 안팎 옷감 각 20필을 하사했다. 옥 장인이 도장을 만들었는데 황제가 옥이 아름답지 않다고 보고 다시 만들게 하니 그 숭배와 공경이 이와 같았다. 하직하고 돌아갈 때 하주위에 명하여 관리를 보내 칙서를 가지고 동행하게 하여 아직 귀부하지 않은 여러 번(오랑캐)을 불러 타이르게 했다. 겨울에 원나라 제사의 후손 쇄남견파장복과 원나라 국공 가열사감장파장복이 아울러 사신을 보내 옥인을 요청했다. 조정 신하들이 이미 하사한 적이 있어 다시 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여 문이 있는 비단을 하사했다.

홍무 7년 여름, 불보국사가 제자를 보내 조공했다. 가을, 원나라 제사 파스파의 후손 공가감장파장복 및 오사장 승려 답력마팔랄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봉호를 청했다. 조서를 내려 제사의 후손을 원지묘각홍교대국사로 삼고 오사장 승려를 관정국사로 삼았으며 아울러 옥인을 하사했다. 불보국사가 다시 제자를 보내 조공하고 천거한 토관 58명을 올리니 또한 모두 관직을 제수했다. 홍무 9년 답력마팔랄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11년 다시 조공하고 옛 관료 16명을 천거하여 선위, 초토 등의 관직을 주기를 주청하니 또한 모두 윤허했다. 14년 다시 조공했다.

그때 남가파장복은 이미 죽고, 할리마(카르마)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가 도술이 있다 하여 상사라고 칭했다. 성조(영락제)가 연왕이었을 때 그 이름을 알았다. 영락 원년 사례소감 후현, 승려 지광에게 명하여 서신과 폐백을 가지고 가서 부르게 했다. 그 승려가 먼저 사람을 보내 조공하고 몸소 사신을 따라 입조했다. 4년 겨울 장차 도착하려 하자 부마도위 목흔에게 명하여 가서 맞이하게 했다. 도착하자 황제가 봉천전에서 접견하고, 다음 날 화개전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황금 100냥, 백금 1,000냥, 보초 2만 관, 채색 비단 안팎 45필, 법기, 요와 욕(깔개와 이불), 안장 얹은 말, 향과 과일, 차와 쌀 등 모든 물품을 갖추어 하사했다. 그 수행원들에게도 하사함이 있었다. 이듬해 봄, 의장, 은 몽둥이, 상아 지팡이, 골타(무기의 일종), 요등, 사등, 향합, 불자 각 2개, 손화로 6개, 산개 1개, 은 교의, 은 발받침, 은 나무 의자, 은 대야, 은 항아리, 청색 둥근 부채, 홍색 둥근 부채, 절할 때 쓰는 깔개, 장막 각 1개, 번당(깃발) 48개, 안장 얹은 말 2필, 짐 싣는 말 4필을 하사했다.

황제가 고황후(마황후)에게 복을 빌고자 하여, 영곡사에서 7일 동안 보편적인 구제를 위한 큰 재를 올리게 했다. 황제가 몸소 향을 피웠다. 이에 상서로운 구름, 단 이슬, 푸른 까마귀, 흰 코끼리 같은 것들이 연일 모두 나타났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시신들이 부와 송을 많이 바쳤다. 일이 끝나자 다시 황금 100냥, 백금 1,000냥, 보초 2,000관, 채색 비단 안팎 120필, 말 9필을 하사했다. 그 제자 관정원통선혜대국사 답사파라갈라사 등에게도 넉넉히 하사했다. 드디어 할리마를 만행구족 시방최승 원각묘지혜 선보응우국 연교여래 대보법왕 서천대선자재불로 봉하여 천하의 불교를 통솔하게 하고, 인과 고명 및 금, 은, 보초, 채색 비단, 금을 짜 넣은 구슬 가사, 금은 기물, 안장 얹은 말을 하사했다. 그 제자 패륭포와상아가령진을 관정원수정혜대국사로, 고일와선백을 관정통오홍제대국사로, 과란라갈라감장파리장복을 관정홍지정계대국사로 삼고 아울러 인과 고명, 은과 보초,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얼마 후 할리마에게 명하여 오대산에 가서 큰 재를 올리고 다시 고황후를 위해 복을 빌게 했으며 하사함이 후했다. 6년 4월 하직하고 돌아가니 다시 금과 비단, 불상을 하사하고 환관에게 명하여 호위하며 가게 했다. 이로부터 정통 말년까지 조공한 것이 8번이었다. 이후 법왕이 죽자 오랫동안 조공하지 않았다. 홍치 8년 왕 갈리마파가 비로소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12년에 두 번 조공하니 예관이 1년에 두 번 조공하는 것은 규정이 아니라며 그 하사품을 줄일 것을 청하여 따랐다.

정덕 원년 조공하러 왔다. 10년 다시 조공하러 왔다. 당시 황제(무종)가 측근의 말에 미혹되어 오사장 승려 중에 전생, 현생, 내생을 아는 자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활불(생불)이라 부른다고 하니 기꺼이 그를 보고자 했다. 영락, 선덕 연간에 진성, 후현이 서번에 들어간 전례를 상고하여 환관 유윤에게 명하여 역마를 타고 가서 맞이하게 했다. 대학사 양저 등이 말하기를 서번의 종교는 삿되고 망령되어 경전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 조종조에서 비록 일찍이 사신을 보냈으나 대개 천하가 처음 평정되어 그를 빌려 어리석고 완고한 자들을 교화하고 거친 복종 구역을 진무하려 함이었지, 그 가르침을 믿어 숭봉한 것이 아닙니다. 태평성대가 된 후 역대 황제들께서는 단지 그들이 내조함으로 인하여 상을 주었을 뿐, 일찍이 명을 받은 사신을 가볍게 욕보여 멀리 그 땅에 가게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갑자기 근시(환관)를 보내 깃발을 보내니 조정과 재야가 듣고 놀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유윤이 소금 인용 수만 개를 요청하고 동원하는 배가 백 척에 이르며, 또 돈과 물품을 편의대로 처분하도록 허락하시니, 형세가 반드시 사소금을 휴대하고 역참을 소란하게 하여 관민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지금 촉(사천) 지방의 큰 도적들이 막 평정되어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관청에는 이미 남은 비축이 없으니 반드시 군민에게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게 될 것이고, 험한 곳으로 달려가 도적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물며 천전 육번을 벗어나 국경을 나가면 수만 리의 여정을 거치며 몇 해가 걸리는데, 길에는 역참이 전혀 없으니 사람과 말은 어디서 먹고 잡니까? 만약 도중에 도적을 만나면 무엇으로 막겠습니까? 중국의 체통을 훼손하고 외번의 모욕을 받아들이니 하나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가져갈 칙서는 신들이 감히 작성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황제가 듣지 않았다. 예부상서 모기, 육과급사중 엽상, 13도 어사 주륜 등이 아울러 간절히 간언했으나 또한 듣지 않았다.

유윤이 떠날 때 진주로 깃발을 만들고 황금으로 공양 도구를 만들었으며 그 승려에게 금인을 하사하고 호상으로 수만 금을 계산했으며 내탕고의 황금이 그 때문에 바닥났다. 유윤에게 칙명을 내려 왕복 10년을 기한으로 삼았고 가져가는 차와 소금이 수십만으로 계산되었다. 유윤이 임청에 이르자 조운선이 그 때문에 막혀 지체되었다. 협강에 들어서자 배가 커서 나아가기 어려워 작은 배로 바꾸었는데 서로 이어진 것이 200여 리였다. 성도에 도착하자 날마다 관청 쌀 100석과 채소 값 은 100냥을 지출했고, 금관역에서 부족하여 인근 수십 역참에서 가져다 공급했다. 서번으로 들어갈 기물을 만드는데 추산한 값이 20만이었다. 지방관이 힘써 간쟁하여 13만으로 줄였다. 장인들이 섞여서 만드느라 밤낮을 이었다. 1년 여를 머물다 비로소 장교 10명,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갔는데 두 달 넘어 그 땅에 들어갔다. 이른바 활불이라는 자는 중국이 유인하여 해칠까 두려워 숨어서 나와 보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노하여 위세로 협박하고자 했다. 번인(토착민)들이 밤에 그들을 습격하여 보물과 기계를 약탈하여 갔다. 장교 중에 죽은 자가 2명, 병사 수백 명이었고 부상자는 그 절반이었다. 유윤은 좋은 말을 타고 질주하여 겨우 면했다. 성도로 돌아와 부하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빈 함만 가지고 달려와 주상했는데, 도착하니 무종은 이미 붕어했다. 세종이 유윤을 소환하여 법리에 맡겨 죄를 다스렸다.

가정 연간에 법왕이 오히려 자주 입공하였고 신종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승려 쇄남견착이라는 자가 있어 과거와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다고 하여 활불이라 칭했는데 순의왕 알탄(타타르의 칸)도 그를 숭신했다. 만력 7년 활불을 맞이한다는 명분으로 서쪽으로 오이라트를 침범했다가 패했다. 이 승려가 살생을 좋아하는 것을 경계하고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알탄 또한 이 승려에게 중국과 통교할 것을 권하니, 이에 감주로부터 장거정에게 편지를 보내 스스로 석가모니 비구라 칭하고 통공을 구하며 예물을 보냈다. 장거정은 감히 받지 못하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가 받으라고 명하고 그 조공을 허락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 또한 활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승려가 기이한 술법으로 남을 복종시킬 수 있어 여러 번이 다 그 가르침을 따르니, 대보법왕 및 천화왕 등 여러 왕들도 모두 머리를 숙이고 제자라 칭했다. 이로부터 서방은 오직 이 승려를 받들 줄만 알고 여러 번왕은 헛된 지위만 지킬 뿐 다시는 그 호령을 시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해설]

오사장(Wusizang)은 티베트의 중부 지역인 '위짱(U-Tsang)'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티베트 불교의 유력자들에게 칭호를 내리고 관리하는 정책을 폈다. 대보법왕(Dabao Fawang)은 티베트 불교 까규파의 수장인 '카르마파'에게 내린 칭호이다. 원나라 때는 사카파가 우세했으나 명나라 때는 까규파가 부상했다. 명나라는 이들에게 벼슬과 경제적 이익(조공 무역)을 주어 회유하고 변방을 안정시키려 했다.

글의 후반부에 나오는 '활불' 소동은 명나라 무종 정덕제가 불교에 심취하여 환관 유윤을 보내 티베트의 고승을 무리하게 초청하려다 실패하고 국고를 탕진한 사건을 비판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마지막에 언급된 쇄남견착은 겔룩파의 수장인 제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를 말한다. 알탄 칸과의 만남을 통해 몽골에 티베트 불교가 확산되고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가 처음 사용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부터 기존의 법왕들은 힘을 잃고 겔룩파(황모파)가 티베트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대승법왕

대승법왕은 오사장 승려 곤택사파이니 그 제자 역시 상사라고 불렀다. 영락 연간에 성조가 이미 할리마를 봉하고, 또 곤택사파가 도술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환관에게 명하여 옥새가 찍힌 서신과 은, 비단을 가지고 가서 부르게 했다. 그 승려가 먼저 사람을 보내 사리, 불상을 조공하고 드디어 사신과 함께 입조했다. 11년 2월 경사에 도착하니 황제가 즉시 접견하고 장경, 은과 보초, 채색 비단, 안장 얹은 말, 차와 과일 등 여러 물품을 하사하고, 만행원융묘법 최승진여혜지 홍자광제호국 연교정각 대승법왕 서천상선금강 보응대광명불에 봉하여 천하의 불교를 통솔하게 하고, 인과 고명, 가사, 번당, 안장 얹은 말, 우산과 기물 등 여러 물품을 하사했는데, 예우는 대보법왕 다음이었다. 이듬해 하직하고 돌아가니 전보다 더 하사하고 환관에게 명하여 호위하며 가게 했다. 그 후 자주 입공하니 황제 또한 선후로 환관 교래희, 양삼보에게 명하여 불상, 법기, 가사, 선의, 융으로 짠 비단, 채색 비단 등 여러 물품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했다. 홍희, 선덕 연간에도 아울러 와서 조공했다.

성화 4년 그 왕 완복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예관이 말하기를 법왕의 인문이 없고 또 조주를 경유하여 들어왔으니 규정이 아니므로 마땅히 그 하사품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사신이 말하기를 사는 곳이 오사장에서 20여 일 거리인데 5년을 거쳐야 비로소 경사에 도달하고 또 바친 말이 많으니 하사품을 온전히 주기를 빈다고 하니, 명하여 수량을 헤아려 더해 주었다. 17년 조공하러 왔다.

홍치 원년 그 왕 상가와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관례에 법왕이 죽으면 그 제자가 스스로 서로 계승하고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3년 보교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대승법왕이 직위를 세습할 것을 주청했다. 황제는 단지 그 조공만 받고 하사품을 주어 돌려보냈으며 습직은 명하지 않았다.

정덕 5년 그 제자 작길아사아 등을 보내 하주위를 통해 입공했다. 예관이 조공하는 길(공도)이 아니라고 하여 상을 줄이고 아울러 지휘 서경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따랐다. 얼마 후 작길아사아가 황제에게 총애를 받아 또한 대덕법왕에 봉해졌다. 10년 승려 완복쇄남견참파이장복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대승법왕 습직을 구했다. 예관이 상고하는 것을 실수하여 마침내 허락했다. 가정 15년 보교, 천교 여러 왕과 함께 조공하러 왔는데 사신이 4천여 명에 이르렀다. 황제가 인원이 정해진 수를 넘었다 하여 그 상을 줄이고 아울러 사천 삼사 관리가 함부로 보낸 죄를 다스렸다.

초기에 성조(영락제)가 천화 등 5왕을 봉할 때 각기 나누어 가진 땅이 있었으나, 오직 두 법왕(대보, 대승)은 떠돌아다니는 승려로서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기에 그 조공 시기가 3년의 반열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가 끝날 때까지 조공을 받들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해설]

대승법왕(Dacheng Fawang)은 사캬파의 고승 쿤가 타시(Kunga Tashi)에게 내린 칭호이다. 대보법왕(까규파)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지위로 대우받았다. '대승'은 대승불교를 의미한다. 이들은 특정 영토를 다스리기보다는 종교적 권위를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으나, 명나라 중기 이후로는 토착 세력화되거나 조공 무역의 이익을 노리고 사절단 규모를 비대하게 늘려 명나라 재정에 부담을 주기도 했다. 작길아사아(Chokyi Ozer)가 대덕법왕으로 봉해진 것은 무종 정덕제의 불교 편향적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대자법왕

대자법왕은 이름이 석가야실이며, 역시 오사장 승려로서 상사라고 불리던 자이다. 영락 연간에 이미 두 법왕을 봉하자 그 무리들이 다투어 천자를 뵙고 은총을 구하고자 하여 오는 자들의 발꿈치가 서로 닿을 정도였다. 석가야실 또한 12년에 입조하니 예우가 대승법왕 다음이었다. 이듬해 묘각원통자혜보응 보국현교관정홍선 서천불자 대국사에 명하고 인과 고명을 하사했다. 14년 하직하고 돌아가니 불경, 불상, 법장, 승복, 비단, 금은 기물을 하사하고 또 황제가 지은 찬사를 하사하니 그 무리들이 더욱 영광으로 여겼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17년 환관 양삼보에게 명하여 불상, 옷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하사했다. 21년 다시 와서 조공했다. 선덕 9년 입조하니, 황제가 경사에 머물게 하고 성국공 주용, 예부상서 호영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만행묘명진여상승 청정반야홍조보혜 보국현교지선 대자법왕 서천정각여래 자재대원통불로 책봉하게 했다.

선종이 붕어하고 영종이 즉위하자, 예관이 먼저 번승 690명을 도태시킬 것을 주주했고 정통 원년에 다시 청했다. 대자법왕 및 서천불자는 예전과 같이 하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되 원하지 않는 자는 술과 음식, 녹봉을 줄일 것을 명하니 이로부터 도성 아래가 조금 깨끗해졌다. 서천불자는 능인사 승려 지광인데 본래 산동 경운 사람이다. 홍무, 영락 연간에 자주 사신으로 서역 제국에 갔다. 성조가 국사라는 호를 하사했고, 인종이 원융묘혜정각홍제 보국광범연교관정광선 대국사라는 호를 더하고 금인, 관복, 금은 기물을 하사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서천불자를 더했다.

초기에 태조가 번승을 불러온 것은 본래 빌려서 어리석은 풍속을 교화하고 변방의 환란을 없애고자 함이었으므로 국사, 대국사를 제수한 것은 4~5명에 불과했다. 성조가 그 교를 겸하여 숭상함에 이르러 천화 등 5왕 및 두 법왕 외에 서천불자를 제수한 자가 2명, 관정대국사가 9명, 관정국사가 18명이었고 그 외 선사, 승관은 다 셀 수가 없었다. 그 무리들이 길에서 교차하며 밖으로는 역참을 소란하게 하고 안으로는 국고를 축내어 공사가 소란스러웠으나 황제는 근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는 자들을 즉시 돌려보냈다. 선종 때에 이르러서는 오랫동안 경사에 머물게 하여 소비가 더욱 심했다. 영종 초년에 비록 많이 돌려보내고 배척했으나 그 후 봉호를 더한 자 역시 적지 않았다. 경태 연간에 번승 사가를 홍자대선법왕으로, 반탁아장복을 관정대국사로 봉했다. 영종이 복벽하자 힘써 경태제의 정치를 반대로 하여 법왕을 대국사로, 대국사를 국사로 강등했다.

성화 초기에 헌종이 다시 번승을 좋아하여 이르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찰파견참, 찰실파, 영점죽 등이 비밀교(밀교)로써 총애를 얻어 나란히 법왕에 봉해졌다. 그 다음은 서천불자이고, 그 외 대국사, 국사, 선사를 제수받은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사방의 간사한 백성들이 투탁하여 제자가 되면 문득 관청의 음식을 얻어먹으니 매년 소비가 수만 금이었다. 조정 신하들이 여러 번 말했으나 다 거절하고 듣지 않았다. 효종이 즉위하자 번승을 깨끗이 도태시켜 법왕, 불자 이하를 모두 차례로 강등하고 본토로 몰아내고 그 인과 고명을 빼앗으니 이로 말미암아 도성 아래가 다시 깨끗해졌다.

홍치 6년 황제가 측근의 말에 미혹되어 영점죽 등을 경사로 부르도록 명했다. 언관들이 번갈아 글을 올려 힘써 간하니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13년 옛 서천불자 착가령점을 위해 탑을 세우도록 명했다. 공부상서 서관 등이 말하기를 이 승려가 나라에 유익함이 없으니 무덤을 만드는 것으로 족하고 탑을 세우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얼마 후 나복견참 등 3명을 관정대국사로 명했다. 황제가 붕어하자 예관이 이교를 내칠 것을 청하여 3명을 모두 선사로 강등했다.

이윽고 무종이 아첨하는 신하들에게 미혹되어 다시 영점죽을 경사로 불러 관정대국사로 삼고, 먼저 강등했던 선사 3명을 국사로 삼았다. 황제는 번어(티베트어) 익히기를 좋아하여 표방(표범 우리, 무종의 유흥 장소)으로 끌어들이니 이로 말미암아 번승이 다시 성해졌다. 나복견참 및 찰파장복을 법왕으로 봉하고 나복령점 및 작즉라죽을 서천불자로 봉했다. 얼마 후 영점반단을 대경법왕으로 봉하고 번승에게 도첩 3천 장을 주어 스스로 승려가 되게 했다. 혹자가 말하기를 대경법왕은 곧 황제(무종)가 스스로 칭한 호라고 했다.

작길아사아는 오사장 사신인데 표방에 머물며 총애를 받아 대덕법왕에 봉해졌다. 그 제자 2명을 정사, 부사로 삼아 본토로 돌아가 살게 하되 대승법왕의 전례와 같이 입공하게 하고, 또 두 사람을 위해 국사 고명을 청하고 서번으로 들어가 차를 베풀게(설차) 해달라고 빌었다. 예관 유춘 등이 불가하다고 고집했으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유춘 등이 다시 말하기를 "오사장은 서방 멀리 있어 성품이 지극히 완악하고 사납습니다. 비록 4왕을 두어 어루만지고 교화하나 그들이 와서 조공하는 것은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차를 가지고 가게 하고 고명을 하사하면, 그들이 혹 황제의 뜻을 빌려 여러 번을 유인하고 망령되이 청탁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따르면 불법이고 따르지 않으면 분란이 생길 것이니 해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이에 설차 칙명은 그만두고 고명만 주었다. 황제가 당시 더욱 이교를 좋아하여 항상 그 옷을 입고 그 경전을 외우고 익히며 내창에서 설법했다. 작길아사아 무리는 표방을 드나들며 권신들과 섞여 지냈는데 기염이 대단했다. 두 사람이 역마를 타고 돌아갈 때 거쳐 가는 곳이 소란스러워 공사가 다 그 해를 입었다.

세종이 즉위하자 다시 번승을 도태시켜 법왕 이하가 모두 배척되었다. 후에 세종이 도교를 숭상하고 더욱 불교를 내치니 이로부터 번승이 중국에 이르는 자가 드물었다.

[해설]

대자법왕(Daci Fawang)은 겔룩파(황모파)의 창시자 쫑카파의 제자인 샤캬 예셰(Sakya Yeshe)에게 내린 칭호이다. 겔룩파는 이후 달라이 라마 제도를 통해 티베트의 지배 세력이 된다.

이 단락은 명나라 중기의 숭불 정책, 특히 무종(정덕제) 시대의 폐단을 상세히 묘사한다. 초기에는 정치적 목적으로 티베트 승려를 우대했으나, 점차 황제 개인의 취향과 종교적 심취로 인해 과도한 재정 낭비와 사회적 혼란(가짜 승려 증가, 역참 마비 등)이 발생했음을 비판하고 있다. 서천불자로 언급된 지광은 중국인 출신 승려로 티베트와의 외교에 큰 역할을 했다. '대경법왕'이 무종 자신을 가리킨다는 서술은 무종의 기행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세종(가정제)이 도교를 숭상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력은 명나라 조정에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천화왕

천화왕은 오사장 승려이다. 초기에 홍무 5년 하주위가 말하기를 "오사장 파목죽파 땅에 장양사가감장이라는 승려가 있는데 원나라 때 관정국사에 봉해져 번인들이 추대하고 복종합니다. 지금 타감 추장 상죽감장과 관올아가 병사를 일으켜 싸우는데, 만약 이 승려를 보내 위무하고 타이르면 타감이 반드시 내부(귀순)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그 말을 따라 그대로 관정국사에 봉하고 사신을 보내 옥인과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이듬해 그 승려가 추장 쇄남장복을 시켜 불상, 불서, 사리를 조공했다. 이때 바야흐로 불보국사에게 명하여 번인을 불러 타이르게 했는데, 이에 파목죽파 승려 등이 스스로 연복사라 칭하고 사신을 보내 표문과 방물을 올렸다. 황제가 후하게 하사했다. 연복사란 그 땅 우두머리 승려의 칭호이다. 8년 정월 파목죽파 만호부를 설치하고 번인 추장으로 그 직을 삼았다. 얼마 후 장양사가가 죽자 그 제자 쇄남찰사파희감장복에게 관정국사를 제수했다. 21년 표문을 올려 병을 칭하고 동생 길랄사파감장파장복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니 드디어 관정국사를 제수했다. 이로부터 3년에 한 번 조공했다.

성조가 즉위하자 승려 지광을 보내 가서 하사했다. 영락 원년 사신을 보내 입공했다. 4년 봉하여 관정국사 천화왕으로 삼고, 이무기 뉴(손잡이)가 달린 옥인, 백금 500냥, 비단옷 3벌, 비단 50필, 파차(차의 일종) 200근을 하사했다. 이듬해 호교, 찬선 두 왕과 필력공와국사 및 필리, 타감, 농답 여러 위, 천장 여러 종족과 더불어 다시 역참을 설치하고 왕래를 통하게 했다. 11년 환관 양삼보가 오사장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그 왕이 조카 찰결 등을 보내 그를 따라 입공했다. 이듬해 다시 삼보에게 명하여 그 땅에 사신으로 가서 천교, 호교, 찬선 세 왕 및 천복, 천장 등과 함께 역참을 수리하고 아직 복구되지 않은 것은 다 복구하게 했다. 이로부터 도로가 다 통하여 사신이 수만 리를 왕래함에 도적의 걱정이 없었다. 그 후 조공이 더욱 빈번해졌다. 황제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다시 삼보에게 명하여 불상, 법기, 가사, 선의 및 융으로 짠 비단, 채색 비단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했다. 얼마 후 또 환관 대흥에게 명하여 가서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선덕 2년 환관 후현에게 명하여 가서 융으로 짠 비단과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그 조공 사신이 일찍이 역참 관리의 아들을 구타하여 죽였는데 황제는 그가 무지하기 때문이라 여겨 돌려보내고 왕에게 칙서를 내려 경계하게 했을 뿐이다. 9년 조공 사신이 돌아갈 때 하사품으로 차를 바꾸었다. 임조에 이르자 관리(유사)가 그것을 몰수하고 그 사신을 구금하고 명을 청했다. 조서를 내려 그를 석방하고 그 차를 돌려주었다.

정통 5년 왕이 죽었다. 선사 2명을 정사, 부사로 보내 그 조카 길랄사파영내감장파장복을 봉하여 천화왕으로 삼았다. 사신이 사사로이 차와 비단 수만 개를 매매하고 관리로 하여금 운반하게 했다. 예관이 금지할 것을 청했으나 황제는 그가 먼 곳 사람임을 생각하여 단지 스스로 배와 수레를 빌리게 했다. 얼마 후 왕이 죽어 상아결견잠파장복으로 이었다.

성화 원년 예부가 말하기를 "선덕, 정통 연간에 여러 조공이 30~40명을 넘지 않았는데 경태 때 10배가 되었고 천순 연간에 100배가 되었습니다. 지금 조공 사신이 방금 도착했는데, 천화왕에게 칙 유를 내려 홍무 연간의 옛 제도와 같이 하여 3년에 한 번 조공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5년 왕이 죽어 그 아들 공갈열사파중내령점견참파아장복에게 잇도록 명했다. 승려를 보내 조공을 바치고 돌아가다가 서녕에 이르러 절에 머물며 떠나지 않고, 또 이름을 사칭하여 입공하고 하사받은 옥새와 폐백 물품을 숨겼다. 왕이 부하 3명을 시켜 와서 재촉하자, 그 승려가 방 안에 가두고 두 사람의 눈을 도려냈다. 한 사람이 도망쳐 도지휘 손감에게 호소했다. 손감이 체포하여 옥에 두었는데 그 무리에게 뇌물을 받고 다시 (조정에) 보고했다. 사천 순안에게 내려 국문하여 다스리게 하니 승려 4명을 사형에 처하고 손감을 체포하여 다스리려 했는데 마침 사면령이 내려 모두 면했다.

17년 장하서의 여러 번이 거짓으로 번왕의 이름을 빌려 조공하는 일이 많으므로, 천화, 찬선, 천교, 보교 네 왕에게 칙서와 감합(확인증)을 주어 간사한 거짓을 막게 했다. 22년 사신 460명을 보내 조공하니 지방관이 새로운 규례를 따르며 단지 150명만 받아들였다. 예관이 사신이 이미 국경에 들어왔으니 굳게 거절하기 어렵다며 그 정을 따라 대개 받아들이고 훗날 두 번의 조공 수로 삼기를 청하니 따랐다.

홍치 8년 승려를 보내 조공했는데 돌아가다가 양주 광릉역에 이르러 대승법왕의 조공 사신을 만나 서로 더불어 가축을 죽이고 술을 마시며 3일 동안 떠나지 않았다. 다른 사신의 배가 이르는 것을 보면 돌을 던져 육지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지부 당개가 역참에 가서 그 뱃사공을 불러 경계하자 여러 승려들이 무기를 들고 소리치며 옹위하여 들어왔다. 당개가 달아나 피하고 하급 관리들이 힘써 싸워 겨우 면했는데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일이 알려지자 통사와 호송한 자의 죄를 다스리고 사람을 보내 왕을 타일러 스스로 그 사신을 다스리게 했다. 그때 왕이 죽어 아들 반아길강동찰파가 습직을 청하니 번승 2명을 정사, 부사로 삼아 가서 봉하게 했다. 도착하니 새 왕 또한 죽어 그 아들 아왕찰실찰파견참이 곧 책봉을 받고자 했는데 두 사람이 부득이하여 그에게 주고, 드디어 사은 예물을 갖추고 아울러 그 아버지가 거느리던 감합과 도장을 증거물로 바쳤다. 사천에 이르자 지방관이 그들이 멋대로 책봉했다며 탄핵하여 체포하여 논죄하니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감형하여 변방 수비로 보내고 부사 이하는 모두 용서했다.

정덕 3년 예관이 조공 사신이 정원을 넘었다 하여 후년에 응당 조공할 숫자로 삼게 했다. 가정 3년 보교왕 및 대소 36번과 함께 조공을 청했다. 예관이 여러 번이 지명과 종족 성씨를 갖추지 않았다 하여 지방관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했다. 42년 천화 등 여러 왕이 사신을 보내 입공하고 책봉을 청했다. 예관이 전례를 따라 번승 22명을 정사, 부사로 보내고 서반 주정대에게 감독하게 했다. 도중에 크게 소란을 피우고 주정대의 약속을 받지 않으니 주정대가 돌아와 그 상황을 알렸다. 예관이 이후부터 번왕을 봉할 때는 즉시 고명과 칙서를 사신에게 주어 가지고 돌아가게 하거나, 혹은 지방관에게 내려주어 국경 근처의 승려를 택해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할 것을 청했다. 여러 장(티베트)을 봉함에 경사 절의 번승을 보내지 않은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번인들은 평소 입공을 이익으로 여겨 비록 여러 번 단속을 거듭했으나 오는 자가 날로 늘어났다. 융경 3년 다시 법령을 정하여 천화, 천교, 보교 세 왕은 모두 3년에 한 번 조공하되 조공 사신은 각 1천 명으로 하고 반은 온전히 상을 주고 반은 줄여서 상을 주게 했다. 온전히 상을 받는 자는 8명을 보내 경사로 가게하고 나머지는 변방에 머물게 했다. 드디어 정해진 관례가 되었다.

만력 7년 조공 사신이 말하기를 천화왕의 장자 찰석장복이 직위를 잇기를 빈다 하니 그 청대로 했다. 한참 뒤 죽으니 그 아들이 습직을 청했다. 신종이 허락했으나 제서(임명장)에는 단지 천화왕이라고만 칭했다. 대학사 심일관의 말을 써서 오사장 파목죽파 관정국사 천화왕이라는 칭호를 더했다. 그 후 조공을 받듦이 바뀌지 않았다. 조공하는 물품은 그림 불상, 구리 불상, 구리 탑, 산호, 서각, 보로(티베트 모직물), 좌계모영(장식), 족력마, 철력마(말 품종), 칼과 검, 명갑주 등속이 있었는데 여러 왕들이 조공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았다.

[해설]

천화왕(Chanhua Wang)은 파목죽파(Phagmodrupa) 정권의 수장에게 내린 칭호이다. 파목죽파는 원나라 말기부터 명나라 초기까지 티베트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다. '연복사(Gyalpo)'는 왕이라는 뜻이다. 명나라는 이들을 '천화왕'으로 봉하여 티베트의 세속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조공 체계 안에 두었다.

이 단락은 조공 무역을 둘러싼 갈등, 사절단의 횡포(살인, 폭행, 밀무역), 그리고 명나라의 통제 노력(인원 제한, 감합 확인, 사신 파견 중단 등)을 상세히 보여준다. 특히 티베트 사절단이 명나라 지방관이나 민간인과 충돌하는 모습은 당시 조공 관계가 평화롭지만은 않았음을 시사한다. 만력제 때 다시 칭호를 정비하는 등 명나라 말기까지 관계가 지속되었다.

찬선왕

찬선왕은 영장 승려이다. 그 땅은 사천 경계 밖에 있는데 오사장에 비하면 가깝다. 성조가 즉위하여 승려 지광에게 명하여 사신으로 가게 했다. 영락 4년 그 승려 착사파아감장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관정국사로 명했다. 이듬해 찬선왕에 봉하고 국사는 예전과 같이 하며 금인, 고명을 하사했다. 17년 환관 양삼보가 사신으로 갔다. 홍희 원년 왕이 죽어 조카 남갈감장이 이었다. 선덕 2년 환관 후현이 사신으로 갔다. 정통 5년 늙었다고 주상하여 장자 반단감조로 대신하기를 청했다. 황제가 그 청을 따르지 않고 그 아들을 도지휘사로 제수했다.

초기에 입공은 정해진 기한이 없어서 영락부터 정통까지 혹은 1년 걸러 한 번 오고 혹은 1년에 두 번 왔다. 역대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가서 하사한 것은 금과 비단, 보초, 불상, 법기, 가사, 선복 등 하나로 족하지 않았다. 성화 원년에 이르러 비로소 3년에 한 번 조공하는 관례를 정했다.

3년 탑아파견찬에게 습봉을 명했다. 관례에 번왕을 봉하는 고명과 칙서 및 폐백은 관리를 보내 가지고 가서 하사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쪽 변방에 일이 많아 예관이 사신에게 주어 가지고 돌아가게 할 것을 비니 따랐다.

5년 사천 도사가 말하기를 "찬선 등 여러 왕이 정해진 제도를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각 절의 번승 132종을 거느리고 입공했는데 또한 번왕의 인문이 없어 지금 단지 10여 명만 남겨 조공 물품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이미 돌려보냈습니다."라고 했다. 예관이 말하기를 "번 땅은 넓고 멀며 번왕 또한 많으니 만약 관례를 따라 동시에 입공하면 안쪽 고을(내군)의 접대 비용이 피폐해질 것입니다. 여러 왕으로 하여금 응당 조공할 해에 각기 인문을 갖추어 차례를 취하여 오게 함만 못합니다. 지금 조공 사신이 이미 도착했으니 그 정을 거스르기 어렵습니다. 내년에 응당 조공할 숫자로 삼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재가했다.

18년 예관이 말하기를 "번왕은 3년에 한 번 조공하고 조공 사신은 150명으로 하는 것이 정해진 제도입니다. 근래 찬선왕이 잇달아 조공한 것이 두 번이고 이미 413명을 보냈습니다. 지금 봉작과 습직을 청하며 또 1,550명을 보냈으니 제도를 어겼으므로 마땅히 물리쳐야 합니다. 봉작과 습직을 청하는 자 300명만 허락하여 훗날 두 번의 조공 수로 삼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기를 빕니다." 하니 또한 재가했다. 드디어 남갈견찬파장복을 봉하여 찬선왕으로 삼았다. 홍치 16년 죽어 그 동생 단죽견잠에게 잇도록 명했다. 가정 이후에도 여전히 제도대로 조공했다.

[해설]

찬선왕(Zanshan Wang)은 영장(Lingzang) 지역의 승려에게 내린 칭호이다. 이곳은 사천성과 가까운 동부 티베트 지역으로 보인다. 명나라가 여러 지역의 유력자들에게 왕호를 주어 세력을 분산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조공 인원과 횟수를 둘러싼 갈등은 여기서도 반복되는데, 명나라는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인원을 제한하려 했고, 티베트 측은 무역 이익을 위해 인원을 늘리려 했다.

호교왕

호교왕은 이름이 종파알즉남가파장복이며 관각 승려이다. 성조 초기에 승려 지광이 그 땅에 사신으로 갔다. 영락 4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관정국사를 제수하고 고명을 하사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사례하니 호교왕에 봉하고 금인, 고명을 하사했으며 국사는 예전과 같이 했다. 드디어 해마다 입공했다. 12년 죽어 그 조카 간사아길랄사파장복에게 잇도록 명했다. 홍희, 선덕 연간에 아울러 입공했다. 얼마 후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그 작위가 마침내 끊어졌다.

[해설]

호교왕(Hujiao Wang)은 관각(Guanjue, 캄 지역의 Gojo로 추정)의 승려에게 내린 칭호이다. 이 작위는 후사가 없어 일찍 단절되었다.

천교왕

천교왕은 필력공와 승려이다. 성조 초기에 승려 지광이 칙서를 가지고 서번에 들어가니 그 국사 단죽감장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영락 원년 경사에 이르니 황제가 기뻐하여 연회를 베풀고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4년 또 조공하니 황제가 넉넉히 하사하고 아울러 그 국사 대판적달, 율사 쇄남장복에게 옷과 비단을 하사했다. 11년에 마침내 관정자혜정계대국사라는 호를 더하고 또 그 승려 영진파아길감장을 봉하여 천교왕으로 삼고 인과 고명,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그 후 매년 한 번 조공했다. 양삼보, 대흥, 후현의 사행 때 모두 금과 비단, 불상, 법기를 가지고 가서 하사했다.

선덕 5년 왕이 죽어 그 아들 작아가감파령점에게 잇도록 명했다. 한참 뒤 죽어 그 아들 령점팔아결견참에게 잇도록 명했다. 성화 4년 예관의 말을 따 3년에 한 번 조공하는 제도를 거듭 밝혔다. 이듬해 왕이 죽어 그 아들 령점견참팔아장복에게 습직하도록 명했다. 20년 황제가 번승 반저아를 보내 옥새가 찍힌 서신과 감합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했다. 그 승려가 가기를 꺼려하여 도중에 이르러 왕의 인신과 번문을 위조하여 복명하니 조서를 내려 체포하여 다스렸다.

정덕 13년 번승 령점찰파 등을 보내 그 새 왕을 봉하게 했다. 찰파 등이 말 쾌속선 30척을 빌려 식염을 싣고 서번으로 들어가는 매로(길을 사는) 자금으로 삼기를 구했다. 호과, 호부가 아울러 상소하여 다투었으나 듣지 않았다. 찰파 등이 도중에 탐욕스럽게 요구함에 만족이 없어 여량에 이르러 관홍주사 이유를 구타하여 거의 죽게 했으니 방자하고 횡포함이 이와 같았다. 가정 대에 이르기까지 천교왕은 조공을 멈추지 않았다.

[해설]

천교왕(Chanjiao Wang)은 필력공와(Biligongwa), 즉 티베트 불교 까규파의 지류인 드리궁 까규(Drigung Kagyu)의 수장에게 내린 칭호이다. 드리궁 지역은 라싸 북동쪽에 위치한다. 명나라는 까규파의 여러 지파(카르마, 드리궁, 스탁룽 등)에게 각각 왕호를 수여하여 세력 균형을 꾀했다. 사신들의 횡포와 위조 사건 등은 당시 명나라 관리 통제의 허점을 보여준다.

보교왕

보교왕은 사달장 승려이다. 그 땅은 오사장에 비해 더욱 멀다. 성조가 즉위하여 승려 지광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불러 타이르게 하고 은과 비단을 하사했다. 영락 11년 그 승려 남갈렬사파를 봉하여 보교왕으로 삼고 고명과 인, 채색 비단을 하사하니 자주 사신을 보내 통공했다. 양삼보, 후현이 모두 가서 그 나라에 하사했는데 여러 법왕 등과 같았다. 경태 7년 사신이 와서 조공하고 스스로 늙었다고 진술하며 그 아들 남갈견찬파장복으로 대신하기를 비니 황제가 그를 따랐다. 보교왕에 봉하고 고명과 칙서, 금인, 채색 비단, 가사, 법기를 하사했다. 관정국사 갈장, 우각의 상가파를 정사, 부사로 삼아 가서 봉하게 했다. 사천에 이르러 소와 말을 많이 고용하여 멋대로 개인 물건을 실었다. 예관이 그 죄를 다스릴 것을 청했는데 영종이 막 복벽하여 그 칙서를 거두고 공급하는 물품의 반을 줄이도록 명했다.

성화 5년 왕이 죽어 그 아들 남갈찰실견참팔장복에게 잇도록 명했다. 6년 옛 제도를 거듭 밝혀 3년에 한 번 조공하되 많아도 150명을 넘지 않게 하고 사천 아주를 경유하여 들어오게 했다. 국사 이하는 조공을 허락하지 않았다. 홍치 12년 보교 등 4왕 및 장하서 선위사가 동시에 입공하니 사신이 2,800여 명에 이르렀다. 예관이 공급 비용을 헤아릴 수 없다 하여 사천 지방관에게 칙서를 내려 제도를 따라 보내고 어기는 자는 물리쳐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따랐다. 정덕, 가정 대를 지나며 조공을 받들어 끊어지지 않았다.

[해설]

보교왕(Fujiao Wang)은 사달장(Sidazang), 즉 스탁룽 까규(Staglung Kagyu)의 수장에게 내린 칭호이다. 스탁룽 사원은 라싸 북쪽에 위치한다. 역시 까규파의 일파이다. 명나라는 이렇게 티베트 내부의 여러 종파를 분할하여 봉작함으로써 어느 한 세력이 독주하는 것을 막는 이이제이 정책을 썼다.

서천 아난공덕국

서천 아난공덕국은 서방의 번국이다. 홍무 7년 왕 복합노가 그 강주(강론하는 승려) 필니서를 보내 내조하고 방물 및 해독 약석을 조공했다. 조서를 내려 문이 있는 비단, 선의 및 포백 등 여러 물품을 하사했다. 그 후 다시 오지 않았다.

또한 화림국사 타아지겁렬실사파장복이 있었는데 또한 그 강주 여노왕숙을 보내 내조하고 구리 불상, 사리, 백합단포 및 원나라 때 받은 옥인 1개, 옥도서 1개, 은인 4개, 동인 5개, 금자패 3개를 바치니 연회를 베풀고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이듬해 국사가 입조하여 또 불상, 사리, 말 2필을 바치니 문이 있는 비단과 선의를 하사했다. 화림은 곧 원 태조(칭기즈칸)의 옛 도읍(카라코룸)으로 극북에 있어 서번이 아니나, 그 국사는 곧 번승이었다. 공덕국과 동시에 와서 조공했고 후에 역시 다시 오지 않았다.

[해설]

서천 아난공덕국(Ananda Merit Country)은 정확한 위치가 불분명하나 인도 북부나 카슈미르 인근의 소국으로 추정된다. 화림(Hualin)은 몽골의 카라코룸이다. 명나라 초기에 원나라의 잔존 세력이나 그 영향하에 있던 승려들이 명나라에 귀순하거나 탐색하러 왔던 상황을 보여준다.

서천 니팔랄국

니팔랄국(네팔)은 여러 장(티베트)의 서쪽에 있는데 중국과 거리가 매우 멀다. 그 왕은 모두 승려가 된다. 홍무 17년 태조가 승려 지광에게 명하여 옥새가 찍힌 서신과 채색 비단을 가지고 가게 하고 아울러 그 이웃 국경인 지용탑국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지광은 불경에 정통하고 재주와 변설이 있어 천자의 덕과 뜻을 선양했다. 그 왕 마달나라마가 사신을 보내 따라 입조하게 하여 금탑, 불경 및 명마와 방물을 조공했다. 20년 경사에 도달했다. 황제가 기뻐하여 은인, 옥도서, 고명과 칙서, 부험 및 번당,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23년 다시 조공하니 옥도서, 붉은 비단 우산을 더해 하사했다. 태조 때가 끝나도록 몇 해에 한 번 조공했다. 성조가 다시 지광에게 명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영락 7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러 왔다. 11년 양삼보에게 명하여 옥새 찍힌 서신, 은, 비단을 가지고 가서 그 후계 왕 사적신갈 및 지용탑왕 가반에게 하사하게 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 조공하러 왔다. 사적신갈을 봉하여 니팔랄 국왕으로 삼고 고명 및 도금한 은인을 하사했다. 16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러 오니 환관 등성에게 명하여 옥새 찍힌 서신, 비단, 사라를 가지고 가서 보답하게 했다. 거쳐 가는 한동, 영장, 필력공와, 오사장 및 야람복납에도 모두 하사함이 있었다. 선덕 2년 또 환관 후현을 보내 그 왕에게 융으로 짠 비단과 저사를 하사했는데 지용탑왕에게도 이와 같이 했다. 그 후 조공 사신이 다시 오지 않았다.

또 속도숭이라는 곳이 있는데 역시 서방의 나라이다. 영락 3년 행인 연디 등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 가서 부르고 은과 보초,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그 추장이 길이 멀다 하여 오지 않았다.

[해설]

니팔랄(Nepal)은 현재의 네팔이다. 당시 네팔은 말라(Malla) 왕조 시기였다. '지용탑국'이나 '속도숭' 같은 소국들은 네팔 인근이나 티베트 서부의 소규모 왕국들로 추정된다. 지광과 양삼보, 후현 같은 명나라 사절들이 티베트를 넘어 네팔까지 가서 조공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타감 오사장 행도지휘사사

타감은 사천 경계 밖에 있고 남쪽으로 오사장과 이웃하니 당나라 토번 땅이다. 원나라가 선위사, 초토사, 원수부, 만호부를 두어 그 무리를 나누어 통솔했다.

홍무 2년 태조가 섬서를 평정하고 즉시 관리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불러 위무했다. 또 원외랑 허윤덕을 보내 그 추장을 타일러 원나라 옛 관료들을 천거하여 경사로 나오게 했다. 섭제사 남가파장복 및 옛 국공 남가사단팔역감장 등이 6년 봄에 입조하여 천거한 60명의 명단을 올렸다. 황제가 기뻐하여 지휘사사 둘을 두니 타감과 오사장이라 하고, 선위사 둘, 원수부 하나, 초토사 넷, 만호부 열셋, 천호소 넷을 두어 즉시 천거된 관료로 임명했다. 조정 신하들이 말하기를 내조한 자는 관직을 주고 오지 않은 자는 마땅히 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진심으로 남을 대하는데 그들이 성실하지 않다면 잘못은 그들에게 있다. 만 리를 와서 조공하니 그들이 다시 청하기를 기다린다면 어찌 먼 곳 사람들이 귀순하려는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모두 제수했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국가가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만방을 통솔하고 선량한 자를 은혜로 위무하며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 무력을 쓴다. 무릇 영토 안에 있는 자는 다 일시동인의 인을 미루어 넓힌다. 이에 섭제사 남가파장복이 천거한 옛 국공, 사도, 선위, 초토, 원수, 만호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멀리서 입조했다. 짐은 그들이 천명을 알아 군대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 직방(직무)의 공을 함께 바침을 가상히 여긴다. 이미 국사 및 옛 국공 등을 지휘동지 등의 관직으로 제수하고 모두 고명과 인을 주었다. 지금부터 관리가 된 자는 힘써 조정의 법을 따르고 한 지방을 위무하고 편안히 하라. 승려는 힘써 교화하고 인도하는 정성을 도타이 하여 백성을 거느리고 선을 행하며 태평을 함께 누리고 영원히 복을 편안히 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하고 아울러 연회를 베풀고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초기에 원나라가 번승을 높여 제사로 삼고 그 제자에게 국공 등의 직품을 주었으므로 항복한 자들이 옛 칭호를 답습한 것이다.

쇄남올즉이라는 자가 귀순하여 타감위 지휘첨사를 제수받았다. 원나라 사도 은인을 바치니 지휘동지로 승진시켰다. 얼마 후 타감 선위 상죽감장이 우두머리로서 지휘, 선위, 만호, 천호가 될 만한 자 22명을 천거했다. 조서를 내려 그 청을 따르고 분사(나뉜 관청)의 인을 주조하여 주었다. 이에 타감, 오사장 두 위를 고쳐 행도지휘사사로 삼고 쇄남올즉을 타감 도지휘동지로, 관초올즉을 오사장 도지휘동지로 삼고 아울러 은인을 하사했다. 또 서안 행도지휘사사를 하주에 설치하여 두 도사를 겸하여 관할하게 했다. 얼마 후 불보국사 쇄남올즉 등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옛 관료 상죽감장 등 56명을 천거하여 주상했다. 명하여 타감사 선위사 및 초토 등 사(관청)를 증설하게 했다. 초토사는 여섯이니 타감사, 타감농답, 타감단, 타감창당, 타감천, 마아감이다. 만호부는 넷이니 사아가, 내죽, 라사단, 열사마이다. 천호소는 열일곱이다. 상죽감장으로 타감 도지휘동지를 삼고 나머지는 차등 있게 관직을 제수했다. 이로부터 여러 번이 조공을 닦음이 오직 삼가하였다.

8년 아력사 군민원수부를 설치했다. 얼마 후 농답위 지휘사사를 설치했다. 18년 반죽아장복을 오사장 도지휘사로 삼았다. 이에 품계를 다시 정하여 도지휘 이하부터 모두 세습하게 했다. 얼마 안 되어 또 오사장 엄불라위를 행도지휘사사로 고쳤다. 26년 서번 사낭일 등 종족이 사신을 보내 말을 조공하니 금과 구리로 된 신부(믿음의 징표), 문이 있는 비단, 옷을 하사하고 조공을 허락했다.

영락 원년 필리 천호소를 위로 고치고 후에 오사장 우아종채 행도지휘사사를 설치했으며 또 상공부위를 설치하여 모두 번인으로 관리를 삼았다. 18년 황제(영락제)는 서번이 모두 직방(명나라 행정구역)에 들어왔는데 그 가장 먼 백륵 등 100여 채(마을)가 아직 귀부하지 않았다 하여 사신을 보내 가서 부르니 또한 많이 입공했다. 황제는 번의 풍속이 오직 승려의 말만 듣는다 하여 국사 등의 아름다운 호칭으로 총애하고 고명과 인을 하사하여 해마다 내조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번승이 오는 자가 날로 많아졌고 선덕 조정에 이르기까지 예우함이 더욱 후했다. 9년 환관 송성 등에게 명하여 옥새 찍힌 서신과 하사품을 가지고 그 땅에 사신으로 가게 하고 도독 조안에게 칙서를 내려 병사를 거느리고 필력술강까지 그를 보내주게 했다.

정통 초기에 공급 비용을 헤아릴 수 없어 조금 줄였다. 당시 번의 추장이 송판 수장 조득에게 편지를 보내 입조하고자 하나 생번(화하지 않은 번인)이 막으니 군대를 보내 길을 열어달라고 빌었다. 조서를 내려 조득으로 하여금 사신을 보내 생번을 부르게 하니 서로 이끌고 조공하는 자가 829채였으며 두루 상을 주어 돌려보냈다. 천순 4년 사천 삼사가 말하기를 "최근 칙서를 받드니 번승이 조공하러 경사에 들어오는 자는 10명을 넘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는 국경에 남겨두고 상을 기다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촉 땅에 재해와 상처가 있는데 만약 그들을 다 머물게 하면 움직이면 몇 달이 지나니 지방관이 접대 비용에 곤란을 겪습니다. 마땅히 정통 연간의 제도와 같이 하여 연회로 대접하고 돌려보내소서." 하니 재가했다.

성화 3년 아석동 여러 종족 토관이 말하기를 "서번의 대소 두 성씨가 악을 행하여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국사, 라마가 권하고 교화해야 마음을 고쳐 믿고 복종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선사 원단장복을 국사로, 도강 자상을 선사로 승진시켜 그들을 교화하고 인도하게 했다. 6년 여러 번이 3년에 한 번 조공하는 관례를 거듭 밝히고 국사 이하는 조공을 불허하니 이에 조공 사신이 점차 드물어졌다.

초기에 태조는 서번 땅이 넓고 사람이 사납고 굳세어 그 세력을 나누고 그 힘을 줄여 변방의 우환이 되지 않게 하고자 했으므로 오는 자에게 문득 관직을 제수했다. 또한 그 땅은 다 고기를 먹어서 중국의 차에 의지하여 목숨을 유지하므로 천전 육번(사천성 서부)에 다과사를 설치하여 말과 교역하게(차마무역) 하고 조공하는 자에게는 차와 베를 넉넉히 주었다. 여러 번이 조공 시장의 이익을 탐내고 또 대대로 관직을 보전하고자 하여 감히 변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성조 때에 이르러 더욱 법왕 및 대국사, 서천불자 등을 봉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로 전하여 교화하고 인도하게 하여 함께 중국을 높이게 하였다. 그러므로 서쪽 변방이 편안했고 명나라가 끝날 때까지 번인 도적의 우환이 없었다.

[해설]

타감(Dokham)은 티베트의 동부 지역인 캄(Kham)과 암도(Amdo)를 아우르는 명칭이다. 명나라는 이곳에 위소(군사 행정 구역)를 설치하고 현지 유력자들을 토관(원주민 관리)으로 임명하는 '기미정책'을 폈다. 이 단락은 명나라가 티베트 지역을 군사, 행정적으로 어떻게 관리했는지, 그리고 차마무역(차와 말을 교환)이 안보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설명한다. '차'가 육식을 주식으로 하는 티베트인들에게 필수품임을 이용하여 그들을 통제했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장하서 어통 영원 선위사

장하서 어통 영원 선위사는 사천 경계 밖에 있고 땅이 오사장과 통하며 당나라 때 토번이었다. 원나라 때 조문, 어통, 여, 아, 장하서, 영원 여섯 안무사를 두어 토번 선위사에 예속시켰다.

홍무 때 그 땅 타전로, 장하서 토관 원나라 우승상 랄와몽이 그 리문(관리) 고유선을 보내 내조하고 방물을 조공하니 연회를 베풀고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16년 다시 고유선 및 조카 만호 약랄을 보내 조공했다. 명하여 장하서 등 처 군민안무사를 설치하고 랄와몽을 안무사로 삼아 문이 있는 비단 48필, 보초 200정을 하사하고 고유선을 예부주사로 제수했다. 20년 고유선을 보내 장하서, 어통, 영원 여러 곳을 불러 위무하게 했다. 이듬해 조정에 돌아와 말하기를:

"변방을 편안히 하는 도는 둔전과 수비를 다스리고 은혜와 위엄을 겸하는 데 있습니다. 둔전과 수비가 이미 견고하면 비록 멀더라도 공이 있을 것이요, 은혜와 위엄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비록 가깝더라도 이익이 없습니다. 지금 어통, 구지의 강토 및 암주, 잡도 두 장관사는 동쪽으로 조문, 여, 아와 이웃하고 서쪽으로 장하서와 접합니다. 당나라 때 토번이 강성해진 이래로 영원, 안정, 암주의 한나라 백성들이 왕왕 저들에게 몰려 구지, 어통으로 들어가 한나라 변방을 방수했습니다. 원나라 초기에 두 만호부를 설치하고 그대로 반타, 인양과 더불어 목책을 세워 변방 백성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 후 각 지파가 무리를 거느리고 인양 등의 목책을 공격했습니다. 촉(사천)의 군사가 일어남에 미쳐 기세를 타고 아, 공, 가 등의 주를 침범하여 능멸했습니다. 홍무 10년에 비로소 조문 토착 추장을 따라 귀부했습니다. 암주, 잡도 두 장관사는 조정에서 설치한 이래로 지금까지 10여 년인데 관리와 백성이 여전히 서로 통솔하지 않습니다. 대개 통제하는 관청이 없어 그 창궐함을 멋대로 하고 낡은 폐단을 답습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까이 있어 이미 귀부한 자도 이와 같은데 멀리 있어 아직 귀부하지 않은 자를 무슨 수로 신하로 복종시키겠습니까? 또한 암주, 영원 등은 곧 옛날의 주 치소입니다. 진실로 병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나아가 성보를 쌓고 산과 밭을 개간하여, 가까운 자는 교화를 향하여 먼저 귀부하게 하고 먼 자는 위엄을 두려워하여 와서 귀의하게 한다면, 서역에 일이 없으면 우리의 요역에 이바지하고 일이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선봉이 되게 할 것입니다. 위무하기를 이미 오래하면 다 우리가 쓰는 바가 될 것입니다. 신의 말과 같이 하면 그 이로움이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오사장, 타감과 통하고 장하서를 진무하면 땅 400여 리를 개척하고 번인 백성 2천여 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여주, 아주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촉 또한 영원히 서쪽을 돌아볼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번인 백성들이 사는 노사강 땅은 토질이 척박하고 사람이 번성하여 오로지 조문의 오차와 촉의 가는 베를 무역하고 강족의 재화와 바꾸어 그 생계를 넉넉히 하는 데 힘씁니다. 만약 암주에 시장(주시)을 세우면 이 무리들의 입고 먹는 것이 다 우리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니 어찌 감히 비행을 저지르겠습니까. 이것이 둘째입니다.

장하서, 백사동, 파렵 등 8천 호로써 외번과 기각(서로 호응함)을 이루면 그 형세가 반드시 견고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먼 자를 불러오고, 만약 그들이 오지 않으면 8천 호로 하여금 가까이는 내응이 되게 하고 멀리는 길잡이가 되게 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하는 것이니 진실로 변방을 제어하는 좋은 방책입니다. 이것이 셋째입니다.

천전 육번 초토사의 8개 고을 백성들에게 번갈아 그 요역을 면제해 주고, 오로지 오차를 찌고 만들게 하여 암주로 운반해 창고를 두어 거두어 저장하고 번인의 말과 바꾸게 하소서. 아주에서 말을 바꾸는 것에 비하면 그 이익이 배가 될 것입니다. 또한 타전로의 원래 말을 바꾸던 곳과 거리가 서로 매우 가깝고 가격은 저쪽보다 더 쳐주면, 번인 백성들이 개미처럼 비린내를 쫓듯 시장으로 돌아오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이것이 넷째입니다.

암주에 이미 창고를 세워 말을 교역하면 번인 백성들이 차를 운반하여 국경을 나갈 때 그 세금을 배로 거둘 것이고, 그 나머지 물화가 이르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또 어통, 구지의 만인 백성들이 경작하는 육지가 아닌 밭은 해마다 세금을 걷지 않았습니다. 만약 해마다 조세 쌀을 바치게 하고 아울러 군사들로 하여금 대도하 양안의 거친 밭을 개간하게 하면 또한 수비하는 관군에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섯째입니다.

조문에서 암주에 이르는 도로는 마땅히 수리하고 개척하여 인마가 왕래하기 편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리적 원근을 헤아려 균등하게 역참을 세우고 여주, 아주의 봉화와 서로 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거의 난략을 막을 수 있고 변경에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째입니다."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후에 건창 추장 월노첩목아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하서의 여러 추장이 몰래 그에게 붙어 조공을 하지 않으니 태조가 노했다. 30년 봄 예부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통일되어 사방 만국이 다 때에 맞추어 조공을 받든다. 오사장, 니팔랄국 같은 곳은 그 땅이 지극히 멀어도 오히려 3년에 한 번 내조한다. 오직 타전로 장하서 토착 추장만이 밖으로 월노첩목아, 가합랄에게 붙어 중국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다.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칼날 아래 죽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그 추장을 타일러라. 만약 명을 듣고 와서 뵙는다면 한결같이 은혜로 대우할 것이요, 고치지 않으면 병사 30만을 내어 죄를 성토하고 가서 칠 것이다."라고 했다. 예관이 황제의 뜻으로 글을 만들어 급히 가서 그들을 타일렀다. 그 추장이 두려워하여 즉시 사신을 보내 입공하고 죄를 사죄했다. 천자가 그를 용서하고 장하서 어통 영원 선위사를 설치하여 그 추장을 선위사로 삼으니 이로부터 조공을 닦아 끊이지 않았다. 초기에 어통 및 영원, 장하서는 본래 각기 부락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합쳐서 하나가 되었다.

영락 13년 조공 사신이 말하기를 "서번은 다른 토산물이 없고 오직 말로써 차와 바꿉니다. 근년에 금지하고 단속하여 생계가 실로 어려우니 비옵건대 예전처럼 개중(소금, 차 등의 무역 허가)을 허락하소서." 하니 따랐다. 21년 선위사 남리 등 24명이 내조하여 말을 조공했다. 정통 2년 남리가 죽어 아들 가팔승이 이었다. 성화 4년 여러 번이 3년에 한 번 조공하는 법령을 거듭 밝혔으나 오직 장하서만은 여전히 해마다 한 번 조공했다. 6년 2년 혹은 3년에 한 번 조공하는 관례를 반포하여 정하고 조공 사신은 100명을 넘지 못하게 했다. 17년 예관이 말하기를 "오사장은 장하서의 서쪽에 있고 장하서는 송판, 월수(월서)의 남쪽에 있어 땅이 서로 접하여 혼동하기 쉽습니다. 오사장 여러 번왕은 관례가 3년에 한 번 조공하는데, 저들은 길이 험하여 오는 것이 적으므로 장하서 번승들이 왕왕 여러 왕의 문첩을 사칭하여 조공하고 상을 속여서 받습니다. 청컨대 여러 번왕 및 장하서, 동복한호에게 칙서와 감합을 주어 변방 신하가 심사하고 검증한 후에 진입을 허락하게 하여, 거짓으로 속이는 폐단을 면하게 하소서. 혹 길이 막히면 보충 조공(보공)을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따랐다. 19년 그 부내의 관정국사가 승려 무리를 보내 조공한 자가 1,800명에 이르니 지방관이 제도를 어겼다고 탄핵했다. 조서를 내려 500명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내게 했다. 22년 예관이 말하기를 "장하서는 여주 대도하의 도적이 일어나 연이어 조공을 잃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세 번의 조공을 보충하여 바쳤습니다. 정해진 제도에 길이 막힌 자는 다시 보충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지금 조공 물품이 이미 도착했으니 마땅히 그 정을 따라 받아들이되 하사품을 헤아려 줄이소서." 하니 재가했다.

홍치 12년 예관이 말하기를 "장하서 및 오사장 여러 번이 일시에 함께 조공하여 사신이 2,8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지방관에게 칙서를 내려 함부로 보내지 말도록 비옵니다." 하니 또한 재가했다. 그러나 그 후에 오는 자가 더욱 많아져 끝내 물리칠 수 없었다. 가정 3년 명령을 정하여 1천 명을 넘지 못하게 했다. 융경 3년 500명은 온전히 상을 주고 8명을 보내 경사로 가게 하는 제도를 정했는데 천교 등 여러 왕과 같았다. 그 조공 물품은 산호, 보로 등속인데 다 "천화왕전"에 실린 것에 준했다. 여러 번의 조공이 다 이와 같았다.

[해설]

장하서(Changhexi)는 사천성 서부 타전로(Tachienlu, 현재의 캉딩) 지역이다. 이곳은 티베트와 중국을 잇는 차마무역의 핵심 요충지였다. 고유선이 올린 상소문은 명나라의 변방 경영 전략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즉, '이이제이(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 '경제적 예속(차 무역 독점)', '둔전과 성보 구축' 등이 그것이다. 이 지역 토관들은 무역의 이권을 위해 명나라에 복종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란군에 가담하기도 하며 줄타기를 했다.

동복한호 선위사

동복한호 선위사는 사천 위주의 서쪽에 있고 그 남쪽은 천전 육번과 접한다. 영락 9년 추장 남갈이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입조하여 방물을 조공했다. 인하여 말하기를 답륭몽, 조문 두 초토사가 인근 경계를 침략하고 약탈하여 도로를 막으니 토벌하기를 청했다. 황제는 병사를 쓰고 싶지 않아 칙서를 내려 위무하고 타일러 해마다 한 번 조공하게 하고 금인과 관대를 하사했다.

정통 3년 늙었다고 주상하여 아들 크라아견찬으로 대신하기를 비니 따랐다. 흉포하고 교활하여 예법을 따르지 않았다. 7년 왕으로 봉해달라고 빌며 금인을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진국장군 도지휘동지로 승진시켜 선위사 일을 관장하게 하고 고명을 주었다. 더욱 강함을 믿고 자주 잡곡 안무사 및 별사채 안무사 요갈과 원한을 맺었다. 10년 8월 사천 지방관에게 공문을 보내 이르기를 "별사채는 본래 아버지 남갈의 옛 땅인데 요갈의 아버지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후에 요갈이 일을 맡아 사사로이 조정에 주상하여 안무사를 설치함을 얻었다. 요사이 이에 거짓으로 선위사 인을 만들고 스스로 선위사라 칭하며 잡곡의 여러 번을 규합하여 장차 자기 땅을 침범하여 삼키려 한다. 이미 요갈을 잡아 가두고 위조 도장을 찾아냈으며 번의 풍속 법을 써서 두 눈을 도려냈다. 삼가 글로써 알린다."라고 했다. 지방관이 그 일을 올렸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 가서 그가 멋대로 한 것을 꾸짖고, 사신과 더불어 요갈의 일족 사람을 택해 안무사로 삼아 그대로 그 토지를 관할하게 하고, 또 요갈을 돌려보내 종신토록 봉양하게 했다.

13년 10월 사천 순안 장홍 등이 주상하기를 "최근 동복 선위의 문첩을 접하니 말하기를 '잡곡의 옛 안무사 아표의 작은 아내가 그 남편과 아들을 독살하고 또 위주 천호 당태에게 뇌물을 주어 자기가 모반했다고 무고했다. 지금 물품을 갖추어 조공하는데 동문산 서쪽으로부터 산을 열고 길을 통하고자 하니 관군이 날짜에 맞추어 주둔하여 맞이하기를 빈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잡곡은 안으로 위주, 보현과 연합하고 밖으로 동복한호와 이웃합니다. 잡곡은 힘이 약해 동복에 저항하고자 하여 실로 위주, 보현에 의지하고 중히 여깁니다. 동복은 세력이 강하여 위주, 보현과 통하고자 하나 잡곡에게 막힌 바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원수처럼 죽이며 평소 서로 화목하지 못합니다. 동문 및 일주 여러 채는 곧 잡곡, 위주, 보현의 요해지입니다. 동복이 잡곡의 처가 과부이고 아들이 약함을 업신여기고 우리 군대가 녹천을 멀리 정벌함을 엿보아, 조공한다는 명분으로 거짓하여 따로 도로를 열고자 하니 뜻이 잡곡을 삼키고 당태를 함정에 빠뜨리는 데 있습니다. 청한 바를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도어사 구심 등에게 내려 헤아리게 했으나 그 논의가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당시 동복이 해마다 입공했는데 보내는 승려 무리가 강하고 사나우며 법을 지키지 않고, 사사로운 물건을 많이 휴대하고 배와 수레를 강제로 요구하며 도로를 소란하게 하고 지방관(장리)을 욕보였다. 천자가 듣고 미워하여 경태 원년 칙서를 내려 간절히 꾸짖었다. 얼마 후 잡곡 및 달사만 장관사의 땅을 침탈하고 그 사람과 가축을 약탈했으나 지방관이 제어하지 못했다. 3년 2월 조정의 논의가 그 입공의 부지런하고 정성됨을 장려하여 도지휘사로 승진시키고, 침략한 땅과 약탈한 인민을 돌려주게 했다. 그 추장이 즉시 명을 받들었으나 오직 옛 위주의 땅만은 오히려 점거한 바 되었다. 갑자기 사천 순무 이광에게 은 항아리, 금과 호박을 보내며, "어제대고(태조의 교유문)", "주역", "상서", "모시(시경)", "소학", "방여승람", "성도기" 등 여러 책을 구했다. 이광이 조정에 알리고 인하여 말하기를 "당나라 때 토번이 모시와 춘추를 구했습니다. 우휴열이 말하기를 책을 주어 권모를 알게 하면 더욱 변방의 속임수를 낳게 하니 중국의 이익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배광정은 말하기를 토번이 오랫동안 배반하다 새로 복종했으니 표문을 올림으로 인하여 시와 서를 하사하여 점차 성교(중화의 가르침)로 빚어내면 교화가 밖으로 흐를 것이라 했습니다. 휴열은 단지 책에 권모와 변사가 있음을 알았을 뿐 충신과 예의가 다 책에서 나옴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명황(현종)이 그를 따랐습니다. 지금 구하는 바를 신은 주는 것이 편하다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조공 사신을 통해 서점에서 사는 것이 심히 어렵지 않습니다. 오직 방여승람과 성도기는 지형과 요새가 갖추어져 있으니 대개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얼마 후 침략한 땅을 돌려줌으로써 칙서를 내려 장려했다.

6년 병부상서 우겸 등이 주상하기를 그가 참람되게 만왕이라 칭하고 파, 촉을 엿보며 올린 상소문에 불손한 말이 많고, 또 여러 번을 불러 모아 병기를 크게 만들고 거스르는 역심이 날로 드러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지방관에게 칙서를 내려 미리 경계하고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크라아견찬이 죽고 아들 찰사견찬장복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도지휘동지로 명하여 선위사 일을 관장하게 했다. 천순 원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왕에 봉해지기를 빌었다. 그 아버지의 관직과 같이 하고 도지휘사로 승진시켰으며 그대로 선위사 일을 관장하게 했다.

성화 5년 사천 삼사가 주상하기를 "보현은 극변(가장 먼 변방)에 치우쳐 있어 영락 5년 특별히 잡곡 안무사를 설치하여 옛 위주 여러 만의 요새를 위무하고 화목하게 했습니다. 후에 동복과 병사를 일으켜 위주 여러 땅을 모두 침략당하고 조공 길이 끊어졌습니다. 지금 잡곡이 옛 강토를 회복하여 장차 사신을 보내 조공하려 하는데 조공 시기를 알지 못하여 감히 멋대로 보내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예관의 말을 따라 3년을 기한으로 삼는 것을 허락했다. 4년 여러 번이 3년에 한 번 조공하는 관례를 거듭 밝혔는데 오직 동복은 해마다 한 번 조공함을 허락했다.

6년 찰파견찬장복이 죽어 아들 작오결언천이 이어 도지휘사가 되었다. 홍치 3년 죽어 아들 일묵찰사파왕단파장복이 국사를 보내 산호수, 보로, 갑주 등 여러 물품을 조공하고 아버지의 직위를 잇기를 청하니 허락하고 고명, 칙서,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9년 죽어 아들 남매가 습직을 청하고 또한 국사를 보내 방물을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아버지의 관직을 제수했다. 죽자 아들 용중단죽이 이었다. 가정 2년 다시 명령을 정하여 조공 사신이 1천 명을 넘지 못하게 하고 그 예하 별사채 및 가갈와사는 따로 조공하게 했다. 융경 2년 동복 및 별사채 조공 사신이 많게는 1,700여 명에 이르러 반만 상을 주고 8명을 보내 경사로 가게 할 것을 명하여 정해진 제도로 삼았다. 만력 이후까지 조공을 받듦이 바뀌지 않았다.

[해설]

동복한호(Dongbo Hanhu)는 사천성 서북부의 강족(Qiang) 거주 지역인 현재의 아바 티베트족 강족 자치주 일대, 특히 금천(Jinchuan) 지역을 말한다. 이곳은 티베트와 중국 사천성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이 기록은 이 지역 토착 세력 간의 치열한 영토 분쟁(동복 vs 잡곡)과 명나라의 개입, 그리고 서적 요청을 둘러싼 논쟁(문명화 vs 정보 유출)을 다룬다. 특히 우휴열과 배광정의 고사를 인용하여 오랑캐에게 책을 주는 것이 득인가 실인가를 논하는 장면은 중화 제국의 전통적인 딜레마를 보여준다. 동복한호 세력은 명나라 말기까지도 강력한 토사(토착 지배자)로 남아 있었다.

 

 

 

 

명사(明史) 권332 열전 제220 서역4

사마르칸트(撒馬兒罕)

사마르칸트는 한나라 때의 계빈(罽賓) 땅이며, 수나라 때는 조국(漕國)이라 했고, 당나라 때 다시 계빈이라 이름했는데 모두 중국과 통교하였다. 원나라 태조(칭기즈칸)가 서역을 평정한 후 모든 왕과 부마(사위)들을 그곳의 군장으로 삼았으며, 전대의 국명을 몽골어로 바꾸면서 비로소 사마르칸트라는 이름이 생겼다. 가욕관(嘉峪關)에서 9,600리 떨어져 있다. 원나라 말기에 이곳의 왕이 된 자는 부마 티무르(帖木兒)였다.

홍무(洪武) 연간에 태조(주원장)가 서역과 통교하고자 하여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회유하였으나 먼 지방의 군장 중에 오는 자가 없었다. 홍무 20년(1387년) 9월, 티무르가 처음으로 회회(이슬람교도) 만라(滿剌) 합비사(哈非思) 등을 보내 내조하게 하여 말 15필, 낙타 2마리를 바쳤다. 조서를 내려 그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백금 18정(錠)을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말과 낙타를 바쳤다.

홍무 25년(1392년)에는 융(絨) 6필, 청색 소폭(梭幅) 9필, 홍색과 녹색 사하라(撒哈剌, 모직물) 각 2필 및 빈철(鑌鐵) 칼과 검, 갑주 등 여러 물건을 겸하여 바쳤다. 그런데 그 나라의 회회인들이 스스로 말을 몰고 양주(涼州)에 와서 서로 무역을 하려 했다. 황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북경으로 가서 팔게 하였다. 원나라 때는 회회인들이 천하에 널려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감숙(甘肅)에 거주하는 자가 여전히 많았으므로, 조서를 내려 수비하는 신하들에게 그들을 모두 보내게 하니 이에 사마르칸트로 돌아간 자가 1,200여 명이었다.

[해설]

사마르칸트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도시이다. 이 기록은 티무르 제국(Timurid Empire)과 명나라 초기 관계를 다루고 있다. 티무르는 명목상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명나라 정벌을 계획하기도 했다. 여기서 언급된 '계빈'은 역사적으로 위치 비정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명사에서는 사마르칸트로 인식하고 있다.

홍무 27년(1394년) 8월, 티무르가 말 200필을 바쳤다. 그 표문에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건대 대명 대황제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사해를 통일하시고 인덕을 넓게 펴시니 은혜가 만물에 미쳐 만국이 기뻐하며 우러릅니다. 모두가 황천이 천하를 평안하게 다스리고자 하여 특별히 황제께 명하여 운수를 받아 억조창생의 주인이 되게 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광명 정대하여 마치 하늘의 거울 같아 멀고 가까움 없이 모두 비추십니다. 신 티무르는 만 리 밖 외진 곳에 있으면서 공경히 성덕이 관대하여 만고에 뛰어남을 들었습니다. 자고로 없었던 복을 황제께서는 모두 가지셨고, 아직 복속되지 않은 나라를 황제께서는 모두 복속시켰습니다. 먼 지방의 끊어진 지역과 혼매한 땅을 모두 청명하게 하셨습니다. 늙은이는 편안하지 않음이 없고, 젊은이는 잘 자라지 않음이 없으며, 선한 자는 복을 받지 않음이 없고, 악한 자는 두려움을 알지 않음이 없습니다. 지금 또 특별히 먼 나라에 은혜를 베푸시어 중국에 오는 상인들로 하여금 도읍과 성지의 부귀하고 웅장함을 관람하게 하시니, 마치 어두운 가운데서 나와 갑자기 하늘의 해를 보는 것 같아 어찌 이 같은 다행이 있겠습니까! 또한 칙서를 받들어 위로해 주시고 역참을 서로 통하게 하여 도로에 막힘이 없게 하시니 먼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 구제를 받습니다. 성스런 마음을 우러르니 조세배(照世杯)와 같아 신의 마음을 활짝 밝혀줍니다. 신의 나라 부족들이 이 덕음을 듣고 기뻐하며 춤추고 감격하여 받듭니다. 신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오직 하늘을 우러러 성수와 복록이 천지와 같이 영원하고 무극하기를 축송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세배란 그 나라에 옛날부터 전해오기를 광명이 맑게 통하여 비추면 세상일을 알 수 있는 잔이 있다고 하여 이른 말이다. 황제가 표문을 받고 그 글에 문채가 있음을 가상히 여겼다. 이듬해 급사중 부안(傅安) 등에게 명하여 옥새가 찍힌 서신과 폐백을 가지고 가서 답하게 했다. 그들이 바치는 말은 일 년에 두 번 이르렀고 천 단위로 계산되었으며, 아울러 보물 지폐(빈초)를 하사하여 값을 쳐주었다.

[해설]

티무르가 보낸 것으로 기록된 이 극도로 공손한 표문은 실제 티무르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중국 측 관리들이 번역 과정에서 윤색했거나 티무르가 교역의 이익을 위해 겉으로만 칭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세배는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잠시드의 잔(Cup of Jamshid)'을 의미한다.

성조(영락제)가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그 나라에 칙유하였다. 영락 3년(1405년), 부안 등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티무르가 별실팔리(Beshbalik)의 길을 빌려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감숙 총병관 송성(宋晟)에게 칙서를 내려 경계하고 대비하게 했다. 영락 5년 6월, 부안 등이 돌아왔다. 당초 부안이 그 나라에 이르렀을 때 억류되어 조공 또한 끊어졌다. 얼마 후 사람을 시켜 부안을 인도하여 여러 나라 수만 리를 돌아보게 하여 그 나라의 광대함을 자랑하게 했다. 이때에 이르러 티무르가 죽고 그 손자 할리(Khalil)가 뒤를 이으니, 이에 사신 호대달(虎歹達) 등을 보내 부안을 송환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황제가 그 사신에게 후하게 하사하고, 지휘 백아얼흔태(白阿兒忻台) 등을 보내 죽은 왕을 제사 지내게 하고 새 왕과 부족들에게 은과 폐백을 하사하였다. 그 우두머리 사리노아정(沙里奴兒丁) 등도 낙타와 말을 바쳤다. 부안 등에게 명하여 그 왕에게 채색 폐백을 하사하고 조공 사신과 함께 가게 했다. 영락 7년, 부안 등이 돌아오자 왕이 사신을 보내 따라와서 조공했다. 그 후로 매년 혹은 한 해 걸러, 혹은 3년 만에 와서 조공했다. 영락 13년에는 사신을 보내 이달(李達), 진성(陳誠) 등을 따라와서 조공했다. 돌아갈 때가 되자 진성 및 중관(환관) 노안(魯安)에게 명하여 함께 가서 그 우두머리 울루그 베그(兀魯伯) 등에게 백금과 채색 폐백을 하사하게 했다. 그 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 진성 등을 따라와서 조공했다. 영락 18년 다시 진성과 중관 곽경(郭敬)에게 명하여 칙서와 채색 폐백을 가지고 가서 답하게 했다. 선덕 5년(1430년) 가을과 겨울, 우두머리 울루그 베그 미르자 등이 사신을 보내 다시 조공했다. 선덕 7년 중관 이귀(李貴) 등을 보내 무늬 있는 비단과 나단, 깁을 그 나라에 하사했다.

[해설]

티무르는 명나라 정벌 도중 1405년에 사망했다. 이후 티무르 제국은 내분에 휩싸였고, 결국 샤 루흐(Shah Rukh)가 권력을 잡았으나 사마르칸트는 그의 아들 울루그 베그(Ulugh Beg)가 통치했다. 울루그 베그는 뛰어난 천문학자이자 군주로 유명하다. 진성(陳誠)은 명나라의 유명한 외교관으로 서역기행문인 '사서역기'를 남겼다.

정통 4년(1439년) 좋은 말을 바쳤는데 색은 검고 발굽과 이마가 모두 흰색이었다. 황제가 이를 아껴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서보(瑞駂)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상을 더 많이 내렸다. 정통 10년 10월에 글을 써서 그 왕 울루그 베그 퀴레겐(曲烈乾)에게 유시하기를 "왕은 멀리 서쪽 변경에 있으면서 삼가 직공을 닦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특별히 왕과 왕의 처자에게 채색 폐백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하여 나의 우대하는 뜻을 보인다."라고 했다. 별도로 칙서를 내려 금옥 기물, 용머리 지팡이, 좋은 말안장 및 여러 색의 금실로 짠 무늬 비단을 하사하고 그 사신에게 관직을 주어 지휘첨사로 삼았다.

경태 7년(1456년) 말, 낙타, 옥석을 바쳤다. 예관이 말하기를 "옛 제도에 상을 주는 것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지금 정사, 부사는 마땅히 1등, 2등의 하사품을 주되 옛날과 같이 하고, 3등인 사람에게는 채색 비단 4벌, 견 3필, 금실로 짠 저사 옷 1벌을 줍니다. 그 수행원인 진무, 사인 이하는 차등을 두어 줄입니다. 바친 아루골(阿魯骨) 말은 매 필마다 채색 비단 4벌, 견 8필, 낙타는 3벌, 견 10필, 달달(타타르) 말은 등급을 나누지 않고 매 필마다 저사 1필, 견 8필, 지폐로 환산한 견 1필, 중등 말도 이와 같이 하고, 하등인 것은 또한 차등을 두어 줄입니다."라고 하니 재가했다. 또 말하기를 "바친 옥석은 쓸만한 것이 겨우 24덩어리, 68근이고 나머지 5,900여 근은 쓰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스스로 팔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굳이 바치고자 하니 청컨대 매 5근마다 견 1필을 하사하소서."라고 하니 또한 허락했다. 얼마 후 사신이 돌아가자 왕 아부사이드(卜撒因)에게 무늬 비단과 기물을 하사했다. 천순 원년(1457년) 도지휘 마운(馬雲) 등을 명하여 서역에 사신으로 보내 칙서로 그 술탄(鎖魯檀) 아부사이드(毋撒)를 장려하고 채색 폐백을 하사하고 조공 사신을 호송하여 갔다 오게 했다. 술탄이란 군장의 칭호로 몽골의 가한(칸)과 같다. 천순 7년 다시 지휘 잠승(詹升) 등을 명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해설]

울루그 베그 사후 티무르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아부사이드(Abu Sa'id)가 권력을 잡았다. '아루골 말'은 명마의 일종이다. 명나라는 조공 무역에서 옥석 등의 품질을 따져 값을 치르기 시작했다.

성화 연간에 그 술탄 아흐마드(阿黑麻)가 세 번 조공했다. 성화 19년(1483년) 이사한(亦思罕) 추장과 함께 사자 2마리를 바쳤는데 숙주(肅州)에 이르러 그 사신이 대신이 와서 맞이하기를 주청했다. 직방랑중 육용(陸容)이 말하기를 "이것은 쓸모없는 물건으로 교묘(제사)에 희생으로 쓸 수 없고 수레를 끄는 데 쓸 수도 없으니 마땅히 받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예관 주홍모(周洪謨) 등도 가서 맞이하는 것은 예법이 아니라고 말했으나, 황제는 끝내 중사(환관)를 보내 맞이하게 했다. 사자는 매일 산 양 2마리와 식초, 꿀, 유락 각 2병을 먹었다. 사자를 기르는 자에게는 광록시에서 매일 술과 음식을 주었다. 황제가 이미 후하게 하사했으나 그 사신 파육만(怕六灣)은 적다고 여겨 영락 연간의 예를 들어 청했다. 예관이 정통 4년의 예를 따라 채색 폐백 5벌을 더 주는 것으로 논의했다. 사신이 다시 적다고 여기니, 이에 정사, 부사에게 각 2벌을 더하고 수행원은 그 반을 주었으며 중관 위낙(韋洛), 홍려시 서승 해빈(海濱)에게 명하여 호송하여 보내게 했다. 그 사신이 옛길을 따르지 않고 광동으로 가서 또 양가의 여자를 많이 사서 처첩으로 삼았는데 위낙 등이 금지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위낙이 상소하여 죄를 해빈에게 돌려 해빈이 하옥되었다. 그 사신이 바다를 건너 말라카(滿剌加)에 가서 사자(산예)를 사서 바치겠다고 청하니 시박 중관 위권(韋眷)이 이를 주관했는데, 포정사 진선(陳選)이 불가함을 강력히 진술하여 그만두었다.

[해설]

명나라 중기에 이르러 서역 사신들이 조공을 빌미로 과도한 요구를 하거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폐단이 드러나고 있다. 신하들은 실용적이지 않은 사자 공물을 반대했으나 황제는 호기심에 이를 수용했다.

홍치 2년(1489년), 그 사신이 말라카를 경유하여 광동에 이르러 사자, 앵무새 등의 물건을 바치니 수비하는 신하가 이를 알렸다. 예관 경유(耿裕) 등이 말하기를 "남해는 서역의 조공로가 아니니 청컨대 물리치소서."라고 했다. 예과급사중 한정(韓鼎) 등도 말하기를 "쟁녕한 짐승은 가지고 노는 것이 마땅치 않고 또한 도로를 소란스럽게 하며 공급하는 비용이 헤아릴 수 없으니 받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은 짐이 받지 않으나 하물며 오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니 즉시 돌려보내라. 수신이 제도를 어겼으니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나 잠시 용서한다."라고 했다. 예관이 또 말하기를 "바닷길은 진실로 열어서는 안 되지만 끊는 것이 너무 심해서는 안 되니 청컨대 그 사신을 조금 호가하고 헤아려 비단을 그 왕에게 하사하소서."라고 하니 재가했다. 이듬해 또 투르판(土魯番)과 함께 사자 및 하라(哈剌), 호라(虎剌) 등 여러 짐승을 바치고 감숙을 경유하여 들어왔다. 진수 중관 부덕(傅德), 총병관 주옥(周玉) 등이 먼저 그림을 그려 주상하고 즉시 사람을 보내 역마를 달려 보내게 했다. 오직 순안어사 진요(陳瑤)만이 그 비용의 낭비와 번거로움을 논하며 받지 말 것을 청했다. 예관이 그의 말대로 하여 호가하는 상을 적당히 주고 또 말하기를 "성명(현명한 황제)께서 자리에 계셔 여러 번 공물을 물리쳤는데 부덕 등이 덕의를 봉행하지 못했으니 청컨대 그들을 죄주소서."라고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조공 사신이 이미 이르렀으니 굳이 돌려보낼 필요는 없고 다만 한두 사람만 북경에 오게 하라. 사자 등 여러 동물은 짐승마다 매일 양 1마리를 주고 망령되이 비용을 쓰지 말라. 부덕 등은 용서하여 다스리지 말라."라고 했다. 그 뒤 홍치 1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와서 조공했다. 이듬해 다시 왔다. 정덕 연간에도 여전히 자주 왔다.

[해설]

서역 사신들이 육로(실크로드) 대신 해로(남중국해)를 통해 오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조정에서는 비용 문제와 의전 문제로 논란이 많았다.

가정 2년(1523년), 조공 사신이 또 왔다. 예관이 말하기를 "여러 나라 사신이 길에 있는 자는 해를 넘겨 지체하고 북경에 있는 자는 함께 상을 받기를 기다리니 광록시와 역참의 공급 비용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마땅히 기한과 약속을 보여주어야 합니다."라고 하고, 이로 인해 금지하고 제재하는 몇 가지 일을 나열하여 올리니 따랐다. 가정 12년 천방(메카), 투르판과 함께 와서 조공했는데 왕이라 칭하는 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예관 하언(夏言) 등이 그 그릇됨을 논하고 칙서를 내려 내각 신하들이 답할 바를 논의하게 하기를 청했다. 장부경(張孚敬) 등이 말하기를 "서역의 여러 왕은 본국에서 봉하여 준 것인지 혹은 부족들이 스스로 서로 높여 부르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예전에도 30~40명에 이르는 자가 있었는데 곧 그 칭하는 바에 근거하여 답하였습니다. 만약 갑자기 줄이고 고칠 것을 의논한다면 아마도 인정이 실망하고 원망할 것이니 청컨대 다시 예부, 병부 두 부서에 칙서를 내려 상세히 논의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에 추신(중추원 신하) 왕헌(王憲) 등이 말한 것에 언급하기를 "서역에서 왕이라 칭하는 자는 단지 투르판, 천방, 사마르칸트뿐입니다. 일몰국(日落國) 같은 여러 나라는 이름은 비록 많으나 조공은 매우 적습니다. 홍치, 정덕 연간에 투르판은 13번 입공했고, 정덕 연간에 천방은 4번 입공했는데 왕이라 칭하는 자는 대개 1명이고 많아도 3명을 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단지 두목이라 칭했을 뿐입니다. 가정 2년, 8년에 이르러 천방은 많게는 6~7명, 투르판은 11~12명, 사마르칸트는 27명에 이르렀습니다. 장부경 등이 말한 30~40명이란 것은 세 나라를 합쳐서 센 것입니다. 지금 투르판 15왕, 천방 27왕, 사마르칸트 53왕은 실로 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홍치 때 답하여 보낸 칙서에는 단지 1명의 왕만 칭했습니다. 만약 사마르칸트의 지난 고사를 따라 왕호에 답하여 사람마다 칙서 하나씩을 준다면 중국을 높이고 외범을 제어하는 바가 아닙니다. 대개 제왕이 외범을 다스림에 진실로 그 오는 것을 막지는 않으나 또한 반드시 제도로써 제한해야 하며, 혹 명호가 참람하고 어긋나거나 언사가 모만하면 반드시 대의로써 바로잡고 그 무례함을 꾸짖어야 합니다. 지금 본국에서 봉한 것이라 하면서 어찌하여 옛 문서를 보지 못하며, 부족이 스스로 불렀다면서 어찌 천조(명나라)에 통달합니까? 우리가 대개 칙서를 주면 그들은 즉시 칙서에 의거하여 제멋대로 왕래하니 아마도 역참을 더욱 소란스럽게 하고 공급 비용을 소비하며 국고를 고갈시켜 계학(욕심)을 채우게 될 것이니 득책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그 말을 받아들여 나라마다 단지 칙서 하나만 주고 또한 힐문하고 꾸짖어 나라에는 두 왕이 없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여러 번국이 끝내 따르지 않아 가정 15년에 입공함이 다시 예전과 같았다. 감숙 순무 조재(趙載)가 주하기를 "여러 나라에서 왕이라 칭하는 자가 150여 명에 이르는데 모두 본조에서 봉한 작위가 아니니 마땅히 개정하게 하고 또 조공 사신의 인원수를 정해야 합니다. 통역은 마땅히 한인을 쓰고 색목인(서역인)을 전용하여 서로 교통하여 분쟁을 낳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다. 부의 논의가 이를 따랐다. 가정 26년 입공하자 감숙 순무 양박(楊博)이 조공에 관한 일을 다시 정할 것을 청하여 예관이 다시 몇 가지 일을 나열하여 시행했다. 그 후 입공은 만력 연간까지 끊이지 않았다. 대개 번인(서역인)들은 장사를 잘하여 중화와의 무역을 탐내어 이미 국경에 들어오면 모든 음식과 길의 비용을 다 관리에게서 취하고, 비록 5년에 한 번 조공한다고 정했으나 끝내 즐겨 따르려 하지 않으니 천조 또한 이를 어렵게 할 수 없었다.

그 나라는 동서 3,000여 리이고 땅은 넓고 평평하며 토양은 기름지다. 왕이 거처하는 성은 너비가 10여 리이고 민가가 조밀하다. 서남쪽 여러 번국의 재화가 모두 이곳에 모여 부요하다고 일컬어진다. 성 동북쪽에 토옥이 있는데 하늘에 절하는 장소(모스크)로 규격과 제도가 정교하고 기둥은 모두 청석이며 꽃무늬를 조각했고 가운데에는 경전을 강론하는 당이 있다. 이금(진흙 금)을 사용하여 경전을 썼고 양가죽으로 감쌌다. 풍속은 술을 금한다. 인물이 수려하고 솜씨의 교묘함은 하렬(Herat)보다 나은데 풍속과 토산물은 대개 그곳과 같다. 그 근처 동쪽에는 사록해야, 달실간, 새람, 양이, 서쪽에는 갈석, 질리미 등 여러 부족이 있는데 모두 여기에 예속되어 있다.

[해설]

명나라 말기로 갈수록 조공 무역이 실제로는 상업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상인들이 '왕'을 사칭하여 명나라의 하사품과 접대를 받으려 했다. 명나라는 이를 통제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묘사된 '하늘에 절하는 장소'는 모스크를 말하며, '이금으로 쓴 경전'은 쿠란을 의미한다.

사록해야(沙鹿海牙)

사록해야는 사마르칸트에서 서쪽으로 500여 리 떨어져 있다. 성은 작은 언덕 위에 있고 서북쪽으로 강에 임해 있다. 강 이름은 화참(火站)인데 물살이 빠르고 급하여 뜬다리(부교)를 놓아 건너는데 작은 배도 있다. 남쪽은 산에 가깝고 사람들은 대개 벼랑과 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원림이 넓고 무성하다. 서쪽에 큰 모래섬(사주)이 있는데 200리가량 된다. 물이 없고 간혹 있어도 짜서 마실 수 없다. 소나 말이 잘못하여 마시면 곧 죽는다. 땅에 냄새나는 풀이 나는데 높이는 한 자여 쯤 되고 잎은 덮개 같으며 그 진액을 끓여 고약을 만들면 곧 아위(阿魏)가 된다. 또 작은 풀이 있어 높이 한두 자에 무더기로 나는데 가을이 깊어 이슬이 맺히면 먹을 때 꿀과 같고 끓여서 엿을 만드는데 번인들은 달랑고빈(達郎古賓)이라 이름한다.

영락 연간에 이달, 진성이 그 땅에 사신으로 가니 그 추장이 즉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받들었다. 선덕 7년 중관 이귀에게 명하여 칙서로 그 추장을 유시하고 금으로 짠 무늬 비단과 채색 폐백을 하사했다.

[해설]

사록해야(Shahrukhia)는 티무르가 아들 샤 루흐를 위해 건설한 도시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근처 시르다리야 강변의 유적이다. 아위(Asafoetida)는 향신료이자 약재이다. '달랑고빈'은 페르시아어로 'Taranjubin' (만나, manna - 식물에서 나오는 단 분비물)을 뜻한다.

달실간(達失干)

달실간은 사마르칸트에서 서쪽으로 700여 리 떨어져 있다. 성은 평원에 있고 둘레는 2리이다. 밖에는 원림이 많고 과일나무가 넉넉하다. 땅은 오곡에 알맞다. 민가가 조밀하다. 이달, 진성, 이귀의 사행은 사록해야와 같았다.

[해설]

달실간(Tashkent)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이다.

새람(賽藍)

새람은 달실간의 동쪽에 있고 사마르칸트에서 서쪽으로 1,000여 리 떨어져 있다. 성곽이 있는데 둘레 2~3리이다. 사면이 평평하고 넓으며 거주민이 번성하다. 오곡이 무성하게 자라고 또한 과일나무가 넉넉하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풀 속에 검고 작은 거미가 생긴다. 사람이 쏘이면 온몸이 아파 견딜 수 없는데 반드시 박하 가지로 아픈 곳을 쓸고 또 양 간으로 문지르며 경을 읽기를 하루 낮밤을 해야 통증이 비로소 멈추고 피부가 다 벗겨진다. 가축이 상처를 입으면 죽는 것이 많다. 무릇 묵을 때는 반드시 물과 가까운 곳을 택하여 피한다. 원나라 태조 때 도원수 설탑라해(薛塔剌海)가 새람 등 여러 나라를 정벌할 때 포(대포/투석기)로써 공을 세웠는데 바로 이곳이다. 진성, 이귀의 사행은 여러 나라와 같았다.

[해설]

새람(Sairam)은 오늘날 카자흐스탄 남부의 도시이다. 독거미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설탑라해의 공략은 몽골 제국의 호라즘 정벌 당시를 말한다.

양이(養夷)

양이는 새람 동쪽 360리에 있다. 성은 어지러운 산 사이에 있다. 동북쪽에 큰 시내가 있어 서쪽으로 흘러 큰 강으로 들어간다. 100리를 가면 황폐한 성이 많다. 대개 그 땅이 별실팔리와 몽골 부락 사이에 끼어 있어 자주 침략을 받았다. 그러므로 인민이 흩어져 도망가고 단지 수비하는 병졸 수백 명이 외로운 성에 거주하며 무너진 집과 담장에 쓸쓸히 잡풀만 우거져 있다. 영락 때 진성이 그 땅에 이르렀다.

[해설]

양이(Yangyi)는 '새로운(Yanghi)'이라는 뜻의 투르크어 지명으로 보이며, 위치상 타라즈(Talas) 근처의 양기(Yanghi)로 추정된다. 몽골(모굴리스탄)과의 접경지대라 황폐해졌음을 알 수 있다.

갈석(渴石)

갈석은 사마르칸트 서남쪽 360리에 있다. 성은 큰 마을에 있고 둘레는 10여 리이다. 궁실이 장려하고 당은 옥석으로 기둥을 삼았으며 벽과 창문은 모두 금벽으로 장식하고 유리를 달았다. 그 선대인 사마르칸트 추장 부마 티무르가 이곳에 살았다. 성 밖은 모두 논(수전)이다. 동남쪽은 산에 가깝고 원림이 많다. 서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기이한 나무가 넉넉하다. 또 서쪽으로 300리를 가면 큰 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가운데 돌 골짜기(석협)가 있는데 양 벼랑이 도끼로 쪼갠 것 같다. 2~3리를 가서 골짜기 입구를 나오면 석문(돌문)이 있는데 색이 철과 같고 길은 동서로 통하니 번인들이 철문관(鐵門關)이라 부르고 병사를 두어 지킨다. 혹자가 말하기를 원나라 태조가 동인도 철문관에 이르러 외뿔 짐승(일각수)을 만났는데 사람의 말을 할 줄 알았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해설]

갈석(Kesh)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샤흐리삽스(Shahrisabz)이다. 티무르의 고향으로 그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했기에 궁실이 장려하다. 철문관은 우즈베키스탄 남부의 유명한 관문인 '다르반드(Darband-i Ahanin)'이다. 외뿔 짐승(기린/Kilin) 전설은 칭기즈칸이 인도 원정을 멈추고 돌아가게 된 일화와 관련 있다.

질리미(迭里迷)

질리미는 사마르칸트 서남쪽에 있고 하렬(Herat)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다. 신, 구 두 성이 있는데 서로 10여 리 떨어져 있고 그 추장은 신성에 거주한다. 성 안팎의 주민은 겨우 수백 가구이고 가축을 기르며 번식한다. 성은 아술하(阿朮河, 아무다리야강) 동쪽에 있고 물고기가 많다. 강 동쪽 땅은 사마르칸트에 예속되고 서쪽은 갈대숲이 많으며 사자가 산다. 진성, 이달이 일찍이 그 땅에 사신으로 갔다.

[해설]

질리미(Termez)는 우즈베키스탄 남부 아무다리야 강변의 도시 테르메즈이다. 아술하는 옥수(Oxus), 즉 아무다리야 강을 말한다. 사자가 산다는 기록은 당시 중앙아시아 생태계를 짐작게 한다.

복화아(卜花兒)

복화아는 사마르칸트 서북쪽 700여 리에 있다. 성은 평천에 있고 둘레 10여 리이며 가구는 만 단위를 헤아린다. 시가지가 번화하여 부유하고 넉넉하다고 일컬어진다. 땅은 낮고 습하며 기후는 일찍 따뜻해져 오곡과 뽕나무, 삼에 알맞고 실과 면, 포백이 많으며 가축 또한 넉넉하다.

영락 13년(1415년), 진성이 서역에서 돌아와 거쳐 간 하렬, 사마르칸트, 별실팔리, 안도회, 팔답흑상, 질리미, 사록해야, 새람, 갈석, 양이, 화주(火州), 유성(柳城), 투르판, 염택(鹽澤), 하밀(哈密), 달실간, 복화아 등 총 17개국의 산천, 인물, 풍속을 모두 상세히 하여 《사서역기(使西域記)》를 지어 바치니 이로 인해 중국이 상고할 수 있게 되었다. 선덕 7년 이달에게 명하여 서역을 어루만지고 유시하게 했는데 복화아 또한 여기에 참여했다.

[해설]

복화아(Bukhara)는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도시 부하라이다.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으로 번영했다.

별실팔리(別失八里)

별실팔리는 서역의 대국이다. 남쪽은 우전(Khotan)과 접하고 북쪽은 와라(Oirat)와 이어지며 서쪽은 사마르칸트에 닿고 동쪽은 화주(火州)에 닿으며 동남쪽으로 가욕관과 3,700리 떨어져 있다. 혹은 언기(Karashahr), 혹은 구자(Kucha)라고도 한다. 원나라 세조 때 선위사를 두었고 얼마 후 원수부로 고쳤으며 그 후 여러 왕으로 하여금 진압하게 했다.

홍무 연간에 남옥(藍玉)이 사막을 정벌하여 포어아해(捕魚兒海)에 이르러 사마르칸트 상인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태조가 관원을 보내 그들을 돌려보냈는데 길이 별실팔리를 경유했다. 그 왕 흑적아화자(黑的兒火者)가 즉시 천호 하마력정(哈馬力丁) 등을 보내 내조하게 하고 말과 해청(매)을 바치니 24년(1391년) 7월에 경사(북경)에 도달했다. 황제가 기뻐하여 왕에게 채색 폐백 10벌을 하사하고 그 사신에게도 모두 하사품이 있었다. 9월 주사 관철(寬徹), 어사 한경(韓敬), 평사 당정(唐鉦)에게 명하여 서역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글을 써서 흑적아화자를 유시하기를 "짐이 보건대 하늘 아래 흙 위에 나라를 가진 자가 그 몇인지 알지 못한다. 비록 산이 막히고 바다가 격해 있어 풍습이 다르지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과 혈기의 종류는 일찍이 다르지 않다. 황천이 돌보아 도우시니 오직 하나로 볼 뿐이다. 그러므로 천명을 받아 천하의 주인이 된 자는 위로 천도를 받들고 일시동인(一視同仁)하여 크고 작은 여러 나라와 다른 지방 다른 종류의 군민으로 하여금 모두 인수의 경지에 오르게 한다. 우방과 먼 나라가 하늘에 순응하고 큰 것을 섬겨(사대)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면 황천이 이를 굽어보아 또한 융성하게 된다. 지난날 우리 중국의 송나라 임금은 사치하고 방종하며 게으르고 거칠어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혔다. 하늘이 덕이 없음을 보고 이에 원나라 세조에게 명하여 북쪽 사막에서 기초를 열고 들어와 중화를 통일하니 생민이 힘입어 안정을 찾은 지 70여 년이었다. 후사에 이르러 국정을 닦지 않고 그릇된 사람을 임용하여 기강이 모두 해이해지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며 무리가 적은 자에게 포악하게 하니 민생의 원망이 위에 사무쳐 하늘에 도달했다. 하늘이 이 때문에 그 명을 고쳐 짐에게 부탁하였다. 짐이 몸소 건부(하늘의 징표)를 쥐고 백성을 주재한다. 무릇 여러 난웅들이 성교(명성과 교화)를 제멋대로 하며 짐의 명을 어기는 자는 병사로써 눕히고, 짐의 명에 순종하는 자는 덕으로써 어루만진다. 이 때문에 30년 동안 제하(중국)는 안정되고 외범은 복속했다. 오직 원나라 신하 만자(蠻子) 하라장(哈剌章) 등이 여전히 남은 무리를 이끌고 분쟁을 일으켜 변방을 도적질하니 군사를 일으켜 토벌함에 형세가 그만둘 수 없었다. 병사가 포어아해에 이르니 옛 원나라의 여러 왕, 부마가 그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 사마르칸트 사람 수백 명이 무역하러 온 자가 있었는데, 짐이 관원을 명하여 호송해 보낸 지 이미 3년이다. 사신이 돌아오자 왕이 즉시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니 짐이 심히 가상히 여긴다. 왕은 그 사대의 정성을 더욱 굳게 하여 통호하고 왕래하며 사명을 끊이지 않게 한다면 어찌 봉국을 영구히 보전하지 않겠는가? 특별히 관원을 보내 위로하고 가상히 여기니 짐의 뜻을 다 알라."라고 했다. 관철 등이 이르자 왕은 하사품이 후하지 않다고 하여 그들을 억류했다. 한경, 당정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있었다.

30년 정월 다시 관원을 보내 글을 가지고 가서 유시하기를 "짐이 즉위한 이래 서방의 여러 상인이 우리 중국에 와서 무역하는 자를 변방 장수가 일찍이 막거나 끊지 않았다. 짐이 다시 관리와 백성에게 칙서를 내려 잘 대우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상인들이 이익을 얻고 국경이 소란스럽지 않으니 이는 우리 중화가 너희 나라에 큰 은혜가 있는 것이다. 앞서 관철 등을 보내 너희 여러 나라와 통호하게 했는데 무슨 까닭으로 지금까지 돌려보내지 않는가? 나는 여러 나라에 대하여 일찍이 한 사람도 억류하지 않았는데 너희가 도리어 우리 사신을 억류하니 어찌 이치이겠는가! 이 때문에 근년에 회회인이 입국하는 자를 또한 중국에서 무역하게 하고 관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돌려보내려 한다. 훗날 여러 사람이 부모처자가 있다고 말하기에 내가 그 지극한 정을 생각하여 모두 놓아보냈다. 지금 다시 사신을 시켜 너희를 유시하니 조정의 은의를 알게 하고 도로를 막아 전쟁의 단서를 열지 말게 하라. 《서경》에 이르기를 '원망은 큰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데 있지도 않다. 은혜를 베푸느냐 베풀지 않느냐, 힘쓰느냐 힘쓰지 않느냐에 있다'고 했다. 너희는 은혜를 베풀고 또한 힘쓸지어다."라고 했다. 이에 관철이 돌아올 수 있었다.

성조(영락제)가 즉위하던 겨울, 관원을 보내 옥새가 찍힌 서신과 채색 폐백을 가지고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얼마 안 되어 흑적아화자가 죽고 아들 사미사간(沙迷查干)이 뒤를 이었다. 영락 2년 사신을 보내 옥박(옥돌)과 명마를 바치니 연회와 하사가 더해졌다. 이때 하밀(Hami)의 충순왕 안극첩목아(Anke Temur)가 가한 귀력적(Guilichi)에게 독살당하니 사미사간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토벌했다. 황제가 그 의로움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 채색 폐백을 하사하고 후사 충순왕 탈탈(Tuotuo)과 화목하게 지내게 했다. 4년 여름 와서 조공하니 홍려시 승 유첩목아(劉帖木兒)에게 명하여 칙서와 폐백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하사하게 하였으며 그 사신과 함께 가게 했다. 가을, 겨울 및 이듬해 여름 세 번 입공했는데, 사마르칸트가 본래 그 선대의 옛 땅이라고 말하며 병사로써 회복하기를 청했다. 중관 파태(把太), 이달 및 유첩목아에게 명하여 칙서와 폐백을 가지고 가서 신중히 헤아려 행하고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경계하고 인하여 채색 폐백을 하사했다. 6년 파태 등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사미사간은 이미 죽고 동생 마합마(馬哈麻)가 뒤를 이었다고 했다. 황제가 즉시 파태 등에게 명하여 가서 제사 지내고 아울러 새 왕에게 하사하게 했다.

8년, 조정 사신이 사마르칸트에 가는 자를 마합마가 후하게 대우했으므로 사신을 보내 채색 폐백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했다. 이듬해 명마와 문표(무늬 있는 표범)를 바치니 급사중 부안에게 명하여 그 사신을 보내고 금으로 짠 무늬 비단을 하사했다. 이때 와라(Oirat) 사신이 말하기를 마합마가 장차 그 부락을 습격하려 한다고 하니, 인하여 순천보경(하늘에 순응하고 국경을 보전함)의 의로써 유시했다. 11년, 조공 사신이 장차 감숙에 이르려 하니 담당 관청에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고 또 총병관 이빈(李彬)에게 칙서를 내려 잘 대우하게 했다. 이듬해 겨울, 서역에서 돌아온 자가 있어 말하기를 마합마의 어머니와 동생이 잇달아 죽었다고 했다. 황제가 이를 불쌍히 여겨 부안에게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가서 위문하고 채색 폐백을 하사했다. 얼마 후 마합마 또한 죽고 아들이 없어 조카 납흑실지한(納黑失只罕)이 뒤를 이었다. 14년 봄, 사신이 와서 상을 알렸다. 부안 및 중관 이달에게 명하여 조문하고 제사 지내게 했으며, 즉시 그 후사 아들을 봉하여 왕으로 삼고 무늬 비단, 활과 칼, 갑주를 하사했으며 그 어머니에게도 하사품이 있었다. 이듬해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며 말하기를 장차 딸을 사마르칸트에 시집보내려 하니 청컨대 말(馬)로 장렴(혼수)을 무역하게 해달라고 했다. 중관 이신(李信) 등에게 명하여 비단과 깁 각 500필로써 돕게 했다. 16년, 조공 사신 속가(速哥)가 말하기를 그 왕이 사촌 동생 왜사(歪思)에게 시해당하고 왜사가 스스로 섰으며 그 부락을 옮겨 서쪽으로 가서 국호를 이역파리(亦力把里, 일리발리)로 고쳤다고 했다. 황제는 번인들의 풍속은 다스리기에 부족하다 하여 속가를 도독첨사로 제수하고 중관 양충(楊忠) 등을 보내 왜사에게 활과 칼, 갑주 및 무늬 비단, 채색 폐백을 하사하고 그 우두머리 홀대달(忽歹達) 등 70여 명에게도 아울러 하사품이 있었으며 이로부터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선덕 원년(1426년), 황제는 그들이 조정을 높여 섬김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 지폐와 폐백을 하사했다. 이듬해 입공하니 그 정사, 부사를 지휘천호로 제수하고 고명과 관대를 하사했으며 이후 사신들은 대부분 관직을 제수받았다. 3년 낙타와 말을 바치니 지휘 창영(昌英) 등에게 명하여 옥새가 찍힌 서신과 채색 폐백을 가지고 가서 답하게 했다. 이때 왜사가 해마다 조공하고 그 어머니 쇄루단 하돈(鎖魯檀 哈敦) 또한 3년을 연이어 와서 조공했다. 왜사가 죽고 아들 에센 부카(也先不花)가 뒤를 이었다. 정통 원년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토산물을 바쳤으며 뒤에도 자주 입공했다. 옛 왕 왜사의 사위 복새인(卜賽因, 아부사이드) 또한 사신을 보내와 조공했다. 10년, 에센 부카가 죽고 예밀력호자(也密力虎者)가 뒤를 이었다. 이듬해 말, 낙타, 토산물을 바치니 명하여 채색 폐백을 왕과 왕모에게 하사했다. 경태 3년 옥석 3,800근을 바쳤는데 예관이 쓸모가 없다고 말하니 조서를 내려 모두 거두고 매 2근마다 비단 1필을 하사했다. 천순 원년 천호 어지경(於志敬) 등을 명하여 복벽(영종의 복위)한 사실을 그 왕에게 유시하고 채색 폐백을 하사했다. 성화 원년 예관 요기(姚夔) 등이 서역의 조공 기한을 정하여 이역파리로 하여금 3년, 5년에 한 번 조공하게 하고 사신은 10명을 넘지 못하게 하니 이로부터 조공이 드디어 드물어졌다.

그 나라에는 성곽과 궁실이 없고 물과 풀을 따라 가축을 기른다. 사람들의 성품은 사납고 굳세며 군신 상하의 체통이 없다. 음식과 의복은 대개 와라(오이라트)와 같다. 땅은 지극히 춥고 깊은 산 깊은 골짜기에는 6월에도 눈이 날린다.

[해설]

별실팔리(Beshbalik)는 몽골어로 '다섯 성'이라는 뜻이며, 원래 위구르 제국의 수도였다가 몽골 제국 시기를 거쳐 당시에는 모굴리스탄 칸국(Moghulistan Khanate)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이 기록은 모굴리스탄 칸국의 역사를 담고 있다.

    흑적아화자(Khizr Khoja): 모굴리스탄의 칸.
    사미사간(Shamy-i Jahan): 키지르 호자의 아들.
    마합마(Muhammad Khan): 샤미 이 자한의 동생.
    납흑실지한(Naqsh-i Jahan): 마하마의 아들.
    왜사(Vais Khan): 나크시 이 자한을 죽이고 칸이 됨. 수도를 일리(Ili) 강 유역의 이역파리(Ili-balik)로 옮겼다고 기록됨.
    에센 부카(Esen Buqa II): 바이스 칸의 아들.
    이들은 티무르 제국과 경쟁하거나 협력하며 중앙아시아 동부(신강 지역)를 지배했다.

하렬(哈烈)

하렬은 일명 흑루(黑魯)라고도 하며 사마르칸트 서남쪽 3,000리에 있고 가욕관에서 12,000여 리 떨어져 있는 서역의 대국이다. 원나라 부마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통치한 후 또 그 아들 샤 루흐(沙哈魯)를 보내 하렬을 점거하게 했다.

홍무 때 사마르칸트와 별실팔리는 모두 조공했으나 하렬은 길이 멀어 이르지 않았다. 25년 관원을 보내 그 왕에게 조유하고 무늬 비단과 채색 폐백을 하사했으나 여전히 이르지 않았다. 28년 급사중 부안, 곽기(郭驥) 등을 보내 군사 1,500명을 데리고 가게 했으나 사마르칸트에 억류되어 도달하지 못했다. 30년 또 북평 안찰사 진덕문(陳德文) 등을 보냈으나 또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성조(영락제)가 즉위하자 관원을 보내 옥새가 찍힌 서신과 채색 폐백을 그 왕에게 하사했으나 여전히 답명이 없었다. 영락 5년 부안 등이 돌아왔다. 진덕문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 추장들에게 입공하라고 설득했는데 모두 길이 멀어 이르지 못한다고 했으며 또한 이해에 비로소 돌아왔다. 진덕문은 보창(保昌) 사람으로 여러 지방의 풍속을 채집하여 시가(詩歌)를 지어 바쳤다.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첨도어사로 발탁했다. 이듬해 다시 부안을 보내 서신과 폐백을 가지고 하렬에 가게 하니 그 추장 샤 루흐 바하두르(沙哈魯 把都兒)가 사신을 보내 부안을 따라와 조공했다. 7년 경사에 도달하니 다시 명하여 하사품을 가지고 그 사신과 함께 가서 답하게 했다. 이듬해 그 추장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사마르칸트 추장 할리(Khalil)는 하렬 추장의 형의 아들인데 두 사람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여 자주 군사를 일으켰다. 황제는 그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도지휘 백아얼흔태에게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내고 임금을 세운 것은 각기 그 삶을 누리게 함이다. 짐이 천하를 통어함에 일시동인하여 멀고 가까움을 두지 않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 너희를 유시했다. 너희가 능히 삼가 직공을 닦고 인민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며 서쪽 국경에서 편안하니 짐이 심히 가상히 여긴다. 요사이 들으니 너와 조카 할리가 병사를 일으켜 서로 원수가 되었다 하니 짐이 측은하게 여긴다. 한 집안의 친족은 은혜와 사랑이 서로 두터워야 외세의 침략을 제어할 수 있다. 친한 자가 오히려 이렇게 어그러지는데 소원한 자가 어찌 화합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마땅히 병사를 쉬게 하고 백성을 쉬게 하며 골육을 보전하여 태평의 복을 함께 누리라."라고 했다. 인하여 채색 폐백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하고 아울러 칙서로 할리를 유시하여 병사를 파하게 하고 또한 채색 폐백을 하사했다.

백아얼흔태가 사명을 받들어 사마르칸트, 실라사(Shiraz), 암적간(Andijan), 안도회(Andkhoy), 투르판, 화주, 유성, 하시하아(Kashgar) 등 여러 나라에 두루 이르러 폐백과 비단을 하사하고 입조 하도록 유시했다. 여러 추장이 모두 기뻐하며 각기 사신을 보내 하렬 사신과 함께 사자, 서역 말(서마), 문표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11년 경사에 도달했다. 황제가 기뻐하여 어전에서 받고 호가하고 하사함이 더해졌다. 이로부터 여러 나라 사신이 함께 이르렀는데 모두 하렬을 으뜸으로 차례를 정했다. 돌아갈 때가 되자 중관 이달, 이부원외랑 진성, 호부주사 이섬(李暹), 지휘 금하람백(金哈藍伯) 등에게 명하여 그들을 보내게 하고 나아가 옥새가 찍힌 서신, 무늬 비단, 사라, 포백 등 여러 물건을 가지고 가서 그 추장들에게 나누어 하사하게 했다. 13년, 이달 등이 돌아오자 하렬 등 여러 나라가 다시 사신을 보내 함께 왔는데 문표, 서역 말 및 다른 토산물을 바쳤다. 이듬해 다시 조공하니 돌아갈 때 진성에게 명하여 서신과 폐백을 가지고 답하게 했으며 거쳐 가는 주와 현에서 모두 전별 연회를 베풀었다. 15년 사신을 보내 진성 등을 따라와 조공했다. 이듬해 다시 조공하니 이달 등을 명하여 처음과 같이 답했다. 18년 우전, 팔답흑상과 함께 와서 조공했다. 20년 다시 우전과 함께 와서 조공했다.

선덕 2년, 그 두목 타라한 이불랄(打剌罕 亦不剌)이 내조하여 말을 바쳤다. 인종이 먼바다의 경영에 부지런하지 않았고 선종이 이를 계승하여 오랫동안 절역(먼 지역)에 사신을 보내지 않으니 그 조공 사신 또한 드물게 왔다. 7년 다시 중관 이귀에게 명하여 서역과 통교하게 하고 칙서로 하렬 추장 샤 루흐를 유시하기를 "옛날 짐의 황조 태종 문황제(영락제)께서 임어하시던 날, 너희들이 조정을 높이 섬겨 사신을 보내 공헌함에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다. 지금 짐이 삼가 천명을 받아 황제 위에 즉위하여 만방을 주재하고 연호를 선덕이라 하였다. 크고 작은 정무는 모두 황조께서 하늘을 받들고 백성을 구휼하며 일시동인하시던 마음을 체득한다. 전에 사신을 보내 서신과 폐백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려 했으나 길이 막혀 돌아왔다. 지금 이미 개통되었으니 특별히 내신을 명하여 가서 짐의 뜻을 유시한다. 그대들은 더욱 천심에 순응하여 성실한 우호를 영원히 도타이 하고 서로 왕래하며 한 집안같이 되어 상인과 여행객이 통행하고 각기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한다면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인하여 무늬 비단과 나단, 깁을 하사했다. 이귀 등이 이르지 않았는데 그 조공 사신 법호아정(法虎兒丁)이 이미 경사에 도착했다가 객관에서 죽었다. 관에 명하여 치제하고 유사가 장사 지냈다. 얼마 후 다시 사신을 보내 이귀를 따라 낙타, 말, 옥석을 바쳤다. 이듬해 봄, 사신이 돌아갔다. 다시 이귀에게 명하여 호송하게 하고 그 왕 및 두목에게 채색 폐백을 하사했다. 이해 가을 및 정통 3년에 아울러 와서 조공했다.

영종이 어리고 약하여 대신들이 휴식을 힘쓰고 중국을 피로하게 하여 외범을 섬기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먼 지방에서 통공하는 자가 심히 적었다. 천순 원년에 이르러 다시 서역과 통교할 것을 논의했다. 대신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는데 오직 충의위 관리 장소(張昭)가 항소하여 간절히 간하니 일이 이에 중지되었다. 7년, 황제가 중하(중국)가 안정되었으나 먼 번국이 조공을 오지 않는다 하여 무신을 나누어 보내 옥새가 찍힌 서신과 채색 폐백을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했다. 이에 도지휘 해영(海榮), 지휘 마전(馬全)이 하렬로 갔다. 그러나 이로부터 오는 자가 자못 드물었고 하렬 또한 제때 조공하지 않았다.

가정 26년(1547년), 감숙 순무 양박이 말하기를 "서역에서 입공하는 사람이 많으니 마땅히 제한을 두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예관이 말하기를 "조종의 옛일에 오직 하밀만이 매년 한 번 조공하는데 300명을 조공하고 11명을 보내 북경에 가게 하며 나머지는 관내에 머물게 하여 유사가 공급했습니다. 그 외 하렬, 하삼(哈三), 투르판, 천방, 사마르칸트 등 여러 나라가 하밀을 경유하는 자는 혹은 3년, 5년에 한 번 조공하고 단지 30~50명만 보내며 그 존류(남아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은 하밀의 예와 같습니다. 요사이 함부로 북경에 들어오게 하니 마땅히 변방 신하에게 칙서를 내려 이 예를 삼가 준수하게 하고 함부로 들여보내는 자는 죄를 주소서."라고 하니 재가했다. 그러나 이때 하렬은 이미 오랫동안 이르지 않았고 그 후 조공은 드디어 끊어졌다.

그 나라는 서역에서 가장 강대하다. 왕이 거처하는 성은 사방 10여 리이다. 돌을 쌓아 집을 만들었는데 평평하고 네모난 것이 높은 대(臺)와 같고 들보와 기둥, 기와와 벽돌을 쓰지 않으며 가운데가 탁 트여 빈 공간이 수십 칸이다. 창문과 문짝은 모두 꽃무늬를 조각하고 금벽으로 그림을 그렸다. 바닥에는 전계(모직물/카펫)를 깔았으며 군신, 상하, 남녀가 없이 서로 모여 모두 바닥에 자리를 깔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다. 나라 사람들은 그 왕을 일컬어 술탄(鎖魯檀)이라 하니 군장이라는 말과 같다. 남자는 머리를 깎고 흰 천으로 감으며 부녀자 또한 흰 천으로 머리를 가리고 겨우 두 눈만 내놓는다. 상하가 서로 부를 때는 모두 이름을 쓴다. 서로 보면 단지 허리를 조금 굽히며 처음 볼 때는 한쪽 다리를 굽히고 세 번 무릎을 꿇는데 남녀가 모두 그렇다. 밥 먹을 때 숟가락과 젓가락이 없고 도자기 그릇이 있다. 포도로 술을 빚는다. 교역에는 돈을 쓰는데 크고 작은 3등급이 있고 사사로이 주조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오직 추장에게 세금을 바치고 인장(표식)을 사용하는데 인장이 없는 것은 금하여 쓰지 못하게 한다. 무역은 모두 12의 세금을 걷는다. 말(斗)과 곡(斛, 부피 단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저울(권형, 무게 단위)만 설치한다. 관청이 없고 다만 관사(管事)하는 자가 있는데 도완(刀完, Darugha/Darwan?)이라 이름한다. 또한 형법이 없어 사람을 죽여도 단지 돈으로 벌을 받는다. 자매를 처첩으로 삼는다. 상을 입으면 단지 100일이고 관을 쓰지 않으며 천으로 시체를 싸서 장사 지낸다. 항상 묘지 사이에 제사를 지내는데 조상에게 제사 지내지 않고 또한 귀신에게도 제사 지내지 않으며 오직 하늘에 절하는 예(배천지례)를 중히 여긴다. 간지(갑자)와 삭망(음력 초하루 보름)이 없고 매 7일을 1전(회전/주)이라 하여 돌고 돌아 다시 시작한다. 2월, 10월을 파재월(라마단)로 삼아 낮에는 먹지 않고 밤이 되어서야 먹으며 달이 차야 비로소 훈채(고기)를 먹는다. 성 안에 큰 흙방을 짓고 가운데 동기(구리 기구) 하나를 두었는데 주위가 수 길이고 위에 고대 솥(정)과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다. 유학하는 자들이 모두 여기에 모이는데 마치 중국의 태학(대학)과 같다. 잘 달리는 자가 있어 하루에 300리를 갈 수 있으며 급한 심부름이 있으면 화살을 전하며 달려 알린다. 풍속은 사치를 숭상하고 씀씀이에 절도가 없다.

땅은 비옥하고 넉넉하며 기후는 따뜻한 날이 많고 비가 적다. 토산물은 흰 소금, 구리, 철, 금, 은, 유리, 산호, 호박, 주취(진주와 비취) 종류이다. 누에를 많이 치고 깁과 비단을 잘 짠다. 나무에는 뽕나무, 느릅나무, 버드나무, 회화나무, 소나무, 전나무가 있고 과일에는 복숭아, 살구, 자두, 배, 포도, 석류가 있으며 곡식에는 조, 보리, 삼, 콩이 있고 짐승에는 사자, 표범, 말, 낙타, 소, 양, 닭, 개가 있다. 사자는 아술하의 갈대숲 속에서 나는데 갓 태어날 때는 눈을 감고 있다가 7일 만에 비로소 뜬다. 토착민들은 눈을 감고 있을 때 잡아서 그 성질을 조련하여 익히는데 조금 자라면 길들일 수 없다. 그 근처 안도회, 팔답흑상이 모두 그 나라에 예속된다.

[해설]

하렬(Herat)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이다.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Shah Rukh)가 이곳을 수도로 삼아 티무르 제국을 다스렸다. 명나라는 사마르칸트와 헤라트를 별개의 세력처럼 기술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티무르 제국의 양대 중심지였다. 여기서 묘사된 풍속은 이슬람 문화(모스크, 라마단, 터번, 숟가락 없이 먹는 것)를 정확히 보여준다. '태학'과 같은 곳은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를 의미한다. '흑루'는 호라산(Khorasan)의 음역으로 보인다.

안도회(俺都淮)

안도회는 하렬 서북쪽 1,300리에 있고 동남쪽으로 사마르칸트와의 거리도 이와 같다. 성은 큰 마을에 있고 둘레는 10여 리이다. 땅은 평평하고 넓어 험한 곳이 없고 전토가 기름지며 백성과 물자가 번성하여 낙토(즐거운 땅)라 일컬어진다. 영락 8년부터 14년까지 하렬과 함께 조공을 통했으나 뒤에는 다시 이르지 않았다.

[해설]

안도회(Andkhoy)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 파랴브(Faryab) 주의 안드호이이다.

팔답흑상(八答黑商)

팔답흑상은 안도회 동북쪽에 있다. 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땅은 넓고 험한 곳이 없으며 산천이 밝고 빼어나고 인물은 순박하고 무성하다. 불탑(浮屠) 몇 구역이 있는데 장려하기가 왕의 거처와 같다. 서양, 서역의 여러 상인이 그 땅에서 많이 판촉하므로 민속이 부유하고 넉넉하다. 처음에는 하렬 추장 샤 루흐의 아들이 점거했다. 영락 6년 내관 파태, 이달에게 명하여 그 추장에게 칙서와 채색 폐백을 하사하고 아울러 하시하아(Kashgar), 갈특랑(Kotlank/Khuttalan?) 등 여러 부족에 미쳐 왕래하고 통상하라는 뜻으로 유시하니 모두 즉시 명을 받들었다. 이로부터 동서 만 리의 여행길에 막힘이 없었다. 12년 진성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8년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니 진성 및 내관 곽경에게 명하여 서신과 폐백을 가지고 가서 답하게 했다. 천순 5년 그 왕 마합마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듬해 다시 조공했다. 사신 아복도랄(Abdullah)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직직을 세습하게 하여 지휘동지로 삼았다.

[해설]

팔답흑상(Badakhshan)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동북부와 타지키스탄 동부에 걸친 바다흐샨 지역이다. 예로부터 라피스 라줄리(청금석)와 루비(Balas ruby)의 산지로 유명하여 부유했다. '불탑'이라 묘사된 것은 이슬람 사원일 가능성이 크거나 불교 유적의 잔재일 수도 있으나, 당시 이미 이슬람화되었으므로 모스크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전(于闐)

우전은 옛 국명으로 한나라부터 송나라 때까지 모두 중국과 통교했다. 영락 4년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사신이 돌아갈 때 지휘 신충(神忠), 모철(母撒) 등을 명하여 옥새가 찍힌 서신을 가지고 함께 가게 하여 그 추장에게 금으로 짠 무늬 비단을 하사했다. 그 추장 다루가(打魯哇) 이불랄금(亦不剌金)이 사신을 보내 옥박을 바치니 지휘 상형(尚衡) 등을 명하여 서신과 폐백을 가지고 가서 위로했다. 18년 하렬, 팔답흑상 등 여러 나라와 함께 말을 바치니 참정 진성, 중관 곽경 등을 명하여 채색 폐백으로 답했다. 20년 아름다운 옥을 바치니 하사가 더해졌다. 22년 말과 토산물을 바쳤다. 이때 인종이 처음 즉위하여 즉시 연회를 베풀고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앞서 영락 때 성조(영락제)가 먼 지방 만국이 신하로 복종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자 하여 서역의 사신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여러 번국은 중국의 재물을 탐내고 또 시장의 무역을 이롭게 여겨 도로에 이어졌다. 상인들이 대개 거짓으로 조공 사신이라 칭하고 말, 낙타, 옥석을 많이 가지고 와서 진헌한다고 소리쳤다. 이미 관문에 들어오면 모든 배와 수레, 물과 육지의 비용, 아침저녁의 음식 비용을 다 관리에게서 취했다. 역참은 공급에 곤란을 겪고 군민은 운송에 피폐해졌다. 서쪽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번번이 길을 따라 지체하며 머물고 화물을 많이 샀다. 동서 수천 리 사이에 소란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어 공사(관청과 민간) 상하가 원망하고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정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고 천자 또한 이를 구휼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급사중 황기(黃驥)가 그 폐해를 극도로 진술했다. 인종이 그 말에 감동하여 예관 여진(呂震)을 불러 질책했다. 이로부터 다시는 서역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조공 사신 또한 점차 드물어졌다.

우전은 예로부터 대국이어서 수, 당 연간에 융로, 한미, 거륵, 피산 등 여러 나라를 침병하여 그 땅이 더욱 커졌다. 남쪽으로 총령(파미르 고원)과 200여 리 떨어져 있고 동북쪽으로 가욕관과 6,300리 떨어져 있다. 대략 총령 이남은 사마르칸트가 가장 크고 이북은 우전이 가장 크다. 원나라 말기에 그 주인이 암약하여 이웃 나라가 번갈아 침략했다. 인민은 겨우 만 명으로 헤아리며 모두 산골짜기로 피하여 살았고 생업이 소조했다. 영락 연간에 서역이 천자의 위엄과 영묘함을 꺼려 모두 직공을 닦고 감히 제멋대로 서로 공격하지 않아 우전이 비로소 휴식을 얻었다. 점차 여러 번국과 장사하여 다시 부유하고 넉넉해졌다. 뽕나무, 삼, 기장, 벼가 완연히 중토(중국)와 같다. 그 나라 동쪽에 백옥하(White Jade River), 서쪽에 녹옥하, 또 서쪽에 흑옥하가 있는데 발원지가 모두 곤륜산에서 나온다. 토착민들이 밤에 달빛이 성한 곳을 보고 물에 들어가 그것을 캐면 반드시 아름다운 옥을 얻는다. 그 이웃 나라들도 많이 훔쳐 가서 바친다. 만력 조정에 이르기까지 우전은 또한 간간이 입공했다.

[해설]

우전(Khotan/Hotan)은 신강 타림 분지 남쪽의 오아시스 도시 호탄이다. 옥(Jade)의 산지로 유명하다. 이 기록은 명나라의 조공 무역이 초기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에서 인종(홍희제) 때 비용 문제로 축소되는 전환점을 설명하고 있다.

실라사(失刺思)

실라사는 사마르칸트와 가깝다. 영락 11년 사신을 보내 하렬, 암적간, 하시하아 등 8개국과 함께 백아얼흔태를 따라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이달, 진성 등을 명하여 칙서를 가지고 그 사신과 함께 가서 위로하게 했다. 13년 겨울, 그 추장 이불랄금(Ibrahim)이 사신을 보내 이달 등을 따라 내조하고 조공했는데, 천자가 바야흐로 북순 중이었다. 이듬해 여름에 이르러 비로소 하직하고 돌아가니 다시 진성에게 명하여 중관 노안과 함께 칙서 및 백금, 채색 비단, 사라, 포백을 가지고 가서 그 추장에게 하사하게 했다. 17년 사신을 보내 이사불한(Isfahan) 등 여러 부족과 함께 사자, 문표, 명마를 바치고 하직하고 돌아갔다. 다시 노안 등에게 명하여 그들을 보내게 하고 그 추장에게 융금(두꺼운 비단), 무늬 비단, 사라, 옥 허리띠, 자기 등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 이때 황제의 수레(거가)가 해마다 북정을 하여 말이 부족했으므로 관원을 보내 채색 폐백, 자기를 많이 가지고 가서 실라사 및 사마르칸트 등 여러 나라에서 말을 사게 했다. 그 추장이 즉시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고 21년 8월 선부(宣府)의 행궁에서 황제를 알현했다. 후하게 하사하고 경사로 돌려보냈는데 그 사람이 드디어 내지에 오랫동안 머물며 떠나지 않았다. 인종이 즉위하여 돌아갈 것을 재촉하니 이에 하직하고 떠났다.

선덕 2년 낙타, 말, 토산물을 바치니 그 사신 아력(阿力)을 도지휘첨사로 제수하고 고명과 관대를 하사했다. 그 후 오랫동안 조공하지 않았다. 성화 19년 흑루, 사마르칸트, 파단사(Badakhshan?)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사자를 바치니 조서를 내려 넉넉한 하사를 더했다. 홍치 5년 하밀 충순왕 엄파(陝巴)가 봉작을 습격하고 귀국하여 인접 국경의 야야극력(Yemek?) 추장과 결혼했다. 실라사 추장이 그 가난함을 생각하여 곁에 있는 나라 이불랄인(Ibrahim?)의 추장과 함께 그 평장 쇄화복태, 지원 만가를 거느리고 각기 사람을 보내 재물을 하사하여 결혼을 성사하도록 도와줄 것을 청했다. 조정이 이를 의롭게 여겨 엄파에게 후하게 하사하고 아울러 두 나라 및 그 평장, 지원에게 채색 폐백을 하사했다. 가정 3년 근처 32개 부족과 아울러 사신을 보내 말과 토산물을 바쳤다. 그 사신들이 각기 곤룡포(망의), 슬란(무릎 덮개), 자기, 포백을 구걸했다. 천자가 물리칠 수 없어 적당히 주었는데 이로부터 조공 사신 또한 이르지 않았다.

[해설]

실라사(Shiraz)는 이란 남서부의 도시 시라즈이다. 명사에서 '사마르칸트와 가깝다'고 한 것은 지리적 오류이거나 티무르 제국의 영향권 안에서 묶여 인식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불랄금(Ibrahim Sultan)은 샤 루흐의 아들로 시라즈를 통치했다.

암적간(俺的干)

암적간은 서역의 작은 부족이다. 원나라 태조가 서역을 모두 평정하고 자제들을 봉하여 왕으로 삼아 진압하게 했는데, 그 작은 곳은 관리를 두고 수자리를 두어 내지와 같이 했다. 원나라가 망하자 각자 할거하여 서로 통솔되거나 예속되지 않았다. 홍무, 영락 연간에 자주 사람을 보내 회유하니 조금씩 와서 조공했다. 땅이 큰 자는 국(國)이라 칭하고 작은 자는 단지 지면(地面)이라 칭했다. 선덕 조정에 이르러 신하의 직분을 다하고 표문과 전문을 받들고 대궐 아래에 머리를 조아린 자가 많게는 70~80부족에 이르렀다.  암적간은 영락 11년 하렬과 함께 조공한 자이다. 14년에 이르러 노안 등이 하렬, 실라사 등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다시 편한 길에 그 추장에게 무늬 비단을 하사했다. 그러나 땅이 작아 항상 조공할 수 없었고 뒤에는 마침내 이르지 않았다.

[해설]

암적간(Andijan)은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분지의 안디잔이다. 훗날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시하아(哈實哈兒)

하시하아 또한 서역의 작은 부족이다. 영락 6년 파태, 이달 등이 칙서를 가지고 가서 하사하니 즉시 명을 받들었다. 11년 사신을 보내 백아얼흔태를 따라 입조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선덕 때 또한 내조하고 조공했다. 천순 7년 지휘 유복(劉福), 보현(普賢)을 명하여 그 땅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그 조공 사신 또한 항상 올 수는 없었다.

[해설]

하시하아(Kashgar)는 신강 서부의 카슈가르이다. '작은 부족'이라 칭해졌으나 실크로드의 핵심 도시였다.

이사불한(亦思弗罕)

이사불한은 땅이 암적간과 가깝다. 영락 14년 안도회, 사마르칸트에 사신으로 가는 자가 그 땅을 경유하여 그 추장에게 무늬 비단 등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 17년 이웃 나라 실라사와 함께 사자, 표범, 서역 말을 바치니 백금과 지폐, 폐백을 하사했다. 사신이 하직하고 돌아가니 노안 등에게 명하여 그들을 보내게 했다. 마합목(Mahmud?)이라는 자가 있어 경사에 머물기를 원하니 그 청을 따랐다. 성화 19년 사마르칸트와 함께 사자, 명마, 번도(오랑캐 칼), 두로(Toulo, 면직물/담요), 쇄폭(Sufu, 모직물) 등 여러 물건을 바치니 하사를 더했다.

이에 앞서 선덕 6년 이사파한(亦思把罕)이 있어 사신 미아아력(Mir Ali?)을 보내 조공했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곧 이사불한이라고 한다.

[해설]

이사불한(Isfahan)은 이란 중부의 도시 이스파한이다. 안디잔과 가깝다고 한 것은 명백한 지리적 오류이다.

화랄찰(火剌札)

화랄찰은 나라가 미약하다. 사방이 모두 산이고 초목이 적다. 물 흐름이 굽이치고 또한 물고기와 새우가 없다. 성은 겨우 1리쯤 되고 모두 흙집이며 추장이 사는 곳 또한 낮고 누추하다. 풍속은 승려를 공경한다. 영락 14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거쳐 가는 지역에 명하여 모두 예로 대우하게 했다. 홍치 5년 그 땅의 회회 파로만(怕魯灣) 등이 바닷길을 통해 유리, 마노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효종이 받아들이지 않고 도로 비용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해설]

화랄찰(Khwarazm)은 호라즘 지역, 혹은 그 중심 도시인 우르겐치(Urgench)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랄찰'의 음이 호라즘과 유사하다.

기력마아(乞力麻兒)

기력마아는 영락 연간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했는데 오직 짐승 가죽, 새 깃털, 털로 짠 굵은 베(계갈) 뿐이었다. 그 풍속은 활쏘기와 사냥을 좋아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다. 서남쪽은 바다에 접해 있고 동북쪽은 숲과 풀이 깊고 빽빽하며 맹수와 독충이 많다. 거리와 골목은 있으나 시장(상점)은 없고 교역에는 철전(쇠돈)을 쓴다.

[해설]

기력마아(Qilima'er)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흑해의 크림(Crimea/Qirim)을 지칭한다는 설이 유력하다(육로 사절단과 관련될 때). 그러나 위치 묘사(서남쪽이 바다, 동북쪽이 숲)는 크림반도의 지형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일부에서는 동아프리카의 킬와(Kilwa)를 지칭한다고도 보지만, 여기서는 서역 열전에 포함되어 있고 육로 조공의 맥락이 강하므로 크림일 가능성이 높다.

백송호아(白松虎兒)

백송호아의 옛 이름은 속마리아(速麻里兒)이다. 일찍이 흰 호랑이가 소나무 숲에서 나왔는데 사람을 해치지 않고 또한 다른 짐승도 잡아먹지 않다가 열흘 뒤 다시 보이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신호(신령한 호랑이)라 칭하고 말하기를 이는 서방 백호가 정기를 내린 것이라 하여 국명을 고쳤다. 그 땅에는 큰 산이 없고 또한 나무가 자라지 않으며 독충과 맹수의 해가 없으나 물산이 매우 박하다. 영락 연간에 일찍이 입공했다.

[해설]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나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의 한 부족이나 소국으로 추정된다.

답아밀(答兒密)

답아밀은 사마르칸트에 복속되어 있다. 바다 가운데 거주하며 땅은 100리가 안 되고 사람은 1,000가구가 되지 않는다. 성곽이 없고 상하가 모두 판옥(판자집)에 산다. 경작할 줄 알고 털로 짠 베, 베와 실, 말, 낙타, 소, 양이 있다. 형벌은 매질(추박)에 그친다. 교역에는 은전을 겸하여 쓴다. 영락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대통력(달력)》 및 무늬 비단, 약, 차 등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

[해설]

답아밀(Darband? Termez?)은 앞서 나온 질리미(Termez)와 혼동될 수 있으나, '바다 가운데 거주한다(居海中)'는 묘사가 특이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Hormuz) 근처 섬이나 다른 해양 지역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마르칸트에 속해 있다는 점이 모순된다. 큰 호수(아랄해나 카스피해) 근처의 섬이나 반도, 혹은 아무다리야 강의 섬일 수도 있다.

납실자한(納失者罕)

납실자한은 실라사에서 동쪽으로 며칠 길인데 모두 배로 간다. 성 동쪽은 평원이고 물과 풀이 넉넉하여 목축에 알맞다. 말은 몇 종류가 있는데 가장 작은 것은 높이가 3자를 넘지 않는다. 풍속은 승려를 중히 여겨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음식을 공양한다. 그러나 기가 세고 싸움을 좋아하여 싸워서 이기지 못한 자는 무리가 비웃는다. 영락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사신이 돌아갈 때 하북을 지나 관중(산서/섬서)으로 돌아 감숙에 이르니 유사가 모두 연회를 베풀었다.

[해설]

납실자한(Nakhchivan?)은 이름만 보면 아제르바이잔의 나히체반과 비슷하지만, 실라사(시라즈) 동쪽이라는 방향이 맞지 않는다(나히체반은 서북쪽). 지리적 혼란이 보인다. '배로 간다'는 설명은 페르시아만 연안을 시사하기도 한다.

민진성(敏真城)

민진성은 영락 연간에 와서 조공했다. 그 나라 땅은 넓고 높은 산이 많다. 낮에 시장을 열면 여러 재화가 나란히 모이는데 중국의 자기와 칠기를 귀하게 여긴다. 기이한 향과 낙타, 말이 난다.

[해설]

정확한 비정이 어렵다. 미얀마의 몽 밋(Mong Mit) 등 남방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서역전에 있어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특정 도시로 추정된다.

일몰국(日落國)

일몰국은 영락 연간에 와서 조공했다. 홍치 원년 그 왕 이사한답아 루밀첩리야(亦思罕答兒 魯密帖里牙, Iskandar Rum...)가 다시 조공했다. 사신이 주하여 저사, 실, 하포, 자기를 구하니 조서를 내려 모두 주게 했다.

[해설]

'일몰국'은 해가 지는 나라, 즉 서쪽 끝을 의미한다. 왕의 이름에 '루밀(Rumi)'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룸(Rum, 오스만 제국 또는 비잔티움의 후예)과 관련이 있거나 알렉산더(Iskandar)의 이름을 딴 통치자가 있는 곳으로 보인다. 시리아나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석아(米昔兒)

미석아는 일명 밀사아(密思兒)라고 한다. 영락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연회와 하사를 마치고 명하여 5일에 한 번 술과 음식, 과일과 미끼(간식)를 주고 거쳐 가는 곳에서 모두 연회를 베풀게 했다. 정통 6년 왕 술탄 아실랄복(Ashraf?)이 다시 와서 조공했다. 예관이 말하기를 "그 땅이 지극히 멀어 하사한 전례가 없습니다. 옛날 사마르칸트가 처음 조공했을 때 하사가 너무 넉넉했으니 지금은 마땅히 조금 줄여야 합니다. 왕에게 채색 폐백 10벌, 사라와 깁 각 3필, 흰 모직물(백모사포), 백장락포 각 5필, 세백포 20필을 하사하고 왕의 처와 사신은 차등을 두어 줄이소서."라고 하니 따랐다. 이후 다시는 오지 않았다.

[해설]

미석아(Misr)는 이집트, 당시 맘루크 왕조를 가리킨다. 술탄 아실랄복은 맘루크 술탄 알 아슈라프(Al-Ashraf Barsbay)로 추정된다.

흑루(黑婁)

흑루는 사마르칸트와 가깝고 대대로 혼인을 맺는다. 그 땅의 산천, 초목, 금수가 모두 검고 남녀 또한 그렇다. 선덕 7년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정통 2년 그 왕 샤 루흐 술탄이 지휘 하지 마흑마(Hajji Mahmud)를 보내 조공을 받들었다. 명하여 칙서 및 금으로 짠 저사, 채색 비단을 보내 그 왕에게 하사했다. 6년 다시 와서 조공했다. 경태 4년 인접한 31개 부족 남녀 100여 명과 함께 말 247필, 노새 12마리, 당나귀 10마리, 낙타 7마리 및 옥석, 풍사, 빈철 칼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천순 7년 왕모 색(塞) 또한 지휘첨사 마흑마 사아반(Mahmud Sha'ban?) 등을 보내 조공을 받들었다. 채색 폐백 겉감과 안감, 저사, 실, 옷을 하사하고 그 사신을 발탁하여 지휘동지로 삼았으며 수행원 7명은 모두 소진무(진무소의 관원)로 삼았다. 성화 19년 실라사, 사마르칸트, 파단사와 함께 사자를 바쳤다. 파단사의 우두머리 또한 술탄 마흑마라 칭하는데 경태 7년 일찍이 입공했고 이때에 이르러 다시 함께 왔다. 홍치 3년 또 천방(메카) 등 여러 나라와 함께 낙타, 말, 옥석을 바쳤다.

[해설]

흑루(Heilou)는 호라산(Khorasan)을 의미한다. 앞서 '하렬(Herat)'을 '흑루'라고도 한다고 했으나, 여기서는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호라산 지역의 다른 도시나 부족을 지칭할 수 있다. 샤 루흐가 왕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티무르 제국의 핵심 영역이다.

토래사(討來思)

토래사는 땅이 작아 둘레와 지름이 100리가 안 된다. 성은 산에 가깝다. 산 아래 물이 있는데 붉은색이라 바라보면 불과 같다. 풍속은 부처를 섬긴다. 부인이 집안의 권력을 주관한다. 소, 양, 말, 낙타가 나고 베와 실, 털로 짠 옷(모갈)이 있다. 땅은 기장과 보리에 알맞고 벼는 없다. 교역에는 돈을 쓴다. 선덕 6년 입공했다. 이듬해 중관 이귀에게 명하여 옥새가 찍힌 서신을 가지고 가서 장려하고 위로하며 무늬 비단과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땅이 작아 항상 조공할 수는 없었다.

[해설]

토래사(Tauris/Tabriz)는 이란 서북부의 타브리즈를 지칭한다. '토래사'는 타브리즈의 음역이다. '부처를 섬긴다'는 기록은 우상 숭배나 이교도적 관습을 불교로 오인했거나, 일칸국 시대의 잔재(불교 영향)가 와전되었을 수 있으나, 당시 타브리즈는 이슬람 도시다. '붉은 물'은 타브리즈 근처의 온천이나 특정 강을 묘사한 것일 수 있다.

아속(阿速)

아속은 천방, 사마르칸트와 가깝고 영토가 매우 넓다. 성은 산에 의지하고 강을 마주하고 있다. 강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고기와 소금의 이익이 있다. 땅은 경작과 목축에 알맞다. 부처를 공경하고 신을 두려워하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싸움을 싫어한다. 물산이 풍부하고 추위와 더위가 절기에 맞으며 백성은 굶주림과 추위가 없고 밤에는 도적이 적어 락토(즐거운 땅)라 칭해진다. 영락 17년 그 추장 야홀사(Yaqub Shah?)가 사신을 보내 말과 토산물을 바치니 연회와 하사를 제도와 같이 했다. 땅이 멀어 항상 조공할 수 없었다. 천순 7년 도지휘 백전(白全) 등을 명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했는데 끝내 다시 조공하지 않았다.

[해설]

아속(Asu/Al-Hasa?)은 보통 몽골 시대의 아수(Asud, 알란족)를 지칭하지만, 여기서는 지리적 묘사(천방과 가깝고 강이 남쪽 바다로 흐름)로 보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이라크 지역이나 아라비아 반도의 알 하사(Al-Hasa) 지역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부처를 공경한다'는 표현은 이슬람 신앙을 중국식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사하루(沙哈魯)

사하루는 아속 서쪽 바다 섬 가운데 있다. 영락 연간에 77명을 보내와 조공하니 매일 술과 음식, 과일과 미끼를 주어 다른 나라와 다르게 했다. 그 땅은 산천이 감싸 안고 있고 가축 등 산물이 넉넉하며 사람의 성품은 순박하고 정직하여 싸움을 부끄러워하고 부처를 좋아한다. 왕과 신료는 성 안에 살고 서민은 모두 성 밖에 산다. 바다에서 기이한 물건이 나는데 서역 상인들이 가벼운 값으로 그것을 사가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해설]

사하루(Shah Rukh)는 티무르의 아들 이름인데 여기서는 지명으로 나왔다. '바다 섬 가운데 있다'는 묘사로 보아 페르시아만의 섬이나 해안 도시를 샤 루흐의 이름을 따서, 혹은 사신이 샤 루흐가 보낸 것을 지명으로 오인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천방(天方)

천방은 옛 윤충(筠沖) 땅이며 일명 천당(天堂)이라고 하고 또 메카(默伽)라고도 한다. 고리(Calicut, 인도 캘리컷)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3개월 만에 비로소 도착한다. 그 조공 사신은 대개 육로를 따라 가욕관으로 들어온다.

선덕 5년 정화(鄭和)가 서양에 사신으로 가서 그 동료를 나누어 보내 고리에 가게 했다. 고리가 사람을 보내 천방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인하여 사람을 시켜 재화를 가지고 그 배에 붙어 함께 가게 했다. 갔다가 돌아오는데 1년이 걸렸으며 기이한 보물과 기린, 사자, 타계(타조)를 사서 돌아왔다. 그 국왕 또한 배신(신하)을 보내 조정 사신을 따라와 조공했다. 선종이 기뻐하여 하사를 더했다. 정통 원년에 비로소 자바(Java)의 조공선에 붙여 돌아가게 하고 폐백과 칙서를 내려 그 왕을 장려했다. 6년 왕이 아들 사이드 알리(賽亦得 阿力)와 사신 사이드 하산(賽亦得 哈三)을 보내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와서 조공했다. 육로로 행하여 하라(Hala)에 이르러 도적을 만나 사신이 죽고 그 아들은 오른손을 다쳤으며 조공물을 모두 약탈당하고 떠나니 수비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조사해서 다스리게 했다.

성화 23년 그 나라의 회회 아력(阿力)이 형 납적(納的)이 중토(중국)를 유람한 지 40여 년이 되어 운남으로 가서 찾고자 했다. 이에 거만의 보물을 가지고 말라카에 이르러 행인 좌보(左輔)의 배에 붙어 장차 북경에 들어가 조공하려 했다. 광동에 도착하여 시박 중관 위권에게 침탈당했다. 아력이 원망하여 북경에 가서 스스로 호소했다. 예관이 그 공물을 평가하여 그 값을 갚아주고 형을 운남에서 찾는 것을 허락하기를 청했다. 이때 위권이 죄를 두려워하여 먼저 안으로 인연을 맺었다(뇌물을 썼다). 황제가 이에 아력을 간첩이라 책망하고 조공을 가장하여 간사한 짓을 한다 하여 광동 수신에게 명하여 쫓아 돌려보내게 하니 아력이 이에 울부짖으며 떠났다. 홍치 3년 그 왕 술탄 아흐마드(速檀 阿黑麻)가 사신을 보내 사마르칸트, 투르판과 함께 말, 낙타, 옥석을 조공했다.

정덕 초에 황제가 어마 태감 곡대용(谷大用)의 말을 따라 감숙 수신에게 명하여 여러 번국의 암말과 거세마를 찾게 하니 번인 사신이 좋은 말은 천방에서 난다고 했다. 수신이 인하여 여러 번국 사신에게 유시하여 그 왕에게 전달하고 입공하게 할 것을 청했다. 병부상서 유우(劉宇)가 중관의 뜻을 맞추어 수신으로 하여금 사자(使者)와 통역을 잘 골라 친히 여러 번국에 가서 깨우치게 할 것을 의논하니 따랐다. 13년 왕 사야파랄크(Shaikh Barakat?)가 사신을 보내 말, 낙타, 소폭, 산호, 보석, 어야도(Fish tooth knife/Walrus ivory?) 등 여러 물건을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망룡 금직 의복 및 사향, 금은 기물을 하사했다.

가정 4년 그 왕 이마두아(Imad?) 등이 사신을 보내 말, 낙타, 토산물을 조공했다. 예관이 말하기를 "서역인이 와서 조공함에 섬서 행도사가 반년 이상 억류하다가 비로소 갖추어 주상했습니다. 바친 옥석은 모두 거칠고 나쁜데 사신이 사사로이 가진 재화는 모두 좋습니다. 청컨대 안신(어사)에게 내려 조사하여 묻게 하고 지금부터 옥석을 많이 가져와 도로를 번거롭고 소란스럽게 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 공물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도사 관리의 죄로 다스리소서."라고 하니 따랐다. 이듬해 그 나라 액마도항(Ahmad Khan?) 등 8왕이 각기 사신을 보내 옥석을 조공했는데 주객랑중 진구천(陳九川)이 그 거칠고 나쁜 것을 골라 물리치니 사신이 원망했다. 통역 호사신(胡士紳) 또한 진구천에게 유감이 있어 사신을 사칭하여 주상했는데 말이 진구천을 무고하여 옥을 훔쳤다고 하니 조옥(의금부)에 하옥되어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상서 석서(席書), 급사중 해일관(解一貫) 등이 구원했으나 듣지 않고 끝내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

11년 사신을 보내 투르판, 사마르칸트, 유밀(Hami/Kumul)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와서 조공했는데 왕이라 칭하는 자가 37명에 이르렀다. 예관이 말하기를 "옛 제도에 흡합밀(Hami)과 타안(朵顏) 3위는 매년 한 번 조공하는데 조공이 300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3위는 땅이 가까워 모두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하밀은 10명 중 2명을 보내고 나머지는 변방에 머물렀습니다. 서역 같은 경우는 만 리 넘어 있어 본래 속국이 아니니 3위의 조공 기한과 같이 보기 어렵고 보낸 사신이 평상수보다 배가 넘습니다. 번국 문서가 200여 통에 이르는데 모두 반역자 아목란(牙木蘭)을 찾아 달라는 것을 말로 삼고 있습니다. 가만히 두려워하건대 말을 핑계로 엿보고 조정의 처분을 살피려는 것입니다. 변방 신하가 밝은 조례를 따르지 않고 대개 기송(보냄)하니 법체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독무 등 여러 신하에게 내려 여러 번인이 입공하는 것을 만나면 존류(남길 자)와 기송(보낼 자)을 분별하여 대개 북경으로 보내지 못하게 하소서. 또한 변방 관리를 엄히 단속하여 눈앞의 화를 피하려다 훗날의 근심을 남기지 말게 하고, 납관(복종을 받아들임)의 헛된 이름을 탐하여 변방 방어의 실제 계책을 잊지 말게 하소서."라고 했다. 황제가 그 주상을 재가했다.

[해설]

천방(Tianfang)은 메카(Mecca)를 말한다. 정화의 원정대가 방문했으며, 카바 신전을 '천당' 혹은 '천방(하늘의 사각형)'으로 묘사했다. 이 기록은 명나라 후기로 갈수록 조공 무역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고, 상인들이 왕을 사칭하며 무역의 이익을 노리는 상황, 그리고 명나라 관리들의 부패(위권의 사례)와 갈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사(故事, 전례)

고사(옛 관례)에 여러 번국의 공물이 이르면 변방 신하가 그 장부를 검사하여 올리고 예관이 장부에 의거하여 하사품을 주었다. 장부에 실리지 않은 것은 스스로 무역하는 것을 허락했다. 조공 사신이 일을 마치면 즉시 남은 재화가 있어도 책임지고 가지고 돌아가게 했다. 관청에 넣기를 원하는 자는 예관이 주상하여 지폐(초)를 주었다. 정덕 말기에 교활한 번인과 간사한 관리가 서로 결탁하여 이익을 꾀하여 비로소 무역하고 남은 재화를 시쾌(거간꾼)에게 명하여 값을 매겨 관에서 견과 지폐를 주는 전례가 생겼다. 이때에 이르러 천방 및 투르판 사신이 그 장부의 남은 옥석, 줄칼 등 여러 재화를 굳이 공물에 준하여 상을 달라고 구했다. 예관이 부득이하여 정덕 연간의 예를 들어 청하니 이를 허락했다.

번인 사신은 대개 상인으로 오면 번번이 무거운 재물을 끼고 중국과 무역했다. 변방 관리가 뇌물을 즐겨 침탈함이 여러 가지였는데 대개 공가(관청)에서 보상을 취했다. 혹 그 값에 맞지 않으면 곧 으르렁거리며(포효하며) 그치지 않았다. 이해에 조공 사신은 모두 교활하고 사나웠으며 이미 중국의 사정을 익히 알고 또한 변방 관리의 침탈을 원망하여 여러 번 이를 호소했으나 예관이 물리치고 묻지 않았다. 진수 감숙 중관 진호(陳浩)라는 자가 번인 사신이 입공할 때 집안 종 왕홍(王洪)을 시켜 명마, 옥석 등 여러 물건을 많이 요구하니 사신이 그를 원망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왕홍을 만나자 즉시 잡아 관청에 나아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예관이 말하기를 일이 국체에 관계되니 모름지기 크게 처분하여 먼 곳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에 삼법사, 금의위 및 급사중에게 명하여 각기 관원 1명을 보내 감숙에 가서 조사하고 다스리게 하니 왕홍이 마침내 죄를 얻었다.

17년 다시 조공했는데 그 사신이 중토 유람을 청했다. 예관이 교활한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옛 관례가 아니라 하여 거절했다. 22년 사마르칸트, 투르판, 하밀, 루미(Rum) 등 여러 나라와 함께 말과 토산물을 조공했다. 그 후 5~6년에 한 번 조공했는데 만력 연간까지 끊이지 않았다.

천방은 서역에서 대국이며 사계절이 항상 여름과 같고 비, 우박, 서리, 눈이 없으며 오직 이슬이 가장 짙어 초목이 모두 이에 힘입어 자란다. 땅은 비옥하고 조, 보리, 검은 기장이 넉넉하다. 사람은 모두 키가 크다. 남자는 머리를 깎고 천으로 감는다. 부녀자는 머리를 땋아 머리를 덮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해지기를 회회 설교의 시조 마하마(Muhammad)라는 자가 비로소 이 땅에서 교를 행하고 죽어 곧 여기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묘지 꼭대기에 항상 빛이 있어 밤낮으로 꺼지지 않는다. 후세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준수하여 오래되어도 쇠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선을 향한다. 나라에 가혹한 소란이 없고 또한 형벌이 없으며 상하가 편안하고 화목하며 도적이 일어나지 않아 서쪽 땅에서 낙국(즐거운 나라)이라 칭한다. 풍속은 술을 금한다. 예배사(모스크)가 있는데 매달 초승(초하루)에 그 왕과 신민이 모두 하늘에 절하고 소리쳐 칭송하고 드날리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절은 사방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방면이 90칸으로 총 360칸이며 모두 백옥으로 기둥을 삼고 황감옥으로 바닥을 삼았다. 그 당(카바)은 오색 돌로 쌓아 만들었고 사방이 평평한 지붕이다. 안에는 침향 대목을 써서 들보를 삼은 것이 모두 다섯이고 또 황금으로 누각을 만들었다. 당 안의 담장은 모두 장미 이슬(장미수)과 용연향을 흙에 섞어 만들었다. 문을 지키는 것은 검은 사자 두 마리이다. 당 왼쪽에 사마의(Isma'il) 묘가 있는데 그 나라에서 성인총이라 칭한다. 흙은 모두 보석이고 담장은 황감옥이다. 양옆에 여러 조사가 법을 전한 당이 있는데 또한 돌로 쌓아 만들었으며 모두 지극히 장려하다. 그들이 회회교를 숭봉함이 이와 같다.

과일과 여러 가축은 모두 중국과 같다. 수박, 단 오이(감과/멜론)는 한 사람이 들 수 없는 것이 있고 복숭아는 무게가 4~5근 되는 것이 있으며 닭, 오리는 무게가 10여 근 되는 것이 있어 모두 여러 번국에 없는 것이다. 마하마 묘 뒤에 우물(잠잠 우물)이 하나 있는데 물이 맑고 달다.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반드시 길어 가지고 가는데 태풍을 만나 물을 취해 뿌리면 곧 멈춘다. 정화가 서양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 풍물을 전한 것이 이와 같다. 그 후 왕이라 칭하는 자가 20~30명에 이르렀고 그 풍속 또한 점차 처음과 같지 않게 되었다.

[해설]

여기서 '고사'는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조공 무역에 관한 전례와 규정을 설명하는 섹션이다. 명나라 말기의 혼탁한 무역 상황을 설명한다. 이어지는 천방(메카)에 대한 묘사는 카바 신전(예배사), 이스마일의 묘(히즈르 이스마일), 잠잠 우물 등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 마하마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말한다. 다만 무함마드의 묘는 메디나에 있으나 여기서는 천방(메카)에 있는 것으로 혼동하고 있다.

묵덕나(默德那)

묵덕나는 회회 조상의 나라로 땅이 천방과 가깝다. 선덕 때 그 추장이 사신을 보내 천방 사신과 함께 와서 조공했으나 뒤에는 다시 이르지 않았다. 전해지기를 그 시조 국왕 모한맥덕(Muhanmode, Muhammad)이 태어나면서 신령하여 서역 여러 나라를 다 신하로 복종시켰으며 여러 나라가 존경하여 별암발이(Bie'anba'er)라 하니, 천사(天使/예언자, Paighambar)라는 말과 같다. 나라 안에 경전 30권이 있는데 무릇 3,600여 단이다. 그 글은 옆으로 가며(가로쓰기) 전서, 초서, 해서 세 가지 체를 겸하는데 서양 여러 나라가 모두 이를 쓴다. 그 교는 하늘을 섬기는 것을 위주로 하며 형상(우상)을 설치하지 않는다. 매일 서쪽을 향해 경건히 절한다. 매년 1개월 재계(라마단)하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거처는 반드시 평소의 곳을 바꾼다. 수나라 개황 연간에 그 나라 살합팔 살아적간 갈사(Sahaba Sa'ad ...?)가 비로소 그 교를 전하여 중국에 들어왔다. 원나라 때에 이르러 그 사람이 사방에 퍼져 모두 교를 지키며 바꾸지 않았다.

나라 안의 성지, 궁실, 시장, 전원은 대개 중토와 비슷하다. 음양, 성력(달력), 의약, 음악 등의 기술이 있다. 그 직물과 기물을 만드는 것이 더욱 교묘하다. 추위와 더위가 기후에 응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물자는 번성하며 오곡과 육축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풍속은 살생을 중히 여기고(할랄 도축을 의미하는 듯)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일찍이 흰 천으로 머리를 가리며 비록 다른 나라에 가더라도 그 풍속을 바꾸지 않는다.

[해설]

묵덕나(Modena)는 메디나(Medina)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와 쿠란(경전 30권), 이슬람의 관습(우상 숭배 금지, 예배, 라마단, 할랄, 히잡/터번)을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별암발이'는 페르시아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파이감바르(Paighambar)'의 음역이다. 수나라 때 이슬람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전설(와이스 알 카르니 혹은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관련 설화)에 기반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이슬람 창시는 7세기 초, 수나라는 6세기 말~7세기 초).

곤성(坤城)

곤성은 서역 회회 종족이다. 선덕 5년 그 사신 자마력정(者馬力丁) 등이 내조하여 낙타와 말을 바쳤다. 이때 개중(소금을 운반하고 그 대가로 차 등을 받는 법)의 령이 있어 사신이 즉시 쌀 16,700석을 경창(서울 창고)에 바쳐 소금을 샀다(실제로는 소금 인수증인 염인). 하직하고 돌아갈 때 바친 쌀을 관에 헌납하기를 원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회인은 이익을 잘 꾀하니 비록 이름은 조공이라 하나 실은 무역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값으로 갚아주라."라고 했다. 이에 비단 40필, 베는 그 배를 주었다. 그 후에도 일찍이 조공했다.

자성조(영락제)가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고 만방을 위엄으로 제어하고자 하여 사신을 사방으로 보내 불러오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서역의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이마를 조아려 칭신하지 않음이 없었고 보물을 바치는데 뒤질세라 두려워했다. 또 북으로 사막을 다하고 남으로 명해(바다) 끝까지, 동서로 해가 뜨고 지는 곳까지 무릇 배와 수레가 이를 수 있는 곳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부터 먼 지방 다른 지역의 새소리(알아듣기 힘든 말)를 하는 사신들이 대궐 뜰에 모여들었다. 시절마다 하사하느라 국고가 비게 되었다. 그러나 사방의 기이한 보배와 진기한 보물, 이름난 새와 특수한 짐승이 상방(황실 창고)에 바쳐지는 것 또한 날로 늘고 달로 더해졌다. 대개 한나라, 당나라의 성성함을 겸하여 가졌으니 백왕(수많은 제왕)이 아우를 수 없는 바였다. 남은 위엄이 후사에 미쳐 선덕, 정통 조정에도 여전히 통역을 거듭하여 이르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인종은 먼 계략을 힘쓰지 않아 즉위 초에 즉시 서양에서 보물을 가져오는 배(정화의 원정)를 철수하고 송화강에서 배를 만드는 노역을 정지했으며 서역 사신을 불러 북경으로 돌아오게 하고 칙서로 귀국하게 하여 중토를 피로하게 하여 먼 사람을 받들고자 하지 않았다. 선덕이 이를 계승하여 비록 간간이 한 번 사신을 보냈으나 얼마 후 또한 정지했으므로 변방 모퉁이가 휴식을 얻었다.

지금 옛 문서를 채집하여 일찍이 공물을 받들고 천조에 이름을 통 한 자는 하삼(哈三), 하렬아(哈烈兒), 사적만(沙的蠻), 하적란(哈的蘭), 소란(掃蘭), 야극력(乜克力), 파력흑(把力黑, 발흐), 안력마(俺力麻, 알말릭), 탈홀마(脫忽麻), 찰력실(察力失), 간실(幹失), 복하랄(卜哈剌, 부하라), 파랄(怕剌), 니사올아(你沙兀兒, 니샤푸르), 극실미아(克癿迷兒, 카슈미르), 첩필력사(帖必力思, 타브리즈), 화단(火壇), 화점(火占, 호전/코칸드?), 고선(苦先, 쿠차), 야석(牙昔), 야아간(牙兒干, 야르칸트), 융(戎), 백(白), 올륜(兀倫), 아단(阿端), 사사성(邪思城), 사흑(捨黑), 파음(擺音), 극법(克癿) 등 29개 부족이다. 강역이 좁고 작아 단지 지면(地面)이라 칭했다. 하렬, 하시하아, 새람, 이역파리, 실라사, 사록해야, 아속, 파단(Badan)과 함께 모두 하밀을 경유하여 가욕관으로 들어오는데 혹은 3년, 5년에 한 번 조공하고 북경에 들어오는 자는 35명을 넘지 못했다. 그 하밀을 경유하지 않는 자는 다시 걸아(乞兒), 마미아(麻米兒), 하란가탈(哈蘭可脫), 법랍촉(癿蠟燭), 야的간(也的干), 날죽(剌竹), 이불랄(亦不剌), 인격실(因格失), 미걸아(迷乞兒), 길사우노(吉思羽奴), 사하신(思哈辛) 11개 지면이 있어 또한 일찍이 조공을 통했다.

[해설]

곤성(Kun City)은 쿤두즈(Kunduz) 혹은 쿰(Qum) 등으로 추정되나 확실치 않다. 이어지는 글은 영락제의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과 그 이후의 수축 정책을 요약하고, 수많은 소규모 부족 및 도시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나열된 지명 중 파력흑(Balkh), 안력마(Almaliq), 찰력실(Chalish/Karashahr), 니사올아(Nishapur), 극실미아(Kashmir), 첩필력사(Tabriz), 야아간(Yarkand) 등은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들이다.

루미(魯迷)

루미는 중국에서 거리가 매우 멀다. 가정 3년 사신을 보내 사자와 서우(코뿔소?)를 조공했다. 급사중 정일붕(鄭一鵬)이 말하기를 "루미는 일찍이 조공하던 나라가 아니며 사자는 기를 수 있는 짐승이 아니니 청컨대 물리쳐 성덕을 빛내소서."라고 했다. 예관 석서 등이 말하기를 "루미는 《왕회(王會)》에 열거되지 않아 그 진위를 알 수 없습니다. 근래 투르판이 자주 감숙을 침략하는데 변방 관리가 루미의 장부 안에서 투르판 사람을 살폈습니다. 그 교활하고 속임이 명백하니 청컨대 보내어 관문을 나가게 하고 잡은 간첩의 죄를 다스리소서."라고 했다. 황제는 끝내 이를 받아들이고 변방 신하에게 명하여 조사하고 다스리게 했다.

5년 겨울, 다시 두 동물을 가지고 와서 조공했다. 하사를 마치자 그 사신이 말하기를 먼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오느라 비용이 22,000여 금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하사를 더해달라고 했다. 어사 장록(張祿)이 말하기를 "중화와 오랑캐는 지방이 다르고 사람과 만물은 성질이 다르니 사람을 머물게 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은 만물의 성질을 어길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자를 기르는 데 매일 양 2마리를 쓰고 서우를 기르는 데 매일 과일과 미끼를 씁니다. 짐승이 서로 잡아먹는 것과 사람이 먹을 것을 먹이는 것은 성현이 모두 싫어하는 바입니다. 또 부리고 기르는 사람의 노역에 날마다 공급하는 비용이 필요합니다. 광록시의 유한한 재물로써 사람과 짐승의 무익한 비용을 채우는 것은 자못 경도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그 사람을 돌려보내고 그 물건을 물리치며 그 상을 박하게 하여 중국 성인이 기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뜻을 밝히소서."라고 했다.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예관의 말을 따라 홍치 때의 사마르칸트의 예와 같이 하여 더해주었다. 22년 천방 등 여러 나라와 함께 말과 토산물을 조공하고 이듬해 감주(甘州)로 돌아왔다. 마침 타북(오랑캐) 도적이 침입하니 총병관 양신(楊信)이 조공 사신 90여 명에게 명하여 가서 막게 했는데 죽은 자가 9명이었다. 황제가 듣고 양신의 관직을 박탈하고 유사에 명하여 그 시신을 관에 넣어 염하여 돌려보내게 했다. 27년, 33년에 아울러 입공했다. 그 공물에는 산호, 호박, 금강찬(다이아몬드), 꽃무늬 자기, 쇄복, 사하라(모직물) 장막, 영양 뿔, 서쪽 개 가죽, 사열손(스라소니) 가죽, 철각 가죽 종류가 있었다.

[해설]

루미(Lumi/Rumi)는 룸(Rum), 즉 당시의 오스만 제국을 지칭한다.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명나라와의 교류는 드물었으나,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의 팽창과 함께 사신(혹은 오스만 사신을 사칭한 상인)들이 도착했다. '서우'는 묘사로 보아 코뿔소나 특이한 소 품종일 수 있다. 명나라 조정 내에서 이러한 '이물(기이한 동물)'의 수용을 두고 실용주의적 관료들과 황제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스만 제국의 조공 사신을 변방 방어에 투입했다가 죽게 만든 사건은 당시 명나라 변방 관리의 무능과 가혹함을 드러낸다.

양회에 없다는 것은 일주서(逸周書) 양회해에 없다는 뜻으로, 일주서는 원래 《상서(尙書)》의 일부였는데, 공자가 제외시킨 글이라고 전해진다. 왕회의 내용은 주나라 서왕이 전세계 제후들과 부족을 불러 잔치를 벌인 내용으로, 한마디로 왕회에 열거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근본이 없다, 진짜로 있는 나라인지 알수 없다라는 뜻이다. 

또한 양신(楊信)이라는 자가 사신을 방어에 동원했다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대형 외교참사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이러한 사소한 기록까지 다 남아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명의 기록의 정교함을 보이기 위해서 끝내기 전에 몇가지를 정리한다. 

 

 

명-오스만 외교 참사 사건


이 사건의 주인공인 양신(楊信)은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활동한 무장으로, 당시 변방의 최고 군사 지휘관인 감숙진 총병관(甘肅鎮 總兵官)을 지낸 인물이다. 출신지는 고원(固原, 현재의 닝샤)이다.

역사적으로 성화(成化) 연간(15세기)에 활동한 동명이인 ‘창무백(彰武伯) 양신’이 존재하나, 본 사건의 양신은 16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서로 다른 사람이다.

[주요 이력]
초기에는 연수(延綏) 방면에서 변방 방어를 담당하는 협수(恊守) 직에 있었다.
가정 19년(1540), 서도독첨사(署都督僉事)로 승진함과 동시에 ‘도장을 걸고 총병관의 직무를 수행(掛印 充總兵官)’하는 형태로 감숙 진영의 진수(鎮守)를 맡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 루미(魯迷) 사절단의 동원

사건은 가정 23년(1544) 무렵 감주(甘州)에서 발생했다. 당시 북방의 적(虜)이 감주 지역을 침입하는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현지 토관(土官)이자 백호(百户) 직책을 맡고 있던 마능(馬能)이 총병관 양신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마침 루미(魯迷) 등지에서 온 진공(進貢) 사절단 90여 명이 감주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을 몰아내어 적을 막는 데 씁시다.”

양신은 이 말을 가볍게 믿고(輕聽), 아무런 정당한 사유 없이(無故) 외국 사절들을 전장에 투입해 적과 싸우게 했다. 그 결과, 사절단 중 ‘사역알리(寫亦阿力)’를 포함한 9명이 전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조정의 논의와 죄목: “외교적 신의를 저버린 죄”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 작전의 실패가 아니라, 심각한 ‘외교 사고’로 규정되었다. 당시 감숙 순무(巡撫) 첨영(詹榮)이 이를 조정에 보고했고, 병부(兵部)는 양신의 행위를 강력히 규탄했다.

병부의 판단: “이들은 강성한 적이 아니라, 황제의 은총을 입어 중국에 귀부(附中國)한 손님들이다. 그런데 양신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죄목: 사료는 이 행위를 ‘조원소흔(挑怨召釁)’, 즉 “원망을 돋우고 화를 자초한 행위”로 기록하며 양신을 사건의 ‘죄괴(罪魁, 우두머리)’로 지목했다.


처분 결과: 파면과 사후 수습

황제는 병부의 상소를 재가하여 엄중한 처벌과 수습책을 내렸다.

1. 양신의 파면: 양신은 즉시 관직을 삭탈(禠職) 당하고 파면되었다. 후임 총병관으로는 함녕후(咸寧侯) 구란(仇鸞)이 임명되어 감숙을 맡게 되었다.
2. 관련자 처벌: 건의를 했던 주동자 마능(馬能)을 비롯해, 지휘 라인에 있던 황기(黃綺), 유정(柳禎), 석빈(石鑌), 조완(趙琬), 손인(孫仁), 사력무정(沙力撫丁) 등은 모두 체포되어 죄를 다스리게 되었다.
3. 피해 수습 및 외교적 조치:
전사한 사절들에게는 관(棺)과 염습 비용을 넉넉히 지급(重給棺斂)하고, 제사와 장례비를 지원했다.
생존한 사절들은 본국으로 호송했다.
해당 국가의 왕에게 공식 외교 문서를 보내 “조정이 죄인(양신 등)을 처벌하고 무고한 피해자들을 위로했다”는 뜻을 명확히 전달했다.

 


역사적 평가 (『명사』의 기록)

『명사(明史)』는 이 사건에 대해 순무 첨영의 비판을 인용하며 그 정무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호의를 가지고 찾아온 먼 곳의 사람들을 창끝과 화살밭(전장)에 밀어넣는 것은, 먼 사람들의 마음을 잃는 것(失遠人心)일 뿐만 아니라 중국이 약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이는 꼴(示中國弱)이다.” (명사(明史) 점영(詹榮) 열전)

결국 양신이 파면되고 조정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자, 변방의 번인(番人)들이 감격하고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일주서 양회의 내용도 첨부하겠다.

 

 

일주서(逸周書)

 

왕회(王會)

성주(成周)의 모임에 단(墠, 제터) 위에는 붉은 휘장과 검은 깃털 장식을 쳤다. 천자는 남쪽을 바라보고 섰으며, 면류관을 썼으나 번로(繁露, 옥으로 된 장식 끈)는 없었고, 조복(朝服)에는 80가지 장식이 있었으며 옥 홀인 정(珽)을 꽂았다. 당숙(唐叔), 순숙(荀叔), 주공(周公)은 왼쪽에 있고, 태공망(太公望)은 오른쪽에 있었는데, 모두 면류관을 썼으나 역시 번로는 없었고, 조복에는 70가지 장식이 있었으며 홀(笏)을 꽂고 천자 곁 당 위에 섰다. 당 아래의 오른쪽에는 당공(唐公)과 우공(虞公)이 남쪽을 바라보고 섰으며, 당 아래의 왼쪽에는 은공(殷公)과 하공(夏公)이 섰는데 모두 남쪽을 바라보았고, 면류관에 번로가 있었으며 조복에는 50가지 장식이 있었고 모두 홀을 꽂았다.

[해설]
이 대목은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성주(낙양)를 건설한 뒤 거행한 대규모 제후 회맹(모임)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천자의 복장과 위치,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주나라의 핵심 인물들인 주공, 태공망 등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당공, 우공, 은공, 하공 등은 이전 왕조나 고귀한 가문의 후예들을 예우하여 배치한 것이다. 복식의 장식 수와 번로의 유무로 위계를 철저히 구분하고 있다.

제후들 중에 질병이 있는 자를 위해서는 조계(阼階, 동쪽 계단)의 남쪽에 자리를 마련하였고, 축회씨(祝淮氏)와 영씨(榮氏)가 그 다음, 규찬(珪瓚, 제사용 술잔을 맡은 이)이 그 다음에 위치했는데 모두 서쪽을 바라보았다. 미종(彌宗)이 그 곁에 있었는데 이는 질병이 있는 제후들의 의약이 있는 곳이었다. 돕는 자인 태사(太史) 어(魚)와 대행인(大行人)은 모두 조복을 입었고 번로가 있었다.

[해설]
여기서는 아픈 제후들을 위한 배려와 제사를 돕는 실무 관료들의 배치를 설명하고 있다. 질병이 있는 제후를 위한 별도의 공간과 의료 지원(의약)을 명시한 점이 특이하다. 태사와 대행인은 기록과 의전을 담당하는 중요한 실무직이므로 번로(장식)가 있는 정식 조복을 입었다.

당 아래의 동쪽 면에는 곽숙(郭叔)이 천자를 위하여 녹폐(菉幣, 푸른 폐백)를 관장하였는데, 면류관을 썼으나 번로는 없었다. 내대(內臺)의 서쪽 면 정북방에는 응후(應侯), 조숙(曹叔), 백구(伯舅), 중구(中舅)가 있었고, 비복(比服)이 그 다음, 요복(要服)이 그 다음, 황복(荒服)이 그 다음이었다. 서쪽의 동쪽 면 정북방에는 백부(伯父), 중자(中子)가 그 다음에 위치했다. 사방 천 리 이내는 비복이라 하고, 사방 이천 리 이내는 요복이라 하며, 사방 삼천 리 이내는 황복이라 하니, 이들은 모두 안에서 조회하는 자들이다.

[해설]
천자를 중심으로 한 제후들의 배치와 통치 구역인 '오복(五服)'의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곽숙은 재물과 폐백을 관리했다. 비복, 요복, 황복은 천자의 도성에서의 거리에 따라 나눈 구역으로, 거리가 멀어질수록 통제력이 약해지거나 의무가 달라진다. 여기서는 이들 구역의 제후들이 모두 천자의 영역 안(내대)에서 조회에 참석했음을 보여준다.

당 뒤쪽 동북에는 붉은 휘장을 쳤는데 욕분(목욕 대야)이 그 안에 있었다. 그 서쪽에는 천자의 수레와 말 여섯 필이 서 있었는데, 푸른 깃털 덮개와 오리 모양 깃발을 달았다. 중대(中臺)의 밖에는 왼쪽에 태사(泰士), 대 오른쪽에 미사(彌士)가 있었고, 폐백을 받는 자 8명과 동쪽을 바라보는 자 4명이 있었다. 폐백을 진열하는 곳은 외대(外臺)에 해당하는데, 하늘의 현학(검은기운)을 상징하는 종마 12필, 옥은 검은 줄로 꿴 벽옥 기(綦) 12개, 사방에는 검은 줄로 꿴 벽옥 표범과 호랑이 가죽 12개, 사방에는 검은 줄로 꿴 벽옥 규(琰) 12개를 두었다. 외대의 네 모퉁이에는 붉은 휘장을 쳐서 제후들 중 쉬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거기서 쉬게 하였으니, 명명하여 효려(爻閭)라고 하였다.

[해설]
의식이 진행되는 공간의 뒤쪽과 바깥쪽 풍경이다. 천자가 타는 수레(육마)의 화려함과 각종 예물들이 진열된 모습을 묘사한다. 특히 '효려'라는 휴게 공간을 두어 제후들이 쉴 수 있게 한 점은 당시 의전의 세밀함을 보여준다. 진열된 물품들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귀한 옥과 가죽, 말 등이다.

주공 단(旦)은 동방을 주관하였다. 그곳의 청마(푸른 말)와 흑●(검은 갈기 말)을 모아(모어, 母兒)라고 한다. 영벽을 지키는 자들은 푸른 옷을 입고 활과 창을 잡았다. 서쪽을 향해 선 정북방에는 직신(稷慎)의 큰 사슴(大麈), 예인(穢人)의 전아(前兒)가 있었다. 전아는 마치 원숭이 같고 서서 걸으며 목소리는 어린아이와 같다. 양이(良夷)의 재자(在子)는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짐승과 같고 그 배에 기름이 있는데, 콩잎으로 그 배를 지지면 '재자'라고 운다.

[해설]
이제부터는 각 방위의 이민족과 그들이 바친 진기한 공물들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주공 단은 동쪽을 맡았다. 여기서 묘사되는 동물들은 실제 동물일 수도 있으나, 고대의 신화적 상상력이 가미되었거나 원숭이 등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예맥족 계열인 예인(穢人)이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양주(揚州)의 우(禺), 우는 물고기 이름이다. 해유관(解隃冠)을 쓴 발인(發人)이 왔다. 표표(麃麃)라는 것은 사슴 같은데 빨리 달린다. 유인(俞人)의 수마(雖馬), 청구(青丘)의 구미호(여우인데 꼬리가 아홉), 주두(周頭)의 휘저(煇羝), 휘저란 양이다. 흑치(黑齒), 백록(흰 사슴), 백마(흰 말). 백민(白民)의 승황(乘黃), 승황은 여우 같은데 그 등에 두 개의 뿔이 있다. 동월(東越)의 해●(바다 짐승), 구인(歐人)의 선사(蟬蛇), 선사는 매미와 뱀인데 순하여 먹으면 맛이 좋다. 어월(於越)의 납(納), 고매(姑妹)의 진귀한 보물들이 있었다.

[해설]
계속해서 동쪽 및 동남쪽 지역의 공물이다. 청구의 구미호나 흑치국 등은 한국 고대 신화나 중국의 산해경 등에도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양주, 어월 등은 중국의 동남부 해안 지역을 의미하며, 이곳의 신비한 동물들이 천자의 덕에 감화되어 모여들었음을 과시하는 내용이다.

구구(具區)의 문신(무늬 있는 조개), 공인(共人)의 현패(검은 조개), 해양(海陽)의 대해(큰 게), 자심(自深)의 계수나무, 회계(會稽)의 이●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서쪽을 향했고, 정북방에 위치했다. 의거(義渠)는 자백(茲白)을 바쳤는데, 자백은 흰 말 같고 톱 같은 이빨이 있어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먹는다. 앙림(央林)은 추이(酋耳)를 바쳤는데, 추이는 몸이 호랑이나 표범 같고 꼬리가 길어 그 몸의 세 배나 되며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먹는다. 북당(北唐)은 여(閭)를 바쳤는데, 여는 유관(隃冠)과 비슷하다. 거수(渠叟)는 구견(鼩犬)을 바쳤는데, 구견은 로견(露犬)으로 날 수 있고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먹는다. 누번(樓煩)은 성시(星施)를 바쳤는데, 성시는 깃털 장식이다. 복로(卜盧)는 ●우(●牛)를 바쳤는데, 이는 소 중에 작은 것이다. 구양(區陽)은 별봉(鱉封)을 바쳤는데, 별봉은 돼지 같고 앞뒤에 머리가 있다.

[해설]
서쪽 지역의 부족들이 바친 공물들이다. 의거, 누번 등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서북방의 유목 민족들이다. 이들이 바친 동물들(자백, 추이, 구견 등)은 호랑이를 잡아먹는다는 등 맹수보다 강한 신수(神獸)로 묘사되어 천자의 위엄을 드높인다. 앞뒤에 머리가 있는 돼지(별봉) 같은 기이한 생물 묘사가 특징이다.

규규(規規)는 기린(麒麟)을 바쳤는데 기린은 인(仁)한 짐승이다. 서신(西申)은 봉조(鳳鳥)를 바쳤는데, 봉조는 인(仁)을 이고 의(義)를 안으며 신(信)을 끼고 있다. 저강(氐羌)은 난조(鸞鳥)를 바쳤다. 파인(巴人)은 비익조(比翼鳥)를 바쳤다. 방양(方煬)은 황조(皇鳥)를 바쳤다. 촉인(蜀人)은 문한(文翰)을 바쳤는데 문한은 고계(언덕 닭)와 같다. 방인(方人)은 공조(孔鳥, 공작)를 바쳤다. 복인(卜人)은 단사(주사)를 바쳤다. 이(夷)는 ●목(나무)을 썼다. 강민(康民)은 부이(桴苡)를 바쳤는데, 부이는 그 열매가 오얏 같고 먹으면 아이를 낳기에 좋다. 주미(州靡)는 비비(費費)를 바쳤는데, 그 형상은 사람 몸에 발꿈치가 반대로 되어 있고 스스로 웃는데, 웃으면 윗입술이 그 눈을 덮으며 사람을 잡아먹으니 북방에서는 토루(土螻)라고 부른다.

[해설]
서남쪽 및 서쪽의 신비한 새들과 약초, 괴수들이다. 기린, 봉황, 비익조 등은 전설상의 상서로운 동물들로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저강, 파, 촉 등은 실제 사천성 및 티베트 접경 지역의 민족들이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비비(개코원숭이류 혹은 전설의 짐승)에 대한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고 기이하다.

도곽(都郭)의 생생(生生)과 기우(欺羽)가 있었는데, 생생은 누런 개 같고 사람의 얼굴에 말을 할 줄 안다. 기간(奇幹)의 선방(善芳)은 머리가 수탉 같고 이것을 차면 사람으로 하여금 어둡지 않게(매혹되지 않게) 한다. 이들은 모두 동쪽을 향했다. 북방 대(臺)의 정동쪽에는 고이(高夷)의 겸양(嗛羊)이 있었는데, 겸양은 양인데 뿔이 네 개다. 독록(獨鹿)의 공공(邛邛)은 잘 달리는 짐승이다. 고죽(孤竹)의 거허(距虛), 불령지(不令支)의 현●, 불도하(不屠何)의 청웅(푸른 곰), 동호(東胡)의 황비(누런 큰 곰), 산융(山戎)의 융숙(콩)이 있었다. 그 서쪽에는 반오(般吾)의 백호(흰 호랑이)와 흑문(검은 무늬), 도주(屠州)의 흑표(검은 표범), 우씨(禺氏)의 도도(騊駼, 야생마), 대하(大夏)의 자백우(茲白牛)가 있었다. 자백우는 들짐승으로 소의 형상인데 코끼리 이빨이 있다. 견융(犬戎)의 문마(文馬)는 붉은 갈기에 흰 몸이며 눈이 황금 같고 이름은 길황(吉黃)의 탈것이라 한다. 수초(數楚)의 매우(每牛)는 소 중에 작은 것이다. 흉노(匈奴)의 교견(狡犬)은 몸이 크고 네 발에 털이 많다. 이들은 모두 북쪽을 향했다.

[해설]
북방 민족들의 공물이다. 고죽, 동호, 산융, 흉노, 견융 등은 중국 역사에서 북방의 주요 이민족으로 자주 등장한다. 뿔 네 개 달린 양, 잘 달리는 짐승, 흉노의 큰 개 등 유목 및 수렵 생활과 관련된 동물들이 주를 이룬다. 방향에 대한 서술(모두 북쪽을 향했다)은 이들이 남쪽에 서서 북쪽의 천자를 바라보았거나, 혹은 텍스트상의 착오로 북쪽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했을 수도 있는데, 문맥상 천자를 향해 도열한 모습을 나타낸다.

권부(權扶)의 옥목(玉目), 백주(白州)의 비려(比閭)가 있는데, 비려는 그 꽃이 깃털 같고 그 나무를 베어 수레를 만들면 끝내 부서지지 않는다. 금인(禽人)의 왕골(菅), 노인(路人)의 큰 대나무, 장사(長沙)의 자라가 있었다. 그 서쪽에는 어복(魚復)의 고종(북과 종), 종우(鐘牛)가 있었다. 양만(揚蠻)의 꿩(翟), 창오(倉吾)의 비취(翡翠)가 있었는데 비취는 깃털을 취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예로부터의 정사(기록)를 통해 알 수 있다. 남방 사람들이 이르렀는데 무리가 모두 북쪽을 향했다.

[해설]
남방 지역의 산물들이다. 장사, 창오 등은 장강 이남 지역이다. 단단한 나무, 대나무, 자라, 깃털을 얻기 위한 비취새 등 남방의 특산물들이 나열된다. 마지막 문장은 이 방대한 리스트 외의 것들은 기존 기록을 참고하라는 뜻이며, 남쪽에서 온 사절단이 북쪽(천자가 계신 곳)을 향해 도열했음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윤(伊尹)이 조회를 하고 헌상함, 상서(商書).
탕왕(湯)이 이윤에게 물었다. "제후들이 와서 헌상하는데, 혹 소나 말이 나지 않는 곳임에도 먼 지방의 물건을 바치게 하니, 사실과 반대되고 이롭지 못하오. 지금 나는 그 지세가 가진 바에 따라 헌상하게 하여, 반드시 얻기 쉽고 귀하지 않은 것으로 사방에 헌상하는 법령을 만들고자 하오."
이윤이 명을 받고 이에 사방을 위한 법령을 만들어 말했다. "신이 청하건대 정동쪽의 부루(符婁), 구주(仇州), 이려(伊慮), 구심(漚深), 구이(九夷), 십만(十蠻), 월구(越漚), 전발문신(鬋髮文身, 머리를 깎고 몸에 문신한 자들)에게는 명령하여 물고기 가죽으로 만든 칼집, ●●의 젓갈, 교벌(鮫瞂, 상어 가죽 방패), 예리한 검을 바치게 하십시오.
정남쪽의 구등(甌鄧), 계국(桂國), 손자(損子), 산리(產里), 백복(百濮), 구균(九菌)에게는 명령하여 진주, 대모(거북 등껍질), 코끼리 이빨(상아), 문서(무늬 있는 코뿔소), 비취 깃털, 균학(두루미), 다리 짧은 개를 바치게 하십시오.
정서쪽의 곤륜(昆侖), 구국(狗國), 귀친(鬼親), 지기(枳已), 섭이(闟耳), 관흉(貫胸), 조제(雕題), 리신(離身), 칠치(漆齒)에게는 명령하여 단청(안료), 흰 꼬리 깃털, 피계(짐승 털로 짠 직물), 강력(江歷), 용의 뿔, 신령한 거북을 바치게 하십시오.
정북쪽의 공동(空同), 대하(大夏), 사차(莎車), 고타(姑他), 단략(旦略), 포호(豹胡), 대적(代翟), 흉노(匈奴), 누번(樓煩), 월지(月氏), 섬리(孅犁), 기룡(其龍), 동호(東胡)에게는 명령하여 낙타, 백옥, 야생말, 도도(야생마), 결제(노새), 좋은 활을 바치게 하십시오."
탕왕이 말했다. "좋다."

[해설]
이 부분은 주나라의 기록인 앞부분과 달리, 상(은)나라의 건국 시조인 탕왕과 명재상 이윤의 대화이다. 억지로 귀한 것을 바치게 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여 부담을 줄이자는 합리적인 통치 철학을 보여준다.
동쪽은 바다와 접해 있으니 어류 관련 제품과 칼을, 남쪽은 열대 기후이니 상아와 진주 등을, 서쪽은 산악과 고원이니 광물과 털 제품을, 북쪽은 초원 지대이니 말과 가축을 바치게 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구이, 흉노, 월지 등의 명칭은 고대 동아시아의 민족 분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양회에 언급된 국가와 민족들

 

왕회에 등장하는 국가와 민족들은 실제 역사에 존재했던 세력과 산해경 등에 나오는 신화적 존재들이 섞여 있다.

[중원 및 제후국]

당(唐), 우(虞), 은(殷), 하(夏)
주나라 이전에 존재했던 왕조들의 후예들이다. 주나라는 이전 왕조의 제사를 잇게 하기 위해 그 후손들을 제후로 봉하고 특별히 대우했다. 당은 요임금, 우는 순임금, 은은 상나라, 하는 하나라의 후예를 뜻한다.

곽(郭), 응(應), 조(曹)
주나라 왕실과 성이 같은 희성(姬姓) 제후국들이거나 가까운 친척 나라들이다.

[동방 - 동이(東夷) 및 해안 지역]

직신(稷慎)
숙신(肅慎)이라고도 쓴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여진족과 만주족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주나라 무왕 때부터 화살과 화살촉을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유명하다.

예인(穢人)
예맥(濊貊)족을 말한다.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지역에 걸쳐 살았던 고대 우리 민족의 직계 조상 중 하나이다. 본문에서는 원숭이 같은 형상으로 묘사되었으나 이는 이민족을 비하하거나 신비화한 표현이다.

양이(良夷)
동이족의 한 갈래이다. 산동 반도나 회수 유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인(發人)
서기전의 고대 국가나 부족 중 하나로, 일부 학자들은 이를 고조선(조선)과 연관 짓거나 산동 지역의 동이족으로 해석한다.

청구(青丘)
푸른 언덕이라는 뜻으로, 산해경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지명이다. 구미호가 산다고 전해지며, 역사적으로는 산동 반도 혹은 한반도 지역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했다.

흑치(黑齒)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을 가진 민족이다. 동남아시아나 일본, 혹은 중국 남부의 소수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산해경에도 등장한다.

백민(白民), 백주(白州)
흰 옷을 입거나 피부가 흰 종족, 혹은 신화 속의 민족으로 묘사된다.

동월(東越), 어월(於越), 구인(歐人)
오늘날의 중국 절강성, 복건성 일대에 있던 월나라 계통의 민족들이다. 훗날 월왕 구천의 월나라와 관련이 깊다.

고죽(孤竹)
현재의 하북성 동북부와 요녕성 서부에 있었던 상나라 제후국이다. 백이와 숙제의 고사로 유명하다. 동이족 계열의 국가로 분류된다.

불령지(不令支)
고죽국 근처에 있었던 산융(북방 민족)의 일파 혹은 동이 계열의 부족이다.

[서방 - 서융(西戎) 및 티베트, 중앙아시아 계열]

의거(義渠)
감숙성 동부와 섬서성 북부에 살았던 강력한 융족(戎族)이다. 전국시대까지 존속하며 진(秦)나라와 대립하고 교류했던 실존 유력 국가이다.

누번(樓煩)
춘추전국시대에 북방 국경지대(산서성 일대)에서 활동한 유목 민족이다. 훗날 조나라 무령왕이 이들의 기마술을 받아들였다.

저강(氐羌)
티베트 계통의 유목 민족인 저족과 강족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중국 서부 고원 지대에 거주했으며 주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강족은 태공망(강태공)의 출신 부족이기도 하다.

파(巴), 촉(蜀)
현재의 사천성(쓰촨성) 지역에 있었던 고대 국가들이다.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명(삼성퇴 등)을 꽃피웠다. 파인은 용맹했고 촉인은 문화가 발달했다.

곤륜(昆侖)
신화 속의 산인 곤륜산 인근에 산다는 부족 혹은 서쪽 끝에 있는 신비한 나라를 의미한다.

월지(月氏/禺氏)
우씨 혹은 월지라고 불린다. 훗날 흉노에게 패해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대월지국을 세운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 민족이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이른 시기인데, 당시 감숙성 일대에 거주하며 옥 무역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하(大夏)
서역의 나라 이름이다. 훗날 박트리아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도 했으나, 선진 시대 문헌에서는 서북방의 유목 부족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구국(狗國), 관흉(貫胸)
산해경에 나오는 신화적 국가들이다. 구국은 개가 사는 나라, 관흉국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묘사된다.

[남방 - 남만(南蠻)]

양만(揚蠻)
양주(남동쪽) 지역의 만족을 통칭한다. 장강(양쯔강) 중하류 지역의 토착 세력을 말한다.

창오(倉吾)
현재의 호남성과 광서성 접경 지역인 구의산 일대를 말한다. 순임금이 남쪽을 순행하다 붕어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구등(甌鄧), 계국(桂國), 손자(損子)
모두 남방의 소수민족 국가들이다. 구등과 계국은 오늘날의 윈난성이나 광시성 등지의 남방 민족과 관련이 있다.

백복(百濮)
장강 남쪽에 거주하던 수많은 부족 집단을 통칭하는 말이다. 훗날 초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북방 - 북적(北狄) 및 유목 민족]

흉노(匈奴)
진한(秦漢) 시기에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중국을 위협했던 거대 유목 제국이다. 주나라 초기를 다루는 이 문헌에 흉노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 글이 후대(전국시대 등)에 작성되면서 당시의 북방 민족 명칭이 소급 적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호(東胡)
흉노의 동쪽에 살았던 유목 민족이다. 선비족, 거란족, 몽골족 등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산융(山戎)
연나라 북쪽에 거주하며 약탈을 일삼았던 호전적인 부족이다. 제나라 환공이 연나라를 돕기 위해 정벌하기도 했다.

공동(空同)
공동산(崆峒山) 인근에 거주하던 부족이다. 전설상의 황제(黃帝)가 도를 물으러 갔다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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