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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히틀러의 삶과 함께 보는 근대사

by 시큼한 파인애플 2021. 1. 27.

영국의 왕, 엘리자베스 2세

지금까지 여러번 제 2차 세계대전 관련한 글을 써왔지만 한번에 정리해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제 2차 세계대전은 그저 옛날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은 아직도 살아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현재 영국의 왕인 엘리자베스 2세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운전병으로 군무했었다. 그녀는 지금도 잘 생존해있다. 그녀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때부터 영국의 왕이 되었으며 지금도 왕으로 재위중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시기는 아직 단절되지 않은, 살아 숨쉬는 시대인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 1차 세계대전을 알 필요가 있으므로 아래 내용은 빌드업이다.

 

프랑스의 뛰어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은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을 재패하였으나 러시아에 원정갔다가 추위에 굴복하고 결국 몰락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전유럽에 나폴레옹이 남기고 간 계몽사상과 내셔널리즘의 영향으로 여러 나라들이 통일된 국민국가가 되었다. 외교의 천재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 통일을 방해하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하고 1871년, 지금까지 분열되어 있던 독일을 통일하면서 유럽의 세력균형에 큰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빌헬름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지만 99일만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팽창주의를 추구했다. 재상 비스마르크는 더이상 영토를 확장하려 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알기때문에 팽창주의를 포기했으므로 빌헬름 2세와는 뜻이 맞지 않아 재상에서 물러나게 된다. 

 

독일이 뒤늦게 아프리카 식민화에 뛰어들자 다른 열강들과 큰 갈등을 빚게 되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도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삼국동맹을 맺었다. 다만 이탈리아는 이 동맹을 남이 먼저 쳐들어왔을때 돕는 방위조약이라고 생각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쟁이 터지면 참전하는 공격적인 동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발칸에서도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었고 게르만족과 슬라브족간의 대결구도가 형성되게 되었다.

 

검은색: 동맹국, 하얀색: 협상국, 회색: 중립국

그렇게 대립이 점점 커지고 있던 도중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보스니아 지역의 주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 젊은 보스니아 소속 세르비야계 보스니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암살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하고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족 국가를 돕겠다며 세르비아편으로 참전하고 독일은 동맹이자 같은 게르만족 국가인 오스트리아의 편으로 참전하며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또한 독일의 적으로 참전하며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고 중립국을 침공했다는 이유로 영국 또한 독일의 적으로서 참전한다. 협상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국 독일, 오스트리아의 대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어이없게도 독일이 준 군함이 멋대로 러시아를 공격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독일의 편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은 역사적으로 계속 러시아와 대립관계였다. 한편 일본은 영일동맹의 의무를 들어 협상국으로 참전했으나 유럽전선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독일의 계획은 슐리펜 계획이라고 하여 주력을 프랑스에 집중시켜 빠르게 프랑스를 제압하고 군대를 동쪽으로 돌려 러시아에 맞서게 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러시아를 오판하여 러시아가 전쟁준비를 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런 결론이 나왔다. 독일은 프랑스가 단단히 방어를 준비하고 있는 프랑스-독일 국경이 아닌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여 빠르게 전쟁을 끝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참호전의 수렁에 빠지면서 프랑스를 제압하는데 실패하게 되고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개시하여 협상국으로 향하는 상선을 무차별적으로 격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의 항의로 잠시 중단했다가 다시 개시하게 된다. 거기다가 멕시코에게 미국을 공격할 것을 비밀리에 요구한 것이 밝혀지면서 참을 수 없던 미국은 결국 협상국으로 참전하게 된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주동자이자 소련의 국부 레닌

그런데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전복되고 공화국이 수립된다.(2월 혁명) 하지만 공화국 정부는 계속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려 하였고 이는 러시아 내부에서 반발을 일으켰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혁명을 일으켜서(10월 혁명)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하게 된다. 전쟁 이후 반 볼셰비키 세력들이 다시 규합하여 내전을 일으키니 이것이 러시아 내전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했다 한들 동맹국의 상황은 나아지자 않았다. 오스만군은 영국군에게 크게 패하고 있었고 소모전은 계속되었다. 결국 1918월 9월 불가리아의 항복을 시작으로 10월에는 오스만이, 11월에는 혁명이 일어난 오스트리아가 항복했고 결국 킬 군항 반란을 시작으로 혁명이 일어나 독일도 같은 달 항복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유럽의 여러 민족들을 독립시켰다.

 

동맹국은 막대한 배상금를 물게 되었으며 많은 영토를 상실했고 군비의 제약을 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공중분해됐고 오스만 제국 또한 공중분해되었다. 독일이 어떤 영토를 상실했는 지는 이 글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이탈리아는 제 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협상국으로 참전하였으니 협상국은 이탈리아에게 거의 보답하지 않았다. 얻은 것이라고는 이스트리아 반도뿐이었다.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이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가 파시즘화 되는데 큰 이유가 된다. 

 

구글맵에서 본 브라우나우 암인의 위치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25년전인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브라우나우 암인에서는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전 유럽을 전화로 몰아넣은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의 탄생이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지방 세무서장이었으며 그 덕에 부자까지는 아니지만 중산층으로서 그럭저럭 잘 사는 집안이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권위주의적이었으며 폭력적이었다. 그래서 아들인 아돌프와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아버지인지라 그를 애지중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러 민족이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시민이었기 때문인지 제국이 표방하는 다양한 민족의 조화를 추구하는 다원주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 나쁜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서 히틀러가 극단주의가 됐다는 설도 있다. 히틀러는 초등하교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실업학교에 들어갓으나 학업에 흥미를 잃고 중등과정까지만 이수하고 고등과정은 유급당하다가 결국 자퇴한다. 한편 이 시기 역사선생님인 레오폴드 푀슈라는 사람의 반유대주의, 게르만 민족주의적 수업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다시 진학해보지만 다시 자퇴를 하게 된다. 이 시기 아버지가 사망하는데 과음하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급사했다. 히틀러에게는 미운 아버지였지만 막상 죽었을때는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많은 유산과 연금을 남겼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은 기존과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빈(비엔나)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다.

1905년 만 16세의 나이에 히틀러는 무작정 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상경했고 촌놈이었던 히틀러에게 빈의 화려한 건축물들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히틀러는 예술가를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빈 미술 아카데미에 낙방을 거듭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미술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히틀러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파리로 간다. 하지만 당시 유행이던 화풍을 따라가지 못하고 현실주의적인 화풍을 고수하다가 그저 미술가 지망생 수준에서 멈추게 된다. 그러던 중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히틀러는 당시 다른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 처럼 전쟁의 환상에 빠져서 오스트리아군에 자진입대하려 하지만 심신미약을 이유로 복무부적합 판정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정부에 청원하여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굳이 독일군에 입대한 이유는 오스트리아는 다민족국가였기 때문에 군대 또한 다민족 군대였다. 히틀러는 열등인종인 슬라브족 병사와는 같이 싸울 수 없다는 이유로 독일군에 입대했다.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한 히틀러는 연락병으로 복무하다가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때 병원에서 히틀러가 보기에는 꾀병을 부려서 온 환자들(아마 PTSD 환자들일 것이다.)과 반전운동을 벌이는 사회주의자들과 파업하는 노동조합 등을 보고 경악한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배후중상설을 믿게되는 계기가 된다. 

 

유대인의 상징 다윗의 별, 당시 유럽에는 국가불문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했다.

배후중상설은 제 1차 세계대전 종전후 많은 독일인들이 믿었던 음모론으로, 독일이 전쟁에서 진 이유는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의 벙역기피, 선동때문이다라는 음모론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은 독일본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보기에는 잘 싸우다가 배후의 적(유대인, 사회주의자)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졌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독일제국은 군부독재 체제였기 때문에 정보가 통제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독일인들은 전쟁에서 지고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정부는 당연히 연일 독일이 이기고 있다는 선전만 해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항복하니 독일인들은 이것이 유대인들의 음모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이는 독일이 파시즘화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독일정부가 항복을 선언을 하고 모두 도망쳐버리자 전후 처리는 결국 사회민주당을 위시로 한 공화주의자들이 하게 되었고 독일인들은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독일이 협상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이어져 결국 독재를 낳게 되었다. 

 

독일의 여러 지방

전쟁이 끝나자 히틀러는 자신이 생활하던 뮌헨으로 돌아갔다. 당시 뮌헨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 상태였다. 혼란한 뮌헨의 상황속에서 히틀러는 많은 것을 배웠는데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테러가 자행되던 것을 보고 혁명이란 전통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선전의 힘을 배우게 되었다. 광장에서 연설하는 선전문구들과 행진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히틀러는 강한 감명을 받았다. 

 

나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

한편 히틀러는 계속 군인인 상태였는데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소수 정당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에 이 정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당이 된다. 당시 이 정당은 정치활동이라기 보다는 그냥 서민들이 모여 불평을 토로하는 모임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당 토론회에서 초청받은 바우만 교수가 바이에른이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해야한다는 바이에른 분리주의적 주장을 하자 분노한 히틀러는 교수를 비난했고 당황한 교수는 자리를 떠났다. 히틀러는 열변을 토해냈고 당대표였던 안톤 드렉슬러는 감명을 받아 입당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거절했던 히틀러지만 마음이 바뀌어 결국 55번째 당원으로 입당하게 된다. 히틀러는 이후 탁월한 연설능력과 선동능력을 바탕으로 당 안에서 세력을 늘려갔고 안톤 드렉슬러는 뒤늦게 히틀러를 쫓아내려고 공작을 계획하다가 역습당해 바지사장이 된다. 나치당은 점점 세를 늘려갔다. 참고로 나치라는 말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의 Nati(독일어 음으로 나찌이다.)에서 따온 말로, 나치의 반대파들이 부르던 멸칭이었다. 그래서 나치당원들은 스스로의 당을 보통 NSDAP로 약칭해서 불렀다. 

 

패전이후 독일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패전 이후 독일은 배상금의 여파로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붕괴에 직면하고 있었다. 패전후 독일에 수립된 민주정권인 바이마르 공화국은 혼란했으며 무장 난동이 자주 일어났다. 히틀러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인 무솔리니의 로마진군에 영향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히틀러는 감옥에 수감된다. 재판이 열였으나 재판장도 당시 독일인 답게 파시스트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히틀러를 애국자라고 생각해며 약한 처벌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는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대중들로 부터 이 빨갱이 체제(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시킬 구세주로 인식되게 된다. 당시 파시즘에 취해있던 많은 독일인에게 있어서 사회민주주의 또한 복지를 탐하는 빨갱이일 뿐었다.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마저도 6개월만에 석방되게 되었다. 바이에른 지방, 특히 뮌헨은 상대적으로 극우의 세가 강했고 중앙정부가 있는 베를린은 좌파의 세가 강했다. 이는 어찌보면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해 전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막대한 배상금탓에 독일 경제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는 사회민주당 정부에 대한 반감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경제가 회복되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던중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로 다시 경제는 나락을 겪게 되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의 건국세력인 사회민주당 세력은 정치적 위기에 빠졌고 그 과정에서 나치당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30년 총선에서 18%의 득표를 받은 나치당은 사회민주당에 이어 두번째로 큰 정당이 되었고 2년후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지율 53%의 전쟁영웅 힌덴부르크에 이어 36%의 지지를 받아 히틀러가 2위의 득표를 받았다. 같은해 치뤄진 총선에서 결국 나치당은 1당으로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대통령이던 힌덴부르크는 히틀러가 총리가 되는 것을 거부했고 의회를 다시 해산했다. 다시 치뤄진 선거에서도 나치당은 1당 지위를 유지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거부하고 슐라이허 장군을 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의회의 지지없는 총리는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힌덴부르크는 설득당하여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게 된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결국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힌덴부르크는 새 내각을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한다. 이 선거에서 나치당은 44%의 지지를 받게 된다. 나치당만으로 과반을 차지못한 히틀러는 우파세력과 타협하여 의회가 가지고 있는 입법권을 행정부에 넘기는 수권법을 통과시키고 결국 독일의 민주주의는 종말을 맞게된다. 사실 제 1당 당대표가 총리를 하도록 규정한 헌법을 무시하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총리를 임명한 것부터 독일의 민주주의는 비정상인 상태였다.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 아돌프 히틀러

 

수권법이 통과되며 히틀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된 1933년 3월 24일을 기점으로 바이마르 체제는 붕괴하고 나치 독일이 시작된다.

 

이후 1934년 장검의 밤 등의 사건을 거치며 반대세력은 모두 숙청당했으며 독일이 갓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혼란했던 바이마르 체제와는 다르게 권력이 히틀러 개인에게 집중되어 각계 각층 요인들이 정부에 협조할 수 밖에 없게되어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히틀러는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으며 유럽에는 다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되었다.

나치독일 내에서의 비무장지대 라인란트의 위치

히틀러는 1935년 독일을 얽매던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와 재무장을 선언했으며 1936년 비무장 지대로 규정되어 있던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며 재무장시킨다. 독일의 이같은 행보에 유럽국가들은 경악하며 협력하여 독일을 견제하는 스트레사 동맹을 결성했으나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던 영국의 유화책으로 인해 영국-독일 해군조약이 체결된다. 무솔리니는 영국이 스트레사 동맹을 파기했다고 보고 독일을 견제하는 것을 중단하며 독일을 견제하고자 하는 노력은 흐지부지되어버린다. 

 

이같은 연합국들의 삽질로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의 침략적 행보는 가속화된다.  

 

1938년 히틀러는 자신의 고국인 오스트리아를 병합한다.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독일과 같은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오히려 이탈리아가 극렬히 반발했는데 히틀러는 본래 오스트리아 영토였다가 이탈리아가 획득한 쥐트티롤의 이탈리아 지배를 인정해주는 것으로 무솔리니의 반발을 무마시킨다. 

 

중일전쟁 발발 직전 판도

한편 동방에서는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이 결국 노골화되어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발단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중일전쟁 초반에는 일본이 파죽지세로 승전을 이어갔으나 갈수록 중국의 지연전으로 인해서 소모전 양상을 뛰게 되었다. 전쟁이전 독일은 일본보다는 오히려 중국과 교류가 많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은것은 1940년 삼국동맹 조약 체결로 인해서이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서, 히틀러의 침략야욕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1938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 지역인 수데텐란트의 반환을 요구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바랬지만 그들은 체코를 배신했다. 영국고 프랑스는 대전쟁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았기때문에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꺼리고 있었고 결국 유화책을 펼쳤다. 그들은 히틀러를 믿는 심각한 오판을 저질렀다. 수데텐란트를 받는 대신 더이상 유럽에서 영토확장을 하지 않겠다는 뮌헨 협약을 체결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

하지만 나치의 야욕이 여기서 멈출리는 없었다. 뮌헨 협정이 체결된 1938년 9월 30일으로부터 겨우 6개월 지난 1939년 3월, 나치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어 결국 체코 전역을 병합한다.

이것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이러한 삽질을 보며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소련은 8월 23일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중부유럽을 두 국가가 분할하기로 합의한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21년만에 대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처칠은 이를 두고 말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와 전쟁,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둘다 선택했다."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의 공격을 받아 빠르게 함락된다. 폴란드는 양국에 의해 분할점령된다.

한편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에서는 가짜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서 선전포고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1940년 4월 9일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덴마크는 당일 항복하고 노르웨이는 62일간 저항하다 항복한다.

 

결국 독일의 총구는 프랑스를 향하게 되었다. 그들은 독일의 총구가 결국 자신들을 향할때까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5월 9일 저녁, 독일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5월 10일 아침이 되자 독일은 벨기에와 네달란드를 침공했다. 네달란드는 5월 15일 항복했다. 빌헬미나 여왕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세웠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에 마지노선이라고 하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독일은 벨기에를 통해 이를 우회했다. 

 

전차부대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연합군 부대를 포위했으며 이들은 됭케르트 철수를 통해 철수한다. 하지만 철수할때 모든 무기를 버리고 철수했기 때문에 이들이 재조직될때까지 다시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벨기에는 5월 28일 항복하고 프랑스의 방어선을 돌파한 독일군은 빠르게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출처 eastory

 

그렇게 서유럽의 육군강국 프랑스는 6월 25일, 침공이 개시된지 6주만에 항복하고 프랑스 남부에 독일의 괴뢰국인 비시 정권이 수립된다. 단 몇주만에 서유럽 대부분이 독일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참고로 이탈리아는 프랑스가 항복하기 직전에 참전한다. 1차 세계대전처럼 관전하다가 마지막에 승자의 편에 참전하여 꿀빨아먹으려 한것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독일이 패망할거라고는 생각못했을 것이다.

 

체임벌린은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후임으로 강경파인 처칠이 총리가 된다.

독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까지 항복한 이상 더이상 영국이 저항하는 것을 무의미하므로 영국이 평화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처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강경파였던 그는 항전을 결정했다. 독일과의 항공전에서 영국이 연이어 승리하며 독일은 영국에 상륙하여 영국을 굴복시키는 것을 포기한다.

 

독소전 직전 판도, 발트 3국은 소련이 병합했다.

히틀러의 관심은 이제 그가 열등인종이라고 항상 생각하던 슬라브족 국가, 소련에게 돌아갔다. 그는 캅카스의 유전지대를 차지하기 원했고 1941년 6월 22일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다. 독일은 겨울이 오기전 소련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월동준비를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던 히틀러는 또 다시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소련은 지난 1939년 11월 30일에 핀란드를 침공했으나 소국인 핀란드를 상대로 고난을 겪는 추태를 보여줬다. 이를 보고 독일은 소련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의심병자로, 유능한 군 지휘관들을 대부분 숙청하여 소련군은 약체화된 상태였다.

 

태평양전쟁 개전 이전 1939년의 판도

한편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지 6개월 후인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있던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미국은 중립을 포기하고 연합국에 가담하게 된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미국을 비롯한 영국, 네덜란드, 중국이 협력하여 ABCD 포위망을 구성하였다. 석유와 철강 수출을 금지하는 무역 봉쇄 포위망이다.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물자들이기 때문에 일본은 결국 미국과 동남아시아 식민지들을 공격하여 이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그러했던 것 처럼 미국도 강하게 때리면 결국 평화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오판한 일본이었으나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서, 절대 만만한 국가가 아니었기에 결국 일본은 패망의 길을 겪게된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를 빠르게 점령했다. 식민지들의 본국이 이미 독일에 점령된 상태이기때문에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며 피지배인들이 처음에는 일본을 해방자라고 생각하여 적극 협조했다. 나중에는 결국 서구열강과 다름없는 제국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독소전 초기 독일은 연승을 거듭했으나 거울이 오고 월동준비가 되지 않은 독일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히틀러의 무리한 진군 요구 등 전략적 실책으로 독일군은 결국 역습당했다. 1942년 8월 23일에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7월 5일에 시작된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아우슈비츠

독소전 시기는 나치의 광기가 극에 달한 시기이다. 나치는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수용소에 몰아넣고 전부 말살하고자 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장애인, 소련인등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유럽 전체 유대인중 2/3인 600만명이 학살되었으며 나치는 적국 민간인만 1천 5백만명이 넘게 학살하는 등 인류 역사상 유래없는 대학살을 저질렀다.

소련의 대역습, 1944년 6월 22일에 시작된 바그라티온 작전

결국 독일은 반격당하고 크게 밀려나게 된다.

 

한편 서방 연합군은 1943년 7월 10일 이탈리아 시칠리아 상륙,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을 통해 대반격에 나서게 된다.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니는 처형당하고 3일 뒤인 30일, 히틀러도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한다. 5월 9일 결국 독일이 항복하면서 길고 긴 유럽에서의 제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이제 남은 것은 동방의 일본제국 뿐이다. 일본은 1944년 6월 19일 필리핀해 해전에서 크게 패하며 해군 항공전력을 궤멸당하고 10월 23일 레이테만 해전에서 해군전력을 궤멸당하며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지경에 처했다. 전선이 너무 넓어졌으며 해군전력도 궤멸당한 터라 보급이 안되서 결국 일본군은 수만명 단위로 아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1억 총옥쇄를 운운하며 최후결전을 준비했고 더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미국은 신무기를 사용하여 일본의 전쟁 의지를 꺾기로 한다.

 

 

1945년 8월 6일 일본에서 8번째로 큰 도시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으며 3일 뒤인 9일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8월 9일에는 소련마저 대일전에 참전하자 결국 일본정부는 항복을 결의한다.

천황이 직접 항복선언을 녹음했으며 15일 정오에 일본제국 전역에 방송되었다. 항복직전 궁성사건이라는 일부 항복에 반대하는 군인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여 항복결정을 번복하려 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고 진압당했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며 제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제 2차 세계대전 전 세계에 큰 상처를 남긴 대전쟁이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 이후 국제질서는 완전히 새로 재정립되었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가 독립하였고 과거 식민열강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의 힘이 약해지고 소련과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등극하여 냉전체제가 형성되었다. 핵무기의 개발은 상호확증파괴에 의거한 평화의 시대를 열었으며 우리는 역사상 유래없는 태평성대에 살고있다. 국가와 국가간의 총력적은 더이상 벌어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전쟁이 벌어진다면 너무나 큰 희생을 치뤄야하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은 과거 되풀이한다

 

  • 사망

추축국

 

독일

800만명

 

이탈리아

53만명

 

일본

300만명

 

연합국

 

미국

42만명

 

영국

50만명

 

프랑스

56만명

 

소련 

3000만명

 

중국

1000만명

 

폴란드

500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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