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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경제

현대 사회는 정말 행복한가?

by 시큼한 파인애플 2022. 2. 9.

지금까지 쓴 글의 요지를 종합한 글이여서, 조금 앞뒤가 안맞거나 난잡할 수 있다.
현대사회가 정말 행복한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과, 우리가 가져야하는 정의관에 대해서 주장해봤다.

기술은 극도로 발전했으나 과연 우리들은 정말 과거의 사람들보다 행복할까?

훨씬 풍족한 시대가 왔는데 행복해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없던 시절을 경험 못했으니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르고 욕구대로 계속 더 큰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선 더 좋은걸 항상 보여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것이 뒤쳐진것처럼 말한다.
미디어,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달로 우리는 어디서나 세계와 모두에게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 필요 없던 것, 원래는 몰랐던 것에 대해 보게되면서 사람들은 더 고통받게 되었다. 말 그대로 모르는게 약인 것이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다. 특히나 관계론 사회인 동양에서는 훨씬 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사회와 나의 관계로서 자신이 정의되기 때문에 훨씬 더 상대성이 강해진다. 그들의 사고체계와 맞물려 이는 더 극대화되었다. 원래였으면 자신이 비참한 삶을 살고있어도 주변도 다 그렇다면 사람은 별 불행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더 나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더 불행해졌다. 또한 원래는 사회 도덕때문에 제약받았던 욕구들도 인터넷을 통해서 사람들은 무제한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증오, 성욕 모든 것을 말이다. 사람이 욕구를 제약받지 않으면 통제가 되지 않고 무제한적으로 발산하게 된다.

현실에서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하면 그냥 주변인들이 무시하면서 묻히고 끝날 것이지만 인터넷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그 의견이 노출되면서 그 생각을 했지만 밖으로는 못하던 사람들이 남이 그러는걸 보고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그들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잘못된 의견을 강화하고, 사실에 대한 판단능력이 낮은 사람들이 잘못된 의견을 보고 동조하면서, 원래는 들리지도 않았을 개소리가 우리 모두에게 큰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미디어와 인터넷에 노출되어 사람들은 자아를 잃고 집단에 소속되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다른 이가 말하는 의견을 그대로 순응하며 자신의 의견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것이 무시무시한 좀비떼의 시작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지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좀비들 말이다.

단순히 자존감만 떨어지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이러한 현대 문물에 의존하게되고 방대한 정보의 바다속에서 표류하며 자기주장을 잃고 자극적이고 정제되고 않은 정보들과 컨텐츠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유아화되는 것이 아래 모든 사회문제들의 원인이다. 말 그대로 욕구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바로 풀어버리고 자기밖에 생각못하며 아는 것 없는 좀비이자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남을 생각하는 것은 고도의 지능을 필요로 한다. 자신만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맘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남을 생각하는 것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높은 지능을 필요로 한다. 욕구를 참고 남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아화되고 무식해지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무논리한 사람들과의 충돌이 반복되고 무감각해지면서 사람들의 논리적 사고방식또한 마비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의 논리에 동조를 안해주면 저능한 것이라고 몰아가거나 책을 더 읽어라, 너가 무식해서 그렇게 생각하든 것이다 같은 주장을 펼친다. 애초에 자기들 논리를 대변하는 책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것 자체가 보편적인 진실이 아닌 편협한 논리라는 반증이다. 그냥 자기랑 깉은 의견이 아니면 이해못한 것으로 치니 일말의 가치도 없는 비논리이다.자신의 지식이 잘못됐다는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그와 일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관계론 사회에서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사람들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졌고 그리하여 공격성이 지극히 높아져 남을 욕하고 깍아내리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려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데려와서 욕하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는 실로 악의로 가득한 행위일 뿐이다. 멘탈이 약한 사람들은 인터넷상에서의 공격에 대한 면역이 없기때문에 그런 공격을 받으면 무너지거나 아무렇지 않은듯하며 지리멸렬하게 계속 키배를 이어간다. 하지만 아무 데미지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 자체가 데미지가 크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공격성이 심각하게 증대되고 논리회로가 마비된 사람들은 증오에 가득차 성별갈등, 세대갈등, 빈부갈등을 증폭시킨다. 모두 사람들이 각박해졌기 때문에 심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별갈등을 조장하는 일각에서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남성들을 도태된 것이라는 매카시즘적 프레임을 씌우며 비논리적으로, 간단히 정신승리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월한 남성에 의해서 선택받는다는 주장은 사실 여성을 경쟁의 결과를 순종적으로 받아들이고 선택당하는 수동적이고 소유물로서의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즉, 그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야말로 여성 혐오자이다. 논리 회로가 마비된 이들은 논리적으로 토론하기보다는 지극히 단순한 세뇌된 혐오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순히 그것을 반복하고, 그저 너는 빨갱이니까 잘못된거야, 너는 이대남이니까, 너는 일베니까, 너는 전라도니까 잘못된 거야 같이 단순한 메카시즘에 빠지고 그것이 정말로 옳다고 생각하게 된다. 논리가 부족하여 합리적으로 말할 능력이 없으니 단순히 상대에게 가치가 없다는 프레임을 씌워 통째로 부정하려는 유치한 술수이다.
애초에 비논리적인 공격은 정당한 논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는 이들의 항상 논리를 잃어서 안됨은 물론, 이러한 비논리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것이 그들의 술수이다. 비논리적이고 비정상적인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의 목적이다.

세대갈등에 대해서도 간단히 말하자면, 이는 기본적으로 젊음 세대와 그 윗세대의 근본적 차이로 인해서 발생한다. 기본적으로 20대는 체제 저항적, 40대는 체제 유지적 특성을 보인다. 왜냐하면 젊은 세대는 윗세대가 만들어놓은 고리타분한 틀과 자신을 이해 못하는 그들의 꼰대질에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대는 기본적으로 틀을 잡고 안정적인 위치에 접어들었기때문에 그것을 부수려는 신세대에 부정적이고 현재를 유지하랴한다. 먄약 신세대가 새로운것을 도입하면 자신에게 익숙하던것을 배우고 자신이 잘 모르늠 것에 새로 적응해야하니 새로운것에도 부정적인 것이다. 지금은 40대 또한 20대때 윗세대에게 같은 꼰대질을 당했는데, 그때는 저항하다가 자신도 같은 위치에 오르니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을 보니 역시 사람은 자기 자아보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좌우될 뿐이다. 말그대로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가서 좀비화된 인간은 자아가 없어 쉽게 남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 대상은 보통 국가인데 어릴때부터 국가가 세뇌를 통해 그러한 생각을 가지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가장 쉽게 그러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보다 더 나은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므로서 현실의 자신은 열등하지만 자신과 별 상관도 없는 거대하고 우월한 것에 자신을 이입하여 자신도 그와 같은 선민의식을 가지게 된다.
인터넷상에서는 시민들이 특정 정당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발적으로 그들을 위해서 공작활동(여론조작 등)을 벌이는 행태로 인해 선거가 결국 국민들간의 직접적 권력다툼으로 전락했다.(실제로 그 국민들에겐 돌아가는게 없지만)

인간은 그렇게 자발적으로 자신의 일도 아닌데 시간낭비할 정도로 광적인 동물이다. 그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말이다.

거대한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므로서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잃는다. 자아가 없는 인간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매초 죽어가는 것이다. 자아가 죽은 사람에게 지금 있는 의식은 그저 자신이 이입한 집단에 의해서 매초 좌우되므로, 매초 죽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단순히 지금 상황만 모면하려고 말을 막 던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고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이 과거의 그들은 이미 죽었다는 이유이다.

또한 낮은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쉬운 방법중 하나인 과시소비도 극렬히 성행하기 시작했다. 쥐뿔 가진것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진이 가진 물건따위를 자신과 동일시하여 그것에 자부심을 가진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개의 물건따위는 자신을 대표하는것도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거지들에게는 그 한개의 물건이 자신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물건이라는 것은 내가 사는것, 필요한게 있으면 사는것일 뿐이지 그것에 이입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하찮은 이는 반대로 물건이 나를 사는 주객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주체라면 물건은 그저 내가 선택하는것, 내가 아이폰 오너일수도 있고 갤럭시 오너일수도 있는 애초에 정해진 것이 아닌 유동적인 것이지만 물건에 먹혀버린 이는 물건이 곧 자신이기 때문에 물건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얼마나 자존감이 낮고 하찮으면 고작 물건따위에 자신을 이입하고 그 물건이 자신을 대표하게 하겠는가? 단순히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소비하는것이 속물주의와 무근본의 극치이다. 가진게 많은 사람이 과시하기보다는 쥐뿔 없기때문에 더 과시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애초에 그들은 자존감이 바닥나 있으니 악을 쓰면서 자신이 가진것을 과대평가하고 남이 가진것을 과소평가하므로서 자신이 뒤쳐진게 아니라는 심리적 안정을 얻어야만 살수 있는 것이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정신적으로만 승리하려고하니 남은것은 참담한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비보편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아예 가장 우월하고 옳은것이라고 굳게 믿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러 아예 자신들과 다른 남들은 다 병신이고 열등하다 식의 취급을 하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버린다.

광우병 선동, 일본 망한다와 같이 별것도 아닌거로 호들갑 다떠놓고 선동하고 반박하는 사람 욕하더니 정작 아무일도 안일어나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정말 역겨운 점은 이들이 걱정해서 관심을 가지는것이 아니라 그저 남의 재난을 유희로서, 즐길거리로서 즐기려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커뮤에서 다른 의견을 전부 몰아내고 같은 의견만 남겨놓고 나서 자기 커뮤에서 주류 여론이 됐으니 다른곳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모여있으니 자신들의 생각들 더 강화하고 절대진리로 생각한다. 문제는 이 병신들이 쓰레기통에서 탈출할때 벌어진다. 오랜시간 확증편향을 통해 자신에게 진리가 된 의견이 다른곳에선 통하지 않으니 받아들일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안에서 가지던 편협한 생각을 남에게까지 강요하려들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욕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그것이 캣맘, 채식주의자이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한 행위를 하므로서 우월감을 가지려는 족속들이다. 할 수 없는게 그런것밖에 없는 그들은 자신의 존재의의를 그런데에서 찾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것은 곧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것으로 받아들이고 신경질적은 반응을 보인다. 단순히 자신이 선민의식을 가지기위한 의도로 이념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지극히 편협하고 역겹다.

단순히 인간의 관점에서 귀엽다는 이유로 개과 고양이의 생명의 가치 타령하면서 매초 도살되는 수천만 마리의 가축들의 생명, 방금 죽은 수조마리의 작고 귀여운 생명의 가치는 외면하는 위선자들이다.
위선자들은
인간으로서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군림하여 그 질서를 통해 얻은 산물을 누리고있으면서 온갖 위선을 떤다.

고양이와 개는 고통을 느낀다고? 뭐 소와 닭은 고통을 못느끼나?

고통을 받건 안받건 그 계안에서만 진행되는 일이고 찻잔안의 태풍과 같아서 외부의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그저 멍청한 유기물들이 잠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조직되었다가 다시 해체될 뿐이다.
우리 인간을 생각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다른 동물의 권리까지 생각해줘야하는가? 아직도 전세계에는 기아로 죽어나가는 수천만의 인간들이 있다.

그들의 역겨운 위선으로 인해 같은 생명인 개와 닭의 운명은 정반대로 갈렸다
한놈은 따뜻한 집에서 인간과 같이 살고 다른 한놈은 차가운 그라인더에 갈려 죽었다
어느 누구도 기억해 주는 이 없이 타의에 의해 태어나 타의에 의해 죽었다
그러면서 무슨 '선'타령하면서 우월감에 도취되는가?

현대인들이 유아화되며 진실을 판단한 이성을 잃어가면서, 또다시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있다. 사회주의라는 유령이. 비혼주의, 페미니즘, 채식주의, 생태주의, 친중종북, 반미반일, 노동자운동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한 부류의 사람이 하는 가지는 생각이다. 여성주의라는 탈을 쓰고 다시금 우리의 일상을 파괴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악마들이다. 1991년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나서, 그들은 실패했다는 인식을 벗기위해 새로운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똑같다. 기존의 모든 질서를 부정하고, 우리의 사회체제 자체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일상을 부정하고 자신들에게 권력을 달라고한다. 왜 여성주의일까? 왜냐하면 겉으로는 그것이 '선'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선한 탈을 쓰고 나서 자신들까지 선한것처럼 포장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뜯어보면 영락없는 사회주의이다. 마치 백년전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구조적으로 차별당하고 있고 공장의 주인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며 모든것을 파괴하려 했던것처럼, 그 유령은 다시금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실패한것처럼, 그들의 이상이 다시 현실에 등장한다면 그 모습은 지옥이 현세에 열린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의 자유 시장 경제에서, 모든것은 시장논리에 의해 결정된다. 계속된 경쟁을 통해서 최적으로 효율성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 이념적으로 개입하여 효율성을 저해한다면, 우리나라는 경쟁력을 잃고 거지나라로 전락하게 된다. 다른 이들은 지금도 효율성을 향해 달려가고있는데 우리 혼자 뒤로가려한다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들이 30년전 실패했던 것을 다시 실행하려 하는것이다. 이번엔 그때는 진짜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시 그짓을 하려고 할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걱정되는 것은, 유아화된 사람들이 진실을 보지 못하고 마치 사이비에 선동되는 것처럼 이들의 계획대로 사회주의의 신봉자가 되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두려울 뿐이다.

현대인들의 유아화는 언어적인 면에서도 잘 관찰된다. 대표적인 예가 올려치기, 내려치기라는 말이다.
어린아이들은 원래 자기가 조금이라도 욕먹거나 실추되면 엄청 발광한다.
사소한 것에 위계를 나누고 자신이 항상 더 위에 사려고한다.
앞서 말했듯 사람들의 자존감이 땅에 떨어지면서 사람들이 유아화되었고 이러한 유치한 유아적 특성도 가지게된 것이다.
올려치기, 내려치기라는 단어에 과대평가, 과소평가하다라는 의미는 없다.
유아화된 인간답게 매우 무식하고 교육받지 못하여 가치를 높이는것, 낮추는것을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원래 '올려치기', '내려치기'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것이다.

그 사소한 것에 위계를 나누는 유아적 특성과 더불어 표현할 단어를 모르는 무식함까지 더해져서 그들에게 채용된 단어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보는 순간 역겨움이 몰려온다.

유아화의 결정적 특징은 바로 무식이다. 유아화가 되면 배우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아는 사람을 욕하고 그것이 가치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무식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혹은 뭣도 모르면서 지도 어디 인터넷에서 모든 정보를 얻어놓고선 얕은 지식으로 아는척 스노비즘을 부리곤 한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 당연히 몰라도 사는데 지장은 없다. 하지만 아는게 먹고싸고 자기밖에 없는데 그걸 인간대우를 해줄 수 있을까? 분명 무식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무식하면서 나대는건 죄다. 왜냐하면 행동을 함에 있어서 아무런 지식도 없는데 당당하게 행동하며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잘못이 있어도 절대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뻔뻔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악을 쓰면서 우기기만 한다. 그들의 싸움은 그저 목소리 큰놈, 시간많은놈이 이기는 무의미한 비논리의 결정이다. 진실을 등지고 박박 우겨봤자 안스럽기만 하다. 그들은 진심으로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바퀴벌레같은 놈들이다. 그들의 인생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그저 생겨나 고통받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들의 인식은 비이성에 기초하고 있어 아무런 가치도 없다. 당연히 이성이 없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이러한 바퀴벌레들에게 주권과 의사결정을 맞기는 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할리 만무하다. 그저 기득권과 지배자들에게 현혹당해 밑에것들만 서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힘쓴다고 착각하며 싸우고 윗놈들은 적대적 공생을 할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은 아무런 가치도 힘도 없고 그저 이용당하고 휘둘릴 뿐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건 허울일뿐 실질적으로는 언제나 기득권에게 있다. 그저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할뿐 그들에게 합법적으로 착취당하고 스스로 시간과 자유를 바치면서 자유인이다라고 믿을 뿐이다. 어떤이는 태어날때부터 뼈빠지게 일하고 어떤 이는 그 땀으로 이루어진 케이크를 힘도 들이지 않고 누워서 먹는다. 나는 이것을 잘못됐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저 현실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현대사회는 온갖 모순으로 가득차있고 거기에 속한 이들은 스스로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천국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는다. 안타까울 뿐이다.

배달산업의 발달도 현대인들의 쇠퇴에 중요한 예시이다. 유아화는 나태또한 유발한다. 배달 자체가 원래 스스로 만들어먹기 귀찮은 니트들이나 하는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립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그저 하루하루 시켜먹기만 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식품을 먹기보다는 맨날 떡볶이, 마라탕같은것만 사먹으면서 몸의 영향균형은 붕괴되고 만성적인 소화불량과 변비에 시달리게 된다.
좀비화된 인간은 스스로 절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배울 수도 없다. 그리하여 자립할 수 없는 것이다.
배달 시스템 자체가 노동자를 지나치게 착취하는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급성장하는 이유이다. 외국의 예를 들면 독일인들은 시켜먹는 것을 잘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인스턴트 음식을 싫어하고 건강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고 가족과 함께 만들어 먹는것을 좋아한다. 또한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인데, 그 사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독일인들은 가족관계를 중시한다.

앞서 말했듯 유아화된 인간은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만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은 남을 잘 생각하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악하다기보다는 애초에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에 속함으로서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의 책임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책임감 없이 제멋대로 이익만 누리며 책임은 누리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가장 신문물에 가까이 있어 유아화가 극심한 젊은 세대가 그래서 자신의 욕구를 참지 못하고 그저 아끼지 않고 하고싶은대로, 사고싶은대로 다 사며 방탕하게 살아서 결국 거지꼴이 되어 결혼하고 나서도 단칸방에 살다가 아사하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다보니 너무 큰것을 탐하다가 망하는 것이다. 단순히 자존감을 위해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니 겉으로 부유하게 보이는데만 급급하고 속은 빈 강정인 것이다.

사실 저번에도 말했듯, 결혼과 후세를 낳는 것은 개인에게는 약간의 희생를 감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개인에게는 손해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나라가 망하고 공멸하여 모두가 손해를 보는 길이다. 이렇듯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것이 책임인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이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존속할수 없으므로,
나는 국가가 강제로 국민들이 올바른 길로 가게 교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 국가'이다.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바로잡아주고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아버지와 같은 국가 말이다.
왜냐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유아화된 국민들로만 가득한 국가는 존속할 수 없게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국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것은 정신병이나 국가라는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뭉친 계약관계임으로 각 개인이 맡은바 책임을 충실히 수행할 필요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는 무너지고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

우리 자존감 낮은 한국인들은 옛날에는 중국의 문물을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고 서양인들이 오자 그것과 똑같은 행태를 보이며 이번엔 서양 문물을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서양인도 아니고 동양인도 아니고 싶은 우리가 있을 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스스로 우리의 모든 전통을 부정하고 남이 우리의 문화를 훔쳐가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 후세에게는 대체 무엇이 남을까. 정체성을 잃은 나라는 존속할 수가 없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1040113532595355

MLB·코닥·내셔널지오그래픽…한국에서 '옷'이 된 브랜드 - 머니투데이

[MT리포트]코닥, MLB, CNN...패션이 되다"한국에는 왜 이렇게 내셔널지오그래픽 직원들이 많나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자주하는 질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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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커버리, 내셔널지오그래픽 로고가 박힌 옷을 명품인것마냥 처입고있는 것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들은 그냥 미국에서 자연 다큐멘터리나 찍는 채널일 뿐이다. 하지만 단순히 서양것이라는 이유로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며 입는 것이 말 그대로 천민의식을 잘 보여준다. 우리로 치면 동남아인들이 SBS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같다. 맥락도 없고 단순히 선진국을 동경하는 거지티나는 행위일 뿐이다. 유아화되어 자존감을 잃고 판단능력을 잃은 좀비들이 그저 미디어에 노출된 '위대한 서양'으로서의 모습을 보며 서양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서양에 닮기를 급급하고 있다.
서양에 좋은 기술과 제도를 닮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양식 즉, 입는것, 먹는것, 생활하는 것까지 모두 지상으로 여기고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것을 버리고 이를 따를 필요는 없다.
아시아인들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좀더 자기 자신을 사랑할 필요가 있다.

양이의 옷을 입고 양이의 명절을 지내고 양이의 도구를 사용하고 양이의 예절을 따르며 양이의 도덕을 지상으로 여기고 양이의 군대가 주둔케하니 그 모습이 마치 길 잃은 양과 같다.

지난 반만년간의 조상들의 전통을 모두 잊고 한세기만에 양이의 모습이 되었으니 근본없는 놈이여 아비없는 놈과 같다. 제 조상들을 잊고 외세를 아비로 여기니 말이다.

강대함에 숙이여 과거엔 중국에 사대하고 지금은 양놈들에게 사대하니 상황은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양인들이 양이들이 옷을 입는것은 사람이 원숭이의 가죽을 뒤집어 쓴것과 같지 맞지 않는 옷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영원히 불행속에서 고통받는다.

양이의 것이라면 물불안가리고 채용하고 지고의 것으로 여기니 왜놈 식민지는 싫고 양이 식민지는 좋단 말인가
개탄할 일이로다
태어날때부터 부여받은 규격화된 사회에서의 역할만 잘 수행해야하는 것이 애국이고 충성인데 그 의무를 배반하고 튀기나하려하고

세상 좋아진줄 모르고 별것도 아닌거에 불평불만 꾀병이나 부리고 전통의 가치를 무시하고 발랑까져서 생각없이 섹스하고 돈쓰고 열정과 도전정신도 없이 온실에서 자라와서 편할줄 모르는 구나.


일본어로 어른을 大人(오토나)라고 한다.
그렇다, 일본인들은 어른이 대인적 성격을 띄고 아이가 소인적 성격을 띈다는 것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다.
속좁은 소인들은 자신의 별것도 아닌 성질에 대해서 서로 자신이 더 잘났고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반면 대인은 설사 자신이 더 우월하더라도 그것을 절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대인과 소인의 차이이다.

인터넷 백수들이나 직업에 귀천에 관하여 함부로 말하며 남을 모욕하는 것이지 진짜 사회인들은 감히 그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의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고 다른 분야의 이도 존중하기 때문이다.
각자 사회에서 맡은바 역할을 다하는 것이 정의이고 선이라는 것을 고대 그리스인들과 고대 중국인들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국가 속에서, 튀지않고, 국가로부터 날때부터 부여받은 책무를 조용히, 남이 모르게,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꿋꿋이 수행하는 것이, 군자이고 대인인 것이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공자, 논어(論語) <학이(學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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